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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본제국 제52대 내각총리대신 후쿠다 다케오 福田赳夫 | Fukuda Takeo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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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5년 1월 14일 |
대일본제국 군마현 군마군 가네코정 | |
사망 | 1995년 7월 5일 (향년 90세) |
대일본제국 도쿄도 기타구 도쿄여자의과대학 부속 아오야마병원 | |
국적 | 일본 |
재임 기간 | 제52대 내각총리대신 |
1973년 2월 23일 ~ 1978년 5월 19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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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후쿠다 다케오는 일본의 제52대 내각총리대신으로, 1973년부터 1978년까지 재임했다. 전임 다카기 소키치가 6년 불황을 타파시긴 것을 이어받아서 급격한 성장 대신 70년대의 안정적 경제성장과 민생의 복리를 이루어내어, 오래 유지하지는 못한다만 그의 임기 중인 1976년 일본은 미국을 꺾고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이 된다.
생애
후쿠다는 에도 시대 때 지역 유지 격인 쇼야(庄屋)를 대대로 지낸 지역 유력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 때문에 지원도 받았고, 머리도 좋아 도쿄제국대학에 들어간 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관료의 길을 걸어 대장성으로 들어가게 된다.
대장성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주영 일본대사관으로 부임하고, 중국의 재정고문을 맡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러다가 전쟁이 승리로 끝난 뒤 중국에서 돌아와 관료계의 선배인 기시 노부스케의 권유로 고향 군마현에서 대정익찬회로 중의원에 출마해 정치를 시작한다.
그렇게 정치적 커리어를 쌓아가다가 1963년 야스다 위기와 1966년 호국군 전쟁 등 연이은 위기로 6년 불황이라는 경제 공황이 닥쳐오자 당시 익찬회에서 이미 유력한 정치가가 되어 있던 후쿠다는 경제 성장의 한 이론을 제시한다. 이른바 "안정성장론"으로, 이제 고도성장의 종식을 인정하고 민생과 경제규모 유지에 국력을 투자하자는 것이었다.
1968년 오히라 마사요시 내각이 집권하자 대장대신을 맡았다. 그는 "국가 개조론"을 내세우며 불황 극복을 주창하는 오히라에 대해 "이런 식으로 가면 3년 뒤에 경제가 파탄날 것"이라고 오히라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면서 날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갈등을 겪다가 당시 국무대신 1명이 사임하면 내각이 무너지던 헌법을 이용해 대장대신직을 던짐으로서 오히라 내각을 붕괴시킨다.
그렇게 일본의 실력자로 부상한 후쿠다는 바로 자신이 오르지 않고 해군 제독 출신의 원로인 다카기 소키치를 총리로 내세웠다. 그는 다카기의 경제관이 자신과 맞는다고 판단하였고, 다카기 내각하에서 후쿠다는 "관청 중의 관청"이라고 불리는 내무대신을 맡으며 정권에 한층 근접했다.
그리고 고령의 다카기가 1973년 퇴임하면서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그의 나이 68세. 드디어 일본의 만인지상이 되겠다는 꿈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총리가 된 후쿠다는 다카기가 안정 궤도에 올려놓은 경제를 다시금 활력을 불아넣고, 폭발적 성장이 아닌 점진적 성장에 중점을 두는 경제정책을 추진했다.
외교적으로는 다카기 소키치 내각의 데탕트 기조를 이어가서 미국 및 독일과 대외적으로는 적대하지 않는 기조를 유지했으나, 대내적으로 국방력 강화에는 어느 내각보다도 힘을 쏟으며 일본의 냉전 승리에 대한 야망은 강했다. 그는 발톱을 숨기고 내실을 다졌던 것이다.
다카기-후쿠다 내각을 거치면서 60년대에 무너질 것만 같았던 일본과 공영권은 그 수명을 연장하고, 외려 80년대에 마지막 전성기라는 불꽃을 불태울수가 있었다.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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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익찬회 | 1953 - 1990 | 정계 입문 |
일본국민당 | 1990 - 1995 | 사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