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버럴: 두 판 사이의 차이

편집 요약 없음
42번째 줄: 42번째 줄:


== 역사 ==
== 역사 ==
=== 대한신보 ===
더 리버럴은 101년 3월 창간한 《[[대한신보]]》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한신보는 언론인이자 진보당 소속이었던 [[윤창열]]이 창간한 언론사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어나더어스)|같은 시기]] [[사간원 (어나더어스)|사간원]] 출신들이 창간한 《[[조선신문]]》보다 늦게 창간했음에도 좌파 계열의 언론사로 자리잡았고 조선신문은 보수 성향이 강해 자유당, 보수당 등의 지지를 받은 반면 대한신보는 좌파 중에서 스펙트럼이 넓어 좌파정당들의 후원과 지지를 받았다. 창간 2년 후인 103년 5월에는 해외 진출을 위해 이클리우스 출신 발행인 [[조던 미카엘]]을 고용하여 영문판을 발간해 임시정부 외주 지역에 확대되었고, 119년에는 루스키아 출신 발행인 [[안톤 지리놉스키]]를 고용해 노문판(루스키아어판)을 발간하였다. 이는 해외 진출은 물론이고 해외에 거주하는 한인들과 외국인들을 독자층으로 확장시키려는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이러한 성과 덕분인지 122년에는 대한신보는 국내에선 발행부수가 조선신문에 밀림에도 불구하고 국외에서는 큰 인기를 얻었다.
더 리버럴은 101년 3월 창간한 《[[대한신보]]》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한신보는 언론인이자 진보당 소속이었던 [[윤창열]]이 창간한 언론사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어나더어스)|같은 시기]] [[사간원 (어나더어스)|사간원]] 출신들이 창간한 《[[조선신문]]》보다 늦게 창간했음에도 좌파 계열의 언론사로 자리잡았고 조선신문은 보수 성향이 강해 자유당, 보수당 등의 지지를 받은 반면 대한신보는 좌파 중에서 스펙트럼이 넓어 좌파정당들의 후원과 지지를 받았다. 창간 2년 후인 103년 5월에는 해외 진출을 위해 이클리우스 출신 발행인 [[조던 미카엘]]을 고용하여 영문판을 발간해 임시정부 외주 지역에 확대되었고, 119년에는 루스키아 출신 발행인 [[안톤 지리놉스키]]를 고용해 노문판(루스키아어판)을 발간하였다. 이는 해외 진출은 물론이고 해외에 거주하는 한인들과 외국인들을 독자층으로 확장시키려는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이러한 성과 덕분인지 122년에는 대한신보는 국내에선 발행부수가 조선신문에 밀림에도 불구하고 국외에서는 큰 인기를 얻었다.


48번째 줄: 49번째 줄: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으며 177년 11월 언론사 특별조치로 이전 조치에서 강제 정간을 당한 [[신진일보]]와 함께 대한신보에서도 반정부 성향의 기자들을 179년 12월 말까지 색출하도록 하였다. 정부 조치로 인해 폐간된 신진일보와는 달리 대한신보에서는 고작 4명만 해고되어 정부의 면제를 받지 못해 사실상 정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김영후 정부]]가 들어선 후 정부의 탄압을 피해 비밀언론사 활동을 이어갔는데, 186년 3월 [[대한민국 국가중앙보안부|중보부]] 산하 대테러부대인 [[K-444]]의 소탕으로 소속 기자 70명이 체포당하고 14명이 구금되는 일을 겪었다. 결국 187년 1월 재정간되어 대한신보의 출판·발행이 약 5개월 간 금지되었고, 한동안 재정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원래 3월에 창간 예정이던 《대한여성신보》도 재정난으로 창간이 취소되었다. 그러던 187년 7월 재정간 기간이 끝나자마자 [[대한민국 7월 혁명|7월 혁명]]을 집중적으로 보도하여 시위대들과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민들의 주목을 받았고, 정간 위기에서 벗어난 대한신보는 반정부-친민주화 노선을 띄는 언론으로 다시 성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으며 177년 11월 언론사 특별조치로 이전 조치에서 강제 정간을 당한 [[신진일보]]와 함께 대한신보에서도 반정부 성향의 기자들을 179년 12월 말까지 색출하도록 하였다. 정부 조치로 인해 폐간된 신진일보와는 달리 대한신보에서는 고작 4명만 해고되어 정부의 면제를 받지 못해 사실상 정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김영후 정부]]가 들어선 후 정부의 탄압을 피해 비밀언론사 활동을 이어갔는데, 186년 3월 [[대한민국 국가중앙보안부|중보부]] 산하 대테러부대인 [[K-444]]의 소탕으로 소속 기자 70명이 체포당하고 14명이 구금되는 일을 겪었다. 결국 187년 1월 재정간되어 대한신보의 출판·발행이 약 5개월 간 금지되었고, 한동안 재정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원래 3월에 창간 예정이던 《대한여성신보》도 재정난으로 창간이 취소되었다. 그러던 187년 7월 재정간 기간이 끝나자마자 [[대한민국 7월 혁명|7월 혁명]]을 집중적으로 보도하여 시위대들과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민들의 주목을 받았고, 정간 위기에서 벗어난 대한신보는 반정부-친민주화 노선을 띄는 언론으로 다시 성장하기 시작한다.  


[[8월 선언]] 이후 대한신보는 "이제 권위주의 정치를 청산할 시간입니다"라는 광고물을 내보내 권위주의 청산과 한국 민주주의를 주로 다루기 시작했으며, [[김성군]]
[[8월 선언]] 이후 대한신보는 [[김성군]] 대표이사가 취임한 189년부터 점차 진보적인 노선을 띄기 시작했고, [[강규일 정부]] 시기에는 중도우파의 평화민주당 외에도 중도좌파인 사회민주당을 지지했으며 [[193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16대 대선]]을 집중 보도한 시기에서도 [[노유천]] 후보에 관한 기사를 자주 내보내 [[친노유천]]-친민주당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194년 2월 김성군 대표이사가 사임하자 또 다시 재정난과 함께 위기를 맞았으며 때문에 중도우파로 분류되던 신진일보에 점유율과 구독률을 빼앗기는 등 타격을 입고 말았다.
 
결국 195년 4월 대한신보는 창간 94년만에 간판을 내리게 되며 폐간되었다. 이후 대부분은 신진일보를 포함해 각종 중소 신문으로 흩어졌지만, 대한신보 출신 기자, 편집인 등 총 49명이 3년 뒤인 198년 3월 '진보신문창간준비협의회'를 결성하고 재창간 준비에 돌입하게 되었다.
 
=== 진보신문 ===
198년 6월 진보신문창간준비위원회는 새로운 진보 언론을 개척하겠다는 명목으로 《진보신문》이란 이름으로 재창간하게 되었다. 진보신문은 대한신보에 비해 좌파 성향의 논조를 띄었고, [[황대진 정부]]와 신자유주의에 관해 비판적인데다 [[전국대한민주노동조합총연맹]]을 지지했었다. 하지만 발행부수와 구독률은 다른 언론사에 비해 극히 낮았으며 파업이나 대규모 시위를 제외하고는 파급력이 없었다.
 
거기에 200년 4월 진보신문은 [[대한공산당 (어나더어스)|대한공산당]]을 비판하는 칼럼을 다뤘다가 대한공산당 당원들이 진보신문을 "진보로 위장한 배신언론"이라 비판하며 당 내에서 불매운동이 일기도 했었다.
 
진보 언론을 개척하겠다고 창간했던 진보신문은 200년 이후 인터넷 신문과 타블로이드 신문의 등장, 그리고 거대 일간지로 부상한 신진일보의 기세에 밀려 사실상 중소 언론사로 전락했다. 그러던 202년 3월 [[최수형]] 대표이사가 사임하고 [[홍수연]] 신임 대표이사가 취임한 후 진보신문은 엄청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진보신문은 그동안 정치에만 한정되어 있던 분야를 스포츠, 연예, 문화, 경제 등으로 활동을 넓히고, 진보신문을 우경화시켜 급진진보의 성격을 버리고 사회민주주의, 사회자유주의 신문으로 탈바꿈했다. 202년 4월에는 진보신문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온라인 활동도 활발해졌으며, 구 대한신보의 명성을 회복하려 했다.
 
202년 6월, 홍 대표이사는 진보신문의 명칭을 《더 리버럴》로 바꾸고, 회사의 사명도 현재의 명칭으로 바꾸게 되며 진보신문은 약 4년 만에 사라지게 된다.


== 인물 ==
== 인물 ==

2021년 5월 5일 (수) 00:29 판

[ 세계관 목록 ]
[ 세계관 설명 ]
[ 같이 보기 ]
본 창작물은 어나더어스의 공식 설정입니다. 세계관 연재자 외에는 무단 편집을 지양해주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 (어나더어스) 대한민국의 7대 중앙 종합 일간지

틀:나무위키 언론 정보

《더 리버럴》(The Liberal)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언론사이자, 리버럴 미디어 그룹이 운영하는 조간일간지이다. 221년 기준으로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과거 대한신보진보신문의 정신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보수 성향의 대한일보와 함께 가장 오래된 언론사이지만 이와는 반대로 진보주의 성향을 띈다. 이 외에도 신좌파, 친노유천 등 다양한 노선을 가진 기자들이 많고, 급진좌파-친권 언론인 팩츠와 중도진보 노선인 신진일보와 함께 삼자언론(三自言論)으로 불리고 있다.

역사

대한신보

더 리버럴은 101년 3월 창간한 《대한신보》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한신보는 언론인이자 진보당 소속이었던 윤창열이 창간한 언론사로, 같은 시기 사간원 출신들이 창간한 《조선신문》보다 늦게 창간했음에도 좌파 계열의 언론사로 자리잡았고 조선신문은 보수 성향이 강해 자유당, 보수당 등의 지지를 받은 반면 대한신보는 좌파 중에서 스펙트럼이 넓어 좌파정당들의 후원과 지지를 받았다. 창간 2년 후인 103년 5월에는 해외 진출을 위해 이클리우스 출신 발행인 조던 미카엘을 고용하여 영문판을 발간해 임시정부 외주 지역에 확대되었고, 119년에는 루스키아 출신 발행인 안톤 지리놉스키를 고용해 노문판(루스키아어판)을 발간하였다. 이는 해외 진출은 물론이고 해외에 거주하는 한인들과 외국인들을 독자층으로 확장시키려는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이러한 성과 덕분인지 122년에는 대한신보는 국내에선 발행부수가 조선신문에 밀림에도 불구하고 국외에서는 큰 인기를 얻었다.

144년 대한신보는 정부 수립을 위해 공준위를 꾸준히 지원했다. 하지만 국총협과 보수파를 비판하는 기사를 내자 교학부가 대한신보의 발행을 금지시키는 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국민들은 교학부의 결정에 반발하며 대한신보의 발행을 재개해달라는 시위가 벌어졌고, 끝내 유상민 당시 임정 총리는 대한신보의 발행을 재개하라는 명령을 통해 교학부는 대한신보의 발행을 재개할 수 밖에 없었다. 정부 수립 이후 대한신보는 조선신문과 함께 대표적인 양대 언론사로 부상했고 대한신보는 유상민 정부에 호의적이었던 반면 조선신문은 유상민 정부를 비판하고 반공-반좌파 노선을 띄기 시작했는데, 이는 4대 대선 이후 부정선거 의혹으로 인해 반정부 노선으로 갈아타며 대한민국 3월 혁명을 지지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대한신보는 박경열 정부가 들어서며 정간 위기를 맞았지만, 다행히 건전한 국민언론을 위한 조치에서 제외되어 반정부 노선을 띄는 언론 중 유일하게 정간 조치를 취하지 않은 언론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으며 177년 11월 언론사 특별조치로 이전 조치에서 강제 정간을 당한 신진일보와 함께 대한신보에서도 반정부 성향의 기자들을 179년 12월 말까지 색출하도록 하였다. 정부 조치로 인해 폐간된 신진일보와는 달리 대한신보에서는 고작 4명만 해고되어 정부의 면제를 받지 못해 사실상 정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김영후 정부가 들어선 후 정부의 탄압을 피해 비밀언론사 활동을 이어갔는데, 186년 3월 중보부 산하 대테러부대인 K-444의 소탕으로 소속 기자 70명이 체포당하고 14명이 구금되는 일을 겪었다. 결국 187년 1월 재정간되어 대한신보의 출판·발행이 약 5개월 간 금지되었고, 한동안 재정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원래 3월에 창간 예정이던 《대한여성신보》도 재정난으로 창간이 취소되었다. 그러던 187년 7월 재정간 기간이 끝나자마자 7월 혁명을 집중적으로 보도하여 시위대들과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민들의 주목을 받았고, 정간 위기에서 벗어난 대한신보는 반정부-친민주화 노선을 띄는 언론으로 다시 성장하기 시작한다.

8월 선언 이후 대한신보는 김성군 대표이사가 취임한 189년부터 점차 진보적인 노선을 띄기 시작했고, 강규일 정부 시기에는 중도우파의 평화민주당 외에도 중도좌파인 사회민주당을 지지했으며 16대 대선을 집중 보도한 시기에서도 노유천 후보에 관한 기사를 자주 내보내 친노유천-친민주당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194년 2월 김성군 대표이사가 사임하자 또 다시 재정난과 함께 위기를 맞았으며 때문에 중도우파로 분류되던 신진일보에 점유율과 구독률을 빼앗기는 등 타격을 입고 말았다.

결국 195년 4월 대한신보는 창간 94년만에 간판을 내리게 되며 폐간되었다. 이후 대부분은 신진일보를 포함해 각종 중소 신문으로 흩어졌지만, 대한신보 출신 기자, 편집인 등 총 49명이 3년 뒤인 198년 3월 '진보신문창간준비협의회'를 결성하고 재창간 준비에 돌입하게 되었다.

진보신문

198년 6월 진보신문창간준비위원회는 새로운 진보 언론을 개척하겠다는 명목으로 《진보신문》이란 이름으로 재창간하게 되었다. 진보신문은 대한신보에 비해 좌파 성향의 논조를 띄었고, 황대진 정부와 신자유주의에 관해 비판적인데다 전국대한민주노동조합총연맹을 지지했었다. 하지만 발행부수와 구독률은 다른 언론사에 비해 극히 낮았으며 파업이나 대규모 시위를 제외하고는 파급력이 없었다.

거기에 200년 4월 진보신문은 대한공산당을 비판하는 칼럼을 다뤘다가 대한공산당 당원들이 진보신문을 "진보로 위장한 배신언론"이라 비판하며 당 내에서 불매운동이 일기도 했었다.

진보 언론을 개척하겠다고 창간했던 진보신문은 200년 이후 인터넷 신문과 타블로이드 신문의 등장, 그리고 거대 일간지로 부상한 신진일보의 기세에 밀려 사실상 중소 언론사로 전락했다. 그러던 202년 3월 최수형 대표이사가 사임하고 홍수연 신임 대표이사가 취임한 후 진보신문은 엄청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진보신문은 그동안 정치에만 한정되어 있던 분야를 스포츠, 연예, 문화, 경제 등으로 활동을 넓히고, 진보신문을 우경화시켜 급진진보의 성격을 버리고 사회민주주의, 사회자유주의 신문으로 탈바꿈했다. 202년 4월에는 진보신문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온라인 활동도 활발해졌으며, 구 대한신보의 명성을 회복하려 했다.

202년 6월, 홍 대표이사는 진보신문의 명칭을 《더 리버럴》로 바꾸고, 회사의 사명도 현재의 명칭으로 바꾸게 되며 진보신문은 약 4년 만에 사라지게 된다.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