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본의 역사
月本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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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인간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한 시기를 살펴보면, 지금으로부터 7만~8만년 전의 구석기 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구석기시대의 유적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빌레못굴' 유적이 있다. 이 빌레못굴 유적에서는 타제석기와 함께 오늘날 남중국 지방에서만 서식하는 동물의 뼈가 발굴되었다. 이 동물 뼈의 발견은 옛날 월본 제도가 오늘날과 같이 섬으로 되어 있지 않고 대륙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연륙설을 나타내는 증거가 되고 있다.

고대시대

고대 월본 열도는 남중국해와 월본해(동해)를 끼고 아카토 문명이 발생하여 아카사인들이 존재했었다. 험한 산지 대신 완만하고 비옥한 유전평야에 집단으로 생활했었다. 유전(有田)이라는 말처럼 농사기술이 발달해 곡식을 주식으로 하였다. 천공단 유적이 대표적인 유적지이다.

아카사인 집단은 정교하고 섬세한 마을을 건설했는데, 중심이 되는 성체 지붕에 붉은 천막을 둘러놓아 홍성이라고 불리었다. 월본은 대륙과 멀리 떨어져 있던 섬이였던 관계로, 중국, 한국 등의 타 국가들에 비해 발전이나 국가 수립이 늦었으며, 6세기까지도 홍성 시대가 이어지며 대형 국가로의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소규모 국가들이 서로 다툼을 계속하던 시기가 이어졌다.

도래인시대ㆍ남북국시대

4세기 이후 주곤 지역의 아카사인들은 한반도의 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나당연합군의 백제 공격으로 인해 백제가 멸망 직전까지 가게 되자, 월본에는 백제로부터 오는 백제 출신 주민들의 이주가 대거 시작되었고 이들은 도래인으로 불리게 된다. 이후 백제는 660년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사비성이 함락되어 멸망하였으나 백제의 잔존 세력들은 백제의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여 나당연합군과 맞서 싸웠다. 이후 백제 부흥 운동 세력은 약 10일에 200개의 성을 탈환하고, 당나라 군대의 보급을 끊는 힘을 보여주었으나 나당연합군의 화력과 고립으로 인하여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백강 전투에서의 패배가 결정적인 멸망 요인이 되어 백제 부흥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백제 부흥 운동 잔존 세력의 수장이던 지수신과 흑치상지는 도피하여 저항해 나가기로 결정했고, 백제계 유민들과 군사를 이끌고 월본 제도로의 항해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월본 지역에서 백제촌을 이루고 살던 백제계 유민들도 합류하게 된다. 지수신과 흑치상지는 백제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남백제국(南百濟國)라는 이름을 지어 세력을 구축하였고, 부여풍의 동생 부여용을 국왕으로 추대하였다. 부여용은 휘(諱)를 관온으로 바꾼 뒤 새로운 백제의 건국과 새출발을 선언하였으며 이것이 현 월본 국황사의 시초가 된다. 이후 남백제국은 개척 과정에서 적대적이던 아카사인들과 충돌하게 된다. 673년에는 남백제국과 아카사인 세력간의 다툼인 외해군란이 일어나게 되고, 백제계 도래인들이 홍성을 점령했다.

홍성이 해체되며 아카사인들은 남안[1]으로 천도하여 세력을 유지하고 하로성을 세웠다. 이후 백제계 도래계는 선구왕조를 중심으로 한 남해국으로 국명을 바꾸게 된다.

남해시대

남해국은 10세기 이후 남쪽에 있던 산암도의 소요 해적과 남해국 간의 잦은 충돌로 피로도가 쌓여갔고 하로성과 백제계 도래인-원주민간 신경전도 끊이질 않았다. 이어 외란족도 남해국의 교역에 약탈을 거행하며 불안정한 기류는 계속되었다. 남해국의 군주 선진왕은 아카사인들과 가다담판[2]에서 통일을 주도하여 관본도 해안선의 무장과 병력을 정비하고 교역에 대한 대비를 강화했다. 통일을 위해 선진왕은 아카사인들에게도 권력을 일부 이양하는 등 지방분권을 조금씩 실행하였고 동북부지방 개척 권한을 주었다.

그 뒤 남해국은 오랜 기간동안 내치에 집중하며 세력을 키우고 있다가, 명이 수립되자 명에 조공과 사신을 보내 교류를 맺고 군신관계를 성립해 인정을 받으며 여엇한 동아시아의 주류세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1413년 네덜란드와 스페인 상인들의 배가 남해국 신주성 지역에 상륙하면서 시현왕은 서양상인과 교류를 하기 시작한다. 이후 해안에 위치한 요새화된 택지를 조성해주는데 이것이 바로 청해촌(淸海村)이다. 남해국은 서양 열강들과 교류하며 각 부성의 특산품을 금품이나 신무기를 받고 팔았으며, 선장에게 1년에 1번 왕을 알현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 결과 남백제는 서양의 문물을 수용하여 개혁을 이뤄내고 상업의 발전도 이뤄냈다. 시현왕 이후 즉위한 성현왕은 중국-조선과 서양 세력을 잇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남해국을 아시아 지역의 해양 허브국가로 발전시켜 상업을 진흥시켰다. 이후 유럽의 해양 진출과 맞물려 포르투갈과 스페인, 네덜란드 상인과의 교류도 번성했다. 당시 중계무역으로 뻗어나가는 남해국의 자신감을 반영한 유물로는 천해성 만국진량의 종(1528년)에 적힌 명문이 있다.

사군시대ㆍ청양성시대

남해국은 11세기 이후부터 지방분권에 따라 각 주(州)마다 부성(府城)의 권한이 생겼는데 초기에는 관할 주의 조세만을 관여하였으나 점차 교역에 대해서도 범위를 확장했다. 본래 교역은 국왕만의 권한이였으나 각 부성의 성주들이 교역에 관할하기 시작하였고, 무기까지 각자 암암리에 거래하기까지 이르렀다. 일부 부성은 서양세력을 등에 업고 신무기를 수입한 뒤 국왕마저도 함부로 간섭하지 못하는 세력을 확보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부성이 바로 척지대장군이 되는 청양성(淸洋城)이다. 그러나 해안선 특히 무역항이 발달한 지역은 부강했던 반면 내륙산간 지역은 쇠약해져 격차가 생기기도 했다. 각 부성은 부성내에서 최고권력인 성주가 지배적이고 성주의 혈족은 귀족처럼 여겨졌다. 귀족을 호위하는 사군(士軍)이 존재했는데 이들의 권력도 막강했다.

남해국 말기, 청양성-중국간 교역을 시찰하고 돌아오는 청공가문의 공주일행과 그 교역품을 운반하던 마차 무리가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청양성의 청공가문 공주가 피살당하면서 이에 역분한 청양성 성주가 배후로 경쟁 관계에 있던 삼주성을 지목한 뒤 청양성과 전투를 벌인다. 이후 전승을 거둬[3] 관본 전역[4]에 분산됬던 권력을 청양성 청공가문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체계로 바꾸었다. 그 뒤 1590년 청양성은 남해국 황선왕에게 성주가 대대적으로 세습받는 척지대장군(拓地大將軍) 지위를 받은 뒤, 국왕을 권력에서 몰아내고 실질적인 권력의 행사자가 된다.

삼청내란 이후 척지대장군 지위를 받은 청양성의 독주와 힘을 본 부성들은 순순히 청양성의 중앙집권에 동의를 했으나 조세권과 무역권을 거둬들이는 것에 몇몇 부성들은 반발하였다. 그러나 청양성은 무력을 앞세워 이들의 반발을 묵살시켰고 반항하는 부성을 공격하여 쑥대밭으로 만들며 자신들의 반대세력들을 제거하였다.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중앙집권을 하게 된 청양성은 무역을 독점한 뒤 부를 독차지하였고 척지대장군 지위를 이용해 백성들을 수탈하는 등 폭정을 일삼았고, 이러한 청양성시대가 약 250년간 이어지게 된다. 청양성 시대동안 상인이나 귀족들은 더욱 부유해진 반면 일반 농민이나 백성들은 수탈에 시달리며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러나 청양성도 반대파들과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다가 19세기부터 거듭된 분란발생과 지방세력들의 횡령으로 인해 쇠락하게 되고, 청양성의 쇠락을 본 반청양성파 성향의 하로성의 사군들은 1847년 청모적의 난을 일으키게 된다. 청양성은 개혁을 통해 회유를 시도하지만, 개방적이지 못한 정책에 동력을 잃어 정치적으로 몰락하게 된다. 이어 하로성은 국왕에게 지지를 얻어 관군기를 하사받아 정통성을 확보했으며, 스스로 국왕에 의한 통치국가를 선언[5]하며 근대적 국가임을 내세웠다. 이 기세를 몰아 하로성은 청양성으로 군사를 보내 고궁을 점거했다. 나락에 빠진 청양성[6]은 결국 다이치 국황에게 대정반환을 단행했다.

제국시대

다이치 국황은 다이치 유신을 통해 지방의 영주들의 영지와 영민을 국황에 반환하게 하였고 지방부성들을 폐지함과 동시에 행정구역을 개편했다. 이어 제국헌법을 제정하고 국호를 전월본제국으로 개칭하여 제국 국가를 표방했다. 제국의 수도도 도번지방으로 천도하여 재정비했다. 이후 메리치 개신과 다이치 유신으로 보통선거권을 부여하였고 정당정치가 실현되었다. 행정 및 경제 개혁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고, 월본은 급격한 서구화가 이루어졌다. 부역 제도와 노예 계급을 폐지하고 사법 및 교육 제도를 근대화하는 한편 철도/통신 사업도 추진하였으며 사회의 모든 방면을 개혁하였다. 또한 공장과 조선소도 건립하여 기술적 발전을 도모하였고 서양의 사상이나 철학, 서적 등이 번역되었다.

1870~90년대는 "식민지를 늘리고 제국주의 정책을 펼치자"는 제국주의자들과 "아직 때가 아니며 서양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친서방주의자들이 대립하기 시작했다. 제국주의자들은 후에 군부 출신 및 제2제국, 친서방주의자들은 후에 민주주의자 출신 및 월본으로 내려져오며 교전하게 된다. 우선은 친서방주의자들이 선거에서 승리하여 정국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이들은 적극적인 외교로 서구 열강들과 대등한 위치에 서야한다고 주장했다. 친서방주의자의 대표주자였던 김하주 총리는 적극적인 개방과 서방 세력과의 교류에 나섰고, 이러한 활동은 월본의 국제적 입지를 넓히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월본은 19세기 말 개방을 내세워 서구열강의 신문물을 적극 수용하면서 근대화를 이룩했고 해적과 서구열강의 간섭에 맞서 군사력도 증대해왔으며, 그 일환으로 무기나 장비를 신식으로 교체하고 서양식으로 편제를 바꾸었다. 월청전쟁[7]으로 산암도를 얻어내고 도와왕국[8]를 병합시켰다. 청나라의 대만, 남부 지역을 점령하여 대륙 진출의 병참기지화를 해내고 도이조약을 통해 대만 및 하이난 섬 등 해안 지역을 할양받아 식민지화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식민지들을 통해 연합국에 물자 지원을 하며 외교적 입지가 상승하였다. 또한 이는 동시에 국제적 입지와 국력을 키우는데 일조했다. 한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월본은 풍부한 재정을 축적했고 경제도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했다.

이후 1929년, 미국의 대공황 영향으로 세계대전의 영향을 받은 부흥은 종식되었고 경제도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로 인해 1930년대는 암흑의 시대라 불린다. 이후 경기 악화의 영향으로 극단주의가 만연하여 극좌나 극우 세력의 폭동이나 선동도 증가하여 국내 상황도 불안정했다. 새로 총리에 취임한 구해민은 새로운 경제 정책을 제시하는데, 월본판 뉴딜 정책이라 불리는 "아성행계획"이다. 구해민이 말한 선언문 중 "월본을 위해서 내가 먼저(我) 살피면서(省) 가겠다(行)"라는 발언에서 따온 이름이였다. 계획에 따라 월본 곳곳에는 공공시설이 지어졌으며 경제 구제 정책이 실시된다. 이러한 아성행 계획은 효과를 어느정도 보게 되었고 1933년을 기점으로 다시 경기가 살아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아성행 계획은 비판이 많던 정책이였고 장기적으로 시행할수 없던 정책이였으므로 1937년 다시 경기가 악화되고 월본의 경제는 살아날 길이 없어보였다. 더군다나 경기 악화의 영향으로 극단주의가 만연하여 극좌나 극우 세력의 폭동이나 선동도 증가하여 국내 상황도 불안정했다. 또한 제국주의와 극단주의의 팽창이 세계적으로 유행하였기에 외부적으로도 뒤숭숭했던 시기가 바로 1930년대였다.

이후 "군국주의로 들어서자"는 제국주의자들이 득세하게 되었고, 군부 역시 자연스럽게 제국주의 세력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결국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영향을 받은 군부가 1937년 3월 13일 쿠데타를 일으킨 3.13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쿠데타로 인하여 구해민 총리가 실각하고 군부에게 거역한 내각 대신 2명이 살해당하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나 정계는 혼란에 빠진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군부의 영향력은 매우 막강해져 군부대신의 현역제가 부활하고 총리마저 군부 출신이 임명되는 등 사실상 군부가 내각을 좌우하게 되었다. 이로서 정당내각은 단절되고, 군부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및 전후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월본은 나치 독일,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고 추축국에 가입한다. 이후 2차대전이 발발하자 월본은 이에 가담하고 영프등에게 선전포고하며 동남아를 점령, 식민지화했다. 그러나 전선의 확대로 인해 일반 국민의 부담 및 피로는 점점 늘어갔고 이는 월본 내부에서 반전세력이 확대되는 계기가 된다.

이후 전월령 중화지[9] 내부에서는 독립운동과 독립전쟁이 잇달아 발생했고, 동남아에서도 반군이 등장하였다. 미영프는 월본에게 선전포고 하였으며 이로서 중국, 동남아, 태평양 군도를 배경으로 한 중해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전쟁 초기에는 월본제국이 우세하여 태평양의 군도들과 동남아 모든 지역을 통치[10]하기도 하였으나 1942년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월본에게 패색이 짙어지게 된다.

1942년 말부터 월본은 전쟁에서 점차 밀리기 시작하여 1943년에는 대부분의 태평양 군도 및 동남아 점령지를 상실하였으며, 이후 미군은 산암도에 상륙하여 월본 본토를 침공할 계획을 세운다. 결국 국황사(소류 국황)는 군부내각을 전원 해임하고 연합국에 항복, 구해민 총리를 임명한다. 구해민 내각은 연합국에 항복했고, 월본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군정부가 설립된다. 일부 군부세력은 이에 불복하고 소류 국황을 북부의 별궁에 감금한채로 북부와 중부에 제2전월본제국(통칭 제2제국)을 세우며 월본 내전이 1943년 발발했지만, 반전세력이 많던 북부와 중부에서는 반발이 심했다. 연합군은 월본에서 군부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마지막 공세를 펼쳤고, 소류 국황도 '만월을 찾아서' 작전을 통하여 무사히 구출된다. 이후 결국 제2제국이 패하면서 월본에서 군부세력은 모두 소멸하였고 동시에 모든 월본의 식민지들은 독립했다.

1941년 미영소간 전후 논의를 위하여 개최된 팔라스 회담에서 미국은 원래 월본에 대하여 연합사령부에 의한 통치를 진행하고 평화적 헌법을 제정하여 민정을 실시하려 하였으나 천년 이상 정신적 지주로 국가의 중심을 유지하던 국황사를 몰아내면 국민들의 반발이 심할 것을 우려해 국황사는 월본의 '상징'으로 존속시키고, 대신 국민들의 민주적인 선거로 선출된 '총리'가 민주적인 통치를 하기로 하였다. 이것이 바로 '상징국황제'이다. 이후 월본은 1943년 미국과의 사이드만 회담에서 승인된 상징국황제에 의해 입헌군주제를 채택하였다. 이후 구 제2제국, 월본 정부, 미국이 1945년 9월 10일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에서 조약을 맺으며(시드니 조약) 월본의 제2차 세계대전은 공식적으로 끝이 났다.

현대

전후시대 (1950년대)

전후에는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함과 함께 미국의 대공산포위망에 합류하였다. 월본은 중국과 인접하였기에 공산화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고 미국은 중화권의 공산화로 인해 월본도 영향을 받을 것을 우려해 월본국에 제국주의를 제거하고 정상화하여 군사권을 준다. 이로 인해 월본은 반공주의로 국가 노선을 잡으며 미국과 급격히 가까워졌고 혈맹관계로 발전한다. 또한 당시 신생 독립국이던 대한민국을 지지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으며 반공주의적 외교 노선을 확정하였다. 그로 인하여 소련, 중국과는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도서지역 및 북도 등지에서는 소련의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 게릴라인 월본적투군이 활동하였으며, 이들의 주도로 1948년 북도, 신설지방에서 대규모 폭동과 소요, 반란이 야기된 정해공란(丁亥共亂)이 발생하였고 정부군과 공산주의 게릴라가 교전을 치루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후 1949년 정해공란이 진압되었으나 이 일로 월본은 반공주의를 강화하였고 주월미군을 증설하였다. 1950년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월본은 대한민국을 지지하며 대한민국을 지원하였다. 동시에 월본은 미국의 전진기지와 군수물자 공급지로 활용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전쟁특수를 누리게 되어 종전 복구가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1955년에는 전쟁 피해를 말끔히 씻고 다시 발전의 길로 들어섰다.

군부독재시대 (1960~1970년대 초)

그러나 경제 성장은 부자와 빈자 사이의 경제적 격차를 벌려놓았고, 정치적 분열을 가중시켜 1950년대 월본은 1년을 넘긴 내각이 단 2번에 불과했을 정도로 정치가 불안하였다. 1962년 월본 총선은 사회당 등 좌파세력이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우익 세력은 월본의 좌경화와 보복을 두려워하게 된다. 그러자 결국 미국, 서구세력의 묵인과 사주 아래 1963년 2월 13일 강일한 장군이 주도한 군부에 의한 쿠데타(발렌타인 쿠데타, 임인정변)가 발생했고 군사정권이 시작되어 약 30여년만에 군부내각이 부활하게 된다. 이후 강일한 소장이 총리가 되었고, 군부는 소류 국황(국황사)를 꼭두각시로 내세우며 민주주의 탄압과 국민 감시 등 비민주적 방법을 동원하여 집권을 해나간다. 대표적으로 비밀경찰들을 배치하고 언론을 통제하여 반공 군사 독재를 강화시킨 일이 있으며,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사람은 공산주의자로 몰아 해외로 추방하거나 고문, 사형을 시키는 등 인권유린을 저지르기도 했다.

강일한 총리는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고 통제시키기 위해 경제발전을 국시로 내세웠고, 실제로 경제발전계획을 통해 월본의 경제와 산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월본의 경제 성장률은 1960년대에 가장 높았으며, 연 10% 성장을 하는 일도 잦았다. 군부독재 기간 동안 월본의 경제는 연평균 8~10%대의 성장을 기록했으며 눈부신 경제성장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2차 산업을 다시 부흥시켜 남부 지역에 현재의 관서임해공업지대를 만들었으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육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군부는 계속하여 민주주의를 크게 탄압해 후퇴시켰으며, 국민들의 민주적인 선거 요구와 군부 퇴진 요구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독재 행위를 펼쳤다.

이후 1969년 4월 강일한 총리가 병사하였고 그로 인해 월본에서는 민주화 열기가 생겼으나(1969년의 봄) 그의 후계자였던 이도완이 최고권력자 지위를 물려받으며 국민들의 민주화 기대와는 다르게 군사정권이 지속되었다. 이로 인해 도신설 지역에서 군부를 반대하는 도신설 7.17 항쟁이 발생하게 된다. 자세히는 1969년 7월 도신설군에서 반군부 시위가 일어나자 군부가 무력을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려고 했는데, 시민들과 일부 경찰, 군인들이 이에 맞서 시민군을 조직하여 대항한 것이다. 그러나 군부는 강경하게 진압하여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였고 도신설군에서 끔찍한 학살을 자행하였다.

이후 1969년 7월 기부사대학교도유대학교, 경당대학교, 선화대학교의 학생회가 주도하여 대학생 13만명이 군부내각의 7.17 항쟁 무력진압을 규탄하며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항쟁시위를 벌였다. 이는 신설지역에만 국한되었던 7.17 항쟁이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해당 시위에서 기부사대학교 경영학과 학생 조창도 열사는 기부사 대의선언이라는 군부 타도 선언문을 낭독하게 되는데, 선언문이 발표된 직후 조창도 열사는 선언문 낭독 3시간 이후 체포되어 즉결 총살당한다. 격앙된 기부사대학교를 비롯한 도유 5대학의 학생회는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일어나 시가를 행진하며 도유도청을 점거하였다. 당시 도유시장 신세웅은 격앙된 학생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도청에서 학생들과 협상하던 중 군부가 다시 난입해 학생들을 강제 연행하는 등 신세웅 역시 군부에 가담했다는 낭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신세웅은 이 일로 돌팔매질을 당해 거의 죽을 뻔 했으나 다행히 목숨만은 건졌다. 당시는 소류 국황이 시위의 양상이 점점 잔혹해짐에 직접 군부를 비판하는 교지를 하달함으로서 무력 진압은 8월 초 즈음 완전히 중단되었으나, 학생들을 강제 연행하고 고문하는 등의 비겁한 공작은 1971년까지 이어졌다. 결국 1971년 3월에 군부가 다시 무력 진압을 감행하였는데 대신 이번에는 민주화 운동가 학생들을 사고사로 포장시킨 의문사가 줄을 이었으며, 당시 고문에 피해를 입은 학생들 중 일부는 현재까지 살아남아 71년 3월의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민주화 요구들을 무력 진압한 이도완 총리는 언론검열을 넘어 언론사와 결탁해서 사실상의 선전기관으로 변질시키고 민주화운동을 철저하게 진압함으로서 독재권력을 공고히 했고 그럼으로 수반되는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 각종 노력을 해왔다. 이도완은 억압정책으로 물가를 안정시키고 각종 규제를 풀어 국민들의 관심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려 하였으며, 그러한 계획의 일환으로 1978년 도유 아시안 게임을 유치한다. 이렇게 군부는 경제개발과 반공을 내세워 집권을 이어가는데, 1960년대 초부터 추진된 경제성장 계획으로 연평균 8~10%대의 성장을 기록했으며 눈부신 경제성장을 하게 되며 1963~1974년에는 초고도경제성장을 이뤄내었다.

그러나 그 이후 오일 쇼크로 경제에 큰 타격을 입게 된 뒤 군부에 대한 불만이 커졌고 민주화의 바람이 불게 되며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점차 싹트기 시작하였다. 1973년 11월 17일 도유과학기술대학교에서 이도완 독재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항쟁을 일으켜서 군사 독재 정권의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1974년에는 기부사대학교, 도유대학교, 선화대학교, 경당대학교 등의 대학에서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1974년 9월 1일, 500여명의 학생권 운동가들을 따라 도유 시민들이 합류해 50만명이 운집하게 되는 도유 9월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도유 9월 혁명은 타 지역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월본의 전역으로 번져 국민들이 군부정권의 종식을 촉구하게 되었다. 하지만 군부와 이도완은 끝끝내 권력을 내려놓지 않았고, 시위대를 탄압하고 붙잡았지만 더 많은 시민들이 나와 군부의 하야를 외쳤다. 군부는 점진적으로 개혁을 한다는 교섭안을 제안했으나 국민들은 교섭안 대신 완전 민주주의 이행을 요구하였으며, 시위가 거세지며 전세계가 주목하고 국황사[11]까지도 정치 불간섭 원칙을 깨고 개입하여 시위대 지지를 선언하자 결국 군부는 하야하고 완전 민주주의 이행을 약속하였다.

1974년 새로 즉위한 뒤 도유 뒷골목에서 은밀하게 군부의 추악한 사주가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고 대노한 헤이모리 국황은 군부의 주요인사를 기피인물로 지정하고 교지에서 괘씸하다는 표현을 사용함으로 확인사살 즉 시위대 지지를 선언하게 된다. 이는 사실상 불경죄를 즉결으로 처분받은 것과 다름이 없었으므로 군부 대부분이 스스로 직을 내려놓고 사임하였다. 이후 결국 외국과 국황사의 압력까지 받게 된 군부는 하야하고 완전 민주주의 이행을 약속하였다. 1974년 9월 30일 이도완 총리도 정식으로 사임하면서 12년에 걸친 군부 정권은 종식되었다.

현재 월본 (1970년대 중반~현재)

1974년 11월 약 12년만에 민주적인 총선거가 다시 열렸고 월본은 민주주의를 회복하게 된다. 또한 군사정권이 물러난 후 들어선 과도 민주 정부는 군사정권에서 이루어진 각종 조치들과 인권 탄압적 정책들을 무효화하였다. 그 이후에는 정치의 안정과 함께 경제의 안정성장도 이어지게 되었고 현대 첨단 기술을 가진 기업들이 성장하여 월본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민주화 직후인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월본은 세계적인 경제 호황에 힘입어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까지 연 평균 3~7%대의 안정적인 경제 성장률을 보이며 경제적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그 결과 현재 월본은 엄연한 민주국가이자 경제대국으로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고 있다.



  1. 지금의 히도마부 지역
  2. '街茶담판'. 각각 하로성이 있는 남안가와 남해국 중부성이 있는 다마를 의미한다.
  3. 삼청내란에서 청양성과 삼주성은 서로 거리가 멀어 청양성의 군대 무리가 삼주성을 침공하기 위해서는 길목에 위치한 수개의 부성을 지나야한다. 삼주성과 동맹을 맺은 부성도 길목에 위치하여 본전까지 길고 험난했다.
  4. 여기에는 몇가지 설이 존재하는데 남해국 선구왕조의 중앙성이 교역을 통해 잘나가는 청양성을 견제하기 위해 삼주성과 결탁했고 이어 삼청내란에서 삼주성을 지원하다가 대패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5. 사로신정, 새로운 정치체계로 하여 통치함.
  6. 지금의 청하부
  7. 전월본제국이 근대식 군대로 전쟁을 치른 첫 전투이다.
  8. 현재의 남양군도
  9. 전월본제국령 중화민국 지역
  10. 다만 태국은 월본제국의 동맹국이자 사실상의 속국화가 진행되긴 했으나 엄연한 당시 동남아 유일 독립국가였다.
  11. 당시 국황은 1974년 새로 즉위한 헤이모리 국황이였으며, 헤이모리 국황은 아버지와 다르게 군부에게 휘둘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군부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헤이모리 국황은 시위가 일어나자 즉시 시위대 지지를 선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