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국 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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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국 제9대 황제
賢宗
현종
묘호 현종
(賢宗)
시호 없음[1]
출생 1601년 4월 18일
키비크바 원고궁
사망 1640년 10월 중순 (39세)
키비크바 원고궁
능묘 선릉(宣陵)
재위 원고국 완디
1632년 6월 13일 ~ 1640년 10월 5일 (8년)
연호 웨카닌신(獻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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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타시옥(棕星)
제디(率)
부모 친부: 인종
모친: ???
배우자 공혜황후

개요

원고 현종(元高 賢宗)은 원고국 제14대 군주이자 제9대 완디이다. 신원로파 정권 아래의 허수아비 완디들 중 유일하게 직접적인 반기를 든 인물로, 헌인대기근의 책임을 지고 제위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반란을 일으켜 신원로파 정권을 몰아내려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현재의 닌신사미시 해안에서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그의 자결 이후 신원로파의 실권자였던 바이자코시는 꼭두각시 황제를 옹립하는 방식을 위험하다 여겨 폐기하고 아예 자신이 직접 황제가 된다.

생애

3대째 이어지는 황권의 실추

헌인대기근

현종의 패반

사망?

결국 그의 반란은 실패하였고, 현종은 3개월만에 궁으로 돌아왔다. 환궁 직후 현종은 강제로 바이자코시의 모든 죄를 사사한다는 명령을 내려야 했으며, 그 다음에는 안건 심사 등 명목상 존재하던 황제의 행정권을 바이자코시에게 양도한다는 문서에 도장을 찍어야 했다. 이렇게 반란 전까지만 해도 조금이라도 남아 있던 황제의 권한은 모두 바이자코시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바이자코시가 모든 권력을 쥐게 된 이후, 현종의 성격은 매우 기이하게 변했다. 생전 술도 한번 안 마시고, 반란 중에도 매일 죽은 황후의 영정에 안부 인사를 건내던 애처가가, 이젠 갑자기 궁녀들과 함께 매일 술판을 벌이게 된 것이었다. 야사의 기록에 따르면 현종이 방탕하게 변하자 시장에는 황제가 미쳤다는 소문이 나돌았다고 할 정도로 그 당시 현종에 대한 민중의 인식은 황제가 아닌 그냥 정신병 걸린 놈이였다고 해도 무방했다. 한편 신원로파 세력은 나름 현종의 성격이 변하게 된 것에 대해 여러 추측을 내놓았으며 그가 겉으로는 권력욕이 없는 척 하고 뒤로는 또 다른 반란을 준비한다는 주장이 지지를 받아 오히려 그에 대한 감시는 강화되었다.

그러던 중 헌인 8년 9월 17일 아침, 현종은 평소 총애하던 궁녀들에게 "환관 둘을 데리고 혼자 세문산에 사냥을 하러 가겠다"고 말한 뒤 궁을 나갔다. 이 소식을 들은 바이자코시는 현종이 그의 지지세력과 밀회를 가지러 나갔다고 판단하여 곧장 그의 뒤를 쫓았으나, 그들이 세문산에서 발견한 건 현종과 함께 나갔던 환관 둘이 화살에 맞아 죽어있는 광경 뿐이었다.

그렇게 현종은 돌아오지 않았고, 18일이 지난 후 별다른 사건이 없자 바이자코시는 그가 완전히 잠적했다고 판단하고 현종이 붕어했음을 세상에 알렸다. 그 다음날 바로 현종의 장례가 치루어졌으며, 바이자코시는 그의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하고 현종에게 묘호를 내렸다.

죽음에 대한 비밀이 밝혀지다

평가

기타

  1. 황제는 관습적으로 시호를 가지지 않는다. 묘호는 황제만의 것인 반면 시호는 신하의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