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제국 총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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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대 프랑스 총리 사디 팔레르모 Sardit Palermo | |
본명 | 사디 제오르 비도 팔레르모 Sardit Georg Bidalut Palerm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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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6년 5월 14일 |
프랑스령 알제리 오랑 | |
사망 | 1994년 7월 16일 (향년 78세) |
그리스 남부 에게주 낙고스섬 | |
국적 | ![]() |
임기 | 파리 시장 |
1950년 7월 12일 - 1958년 7월 11일 | |
프랑스 총리 | |
1968년 6월 15일 - 1972년 6월 1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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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프랑스 제국의 제32대 총리. 본명보다는 히피들의 대변자라는 별명으로 조금 더 유명하다.
생애
사디 팔레르모는 공무원의 아들로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4살때 파리로 이사한 이후 쭉 파리에서 살았다. 학교 공부에도 소질을 보였기 때문에 당대 최고 명문 소르본 대학교의 경제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한 수재였다. 그는 24세에 이미 석사 학위를 딴 상태였다. 또 열성 사회당원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 역시 청소년 시절부터 프랑스 사회당에 입당해 파리시당 내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던 1940년, 제2차 세계대전에 터지자 그는 친구와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진 입대하여[1] 서부전선에 배치되었다. 1942년 아프리카 전선으로 재배치받아 타바카 전투에서 이탈리아군과 싸웠는데, 이때 부상을 입어 제대하였다. 이 일이 파리시 지역 일간지의 한 기자에 의해 애국주의의 아이콘으로 부각되어 그는 단숨에 전국적인 인지도를 가진 인사가 되었다.
1944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이후, 그는 소르본 대학교를 잠깐 휴학하고 정치계에 투신하였다. 1945년 치뤄진 파리시의회 의원에서 안정적인 표차로 시의원에 당선된 그는 보수인민당 소속의 시장을 공격하며 보수 저격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런 뚜렷한 행보에 힘입어 1950년 파리시장에 출마했고 그는 그가 시의원 시절 공격했던 시장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역대 최연소 파리 시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이때가 그의 나이 34세였다.
1954년 파리 시장에서 재선하였다. 그는 일찍이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우고 여러 진보적인 정책들을 발표하는 파격 행보를 보여 특히 젊은 유권자들을 상대로 인기를 얻었다. 1958년 시장직에서 퇴임한 이후, 잠시 야인으로 지내다가 1960년 총선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전국적으로 차기 총리감으로 지목되는 총리는 아니었으나, 1960년대 중반경부터 청년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그는 1967년 더블린에서 열린 "사랑의 여름" 축제에 참가해 히피 운동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듬해 3월, 그는 사회당 총서기로 선출되었고 동시에 소르본 대학교들을 중심으로 보수적 사회 분위기를 반대하는 청년들의 항의 시위가 발생하자, 누구보다 앞서 이 시위를 지지하며 청년층으로부터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4월에는 르네 밀랑 총리의 불신임을 이끌었다.
1968년 6월 치뤄진 조기 총선에서 사회당은 총 400석중 274석을 얻는 초압승을 거두고 그 역시 총리로 취임했다. 사디 팔레르모는 총리로 재임하며 가톨릭과 정치의 완전한 분리 선언, 황실 권한 및 예산 축소, 강경한 반공-반미-독자 외교, 오락용 대마초 합법화, 동성애 처벌 위헌 판정 등 당시로서는 혁명과 다름 없었던 급진적 개혁안을 내세웠다.
하지만 이런 급진적 행보에 여러 중도 성향 유권자들이 등을 올리면서, 1972년 총선에서는 내각의 지지율이 낮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10석 차이로 여당이 우파 연합에게 밀려, 그는 4년만에 정권을 잃고 실각하였다. 결정적으로 알제리 공화국군이 총선 일주일전 일으킨 테러로 인해 막판 여당의 지지율이 폭락한 것이 매우 크게 작용했다.
총리직에서 퇴임한 이후에는 작가 겸 평론가로 왕성히 활동하였으며 휴학했던 소르본 대학교에서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끝마쳤다. 1984년 그는 파리 제6대학교의 총장으로 재직하였다. 이 외에도 30권이 넘는 경제학, 정치, 외교, 자서전 등의 여러 책들을 쓰면서 작가로서의 존재감도 드러냈다. 그러면서 정치 평론가로서 좌우파 가리지 않고 신랄한 비판을 가하였다.
1994년, 그리스에서 휴양하던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당시 총리였던 프랑수아 발레도,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 가수 폴 매카트니, 교수 티모시 리어리 등 유명 인사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프랑수아 발레도는 "그와 나의 정치적 노선은 달랐지만 둘 다 더 나은 국가를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는 하나였다"라고 추도사를 읊었다.
평가
현대에도 몇몇 국가에서 이뤄지지 않는 일들을 50년 전에 합법적 입법 과정으로 이뤄낸 혁명가라는 긍정적 평가와, 시대상 지나치게 급진적이었던 정책을 추진해 사회적 분열을 야기시켰다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이 때문에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평이 많이 갈렸다. 하지만 개방적인 현대 프랑스인들은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총리이다. 이를 반영하듯이 2011년 프랑스의 한 방송국이 조사한 "위대한 프랑스인"에서 그는 6위를 차지했다.
가톨릭계에서는 정교분리 원칙 때문에 그를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였으나 최근 들어서는 가톨릭계 내에서도 팔레르모 총리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또 식민지 주민들에게는 말 그대로 추앙받는 총리인데, 그가 식민 통치에 대해 사과하며 현대와 같은 느슨한 연방 체제의 식민지 관리 형태를 처음 고안하였기 때문이다.
여담
- 그는 히피들의 대변자라는 수식어 답게 1960년대 당시 20대들의 문화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특히 비틀즈와 롤링 스톤스, 지미 헨드릭스 등의 록 음악가들을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 말년의 그는 그리스 섬들을 요트를 타고 자신이 직접 몰면서 이곳 저곳 돌아다녔다. 1990년대 이후로는 프랑스보다 그리스 섬에서 지내는 날이 더 많았다.
- 총리로서의 행보가 너무 강렬해서 묻힌 감이 있지만 작가로서의 역량도 훌륭한 편이다. 그는 밀리언 셀러를 무려 3권이나 보유하고 있는 인기 작가이기도 했다.
각주
- ↑ 그는 석사 학위 소유자였던데다가 소르본 대학교 수석 입학자로 징집 대상에서 제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