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특별행정구 (영광이 다시 오길)

홍콩특별행정구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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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
홍콩 특별행정구
香港特別行政區
Hong Kong Special Administrative Region
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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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7월 1일 ~ 2024년 9월 15일
홍콩 반환 이전 홍콩 혁명 이후
대영제국
영국령 홍콩
영연방
홍콩 자치령
홍콩 공화국 임시정부
상징
상징가
의용군 행진곡[1]
국화
양자형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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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반환 1997년 7월 1일
2014년 홍콩 민주화 운동 2014년 9월 26일 ~ 2014년 12월 15일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2019년 3월 15일 ~ 2024년 9월 15일
홍콩 공화국 임시정부 수립 2021년 12월 10일
제2차 중영공동선언 2023년 9월 13일
특별행정부 소멸 2024년 9월 15일

지리
면적
1,105.6㎢
위치
중국 대륙 남부
인문환경
공용어
영어, 중국어(사실상 광둥어)
인구
7,571,777명(2021년)
공용 문자
로마자, 한자
종교
불교, 도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군대
중국인민해방군 주홍콩부대
행정구역 약칭
정치
정치 체제
수반 간선제, 단원제, 제한선거제
역대 국가원수
장쩌민 (1993년 ~ 2003년)
후진타오 (2003년 ~ 2013년)
시진핑 (2013년 ~ 2023년[2])
리커창 (2023년 ~ 2024년[3])
역대 행정장관
퉁치화 (1997년 ~ 2005년)
도널드 창 (2005년 ~ 2012년)
렁춘잉 (2012년 ~ 2017년)
캐리 람 (2017년 ~ 2024년[2])
경제
경제 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통화
홍콩 달러

개요

홍콩 특별행정구(香港特別行政區, Hong Kong Special Administrative Region)는 1997년 홍콩 반환이후 2024년 영연방 산하 홍콩 자치령 수립 이전까지 존재했던 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이다.

역사

반환과 안정기

1997년 7월 1일에 홍콩의 주권은 영국으로 부터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넘어갔으며 홍콩 전역의 유니언 잭이 내려지고 오성홍기와 구 홍콩 특별행정구기가 게양되었다. 반환 직후 홍콩은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주가가 폭락하고 많은 홍콩인들이 중국으로 이민을 가는 등의 혼란이 거리를 매웠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50년 동안[4]일국양제에 의한 홍콩인의 자치를 약속했다. 그리고 중국 정부의 발빠른 아시아 외환위기 대처와[5] 성공적으로 치뤄진 입법회 및 행정장관 선출로 인해 홍콩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으며 해외로 망명을 간 홍콩인들도 점차 다시 돌아오기 시작하며 홍콩은 점차 정상화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홍콩 민주주의 붕괴의 조짐은 반환 후 6년도 채 되지않은 2003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3년 중국 정부가 홍콩 국가보안법[6]을 통과시키려고 하자 50만 홍콩 시위대가 그 앞을 막았고 결국 국가보안법은 일단은 부결시켰으며, 그 이후에도 2005년 평등선거 시위, 2009년 반국가분열법 반대 시위, 2013년 애국교육[7] 필수과목 지정 반대 시위 등 여러 시위가 일어나는 등 점차 중국 본토와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어 갔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은 시진핑 집권 이후 폭발하게 된다.

2014년 홍콩 민주화 운동 (우산 혁명)

2010년대 이후 홍콩 내에서는 홍콩의 행정수반이자 실질적인 국가원수인 행정장관을 직선제로 선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이런 홍콩인들의 요구에 중국 정부는 결국 2017년 이후부터는 행정수반에 대한 직선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하였으나...... 이는 사실 눈가리고 아웅이였다. 중국 정부에서 제의한 '직선제'란 중국 전인대에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후보들을 선출한 뒤 그 후보들 중 한 명을 행정장관으로 선출하는 식이였다. 차라리 기존 홍콩 입법회에서 선출하는 방식이 더 민주적으로 보이는 상황 속에서 홍콩인들이 이를 받아들일리가 없었고 결국 홍콩인들은 거리로 나오게 된다.

9월 22일에 홍콩의 주요 24개 대학이 동맹 휴학을 선언했고 26일 부터는 학생들이 대규모로 체포되기 시작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대다수 홍콩 주민들은 이시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조슈아 웡의 등장으로 상황은 급 반전되었다. 그는 자신들의 세대에서 민주화를 완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체포되어 가면서도 이를 끝까지 주장했다. 그의 등장을 기점으로 홍콩 시민들의 민주화 열기는 강화되어만 갔으며 단식시위가 시작되는 등 민주화 열풍은 점점더 강해져만 갔다. 그러나 이후 홍콩 경찰이 강경 진압을 천명하자 이에 우려를 표한 지도부가 일부 자수하는 일이 벌어졌고 결국 마지막 시위대가 12월 15일에 철수하며 우산 혁명은 끝이나게 된다.

2014년 홍콩 우산 혁명은 결과적으로 실패하였으며 완전한 민주화를 쟁취해내지 못했다. 그러나 2014년의 혁명은 홍콩인들과 세계 만방에 홍콩이 진정한 민주주의 체제가 아님과 홍콩 내에서 벌어지는 민주주의에 대한 탄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2014년의 경험과 노력이 모여 2019년 혁명의 뿌리가 되게 된다.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2014년 홍콩 민주화 운동 이후 표면상 안정을 되찾은듯 했다.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지 않은지 4년 반이 지났고 입법회 선거를 비롯한 여러 정치적 시스템도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으며 경제또한 다시 호황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안정의 뒷 편에서 중국정부는 홍콩의 주권을 야금야금 파먹어가고 있었다. 2019년 3월 9일에 중국 시진핑 당시 국가주석은 홍콩 범죄인 인도법안을 홍콩 행정장관인 캐리 람 행정장관을 통하여 제출하였다. 이 법안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자면 홍콩 내에서 중국 정부(중국 공산당)와 홍콩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발언 혹은 행동을 했을 경우 국적에 관계없이 중국 본토로 송환 할 수 있게 허용하는 법안이였다.

한마디로 국적에 관계없이 홍콩에서 반중·반정부 발언을 한 사람은 중국으로 끌고갈 수 있게하는 법안이란 소리였다. 당연히 홍콩의 민주주의를 뿌리째 뽑으려는 이런 시도에 많은 홍콩 시민들은 분노했고 이미 법안이 제출된 당일부터 소규모 시위가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2019년 6월 9일에 주최측 추산 103만 명[8], 경찰 추산 25만 명 규모의 대규모 시위가 빅토리아 공원에서 일어나며 본격적으로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게 된다. 상인들은 철시했고 초·중·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도 잔체로 동맹휴학에 들어갔으며 부두의 노동자들과 회사원들도 일제히 파업에 들어갔다. 심지어 최종 표결이 예정되어 있던 80만 명[9]이 입법회를 포위하여 최종 표결이 연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5대 요구사항을 내세우며[10]민주화 운동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그러나 홍콩 당국의 폭동적 시위진압과 코로나 19의 1차 대유행으로 인해 시위에 대한 관심이 점차 떨어져 가던 와중이였다. 그러나 2020년 2월 25일, 이런 분위기를 다시 한번 반전시킬 또하나의 기폭제가 등장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홍콩 행정부의 내부고발자에 의해 공개된 한 문서였다. 그 문서의 제목은 중국어로 '关于中国人民解放军进驻香港的议案'[11] 영어로는 'Agenda on the Chinese People's Liberation Army's entry into Hong Kong'였는데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중국인민해방군의 홍콩 투입에 대한 안건'이였다. 당시 홍콩 입법회는 시위로 인해 사실상 정회 중이였는데 이런 문건을 보냈다는 것 자체가 홍콩인의 의지를 무시하고 중국 정부 단독으로 인민해방군을 진주시키겠다는 의미였기 때문에 많은 홍콩인들은 다시한번 분노하여 시위에 돌입하였다.

3월 무렵부터 시위는 점차 과격화 되기 시작한다. 시위대는 점차 죽창, 화염병등으로 무장하기 시작했고 대부분의 대규모 시위에는 화염병과 투석기까지 동원되어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또한 중국 정부가 홍콩 내에 인민해방군을 풀어 홍콩의 민주주의를 완전히 말살시키고 중국에 완전히 복속시키려는 시도가 발각되자 그동안 홍콩 민주화 세력내에 다수를 차지하던 민주파 세력이 급속도로 급진화 되고 독립파 (본토파)가 민주화 세력 내에서 절대 다수로 성장하기 되기 시작했다.

한편 이런 정치적 격동이 홍콩내에서 진행되고 있을 무렵 홍콩 밖에서는 코로나 19로 인한 판데믹과 미중간의 무역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였던 도널드 트럼프는 자국내의 코로나 19 확진자 수가 점차 가파르게 증가하고 이전부터 이어진 정치적 논란과 추문으로 인해 지지율이 점차 하락하던 추세였다. 그러던 와중 중국 인민해방군이 홍콩에 진주하려고 했다는 문건이 유출되자 트럼프는 지지율 반등을 위해 중국을 맹렬히 비난하기 시작한다. 즉 외부의 적을 만들어 국내에서 자신의 지지율을 끌어 올리겠다는 의도였다. 그리고 중국에 대한 강경 경제재제를 선언하며 미중 무역전쟁의 포문을 다시 열기 시작했다.

2020년 중국 전력 부족 사태와 특별행정구 체제의 붕괴 위기

미국의 이러한 경제재제는 서방 동맹국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불러왔다. 물론 미국의 재제는 트럼프의 재선을 위한 정치적 쇼맨십에 불과했으나 동맹국이 중국제재에 뛰어들자 상황이 반전된다. 미국-유럽-영국과 파이브 아이즈 국가인 호주, 뉴질랜드의 대중국 경제제재 참여로 중국의 경제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일본과 한국, 대만, 인도 또한 경재제재에 참여했고 유럽연합은 중국에 대한 제재를 발표하였다.[12] 특히 여기서 호주가 중요한데 당시 호주는 대중 석탄 수출량이 1위인 국가였는데 호주 정부가 재제에 참여한다고 선언하자 중국 정부가 일방적으로 호주 석탄에 대한 금수조치를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석탄 화력 발전이 전력 수급에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국에게 있어서 매우 치명적인 조치였다. 이후 내몽골의 석탄으로 어느정도 정상화가 될 조짐이 보였으나 그때는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 4월 석탄 금수조치가 시행된 이후부터 중국의 전력난은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고 중국 인민의 시진핑 정부에 대한 지지도는 60% 아래로 폭락했다. 결국 중국 공산당내 반 시진핑파인 상하이방과 공청단(중국 공산주의 청년단)이 약진하여 시진핑 정권을 흔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중국 내에서 정치적 불안과 시진핑 정권 흔들기가 계속되자 중국 공산당의 지방 장악력이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공산당의 지역 장악력이 약화된다는 것은 홍콩에 대한 중국 정부의 간섭이 약화된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홍콩 민주화 운동은 점점더 격렬해져만 갔다. 결국 홍콩 내의 경찰력이 사실상 완전히 붕괴되고 캐리 람 행정장관 본인이 실각 할 위기에 처하자 5월 22일에 캐리 람 행정장관이 천다오샹 당시 주 홍콩 중국군 사령관에게 지윈을 요청하게 된다.[13][14] 그러나 이는 홍콩 시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어버리는 꼴이었고 서방은 이를 빌미 삼아 경제제재를 강화하기에 이른다.

2020년 중국 정치위기와 붕괴

주 홍콩 중국군 사령부와 홍콩 행정부의 독단적인 인민해방군 투입으로 인해 서방의 제재는 더욱 강화되었고 강화된 경재 제재는 중국 경제의 몰락을 앞당겼다. 결국 중국 증시와 함께 위안화의 환율이 폭락하자 그에 비례해서 시진핑 정권에 대한 당과 인민의 지지도 같이 폭락했다. 결국 2020년 5월 29일에 공청단 소속 리커창 국무원 총리가 시진핑 국가주석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하며 중국에는 대규모 정치위기가 찾아오게 된다. 당·정·군의 권력투쟁은 중국을 근간부터 흔들기 시작했으며 시진핑은 군부내 친 시진핑파의 지원을 받아서 겨우 정권을 유지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게 한 주, 한 해가 흘러만 갔다 중국 정부의 홍콩 통제력은 사실상 소멸하였고 홍콩 특구 정부는 주둔 인민해방군의 지원을 받아 명맥만 유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홍콩인들은 이전부터 슬금슬금 올라왔던 독립에 대한 구상을 점차 실체화 하기 시작했다. 결국 2021년 12월 10일 홍콩인들은 세계인권선언 72주년을 맞이하여 자신들의 국가, 자신들의 정부인 홍콩 공화국 임시정부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서방은 이 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대만은 가장 먼저 임시정부와의 수교를 선언한다. 임시정부가 세워짐으로써 홍콩인들은 홍콩 역사 최초로 자신들의 정부를 구성하게 되었고 독립의 열망은 점점 더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홍콩 임시정부 수립과 조 바이든 당시 미국 대통령의 더 강경한 경재제재의 여파로 시진핑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서 물러나 국가 주석 직위만 유지한 채로 사실상 실각하게 되었고 중국의 정치위기는 더욱 더 심화되어만 갔다. 한편 홍콩 임시정부는 기존의 특구정부를 사실상 대체하고 홍콩 전역을 사실상 통제하는 유일한 정부로 거듭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홍콩은 상당히 불안정했고 만약 중국 정치위기가 끝난다면 자신들의 운명이 어찌될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홍콩 임시정부 내에서는 갑론을박이 오갔고 결국 최종적으로 결정된 안건은 영연방의 위임통치 였다. 이미 영국은 홍콩을 한번 통치한 경험이 있어 거부감이 적고 많이 쇠퇴하긴 했어도 아직은 강대국이였기 때문에 중국이 쉽게 건들지 못할것 이라는 이유였다.

그리고 임시정부는 이 안건을 국민투표에 부쳤고 결과적으로 전 국민의 80% 가량이 찬성하여 홍콩 정부 명의로 영국 정부와 영연방에 위임통치를 청원하는 문서를 전달하기에 이른다. 물론 아직까지 홍콩 특구 정부는 명목상 존재하고 있었고 홍콩의 주권은 중국 정부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 정부는 반발하였지만 경제성장률의 상승곡선이 3.8%까지 크게 꺾여 경제위기에 직면하는 이빨빠진 호랑이로 전락한 중국의 외침을 들어주는 국가는 사실상 없었다. 결국 답이 없다고 생각한 중국 정부는 영국 정부에 "홍콩의 주권을 다시 넘길테니 경재제재를 풀어달라" 라는 내용의 문서를 보냈고 영국 정부는 미국과의 합의하에 대만의 국가인정 등의 조건을 붙혀서 중국 정부에 합의문을 전달했고 결국 중국 정부는 이를 수락, 2023년 9월 13일에 제2차 중영공동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2024년 7월 진행된 홍콩 주민투표에서 중국 잔류(15.4%)보다 영국으로의 재반환(69.8%)이 압도적인 표차를 받게되며, 최종적으로 영국으로의 송환에 서명했으며, 2024년 9월 15일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홍콩의 주권을 포기하였으며 그 주권은 영국 정부로 넘어갔다. 홍콩 전역에서 양자형기와 오성홍기가 내려가고 유니언 잭과 구 영국령 홍콩기가 다시 게양되는 진풍경이 펼쳐진 가운데 캐리 람 행정장관이[15] 홍콩의 주권을 영국에 넘긴다는 선언을 하며 공식적으로 홍콩특별행정구는 소멸하게 되었다.

정치

홍콩특별행정구는 외관상 일국양제에 의해서 민주주의를 표방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독재체제와 다를것이 없었다. 우선 행정수반이자 실질적인 국가원수인 행정장관과 입법부인 입법회가 있었으나 이는 겉치래였을 뿐이였다.

우선 행정수반이자 실질적 국가원수인 행정장관을 입법회 간선으로 뽑았는데 여기서 '많은 의원내각제 국가들이 행정수반에 해당하는 총리를 간선으로 뽑으니 문제될게 없지 않나?' 라고 의문을 가질수도 있으나 홍콩의 행정장관은 결과적으로 중국 국가주석이 허가해 줘야 취임 할 수 있고 이 승인권이 의원내각제 국가 국가원수의 그것이 아닌 실질적인 권한이였기 때문에 친중파가 선출 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러면 다시 '입법회에서 민주파 후보를 뽑으면 되지 않나?' 라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으나 애초에 입법회 선거에 참여하려면 인두세를 내고 복잡한 절차를 거처야 하기 때문에 빈곤층의 의견이 잘 반영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정원 70명 중 절반에 해당하는 35명을 직능선거제 및 구의회 의원들의 (지방의원) 간선으로 뽑고 중국 정부가 승인하는 구조였기 때문에 항상 친중파가 우위를 점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또한 2010년대 말에 들어서는 중국 시진핑 정권이 내정간섭을 시도하면서 이런 민주정이 사실상 붕괴 직전에 몰렸기 때문에 사실상 홍콩 특구의 민주주의는 20년대 이후로 무의미해 졌으며 이는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의 기폭재가 되어 그대로 중국정부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홍콩 행정부


역대 홍콩 통치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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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령 홍콩 | 홍콩 자치령 일본제국령 홍콩점령지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 홍콩 공화국 임시정부 홍콩공화국
1841 ~ 1941 1941 ~ 1945 1997 ~ 2024 2022 ~ 2025 2025 ~
1945 ~ 1997
[A] 명목상

홍콩의 역사 · 홍콩 총독 · 홍콩 행정장관 · 홍콩 임시정부 주석 · 홍콩 대통령
홍콩특별행정구정부
香港特別行政區政府
1997.7.1. ~ 2024.9.15.
국가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
소재지
홍콩 중사이구 타마르 팀메이에비뉴 2호
정부수반
홍콩 행정장관
상급기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젠사쥐(尖沙咀)에서 바라본 행정부 청사

홍콩 입법회

홍콩공화국 정부의 입장

현재의 홍콩 공화국 정부는 홍콩 특구 정부와 중국 공산당에 맞섰던 홍콩 민주화 세력과 홍콩 공화국 임시정부의 직계후손이기 때문에 이 시기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발트 3국과 같이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한 불법 점령기'라고 교과서에 써넣지는 않지만 현재 홍콩 공화국 정부는 '홍콩은 기존 청나라의 영토였고 영국이 청으로 부터 빌린 조차지였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으로의 반환은 정당했으나 이는 홍콩 주민의 의사를 묻지 않은 반환이였으며 그 결과 중국 정부는 홍콩에 비민주적이고 폭압적인 통치를 자행했다.' 라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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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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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행정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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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제2-3대 제4대 제5-6대
퉁치화 도널드 창 렁춘잉 캐리 람
영국령 홍콩 · 홍콩 공화국 임시정부 · 홍콩공화국

  1. 홍콩 특별행정구는 자체적인 국가가 없었으며 중국의 국가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2. 2.0 2.1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및 2020년 중국 정치위기로 인해 실질적으로 재임한 기간은 공식 기간보다 짧다
  3.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실질적으로 재임하지는 못했다
  4. 공식적으로 2047년 까지
  5. 공교롭게도 아시아 외환위기는 홍콩이 반환된 바로 다음날인 1997년 7월 2일에 일어났다.
  6. 2020년 중국 전인대가 통과시키려 했던 그 법안이 맞다!
  7. 여기서 말하는 애국은 당연히 홍콩이 아닌 중화인민공화국을 향한 애국이다.
  8. 경기도 고양시의 인구와 비슷한 수준이다!
  9. 이는 경기도 부천시 인구와 맞먹는 수준이다!
  10. 홍콩 범죄인 인도법안의 완전한 철회, 홍콩 시위대에 대한 폭도 지정 철회, 홍콩 경찰의 시위대 무력진압에 대한 정식 사과 및 독립적 조사위원회 설치, 체포된 시위대에 대한 전면 석방,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 및 홍콩 입법회 보통선거/평등선거 실시
  11. 해당 문서는 간체자와 영어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12. 이 당시 각국 정부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참여한 데에는 코로나 19 판데믹으로 집권 여당의 지지율이 폭락하자 코로나의 발원지인 중국을 타격하여 지지율을 높이려는 목적이 컷다.
  13. 심지어 이 조치는 중앙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은 조치였다.
  14. 그러나 캐리 람 행정장관 자의에 의해 요청 한 것이 아닌 외압에 의한 요청 이라는 설도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그렇다.
  15. 2024년 8월 홍콩 특구 입법회의 압력에 의해 사임했으나 중국 정부가 이를 공식적으로 승인하지 않아 명목상의 행정장관 자격으로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