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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ern African War
21세기 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로 전개된 전쟁으로, 아프리카 대륙에서 새로운 질서를 두고 총력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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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강력한 흑인 민족주의 및 좌파 반식민주의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하는 아자니아 연방은, 범아프리카주의의 재건을 국정의 핵심 기조로 내세우며 아프리카 대륙 내 새로운 질서의 중심 국가로 부상하고 있었다. 아자니아 연방은 남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범국가적 연합체를 구성하며 정치, 군사, 경제적 기반을 다져갔고, 특히 중국과 유럽의 인프라 투자 유치를 적극적으로 이끌어내면서 급격한 경제 성장을 실현하게 된다. 그 결과, 남아프리카 일대에서 빠르게 영향력을 확대해나가며 대륙 남단의 지정학적 중심지를 장악하게 된다.
한편, 아프리카 동부와 중부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는 동아프리카 연방 역시 마찬가지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으며, 이들 역시 독자적인 지역 블록의 중심 세력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명확히 하고 있었다. 두 연방체는 서로 다른 역사적 맥락과 이데올로기를 배경으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대륙의 지도력과 주도권을 놓고 본격적인 경쟁 구도를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아프리카 대륙을 남북으로 양분시키는 강력한 정치적, 군사적 대립의 단초가 되었고, 그 긴장은 점차 실질적인 충돌로 전이되어갔다.
이러한 대치 국면이 지속되던 가운데, 2028년 말, 아자니아에 사실상 굴복한 상태였던 보츠와나에서 친동아프리카 연방 정치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발생한다. 아자니아는 자국 내 영향력 확대를 저해하는 요소로 간주한 해당 정치 세력에 대해 강제 해산, 체포, 정치적 탄압을 가하면서 보츠와나 정국을 장악하려 시도하였고, 이 조치는 동아프리카 연방 측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따라 동아프리카 연방은, 아자니아의 군사적 팽창을 견제하고 보츠와나 사태에 대한 경고를 의미하기 위해 앙골라와의 국경 지역에서 대규모 연합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경제 강국이었던 앙골라와 연합해, 잠비아와 말라위에 대한 보호를 선언하며 본격적인 압박 수단을 동원하기 시작한다.
결정적인 도화선은 2029년 7월, 보츠와나에서 추방된 망명 정치 세력이 이곳에서 자칭 츠와나 임시정부 수립을 선언하며, 자신들이 정통성을 가진 합법 정부임을 주장하고, 아자니아에 의해 탄압당한 보츠와나 국민들의 권리를 대변하겠다고 천명했다. 아자니아는 임시정부 수립 선언을 보호국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간주하였고, 같은 해 하반기, 아자니아 국경 수비대의 탄자니아 국경에서의 도발이 결국 무력 충돌로 이어지게 되며 아자니아는 강경 대응을 천명하였고 이로써, 아프리카 대륙의 두 강력한 연방체 간의 긴장 상태는 돌이킬 수 없는 전면전으로 돌입하게 된다.
- 전개
아자니아군은 과거 남아프리카 공화국 시절부터 이어져 온 현대화된 기갑 사단과 공군 전력을 기반으로 대규모 작전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기동성과 화력을 동시에 활용하여, 동아프리카 연방과 그 우호국들의 주요 보급망을 신속히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며, 작전 개시 초기부터 보츠와나-잠비아 국경 일대를 타격 지점으로 설정하여 전면적인 진격을 단행하였다. 전황은 아자니아 측에 유리하게 흐르며, 기갑 전력이 거의 무저항으로 국경을 돌파한 이후, 곧장 잠비아 수도인 루사카까지 진격하는 데 성공한다.
당시 잠비아와 말라위는 국력과 군사력이 상대적으로 약소한 국가들이었고, 아자니아의 급속한 군사 압박에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침공이 시작된 지 불과 2주 만에 공식적인 협상 테이블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항복이나 중립 선언에도 불구하고, 전선은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동아프리카 연방과 앙골라 측은 잠비아와 말라위의 의사와는 별개로, 전략적 요충지 확보 및 전선 확장을 위한 명분 아래 해당 지역에 자국 군대를 직접 파병하였고, 이로 인해 전쟁은 명백한 확전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동아프리카 연방은 정치적 연대의 결속력은 갖추고 있었으나, 회원국 간의 입장 차이와 조율의 어려움, 통합된 지휘 체계의 부재 등으로 인해 군사적 실질 대응력에서는 다소 열세를 보였다. 이에 따라 동아프리카 측은 자국 군대만으로 전황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즉시 해외 민간군사기업과의 협상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에세론 그룹을 비롯한 여러 서방계 대형 PMC 및 제3국 기반 용병단과의 대규모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로 인해 약 6만 명 이상의 외국 용병 인력이 동아프리카-앙골라 연합군 측에 배속되어, 루사카 일대를 중심으로 치열한 교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아자니아군은 동아프리카 측의 거센 반격에 일시적으로 루사카 방면에서 다시 밀려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루사카 시는 아자니아군과 앙골라군이 이미 대대적인 요새화 작업을 마친 상태였으며, 이 도시는 곧바로 양 진영 간의 주요 전장이 되어버렸다. 시가지 중심부에서는 아자니아-앙골라 연합군과, 동아프리카 연방의 정규군, 케냐의 특수부대, 그리고 에세론의 하청 PMC 소속 용병들이 집결하여 정면 충돌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루사카 전역은 극단적인 시가전 양상을 보이게 된다. 민간인 피해는 물론 도시 기반시설의 붕괴도 급속히 진행되며, 참혹한 교전이 장기화되기 시작한다.
한편, 전선은 육상 전투에 국한되지 않았다. 모잠비크 북부 해안 일대에선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전쟁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 걸프 연합군과 중국이 전략적 파트너십 아래 협조 체제를 구축하였고, 이들은 아자니아를 압박하기 위한 다방면 전략의 일환으로 북부 모잠비크 해역을 통해 대규모 상륙 작전을 단행하였다. 이 작전은 특히 중국 측이 제공한 무인 드론 편대의 정밀한 공중 지원과 정찰 덕분에, 아자니아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하였다. 결국 아자니아는 해당 지역에서 전술적 철수를 결정하게 되었고, 전선은 잠베지 강과 모잠비크 해안 일대를 따라 정체되며 새로운 교착 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이후의 전쟁은 큰 전선의 변화 없이 의미 없는 소모전으로 진행되었으며, 양측 모두 자원 고갈과 군사적 피로가 누적되고 중국과 EU는 개입 비용과 여론 악화를 우려하여 양측에 휴전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결국 2030년 6월, 로앙와 평화 협정 체결되며 보츠와나는 아자니아 연방에 잔류하되 국제 감시 하에 점진적 자치권 확대가 약속되었다.
- 나탈 봉기
한편, 남아프리카의 나탈 지역에서는 아자니아 연방 정부조차 예상하지 못한 돌발적인 군사 행위가 발생하게 된다. 나탈은 과거 남아프리카 공화국 시절부터 백인 지주와 기업인 계층의 정치적・경제적 기반이자, 더반을 중심으로 한 항구 산업, 농업, 제조업 등이 집약되어 있던 부유한 지역으로, 남아공 경제의 중심축 중 하나로 평가받아 왔다. 그러나 아자니아 연방이 수립된 이후, 흑인 중심의 민중주의 정권은 강력한 재분배와 재산 환수 정책을 실시하였고, 그 결과 나탈 지역 내 백인 자산가와 기업인들 사이에서는 점차 불만과 반발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불만은 특히 남부 아프리카 전쟁이 본격화된 이후 더욱 격화되었는데, 전시체제 하에서 발효된 전시 통제령에 따라 일부 대규모 사유재산이 정부에 의해 강제 징발되면서, 백인 기득권층 내부에서는 더 이상 현 체제를 용납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된다. 이에 따라 일부 유력 백인 기업인들과 지주 계층은 유럽계 해외 투자자들과 접촉을 시도하였고, PMC중개인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며 무력 대응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결국 이들은 미국계 PMC 기업인 레드하우스 인터내셔널과 비밀리에 계약을 체결하였고, 더반을 중심으로 한 나탈 지역의 독립을 목표로 한 계획을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긴다. 2030년 2월 5일, 사전에 조직된 RH 소속 용병 인원들이 해상 경로를 통해 더반 항구에 비밀리에 상륙하였고, 상륙 직후 주요 방송 시설, 지방 정부 청사, 공항 등 핵심 기반 시설을 신속하게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이 작전은 불과 12시간 만에 이루어진 전광석화와 같은 공격이었으며, 이후 백인 기득권 세력들로 구성된 '나탈 공화국 임시의회'는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포하고 아자니아 중앙정부를 상대로 재산 환수 정책 철회와 독립적 행정 권한 인정 등을 핵심 요구 조건으로 협상을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아자니아 연방 정부는 이를 국가 통합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간주하고, 협상을 전면 거부하는 강경한 태도로 대응하였다. 중앙정부는 즉각 공수부대와 기계화 장갑차 부대, 드론 정찰 및 타격 전력을 나탈 지역에 급파하였으며, 더반 시가지를 완전히 포위한 뒤, 곧바로 도심 지역으로 진입하여 무장 세력에 대한 소탕 작전에 착수한다. 이에 RH사는 자사 인원 및 장비의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더반에서의 작전을 중단하고 자산을 회수하며 급히 철수 결정을 내린다. RH 용병들이 철수하자 남겨진 백인 민병대 세력은 곧 아자니아 정규군의 압도적인 화력과 기계화 전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밀리기 시작했고, 작전 개시로부터 불과 4일 만에 더반 전역은 완전한 진압 상태에 들어가며 민병대 측은 공식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
- 영향
아자니아 연방은 동아프리카 연방 및 앙골라 연합군과의 전면전에서 잠비아와 말라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협상 테이블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이후 두 국가는 보츠와나와 마찬가지로 독립 국가의 외형을 유지한 채, 사실상 보호국 형태로 아자니아 체제에 점진적으로 통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외교적・군사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아자니아 내부에서는 전쟁 과정에서 발생한 막대한 피해와 인명 손실로 인해 민심이 빠르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실시된 통계에 따르면, 이번 전쟁에서 약 12만 명 이상의 전사자가 발생하였고, 전역에 걸쳐 이루어진 폭격 및 공격으로 인해 아자니아 주요 도시들의 전력망 역시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물자 부족과 인프라 붕괴가 겹쳐 국민들의 생활 수준은 급속도로 저하되었다. 이에 따라 아자니아 정부는 민중의 불만과 분노가 체제 자체로 향할 것을 우려하며, 그 책임을 외부의 ‘적’으로 돌리는 방향을 선택하게 된다. 정부는 나탈 봉기 및 전쟁 중 PMC로 참전한 백인 용병 세력의 존재를 부각시키며, 백인 공동체 전체를 반역자로 규정하는 선전전을 강화하였고, 이를 명분으로 한층 더 가혹한 백인 탄압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이로 인해 아자니아 전역의 소수나마 남아있던 백인 공동체 마저 급속히 해체되었고, 상당수는 토지와 재산을 몰수당한 채 강제로 추방되었으며, 정권에 협력하거나 정치적 충성을 맹세한 극소수의 백인만이 남아 극히 제한된 시민권을 유지하게 된다. 이는 아자니아 사회의 급격한 탈백인화와 인종 기반의 급진적 재편을 야기하였다.
한편, 전쟁 이후 동아프리카 연방과 앙골라 연합군은 아자니아와 마주한 국경선을 따라 대대적인 군사 및 정치 체제 개편에 착수하였다. 동아프리카 연방 의회는 그동안 상징적 비율로만 존재하던 의석 비중을 개편하여 인구 비례 의결권 체제로 전환하였고, 이는 케냐와 탄자니아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연방 체제 구축으로 이어졌다. 이와 동시에, 기존에 중립적 태도를 유지하거나 가입 의사가 불확실했던 콩고에서도 아자니아의 지원을 받던 정치 세력인 인민민주당이 후방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를 계기로 콩고는 완전히 동아프리카 연방의 일원으로 편입되기에 이른다. 앙골라 또한 공식 가입은 유보한 채, 준회원국 수준의 외교・경제・안보 협력을 강화하며 아자니아 견제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아자니아 연방의 나미비아 서부 지역, 특히 나마족, 헤레로족 등 소수 민족이 밀집한 지역에서는 전쟁 당시 참전했던 민병대, 용병 출신, 그리고 비정규 인력 중심으로 형성된 유랑인 커뮤니티가 점차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중앙 정부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되었으며, 사회적 주변인으로 내몰린 끝에 점차 분리 독립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들을 중심으로 '니마콸란드 운동'이라 불리는 자치국 설립 운동이 조직되었고, 이들은 오밤보란드, 츠와나란드 등의 분리 독립 지향 단체들과 연계하며 게릴라 활동과 무장 봉기를 통해 아자니아 정부에 저항하는 무력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