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아침해의 원유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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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의 실질적인 집권층은 안동김씨 세도가였으며, 이들은 만주의 후금이라는 방패로 순나라의 마수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노선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들은 공식적인 관계가 매우 경직된 상태였던 대순<ref> 다만 중국의 압도적인 인구수 때문에 초기 순나라때처럼 공식적인 무역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지는 않았다.</ref>에 대한 대체제로 네덜란드, 일본, 후송과 러시아와의 제한적인 무역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홍경래의 난 이후 세가 약해진 안동 김씨 세력의 권력 확보를 위한 조치이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남만주로 농민들을 보내 농지를 확보하거나, 명의 붕괴 이후부터 세를 얻은 보부상 등의 상인 세력들의 포섭을 통해서 안정적인 정치를 했던 안동김씨 세도가였으나, 19세기에 들어서는 더이상 권세를 그대로 유지하기가 힘들어지고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조선의 실질적인 집권층은 안동김씨 세도가였으며, 이들은 만주의 후금이라는 방패로 순나라의 마수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노선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들은 공식적인 관계가 매우 경직된 상태였던 대순<ref> 다만 중국의 압도적인 인구수 때문에 초기 순나라때처럼 공식적인 무역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지는 않았다.</ref>에 대한 대체제로 네덜란드, 일본, 후송과 러시아와의 제한적인 무역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홍경래의 난 이후 세가 약해진 안동 김씨 세력의 권력 확보를 위한 조치이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남만주로 농민들을 보내 농지를 확보하거나, 명의 붕괴 이후부터 세를 얻은 보부상 등의 상인 세력들의 포섭을 통해서 안정적인 정치를 했던 안동김씨 세도가였으나, 19세기에 들어서는 더이상 권세를 그대로 유지하기가 힘들어지고있는 상황이었다.


이러는 사이 성장하고 있던 근왕파 세력, 훗날 왕도개화파라불리는 세력이 존재하였는데, 음지에서 암약하던 이들이 본격적으로 힘을 얻게 된 사건이 바로 병인양요였다. 해당 사건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을 바라지 않던 안동김씨는 이 기회에 프랑스의 세력을 기반으로 개화와 권력 유지를 동시에 이루어내려고 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무력에 대항도 안하고 문을 연것에 대해 백성들의 민심이 극도로 나빠졌고, 결정적으로 당시 한국 내의 유교적 민족주의자로 평가받는 최익현이 전면적으로 개혁을 실시할것에 대한 지부상소를 올렸다가 옥사하면서 안동김씨의 명분이 완전히 소멸해버렸다. 결국 이 때를 노린 당시 국왕 이인수는 왕도개화파를 선동하여, 훗날 정묘사화로 불리게 되는 정치적인 숙청을 감행, 몇백년만에 다시 조선의 세도가에게서 권력이 왕의  돌아가게 된다.
이러는 사이 성장하고 있던 근왕파 세력, 훗날 왕도개화파라불리는 세력이 존재하였는데, 음지에서 암약하던 이들이 본격적으로 힘을 얻게 된 사건이 바로 병인양요였다. 해당 사건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을 바라지 않던 안동김씨는 이 기회에 프랑스의 세력을 기반으로 개화와 권력 유지를 동시에 이루어내려고 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무력에 대항도 안하고 문을 연것에 대해 백성들의 민심이 극도로 나빠졌고, 결정적으로 당시 한국 내의 유교적 민족주의자로 평가받는 최익현이 전면적으로 개혁을 실시할것에 대한 지부상소를 올렸다가 옥사하면서 안동김씨의 명분이 완전히 소멸해버렸다. 결국 이 때를 노린 당시 국왕이자 훗날 대한제국 초대 황제가 되는 고조 이인수는 왕도개화파를 선동하여, 훗날 정묘사화로 불리게 되는 정치적인 숙청을 감행, 몇백년만에 다시 조선의 세도가에게서 권력이 왕을 위시한 근왕 대신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천지가 개벽하다===
실권을 잡은 근왕 세력과 고조는 이후 서양 문물에 대해서 내부적으로 조사하는 기간을 가졌고, 이때 순나라와 후송나이 각각 버마전쟁과 아편전쟁으로 몰락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최종적으로 정치적 숙청이 끝난 조선에 다시 돌아온 조선통신사가 당시 비슷한 일을 겪고 있던 일본의 내부상황을 알리면서, 이들은 살아남기 위한 개화에 대한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2024년 1월 18일 (목) 22:11 판

대한제국
大韓帝國 | Empire of Korea
국기 국장
광명천지
(光明天地)
칭제건원 이전 동시베리아 전쟁 이후
조선 대한국
대금민국
상징
국기
태극기
국화
무궁화, 오얏꽃
황실 상징
이화문
역사
[ 펼치기 · 접기 ]
1392년 대조선국 건국
1875년 대한제국 선포
1904년 한러일전쟁 승전
1930년 한성 진군
1937년 제 2차 동아시아 전쟁
1941년 동시베리아 전쟁
1944년 한성 내전, 헌정 복귀
지리
수도
한성부
최대도시
한성부
위치
동북아시아 한반도 일대, 만주,
시베리아 일대 등
주변국
중화민국, 백러시아 시베리아정부, 대일본제국,소비에트 연방
인문환경
[ 펼치기 · 접기 ]
총 인구
약 5600만(본토)
공용어
한국어
공용 문자
한글, 한자
민족
한국인, 러시아인, 만주인 등
국교
사실상 신유교
종교 분포
30% 무교, 20% 유학, 12% 천주교, 5% 불교, 그 외 33%
군대
대한제국군
정치 · 경제
[ 펼치기 · 접기 ]
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양원제→일당독재, 군사독재, 입헌군주제→환태평양 사령부 통감청
정부 수반
내각총리대신→제국대막리지
국가 원수
순조 성덕제 이인황[1]
행정 수반
김창암[2]
여당
대한호국회
경제 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계획경제
통화
대한제국 원 (圓)

개요

대한제국, 통칭 대한 혹은 제국주의 한국은 신미개혁을 시작으로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그 식민지들을 통치했던 제국주의 열강이다. 1875년 7월 3일부터 1945년 4월 4일까지 유지됬으며, 대일본제국과 더불어 동아시아에서 근대화에 성공한 유일한 국가 중 하나였다. 현대까지 아시아 북부와 시베리아 일대에 남아있는 영향을 끼쳤으며, 이후 헌법의 개헌으로 기존의 제국 체제가 붕괴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역사

극동의 여명

당시 조선의 실질적인 집권층은 안동김씨 세도가였으며, 이들은 만주의 후금이라는 방패로 순나라의 마수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노선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들은 공식적인 관계가 매우 경직된 상태였던 대순[3]에 대한 대체제로 네덜란드, 일본, 후송과 러시아와의 제한적인 무역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홍경래의 난 이후 세가 약해진 안동 김씨 세력의 권력 확보를 위한 조치이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남만주로 농민들을 보내 농지를 확보하거나, 명의 붕괴 이후부터 세를 얻은 보부상 등의 상인 세력들의 포섭을 통해서 안정적인 정치를 했던 안동김씨 세도가였으나, 19세기에 들어서는 더이상 권세를 그대로 유지하기가 힘들어지고있는 상황이었다.

이러는 사이 성장하고 있던 근왕파 세력, 훗날 왕도개화파라불리는 세력이 존재하였는데, 음지에서 암약하던 이들이 본격적으로 힘을 얻게 된 사건이 바로 병인양요였다. 해당 사건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을 바라지 않던 안동김씨는 이 기회에 프랑스의 세력을 기반으로 개화와 권력 유지를 동시에 이루어내려고 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무력에 대항도 안하고 문을 연것에 대해 백성들의 민심이 극도로 나빠졌고, 결정적으로 당시 한국 내의 유교적 민족주의자로 평가받는 최익현이 전면적으로 개혁을 실시할것에 대한 지부상소를 올렸다가 옥사하면서 안동김씨의 명분이 완전히 소멸해버렸다. 결국 이 때를 노린 당시 국왕이자 훗날 대한제국 초대 황제가 되는 고조 이인수는 왕도개화파를 선동하여, 훗날 정묘사화로 불리게 되는 정치적인 숙청을 감행, 몇백년만에 다시 조선의 세도가에게서 권력이 왕을 위시한 근왕 대신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천지가 개벽하다

실권을 잡은 근왕 세력과 고조는 이후 서양 문물에 대해서 내부적으로 조사하는 기간을 가졌고, 이때 순나라와 후송나이 각각 버마전쟁과 아편전쟁으로 몰락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최종적으로 정치적 숙청이 끝난 조선에 다시 돌아온 조선통신사가 당시 비슷한 일을 겪고 있던 일본의 내부상황을 알리면서, 이들은 살아남기 위한 개화에 대한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1. 1922년 3월 2일 즉위
  2. 1944년 기준. 같은 해 하야.
  3. 다만 중국의 압도적인 인구수 때문에 초기 순나라때처럼 공식적인 무역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