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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파리 시장에서 재선하였다. 그는 일찍이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우고 여러 진보적인 정책들을 발표하는 파격 행보를 보여 특히 젊은 유권자들을 상대로 인기를 얻었다. 1958년 시장직에서 퇴임한 이후, 잠시 야인으로 지내다가 1960년 총선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 1954년 파리 시장에서 재선하였다. 그는 일찍이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우고 여러 진보적인 정책들을 발표하는 파격 행보를 보여 특히 젊은 유권자들을 상대로 인기를 얻었다. 1958년 시장직에서 퇴임한 이후, 잠시 야인으로 지내다가 1960년 총선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 ||
이때까지만 해도 전국적으로 차기 총리감으로 지목되는 총리는 아니었으나, 1960년대 중반경부터 베트남 전쟁 참전을 반대하며 청년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그는 196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사랑의 여름" 축제에 참가해 히피 운동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듬해 3월, 그는 사회당 총서기로 선출되었고 동시에 소르본 대학교들을 중심으로 베트남전쟁과 보수적 사회 분위기를 반대하는 청년들의 항의 시위가 발생하자, 누구보다 앞서 이 시위를 지지하며 청년층으로부터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4월에는 [[르네 밀랑]] 총리의 불신임을 이끌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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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 28일 (수) 21:55 판
프랑스 제국 총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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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대 프랑스 총리 사디 팔레르모 Sardit Palermo | |
본명 | 사디 제오르 비도 팔레르모 Sardit Georg Bidalut Palerm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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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6년 5월 14일 |
프랑스령 알제리 오랑 | |
사망 | 1994년 7월 16일 (향년 78세) |
그리스 남부 에게주 낙고스섬 | |
국적 | 프랑스 |
임기 | 파리 시장 |
1950년 7월 12일 - 1958년 7월 11일 | |
프랑스 총리 | |
1968년 6월 15일 - 1972년 6월 1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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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프랑스 제국의 제32대 총리. 본명보다는 히피들의 대변자라는 별명으로 조금 더 유명하다.
생애
사디 팔레르모는 공무원의 아들로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4살때 파리로 이사한 이후 쭉 파리에서 살았다. 학교 공부에도 소질을 보였기 때문에 당대 최고 명문 소르본 대학교의 경제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한 수재였다. 그는 24세에 이미 석사 학위를 딴 상태였다. 또 열성 사회당원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 역시 청소년 시절부터 프랑스 사회당에 입당해 파리시당 내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던 1940년, 제2차 세계대전에 터지자 그는 친구와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진 입대하여[1] 서부전선에 배치되었다. 1942년 아프리카 전선으로 재배치받아 타바카 전투에서 이탈리아군과 싸웠는데, 이때 부상을 입어 제대하였다. 이 일이 파리시 지역 일간지의 한 기자에 의해 애국주의의 아이콘으로 부각되어 그는 단숨에 전국적인 인지도를 가진 인사가 되었다.
1944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이후, 그는 소르본 대학교를 잠깐 휴학하고 정치계에 투신하였다. 1945년 치뤄진 파리시의회 의원에서 안정적인 표차로 시의원에 당선된 그는 보수인민당 소속의 시장을 공격하며 보수 저격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런 뚜렷한 행보에 힘입어 1950년 파리시장에 출마했고 그는 그가 시의원 시절 공격했던 시장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역대 최연소 파리 시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이때가 그의 나이 34세였다.
1954년 파리 시장에서 재선하였다. 그는 일찍이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우고 여러 진보적인 정책들을 발표하는 파격 행보를 보여 특히 젊은 유권자들을 상대로 인기를 얻었다. 1958년 시장직에서 퇴임한 이후, 잠시 야인으로 지내다가 1960년 총선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전국적으로 차기 총리감으로 지목되는 총리는 아니었으나, 1960년대 중반경부터 베트남 전쟁 참전을 반대하며 청년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그는 196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사랑의 여름" 축제에 참가해 히피 운동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듬해 3월, 그는 사회당 총서기로 선출되었고 동시에 소르본 대학교들을 중심으로 베트남전쟁과 보수적 사회 분위기를 반대하는 청년들의 항의 시위가 발생하자, 누구보다 앞서 이 시위를 지지하며 청년층으로부터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4월에는 르네 밀랑 총리의 불신임을 이끌었다.
각주
- ↑ 그는 석사 학위 소유자였던데다가 소르본 대학교 수석 입학자로 징집 대상에서 제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