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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시대
"만약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했다면?"을 바탕으로 제작된 시즌제 대체역사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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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여당의 위기
"제발 열린우리당을 살려주십시오"

대통령 탄핵 소추로 정국이 뜨거웠던 지난 총선에서 과반을 흭득한 열린우리당은 압도적인 여대야소로 국정 안정을 노렸으나 당의 난맥상과 여당 심판 여론이 강해져 잇단 부진을 겪어야 했다. 또 참여정부가 추진하려던 신행정수도법이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내렸고, 국가보안법 폐지, 사립학교법 개정, 과거사 진상 규명, 조중동 독과점 타파를 담은 4대 개혁 입법 역시 여야의 충돌로 무산되면서 국정 동력에 타격을 입었다.

이에 대통령인 노무현은 2005년 7월 지역주의 타파와 중대선거구제 개편을 빌미로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제안했으나 국민 여론과 당 내에서의 반발로 실패하였고, 오히려 여당을 더욱 위기에 빠뜨리는 최악의 수가 되고 말았다. 여기에 호남을 기반으로 했던 새천년민주당이 정통성 강화와 세력 회복을 위해 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꾼 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의 설욕에 성공해 열린우리당의 몰락에 쐐기를 박았다.

결국 2007년 들어 일부 의원들이 집단 탈당함으로써 몰락이 현실화되었고, 김한길계는 2007년 5월 7일 중도개혁통합신당을 창당한데 이어 당의 중심축이던 김근태와 정동영을 중심으로 중도통합민주당 탈당파, 손학규 측 세력과 함께 대통합민주신당을 창당해 민주당계 진영의 이합집산을 겪는다. 갈수록 어려움에 빠진 열린우리당도 8월 20일 대통합민주신당과의 통합을 선언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향후 대선을 앞두고 후보 경선에 돌입하게 된다.

당선 직후 환호하는 이명박 당선인 내외

한나라당에서는 박근혜 전 대표최고위원, 이명박 전 서울시장, 그리고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가 유력 대권주자로 떠올랐으나, 이명박·박근혜의 치열한 경쟁이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특히 BBK 주가조작, 다스 실소유주 논란, 최태민과의 관계 등 양 후보 간의 의혹 검증이 내내 이어졌고, 후보 선호도 조사에서는 두 후보가 나란히 1·2위를 차지하기도 했으나 북한의 핵실험과 재보궐선거 참패로 인해 박근혜의 지지세가 빠지며 이명박의 우세가 확연히 나타났다.

민주당계에서는 고건 전 총리를 제외한 유력 후보로 정동영, 김근태, 이해찬 등이 거론되다가, 통합신당으로 재편된 이후 정동영, 이해찬, 손학규의 3강 구도로 굳어진다. 그런데 당시 이재명이 대표였던 정동영과 통하는 사람들(이하 정통)에서 노무현의 이름을 도용하고, 선거인단 명부를 박스채로 실어 나르다 적발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었으며, 범여권·진보 진영 단일화 시도 또한 실패로 끝났다. 민주당에서는 이인제가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지만 단일화 협상을 내팽겨치면서 분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민주노동당에서는 결선 투표 끝에 NL의 지지를 받은 권영길이 선출되었지만 일심회 사건의 여파로 여전한 정파 간 대립을 보여주었으며, 창조한국당의 문국현, 정계 은퇴 번복과 함께 대선 출마를 선언한 이회창, 경제공화당의 허경영 등 각 군소 후보들이 출마를 선언했다. 이 중 경제 공약을 내건 이명박은 친서민적 행보를 보이면서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었지만 야권 후보들은 이명박의 BBK 주가조작 의혹을 제기함으로써 사실상 "이명박 vs 반이명박" 구도로 굳어지게 된다.

선거 결과 이명박은 48.67%로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으며, 정동영은 26.14%로 22.53%p 차로 패배했다. 또 민주당계 진영으로서는 최저 득표율을 받은 후보가 되었으며, 지난 15·16대 대선에서 3~40%를 얻었던 이회창은 15%로 아쉬운 성적을 냈지만 선거비용 전액을 보전받는 데 그쳤다.

공천권을 쥐다
서청원 전 대표의 미래한국당 입당 기자회견

대선 이후 주류 세력이 된 친이 세력은 총선을 앞두고 공천심사위원회를 통한 공천권을 잡았는데, 이 때 탈락한 친박계 후보들이 대부분 중진 의원들이었고 이들에게는 소위 "공천 학살"에 가까웠던지라 당연히 큰 반발을 불러온다. 결국 이들은 한나라당을 집단 탈당한 후 군소정당이던 미래한국당에 입당, 명칭을 친박연대로 바꾸며 독자 노선에 나선다. 정작 계파의 수장이던 박근혜는 공천 심사에서 합격하고도 친박 후보들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받고 충격에 휩싸였으며, 기자회견을 마친 후 탈당한 친박 의원들에게 "살아서 돌아오라"는 말을 남겼다.

야당인 통합민주당에서도 박재승을 위원장으로 하는 공천관리위원회가 공천 원칙(전과 기록이 한 차례 있는 후보들은 공천에서 배제시킨다)을 이용하여 예비 후보자들을 대대적으로 물갈이해 이른바 "공천 특검"이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심각한 공천 문제를 피할 수 없었다. 허나 다행인 것은 공천 결과에 불복한 몇몇 의원들만 탈당했을 뿐, 분당까지는 가지 않았던 터라, 한나라당보다는 그리 심각한 편이 아니었다.

민주노동당 분당
서울패션아트홀에서 열린 진보신당 창당대회

지난 총선에서 10석을 얻어 진보정당 최초로 원내 진입에 성공한 민주노동당은 2005년 군자산의 약속을 계기로 난입한 NL 세력으로 인해 위기가 감지되기 시작한다. 이후 2006년 10월 24일, 북한의 지령을 받은 재미동포 사업가를 중심으로 국가 기밀과 당 내부 당직자 정보를 누설하다 적발된 사건(일심회 사건)이 터지면서 정파 갈등이 심각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열린우리당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 또한 아쉬운 성적을 낸다.

제17대 대통령 선거 경선 당시에는 독자 후보보다는 정파 색이 옅었던 범 PD 계열의 권영길을 밀어주어 당선을 이끌어냈는데, 정작 그가 대선 후보가 되었을 때는 국민적 관심사인 경제 문제를 뒷전으로 미루면서 자신들의 구호인 코리아연방을 내건 탓에 3%의 득표율만 얻고 패배하고 만다. 여담으로 이들의 성향과 가까운 '코리아연방'은 훗날 18대 대선 당시 이정희 후보의 모토로 쓰이기도 했다. 어찌됐든 권영길의 참패로 민주노동당은 전운이 고조되고 있다.

결국 2008년 2월 심상정의 혁신위원회 체제에서 낸 혁신안이 부결되자, 심상정, 노회찬 등 PD 세력이 탈당하여 진보신당을 차렸고 민주노동당은 이제 NL만 남으면서 17대 총선 시절의 위상이 추락하다 못해 진보정당이 두 개로 쪼개지는 대참사로 이어진다. 이로 인해 민주노동당은 혁신과 재창당의 뜻으로 사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고, 진보신당은 촛불집회 이후 인터넷에서 존재감을 알림으로써 두 자릿수 득표율와 비례대표 당선을 위해 확장을 시도하는 등 양당의 행보가 엇갈리고 있는 상태이다.

다시 선진당으로
자민련의 후신으로 불리는 자유선진당의 등장으로
충청권 보수정당의 재기를 노리고 있다.

15대 총선 이래로 충청도 보수 진영을 이끈 자유민주연합은 DJP연합의 균열과 연달은 선거 참패, 그리고 탄핵 역풍으로 인한 몰락을 겪으면서 위기에 휩싸였고, 급기야 당의 수장인 김종필이 정계 은퇴로 탈당하여 사실상 당의 구심점을 잃어버린 채 향후 입지 확보가 시급해졌다. 이 때 자민련의 부총재이자 충청남도지사였던 심대평이 신당 창당을 위해 탈당하면서 국민중심당을 출범하였고, 이를 계기로 충청권 보수정당의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자민련은 국민중심당과의 합당을 제안했지만 합의조차 이루지 못해 2006년 3월 10일 한나라당에 흡수되었으며, 남은 3명은 국민중심당으로 이동해 명맥을 유지하였으나 17대 대선을 앞두고 정계 복귀를 선언한 이회창의 주도로 2008년 2월 4일 자유선진당을 창당하면서 양당 간 흡수 합당이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자유선진당은 충청권 보수정당의 재기를 위해 총선을 앞두고 본격적인 선거전에 돌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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