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마천루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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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신성혁명은 2432년 2월 신성복음연합 김제에서 시작된 종교 혁명이다.
혁명 발발
신성혁명의 발발 전 신성복음연합은 4대황제 박중현과 그 최측근 남원선제후 이두수에 인한 부패로 인해 망가져 있던 상태였다. 박중현의 사망이후 5대황제 이한월이 즉위 하였지만 이미 시작된 부패와 이두수를 필두로 하는 귀족의 막대한 영향력으로 수많은 개혁들이 실패하고 좌절되어 왔다. 이로인하여 신성복음 연합은 사회 전반적 혼란이 지속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신성복음연합을 지탱하던 제국국교회의 타락은 혼란을 가중시키기만 했다.
이 상황 속에서 연합을 바꾸고자 하는 모임이 등장했다. 자신들의 모임을 연합신성부흥회로 부르던 이 단체는 초기에는 신실한 신자들의 기도로 시작하였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단체의 힘이 커져갔고 점차 극단적인 사람들도 모여져 갔다. 점차 이들은 자신들이 주님의 뜻에 따라 행동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고, 민중들을 비롯하여 국교회 내에서도 상당수의 동조자를 모으며 갈수록 세력을 키워 갔다.
2431년 10월 신성복음연합은 마침내 제국의 상비군마저도 대규모로 감축시켰다. 이로인해 많은 퇴역군인들이 주변에 퍼지게 되었고 이로인한 사회적 문제는 점차 심각해져 갔다. 연합신성부흥회의 대표목사 배드로는 지금이 바로 행동에 나설 때라고 여겼다. 대규모로 해체된 퇴역군인들을 이용해 신성복음연합을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고, 이 주장은 부흥회의 핵심 간부 김성호 목사와 이기태 목사의 지지를 받아 결정되었다.
2432년 2월 유난히 추운 겨울로 인해 모든 민중들의 불만이 가속되어가는 와중 부흥회는 행동을 개시했다. 김제를 시작으로 연합신성부흥회 목사들과 신도들, 그리고 퇴역 군인들이 모여 함께 동참하기로 한 민병대장 김제원과 부대장 나세민을 바탕으로 대규모 혁명을 일으켰다. 올바른 신앙을 바탕으로 연합을 정상화 시키자는 혁명은 순식간에 김제 전체가 동조하게 되었고 순식간에 연합은 김제의 통제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혁명은 이제 시작되어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혁명의 진격
혁명지도자 목사 배드로는 혁명이 완수되기 위해서는 크게 2가지 목표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첫번째는 제국국교회의 수장 황제의 설득, 두번째는 부패한 귀족들의 처단이었다. 첫번째 목표를 위해서 자신이 꼭 가야 한다고 생각하여 배드로는직접 혁명세력과 함께 전주로 향하였고, 두번째 목표를 위해 남부로 움직일 세력은 2인자였던 김성호 목사와 민병대장 김제원이 이끌었다.
전주지역은 김제의 바로 옆에 있어 혁명의 여파를 그대로 받은 지역이었다. 목사 배드로는 혁명세력과 함께 전주로 향하며 전주의 시민들이 자신의 대의에 동참하리라고 여기고 그러면 황제가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여겼다. 목사 배드로는 시민들과 함께 진군하여 제국교의 정상화와 부패한 귀족의 처벌을 주장하면서 황제앞으로 나아갔고 이 행진은 점차 커져만 갔다. 이한월 황제는 이 꼴을 두고만 있을 수는 없었고, 즉각 중앙군을 모아 배드로의 군세가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도록 차단하라고 명령한다. 처음에는 높은 숙련도로 밀어붙였던 황제의 사병은 점차 모여가는 배드로의 군세에 우위를 잃어버리게되고 2432년 8월 전주에서 대규모 교전이 일어나게 된다. 황제군은 혁명군이 시내로 진입하지 못하게 막는 데는 성공했으나, 황제를 지지하지만 혁명파의 대의에도 어느 정도 공감하는 시민들의 영향으로 인해 적극적인 진압보다는 지리한 대치 국면으로 전환, 혁명군은 전주 외곽에 주둔하게 된다. 황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을 무리하게 깨부수는 것보다는, 그동안 자신에게 위협이 되었던 대귀족들에게 분노를 돌리는 데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배드로 역시 전주의 굳건한 방어를 뚫어내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느끼고 성외에서 시민들에게 자신의 뜻을 계속해서 외치는 쪽으로 전략을 수정한다.
남부로 향한 김성호목사는 먼저 정읍공작령을 향해 나아갔다. 사악한 이두수를 벌하기 위해서 거쳐가야 하는 곳으로 이곳을 우선 거점을 삼으려고 한 것이다. 기회주의자 정읍공작 박룡승은 빠르게 혁명군이 대세이며 연합의 지원을 받지 못하자는 것을 알자 빠르게 개종하고 혁명군에 대한 지원을 약속한다. 정읍을 거점으로 빠르게 확보한 혁명군은 이제 최중요 목표 남원을 향해 나아갈려고 하는데 여기서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긴다. 부대장 나세민의 자신의 형은 고창 공작이었는데 갑작스럽게 급사하고 이제 겨우 14살인 아들이 작위를 이어받은 것이다. 이 기회를 타서 고창을 차지할려고 한 민병 부대장 나세민은 자신의 군대를 쪼개 고창을 향해 진격하게 된다. 부대장의 이탈로 갑작스럽게 군대가 줄어든 혁명군은 이 군대로는 남원을 장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이때 민병대장 김제원은 자신이 어떻게든 군대를 모아올테니까 일단 남원으로 진격하자고 말하고 김성호목사는 김제원을 믿고 남원을 향해 진격하게 된다.
남원공작 이두수는 혁명군을 막아내기 위해 군대를 모아 혁명군을 향해 진격한다. 2433년 3월 김성호 목사의 군대와 이두수의 군대가 대규모 회전을 치르게 되고 숙련된 이두수의 군대가 점차 김성호의 군대를 밀어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때 북부의 원불교도들을 모아서 온 민병대장 김제원이 김성호 목사와 합류하게 되고 숫적우세를 바탕으로 혁명군이 압박해 나가 이두수의 군대를 물리치게 된다. 그리고 곧장 그대로 남원을 포위하게 되고 남원 공성전에 들어가게 된다. 2433년 6월부터 이어진 공성전은 장장 2년여동안 이어지게 되고 결국 숫적 열세와 보급고갈로 인해 2435년 3월 함락되게 된다. 혁명군은 남원 공작가를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죽이게 된다. 이 참극에서 살아남은 것은 운좋게 남원공작을 떠난 이제 겨우 10살이었던 이두수의 손녀 이옥순만 남게 된다.
결말
남부 전역이 대강 마무리되고, 황제뿐 아니라 남원에서의 참상을 전해들은 다른 귀족들은 저 칼끝이 자신들의 목을 향하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결국 황제는 공식적으로 제국과 교회를 개혁할 것을 약속하고, 혁명군이 점유한 영역을 암묵적으로 인정할 것을 제안한다. 혁명군에게는 전주를 뚫어낼 힘도 없었을 뿐더러, 시간이 더 지체된다면 북부의 지배자 임요한의 군세에 모든 혁명군이 짓밟힐 우려가 있었다. 그리하여 배드로 목사는 전주로 마침내 입성해 황제와 화약을 체결하고, 뒤이어 모든 혁명군 장군들은 황제에게 다시금 충성을 맹세하며 혁명은 공식적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혁명의 영향은 남부 전역에 남아있었다. 김제공작령의 시민들은 배드로 목사를 공작으로 추대했으나 배드로는 황제와의 약속을 이유로 들며 사양했고, 배드로는 김제의 백작으로 남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이끌던 혁명군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을 연합신성부흥회의 이름을 따서 신성교도로 부르면서 다녔고 자연스럽게 혁명신앙은 신성교로 이름붙여졌다.
남부로 향한 세력들도 현지 귀족을 죽이고 그자리에 머물게 된다. 남원공작을 무너뜨리기 위해 원불교도를 이용한 민병대장 김제원은 진안지방에 머물고 그 지역에 원불교도들의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 준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자신또한 원불교로 개종하게 된다. 한편 남원 땅은 신성교도들에게 점령되었으나 남원 공작가의 유일한 상속자 이옥순을 황제는 남원 공작으로 책봉했고, 옥순은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나 가족을 모두 앗아간 신성교도들에게 증오를 품게 되고, 그러면서도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현실 속에서 광증을 앓게 된다.
혁명의 종료 이후 황제는 이들을 공식적으로 용인하지는 않았지만 우선적으로 제국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방치하게 된다. 또한 이들이 귀족들을 죽인 것을 기회로 개혁에 돌입하게 된다. 거기에 더하여 새로운 법왕으로 개혁파 김한결이 즉위하면서 제국의 개혁은 비로소 시작점을 맞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