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마천루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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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반란이란 2400년부터 2413년까지 신안 제국에서 벌어진 일련의 난들의 연속으로, 신안 제국의 목포시를 제외한 육지 영토 전체를 잃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전개
제3차 신성 복음 연합-신안 전쟁이 끝난 뒤, 이전의 내전 등으로도 소모된 신안 정예병력은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많은 신안의 젊은이들은 귀족들의 사병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동부의 대표적 제후이자, 명목상으로 여순의 지방관이었던 박바다 aka 밤바다는 반란을 결행하였으며, 동부 제후들 대부분이 그를 따라 독립하였다. 그러나 약체화된 황제의 중앙군은 이를 토벌할 여력이 없었다.
이 광경을 본 전남 서부의 제후들과 주민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신안 제국이 반란을 진압할 여력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자 이들에게는 거리낄 것이 없어졌다. 무안, 해남, 나주, 영광, 모든 곳에서 지주들과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수도 목포와 도서 지역의 노예들도 해방을 선언하며 반란에 동참하였다. 황제는 이를 진압하다가 결국 반란군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귀족들도 자신의 재산이던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경악하였고, 꿍쳐두던 사병들을 보내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이미 본토에서는 이 거대한 흐름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명명백백히 밝혀졌고, 신안인 귀족들은 결국 수십,수백 년간 가지고 있던 봉지를 포기하고 섬으로 달아나야 했다. 섬 지역 대부분의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거문도 일대에서는 노예들이 승리하였고 코뮌을 성립하였다. 한편 목포를 공격하는 반란군과 신안군 간의 치열한 교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결말
후에 황제가 되는 김문어는 필사적으로 몰려오는 적군을 방어하였고, 황족들 상당수가 죽거나 부상을 입었으나 어쨌건 싸움은 끝나게 되었다. 한때 위용을 자랑하던 신안 제국은 2백여 년 전 목포를 막 점령한 시절로 회귀한, 아니 더 못한 수준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겨우 지켜낸 목포를 제외한 육지의 식민지는 전부 상실하였고, 과거 오랫동안 지배하던 강화, 인천 등은 한참 전에 잃었다. 게다가 신안의 경제력을 담당하는 도서 지역들도 절반 이상이 동부의 밤바다를 따라 독립하거나, 거문도와 같이 아예 별개의 세력으로 자립하였다. 신안 제국에 남은 것은 옛 신안 섬들과, 진도, 그리고 상처입은 수도 목포뿐이었다. 한때 반도 최대의 도시였던 목포시는 전주 아래로 떨어졌다.
신안 제국으로써는 약간의 위로가 될지도 모르나, 그들의 숙적 신성 복음 연합도 얼마 지나지 않아 신성 혁명으로 한바탕 반란소동이 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진압에 성공했고, 신성복음연합 역시 형체는 유지하였다는 점이 다르다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