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버럴: 두 판 사이의 차이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41번째 줄: 41번째 줄:
'''《더 리버럴》'''(The Liberal)은 [[대한민국 (어나더어스)|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언론사이자, [[리버럴 미디어 그룹]]이 운영하는 조간일간지이다. 221년 기준으로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과거 [[대한신보]]와 [[진보신문]]의 정신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보수 성향의 [[대한일보]]와 함께 가장 오래된 언론사이지만 이와는 반대로 진보주의 성향을 띈다. 이 외에도 신좌파, [[친노 (어나더어스)|친노유천]] 등 다양한 노선을 가진 기자들이 많고, 급진좌파-[[친권]] 언론인 [[팩츠]]와 중도진보 노선인 [[신진일보]]와 함께 [[삼자언론]](三自言論)으로 불리고 있다.
'''《더 리버럴》'''(The Liberal)은 [[대한민국 (어나더어스)|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언론사이자, [[리버럴 미디어 그룹]]이 운영하는 조간일간지이다. 221년 기준으로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과거 [[대한신보]]와 [[진보신문]]의 정신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보수 성향의 [[대한일보]]와 함께 가장 오래된 언론사이지만 이와는 반대로 진보주의 성향을 띈다. 이 외에도 신좌파, [[친노 (어나더어스)|친노유천]] 등 다양한 노선을 가진 기자들이 많고, 급진좌파-[[친권]] 언론인 [[팩츠]]와 중도진보 노선인 [[신진일보]]와 함께 [[삼자언론]](三自言論)으로 불리고 있다.


더 리버럴은 101년 3월 창간한 [[대한신보]]거슬러 올라간다. 대한신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어나더어스)|임정]] 시기 등장한 언론사로, [[사간원 (어나더어스)|사간원]] 출신들이 조직한 [[조선신문]]보다 늦게 창간했음에도 좌파 계열의 언론사로 자리잡았고 조선신문은 보수 성향이 강해 자유당, 보수당 등의 지지를 받은 반면 대한신보는 좌파 중에서 스펙트럼이 넓어 좌파정당들의 후원과 지지를 받았다.
== 역사 ==
더 리버럴은 101년 3월 창간한 [[대한신보]]》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한신보는 언론인이자 진보당 소속이었던 [[윤창열]]이 창간한 언론사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어나더어스)|같은 시기]] [[사간원 (어나더어스)|사간원]] 출신들이 창간한 《[[조선신문]]》보다 늦게 창간했음에도 좌파 계열의 언론사로 자리잡았고 조선신문은 보수 성향이 강해 자유당, 보수당 등의 지지를 받은 반면 대한신보는 좌파 중에서 스펙트럼이 넓어 좌파정당들의 후원과 지지를 받았다.
 
창간 2년 후인 103년 5월에는 해외 진출을 위해 이클리우스 출신 발행인 [[조던 미카엘]]을 고용하여 영문판을 발간해 임시정부 외주 지역에 확대되었고, 119년에는 루스키아 출신 발행인 [[안톤 지리놉스키]]를 고용해 노문판(루스키아어판)을 발간하였다. 이는 해외 진출은 물론이고 해외에 거주하는 한인들과 외국인들을 독자층으로 확장시키려는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이러한 성과 덕분인지 122년에는 대한신보는 국내에선 발행부수가 조선신문에 밀림에도 불구하고 국외에서는 큰 인기를 얻었다.
 
144년 임정이 국가 수립에 대한 논의를 두고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자 대한신보는 [[전국대한인공화국준비위원회|공준위]]를 꾸준히 지원했고, [[대한인민국립촉성민주협의체|국총협]]과 보수파를 비판하는 기사를 냄에 따라 보수파를 자극해 결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학부|교학부]]가 대한신보의 발행을 금지시키는 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하지만 국민들은 교학부의 결정에 반발하며 대한신보의 발행을 재개해달라는 시위가 벌어졌고, 끝내 [[유상민]] 당시 임정 총리는 대한신보의 발행을 재개하라는 명령을 통해 교학부는 대한신보의 발행을 재개할 수 밖에 없었다.
 
정부 수립 이후 대한신보는 조선신문과 함께 대표적인 양대 언론사로 부상했고 대한신보는 [[유상민 정부]]에 호의적이었던 반면 조선신문은 유상민 정부를 비판하고 반공-반좌파 노선을 띄기 시작했는데, 이는 [[154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4대 대선]] 이후 부정선거 의혹으로 인해 반정부 노선으로 갈아타며 [[대한민국 3월 혁명]]을 지지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대한신보는 [[박경열 정부]]가 들어서며

2021년 5월 3일 (월) 22:04 판

[ 세계관 목록 ]
[ 세계관 설명 ]
[ 같이 보기 ]
본 창작물은 어나더어스의 공식 설정입니다. 세계관 연재자 외에는 무단 편집을 지양해주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 (어나더어스) 대한민국의 7대 중앙 종합 일간지

틀:나무위키 언론 정보

《더 리버럴》(The Liberal)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언론사이자, 리버럴 미디어 그룹이 운영하는 조간일간지이다. 221년 기준으로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과거 대한신보진보신문의 정신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보수 성향의 대한일보와 함께 가장 오래된 언론사이지만 이와는 반대로 진보주의 성향을 띈다. 이 외에도 신좌파, 친노유천 등 다양한 노선을 가진 기자들이 많고, 급진좌파-친권 언론인 팩츠와 중도진보 노선인 신진일보와 함께 삼자언론(三自言論)으로 불리고 있다.

역사

더 리버럴은 101년 3월 창간한 《대한신보》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한신보는 언론인이자 진보당 소속이었던 윤창열이 창간한 언론사로, 같은 시기 사간원 출신들이 창간한 《조선신문》보다 늦게 창간했음에도 좌파 계열의 언론사로 자리잡았고 조선신문은 보수 성향이 강해 자유당, 보수당 등의 지지를 받은 반면 대한신보는 좌파 중에서 스펙트럼이 넓어 좌파정당들의 후원과 지지를 받았다.

창간 2년 후인 103년 5월에는 해외 진출을 위해 이클리우스 출신 발행인 조던 미카엘을 고용하여 영문판을 발간해 임시정부 외주 지역에 확대되었고, 119년에는 루스키아 출신 발행인 안톤 지리놉스키를 고용해 노문판(루스키아어판)을 발간하였다. 이는 해외 진출은 물론이고 해외에 거주하는 한인들과 외국인들을 독자층으로 확장시키려는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이러한 성과 덕분인지 122년에는 대한신보는 국내에선 발행부수가 조선신문에 밀림에도 불구하고 국외에서는 큰 인기를 얻었다.

144년 임정이 국가 수립에 대한 논의를 두고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자 대한신보는 공준위를 꾸준히 지원했고, 국총협과 보수파를 비판하는 기사를 냄에 따라 보수파를 자극해 결국 교학부가 대한신보의 발행을 금지시키는 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하지만 국민들은 교학부의 결정에 반발하며 대한신보의 발행을 재개해달라는 시위가 벌어졌고, 끝내 유상민 당시 임정 총리는 대한신보의 발행을 재개하라는 명령을 통해 교학부는 대한신보의 발행을 재개할 수 밖에 없었다.

정부 수립 이후 대한신보는 조선신문과 함께 대표적인 양대 언론사로 부상했고 대한신보는 유상민 정부에 호의적이었던 반면 조선신문은 유상민 정부를 비판하고 반공-반좌파 노선을 띄기 시작했는데, 이는 4대 대선 이후 부정선거 의혹으로 인해 반정부 노선으로 갈아타며 대한민국 3월 혁명을 지지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대한신보는 박경열 정부가 들어서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