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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코싱가




코싱가 전경

코싱가 왕국(중국어: 國姓爺王國, 영어: Kingdom of Koxinga) 혹은 동녕 왕국(중국어: 東寧王國, 영어: Kingdom of Tungtu)은 동남아시아 보르네오 섬 북부에 위치한 국가이다. 브루나이, 인도네시아와 직접적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남중국해의 해상 국경으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베트남, 필리핀 등과 접해 있다. 수도는 청톈(承天)이며, 최대 도시는 메이리(美里)이다.

반청복명의 기치를 내세운 정성공타이완 섬정씨왕국을 세우나 삼번의 난 이후로 청나라와의 대립 끝에 몰락하자, 당시 실권자였던 정극상풍석범의 주도로 필리핀 제도를 거쳐 보르네오 북부 해안 지대였던 청톈의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한 것이 코싱가 왕국의 시작이었다. 이후 네덜란드, 스페인, 영국 등의 구미 열강과의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서구화를 이룩했으며 루샨 전쟁으로 브루나이 제국술루 술탄국으로부터 영토를 할양받아 지금의 국토를 완성했다. 1941년에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의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해상 충돌이 벌어졌으며, 일시적으로 주권을 상실해야만 했다. 1945년 연합국의 도움을 받아 해방된 후에는 동남아시아에서 독보적인 경제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

코싱가는 민주주의에 입각하여 총리직선제를 채택한 입헌군주국이다. 현재 군주는 정밍위(鄭明瑜)이며 총리는 천웨이원(陳偉文)이다. 전제군주정군부 독재의 잔재가 남아있어 성문법상 군주의 적극적인 정치 개입을 지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현재는 이를 희석하기 위해 법 개정에 나서고 있다. 또한 민족과 문화가 혼합되어있는 다양성을 바탕으로 민족 자치,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풍부한 천연자원과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근대화를 통해 영미식 자본주의 체제를 습득하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과 함께 유수의 기업들을 설립해 나가면서 빠른 속도의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특히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플라자 합의의 영향과 맞물려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면서 연 평균 경제 성장률을 10% 이상씩 유지시켜나가기도 했다. 또한 풍부한 천연자원에도 불구하고 이에 의존해 나가지 하기 위해 기존의 MICE 산업[1], 금융업에 투자를 거듭해 오고 있으며, 최근에는 브룩, 쿠칭, 마르게리타, 키나발루와 같은 IT 산업 및 제조업을 위시한 기업들이 세계적인 시장 진출에 나서고 있다.

국가 상징

국호

코싱가(Koxinga)의 국명은 반청복명 운동을 이끈 정성공에게서 유래되었다. 당시 남명의 황제였던 융무제는 정성공을 부마로 삼으려 했지만 자식이 없었기에 대신 주씨(朱氏)를 사성하였고, 정성공에겐 '국성야'(國姓爺)라는 별명이 붙여지게 되었다. 그 뒤 보르네오 섬에 정착한 정씨 왕국의 후예들을 네덜란드령 동인도, 필리핀 도독령 등지에서 '코싱가 왕조'로 부름에 따라 국명으로 굳혀지게 되었다.

그외에 한자 문화권과 국내 일부에서는 둥닝(Tang-lêng, 東寧)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대만 정씨 정권 당시 사용되었던 국호 혹은 지명에서 유래되었다. 또한 정씨 왕실은 대내외적으로 '연평왕'(延平王)[2]을 자칭함으로서 중국 대륙에 대한 권토중래를 노림에 따라 공공연히 중국 대륙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현지 말레이 방언으로 서부 지방은 사라왁(Sarawak) 혹은 부미 크냘랑(Bumi Kenyalang, 코뿔소의 땅), 동부 지방은 사바(Sabah), 느그리 디 바와흐 바유(Negeri Di Bawah Bayu, 바람 아래의 땅)로 불린다. 그중에서 뤄창은 19세기부터 제셀턴(Jesselton)으로 불리며 다수의 귀화한 영국계 이주민들이 거주했으며,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국기

황매화청기
Golden Chinese plum and Blue Flag
파일:Flag of Koxinga.png
표준 중국어 黃梅花青旗
민남어 Hông-mûi-hoa-chheng-kî

코싱가의 국기는 '황매화청기'(黃梅花青旗)로 불리며 1873년에 창안되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가운데 금색 매화는 왕실을, 푸른색 바탕은 국가·국민·평화 등을 의미한다. 일본 제국으로부터의 해방 직후 코싱가 의회에서는 헌법에 황매화청기에 대한 조항을 서술하여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1946년 3월 26일 임시 내각의 법안 처리에서 「국기에 대한 규정」이 발표됨에 따라 크기, 길이, 비율, 제작, 사용에 대한 방침이 조직되었다.

국장

황매화문 | 黃梅花紋
Coat of arms of Koxinga and Zheng Clan of Tungning

코싱가의 국장은 코싱가 왕실의 가문인 동녕 정씨(東寧鄭氏)를 상징하는 종문(宗紋)으로 매화(梅花)를 도안화한 문장이다. 개항 이후 일본의 국화문, 중화민국의 청천백일(青天白日)과 같이 근대 사회에 도래 이후 쓰여지기 시작했으며, 1859년의 공식 지정되었다. 프랑스의 백합이나 일본의 국화처럼 원래는 왕실의 문양에서 국장으로 확대된 케이스다. 공문서나 궁궐 건물들은 물론이고, 내/외부 장식, 가구, 심지어 가정용품에도 황매화문이 그려진 문화재나 건물이 많다. 또한 근대 주권국가의 상징으로서 군대에서는 개인화기 가늠쇠 밑에 국장이나 왕실 문장을 넣는 것이 유행이었기에, 당시 수입된 화기엔 황매화문이 새겨진 경우가 잦았다.

국가

코싱가의 국가개화유수(開花流水, 피어오른 꽃과 흐르는 물)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를 참조. 이외에 승수구(承受幬, 계승해온 휘장)라는 왕실가도 있다. 군부 내각 시절에는 국가를 오전 7시, 오후 6시에 하루 두 번 거리에서 들려주었으며 승수구는 국영 방송국에서 주기적으로 방송하여 국민 전체에게 보급하는데 신경을 썼다. 현재는 국가 행사 혹은 특정 방송에서 주로 송출되며, 과거에는 왕실가를 기립 상태로 제창해야만 했으며, 이를 어기는 것이 발견되었을 때 불경죄로 체포되는 일이 빈번했다.

개화유수부다페스트 음악원을 다녀 에르뇌 도흐나니의 제자로서 활동했던 객원지휘자 웨이궈팅(魏國庭)이 해방 이후 1946년 8월 13일에 작곡하였다. 승수구는 1886년에 고체시(古體詩)였던 성은일월무(聖恩日月侔, 임금의 은혜는 해와 달과 같다.)에 러시아 제국 출신 작곡가였던 표트르 슈로프스키(Pyotr Schurovsky)[3]가 가사와 선율을 더해 만들어졌다.

연호

承和 (ㄔㄥㄏㄜ)

청허
貞明 (ㄗㄏㄣ ㄇㄧㄥ)
2019. 3. 19. ~ 현재
서기 2024년 외 가공 기년법
코싱가 전밍(貞明) 6년
유력
대한제국 청천(淸天) 32년

코싱가의 연호는 1680년대 말에 태종 조성왕(太宗 潮盛王)이 난톈(南天)이라는 연호를 처음 반포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일본과 같이 군주의 사망과 동시에 새 연호를 즉시 반포하는 즉위년칭원법과 유사한 방식으로 선왕 사후 그 달의 새 연호를 발표하는 훙월칭원법(薨年稱元法)을 채택하고 있다. 일본이 중앙집권화를 달성한 후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를 확립한 것과는 달리, 명의 연호 체계를 그대로 도입한 코싱가는 첫 연호를 반포하면서부터 군주의 재위 중 단 하나의 연호만을 사용토록 조치했다. 현재 연호는 서력기원과 병용하여 정부기관 및 지자체의 공문서 또는 운전면허증ㆍ보험증과 같은 신분증, 달력과 신문 등의 일상생활에서 보편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과거에는 왕실을 개창한 정성공타이완 섬 일대에 왕조를 선포한 1661년을 원년으로 삼는 '개국기원'(開國紀元)을 당대 연호와 함께 사용하기도 했다. 현재는 행정부의 연호 조례수칙에 따라 공식석상에서 사용되고 있진 않지만, 20세기부터 무기의 제식 채용 연도를 개국기원으로 환산한 연도로 붙이는 전례로 인해 지금까지도 해당 작명 방식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역사

북보르네오 및 코싱가의 역사
婆羅洲國姓爺史
브루나이 제국(Bruneian Empire)
15세기–1599, 1641-1684
사라왁 술탄국 1599 – 1641
코싱가 왕조(國姓爺王朝)
1684-1878
술루 술탄국(Sultanate of Sulu)
1658-1878
근대 코싱가(近代 爺王朝)
1878-1941
텐자오 시대 1864 ~ 1901 / 싱지 시대 1901 ~ 1935 / 융우 시대 1935 ~ 1941
일본제국의 지배(日本帝國 植民地)
1941-1945
코싱가 왕국(爺王朝 王國)
1945 - 현재
젠핑 시대 1945 ~ 1991 / 청허 시대 1991 ~ 2019 / 전밍 시대 2019 ~ 현재

정씨 왕조의 정착 이전

서부 지방에는 약 4만년 전부터 인류가 살아왔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토착민들은 사냥, 낚시, 연체동물과 식용 식물 채집을 통해 열대우림에서 살아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청톈 인근에 위치한 위안먼(元門)에서 발견된 당나라송나라 추정되는 도자기들이 출토되면서 고중세부터 이 곳이 항구 도시로서의 기능을 시사해왔음을 알 수 있다. 허나 원나라 이후로 쇠퇴하고 명나라 때에는 완전히 그 기능을 상실하면서 몰락하였다.

동부 지방에는 약 2만년 ~ 3만년 전 사이에 아시아 본토에서 인류가 정착했다고 추정한다. 이들 민족이 오스트랄네이드 혹은 네그리토족이었다고 하나, 이들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다. 기원전 5천년 전에는 몽골로이드로 파악된 인류가 새로이 정착하였으며 일부 인류학자들은 이들이 중국 남부 지방 혹은 북베트남에서 유래되었다 주장하고 있다. 1410년에는 서부 지방 끝자락에 위치한 차오청 강(朝城江) 인근에 옹섬핑(黃森屏)[4]을 위시한 한족 집단이 정착했으며 한자 문화권과 유사한 문화 및 행사를 치룬 흔적과 유물들이 남아있다.

15세기로 접어들면서 브루나이 제국은 거듭된 전성기 속에 동부 지방과 서부 지방을 망라하는 북보르네오는 물론 보르네오 섬 전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후 9대 술탄 무함마드 하산이 1598년에 죽고 그의 장남 압둘 자리룰 아크바르가 왕위를 잇자, 아브라함 알리 오마르 역시 정당한 후계자임을 주장하면서 1,000여명의 추종자를 이끌고 사라왁 술탄국을 세워 독립하였다. 그는 지금의 청톈에 궁전을 짓고 행정 체제를 정비하는 등 행보를 보였으나 1641년에 휘하 세력에게 암살되면서 서부 지방은 다시 브루나이로 통합되어야 했다.

코싱가 왕조의 형성과 발전

청나라에 맞서 명나라를 부흥코자 했던 정성공은 한때는 옛 수도였던 난징까지 진출했으나 끝내 청군에 패배하고 금문도까지 밀려났다. 이에 타이완 섬 서남부에 근거지를 마련한 그는 정씨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후 3대를 거치면서 삼번의 난에 적극 동조하는 등 지속적인 반청 정책을 펼쳤지만, 유국헌이 이끌던 정씨 정권 병력이 시랑에게 대패하면서 정벌될 위기에 처했다. 정극상, 풍석범, 정득소[5] 황량기[6] 등의 주요 권력자들은 처음에는 루손 섬으로 이주하려 했으나 필리핀 제도는 스페인의 식민지였으며 정성공 시절에 도발적인 국서를 보내 관계가 악화되었기에 그동안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보르네오 섬에 정착이 고려되었다.

그동안 북보르네오는 사라왁 술탄국 이후 보르네오 제국의 영유권으로 편입되었지만 중앙집권체제에 속하지 않는 느슨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원주민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사실상 독립화된 지역이었으며, 내부에서도 부족간의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만에서 출발한 수백 척에 이르는 정크선과 약 3만 명에 이르는 군인, 선원, 주민들은 새로운 정착지를 향해 나아갔고, 이들은 1684년에 사라왁 술탄국의 근거지로 활용했던 청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새로운 땅에 들어선 한족 정권은 화포와 화승총으로 무장해서 원주민들을 몰아냈다. 그 중에서 진영화(陳永華)의 둘째 아들이었던 진몽구(陳夢球)는 아버지처럼 한인 사회의 기강을 다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이를 위해 정극상의 장인임을 이용해 젠궈(監國, 감국)에 올라 무질서한 통치를 하려던 풍석범을 이주 선단에서 암살하고 정권을 차지했다. 진몽구는 불안정한 대외관계 개선을 위해 네덜란드령 포르모사 시기에 시행되었던 복사(五商, ť Verpachten van Dorpen)를 도입하여 기존 원주민과의 교역 관계를 정비했으며, 당시 필리핀 총독 가브리엘 데 쿠루제알레기 이 아리올라에게 서한을 보내 과거에 있었던 외교적 결례를 사과하고 무역을 재개했다.[7] 1687년에는 해오상(海五商)[8]옌핑상관(延平商館)을 설치하여 적극적인 무역 활동을 시도했으며 시암은 물론 류큐, 에도 막부나가사키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특히 1684년, 천계령 해체 이후 중국 연안에서 밀무역을 통해 원단 자재를 수입했다. 소금의 경우에는 진영화가 단순한 전오염(煎熬鹽)을 개량해서 만든 염토 추출 방식과 함께 암염을 채취해서 조달했다.

유가 사상의 보급 및 정부 인재 확보를 위해 3년 단위로 주시(州試)를 실시하였고, 기존 원주민들의 한화를 위해 관립 유학당에 입학한 이들에겐 군역을 면제하는 혜택을 주었다. 한편 치안 통제를 위해 보갑제(保甲制)를 도입하고 주민들의 정보를 조사하여 조세 및 인구 통계에 활용했으며 도박 역시 금지했다. 진몽구는 또 정씨 일가를 모시는 종묘사직을 세움으로서 형식상으로 남은 명나라 천자와의 군신 관계에서 벗어나 독립하였다.[9] 이 과정에서 진씨 가문이 사실상 군주를 대신해 정권을 운영하는 실권직을 독점하면서 이른바 젠궈 정권이 성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반들을 토대로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문화적·사회적 성황이 지속되었으며 인구도 1800년대에 약 4백만 명에 가까울 정도로 증가했다. 경제도 융성해지면서 주요 무역항이었던 안푸항(安撫港)에 들어올 수 있는 외국 선박 수와 무역액 또한 크게 증대했고, 구미 열강에서 수입된 상품들이 대거 유입됨과 함께 근대화의 기초를 다져나갔다. 이 시기에 상업성 목적을 띈 기업들이 출현하였는데 주로 광업 및 무역업 위주였으며, 이들 기업들이 금광 및 주석광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일자리를 구하고자 한 중국 본토 내 화교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근대화와 제국주의 침략 극복

동남아시아에 대한 서구 열강들의 관심이 증폭된 가운데 스코틀랜드 출신의 외교관, 존 크로퍼드(John Crawfurd)는 인도에서 코친차이나 일대로 가 시암, 라오스 등에서 영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코싱가 역시 예외가 아니었기에 청톈으로 정씨 왕가를 알현하게 된 그는 1825년에 영녕수호조약(英寧修好條約)을 체결함으로서 근대 세계 교류에 첫발을 내딛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코싱가는 네덜란드, 프랑스, 스페인, 미국 등과 불평등 조약 관계를 정립했다. 특히 미국의 특사로 파견된 에드먼드 로버츠(Edmund Roberts)의 방문 이후 서양 인쇄술과 의학, 과학을 망라하는 지식들의 유입이 급격한 속도로 개방되었다. 당시 실권자로서 주장신구이(舊章新規, 구장신규)를 지향하던 천뤄스(陳篛實)[10]는 기존 정권 체제의 균열을 줄 것이라 염려해 적극적인 서구식 근대화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허나 서구화를 지향하던 지식인들은 외국과의 자유 무역과 이를 통한 부국강병을 촉구했으며, 그동안 군주를 대신해 실권을 장악했던 진씨 가문의 실각을 요구했다. 이에 왕권강화를 노리던 왕실은 신흥 자본가들과 결탁하였다. 경제적 후원 세력의 지원을 받기 시작한 왕실은 왕실 일가의 서구 교육을 위해 영국 등으로 유학을 보냈으며, 이들이 곧 초기 내각의 요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노예제 또한 철폐되었으며 군제 개혁이 진행되면서 옌핑 왕립무관학교(延平王立武官學校)가 설립되고 서양 출신 교관단의 도움하에 코싱가 친위대가 창설되어 근대식 군대를 양성하게 되었다. 신흥 자본가들은 왕실 소유의 광산에 대한 독점 개발권을 차지하고 해방 노예 출신의 값싼 노동자들을 고용하였다. 이에 왕실-자본가 주도의 산업 육성이 시작되어, 서양식 공업 기술이 도입되었으며, 금융 제도에서도 통화 단위를 코싱가 달러로 채택하고 화폐 발행 및 통화량을 조절하는 중앙은행동방흥업은행(東方興業銀行)이 1847년에 설립되면서 본격적인 자본주의 사회의 도래를 맞이했다.

이런 진씨 가문과 왕실-자본가의 알력 다툼 끝에 천뤄스 스스로 권력을 포기함으로서[11] 그동안 코싱가 사회를 통치하던 젠궈 정권이 무너지고 시민 계급이 주도하는 중앙 집권 개혁이 시작되었다. 젠궈별정도감(別定都監)은 폐지되었으며 육부(六部)를 중심으로 한 중앙행정조직으로 개편되었다. 재정 관리도 호부에서 단일하게 처리토록 했으며, 주시과거제를 대체하는 고등국시(高等國試)가 실시되었다. 1859년에는 왕실의 권위와 근대화의 자주 주도권을 쟁취했다는 의미에서 신고전주의 양식을 채택하여 만든 왕궁인 바이칸뎬(白崁殿, 백감전)이 건립되었다.

숙종 천소왕이 즉위한 톈자오 시대(天昭時代, 1864 ~ 1901)부터는 본격적인 전신·철도·각종 공장 등의 관공 사업이 진전을 이루었다. 수도인 청톈에 대한 개조 사업이 진행되면서 방사형 도로가 구성되고 간선도로를 연결하였으며 오수를 처리할 배수시설과 수도가 정비되었다. 난개발로 진행된 무허가 가옥들도 도로 폭 정비와 함께 철거되었다. 선진 제도 확보에 있어서는 외국인 초빙사(外國人招聘師)들이 주요 분야에 고용되어 근대 국가 건설에 이바지했다. 1870년대 말에는 코싱가 자본가와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이 출자하여 설립된 합작기업, 톈페이(天妃)를 통해 주요 대로에 전기 가로등이 설치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는 청톈에서 청궁까지 시외 전화가 개통되면서 수백 회선에 전화들이 개설되었으며, 노면전차의 운행도 활발해졌다. 지조(地租) 개정, 징병령, 그레고리력 채용, 사법 제도 확립, 단발령 등의 다발적인 체제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민중들도 양성된 개화 문명의 분위기에 심취하였으며 아시아에서 태국, 일본과 함께 성공적인 근대 국가를 빠른 시일내에 성립시킬 수 있었다.

한편 부강해진 국력과 제국주의에 동조하는 사회 양상의 흐름은 그동안 코싱가를 주권국으로 인정하지 않던 브루나이 제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데도 일조했다. 1846년 캉룽 조약(康隴條約)을 체결하면서 브루나이는 사라왁으로 부르며 주권이 미치는 곳으로서 여기던 코싱가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정씨 왕조의 자손들이 영구히 통치할 것임을 인정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 비한족계 민족들은 분노하여 교역소 내 한족 상인들을 공격했고, 코싱가는 이를 구실로 술루 술탄국브루나이 제국을 침략함으로서 루샨 전쟁(樓扇戰爭, 1877~1878)이 발발했다. 이 전쟁으로 코싱가는 사바, 즉 지금의 동부 지방을 차지하면서 지금의 국토를 만들 수 있었다. 종전 이후 브루나이는 1888년부터 1984년까지 영국의 보호령으로 전락했으며, 1898년에는 술루 술탄국미국령 필리핀에 합병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안정화된 국내외 정세와 사회 속에서 1890년대와 1900년대 초, 즉 톈자오 시대가 저물고 싱지 시대(興治時代, 1901~1935)가 시작되는 시기에 독일제국 내 공법학설의 영향을 받은 위카이랑(余開朗), 친라오(秦撈) 등의 법학자들은 갓 성장한 시민계급과 군주의 권위 사이에 주권이 있다고 본 국가법인설(國家法人說, Juristische Staatsperson)을 주장했다. 이 정치적 타협의 산물은 곧장 법률 개혁으로 이어져 최초의 근대 성문법인 옌핑대법(延平大法)이 공포될 수 있었다. 본격적인 군제 혁신도 이어졌다. 1880년대 말에 국민개병제를 실시했고 프로이센의 영향을 받은 사단 편제가 구성되었다. 해군 양성에도 힘을 쓰면서 수사총제영(水師總制營)과 둥닝함대(東寧艦隊)가 창설되었는데, 특히 둥닝함대는 청나라북양함대를 포함하여 아시아 국가 중에서 유이하게 전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운용하는 성과를 거두면서 남중국해 내에서 강력한 해군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코싱가는 중립국 지위를 유지하면서 유럽 국가들로부터 전략 물자를 수출하면서 호황을 누렸다. 직접적으로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는 전역에 위치하지는 않았으나, 1917년 4월에 미국독일제국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계기로 참전하고 그 해 7월에는 시암까지 참전을 선언하자 국제사회에서 코싱가의 주권을 확립하고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는 등의 국익을 위해 협상국에 협조하였다. 10월 21일에 루이런(魯逸仁) 참장이 지휘하는 약 2,000명의 자원 원정대가 프랑스로 보내져 군사 교육을 받은 후 및 물자 운송, 전선 공세 등의 활약을 펼쳤다. 종전 이후 코싱가는 승전국으로서 파리 강화회담에도 참여했고, 이로인해 국제 연맹의 창립국 중 하나가 되었으며 19세기 초반 서구 열강들에 의해 유지되던 치외법권, 협정관세제도를 혁파하여 자주 국권을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 말까지 이어지는 전간기 코싱가 사회는 일본 제국, 영국 등의 입헌군주제 국가들의 정치 체제를 본받아 의원내각제를 실시할 것을 요구하는 민주주의 운동이 거세게 탄력을 받았다. 그동안 정계의 중심은 왕실 구성원과 19세기 서구화에 협조했던 일부 재벌이었는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재력과 학식을 갖춘 유력 지식인·군인들이 등장, 참정권 요구가 지속되었고, 이들은 지방 사회에까지 연설과 정치 집회를 개최하여 근대 시민 의식을 고양시켰다. 당시 군주였던 경종 흥치왕은 이러한 정치 운동이 중앙집권적 통치를 위협하고 왕권에 도전한다고 여겨 1922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주동자들을 투옥시키기도 했다.

한편 전쟁특수로 인한 활황이 꺼진 후 과열 투자와 물가 폭등, 주가 하락, 예금 인출 등의 혼란이 발생했다. 호부대신 한후이(韓輝)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특별어음을 발행하였는데, 이 수혜가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일부 재벌들에게 혜택이 돌아간다는 루머가 퍼지고 동방흥업은행이 일부 지방 은행에 대한 자금지원을 거부하면서 경제 위기는 가속화되었다. 또 왕실의 내탕금이 사치 향락과 친왕실 인물을 위한 뇌물 및 사교회 운영을 위해 쓰인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중산층의 지지를 잃었으며, 유학생들은 귀국 후 집권층의 무관심한 대우와 상대적으로 낙후화된 사회 체계에서는 기회를 가질 수 없단 생각에 환멸을 느꼈다.

이러한 긴장감이 감도는 상황에서 1929년, 대공황을 기점으로 국외로의 수출 산업이 타격을 받았다. 당시 정부 세입도 전체 규모의 1/10 이상이 적자를 보는 상태였기에 경종은 재정 재건을 위해 공무원들과 장교들의 급료를 일시 동결하고 소득세와 재산세의 추가적인 부과를 제안했다. 이에 육군 원수이자 숙종의 동생이었던 정쉐션(鄭雪瀋)을 필두로 군부 원로들이 반발했지만 별다른 타개책이 없었기에 지체없이 추진되었다. 하지만 경제 위기속에서 팍팍한 살림에 세금 인상을 계기로 민중들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1930년, 경오항쟁(庚午抗爭)이 발생했다. 이 운동을 주도한 스웨이텅(石瑋騰)은 입헌인민당(立憲人民黨)을 결성하고 파화일보(法華日報)를 발행하여 무능한 집권층에 대해 비판을 내쏟았고, 하급 장교와 공무원들까지 가세하였다. 결국 그 해 6월, 경종이 흠정헌법을 포기하고 스웨이텅의 개혁안을 받아들이면서 19세기 중반에 시작된 절대군주제가 종식하고 입헌군주제가 실시되었다.

1931년 4월 24일에 의원내각제 실시가 공표되었으며, 육부를 중심으로 한 통치 체계가 폐지되고 보통선거[12]에 의거하여 스웨이텅을 총리로 한 첫 내각이 성립되었다. 그는 메이지 헌법·바이마르 헌법의 영향을 받은 옌핑대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군주권을 제한하고 민주주의기본권의 보장, 내각 조직 규정 등을 서술했다. 허나 이러한 정치적 자유기조의 발현으로 노동 쟁의, 코싱가 공산당의 창당 등 사회주의 세력이 득세하자 스웨이텅은 이들을 반국가세력, 체제 위협 분자로 규정하고는 탄압하였으며, 건강보호법, 친정부 노동조합 결성 인정 등의 사회 안정 보장책을 부분 수용하면서 노동자들의 결집을 와해시켰다. 또한 대공황 극복을 위해 금본위제를 폐지하고 모라토리엄을 선언했고, 수입 쿼터와 같은 보호무역 정책을 채택했다. 또 정부의 경제 개입을 강화해 수출 규제와 교역을 국영 중앙은행인 동방흥업은행이 독점토록 조치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세계 각국에서 배타적 민족주의, 전체주의가 힘을 얻고 정치적 극단주의가 득세하자 군부에서는 제국주의 침략을 대비해 군비 지출 증대 및 군사력 강화를 줄기차게 요구되었다. 이윽고 다자오잉(戴兆穎)과 장교 출신 인사들이 창당한 사회유신회(社會維新會)가 대중 운동을 주도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이들은 스웨이텅 내각의 핵심 요인으로서 군비 확장에 반대하던 셰창린(謝昌霖)을 암살하는 등의 백색테러를 일삼았고 정부에 의해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전국적 구명 운동으로 석방됨으로서 그 영향력은 더욱 확대되었다. 1935년,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예종 영무왕이 즉위함으로서 융우 시대(永武時代, 1935 ~ 1941)가 시작된 직후에는 사회 각계 각층을 총망라하여 강력한 대중조직을 건설함으로서 효과적인 정책 추진을 이루어내자는 사회유신회의 정계통일안에 대다수의 국민들이 지지하였고, 입헌인민당 내부에서도 사회유신회와 통합하자는 이들이 대두되면서 끝내 동방총동맹(東方總同盟)이 결성되었다.

동방총동맹의 당수로서 추대된 다자오잉일본 제국, 나치 독일의 팽창주의적 정책을 본받으려고 했으며, 한족 중심주의를 추진해 말레이인, 토착 소수민족들의 문화를 금지, 개종 및 서구화를 강요했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구금하거나 처벌하는 등 박해를 가했다. 이 시기에 약 9만 명에 달하는 상시 병력을 유지시켰고 10여 척 이상의 구축함, 순양함을 건조 및 진수하였으며 청궁급 항공모함을 운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고 유전지대를 확보하기 위한 일본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ABCD 포위망과 미국의 대일 석유수출 금지를 계기로 진주만 기습과 함께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은 1941년 12월 16일, 만성적으로 부족한 천연자원 및 원유 지대 확보를 위해 보르네오 전역으로 출전하였다. 코싱가 왕립해군의 총 함대 사령관이었던 차이카이시(蔡愷禧)가 맞서면서 남중국해 해전이 발발했으나 부족한 실전경험, 미숙한 전술/전략의 운용에 따른 격차로 대패함으로서 코싱가 영해는 사실상 일본군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왕실과 내각 핵심 인원들은 연합군의 도움을 받아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 망명 정부를 세웠다. 한편 일본 제국은 와조 전술(蛙跳戰術)을 활용해 코싱가의 주요 거점만을 선점하여 타 지역을 압박하는 계획을 펼쳤다. 이에 본토에 남아있던 중견 장교들은 국내 기술자들과 함께 린저우(林州), 선샨(深山) 등에 위치한 유정 및 정유 시설들을 파괴함으로서 일본군의 자원 활용을 원천 봉쇄했다.

1942년 3월에야 코싱가 국군의 산발적인 항전을 물리친 일본군은 코싱가 군정청을 설치했다. 이후 본국의 자급자족 정책을 따라 착취를 시작했고, 많은 한족들을 강제징집하고 노역을 시키거나 일본군으로 징병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독립 투사들은 망명 정부에 협조하여 연합군에게 보르네오 섬 일대에 대한 일본군의 정보를 지속적으로 전달하거나 직접 무장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1945년,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고 필리핀을 점령한 연합국은 보르네오 일대의 탈환을 노리고 있었다. 조지 우튼(George Wootten) 중장이 지휘하던 약 3만 명에 연합군은 페이민다오(飛閩島)에 상륙한 후 청톈을 점령하기 위해 6월 20일에는 메이리에서부터 남서 해안으로 진격했다. 이러한 소탕 과정은 8월 15일에 일본 제국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마무리되었으며, 코싱가는 해방될 수 있었다.

현대의 코싱가

해방과 군부내각의 독재

태평양 전쟁이 끝나기 직전 예종이 시드니의 망명 정부에서 급서하자, 그의 동생이었던 성종 건평왕이 즉위하면서 코싱가의 해방과 함께 젠핑 시대(建平時代, 1945 ~ 1991)가 시작되었다. 하급 장교 출신으로서 자유 코싱가 동맹(自由國姓爺同盟)을 결성해 레지스탕스 활동을 지도한 류하오샹(劉鎬想)이 국민적 지지를 바탕으로 임시 내각을 수립하였으며, 그 해 10월에 전범재판을 열어 일본군의 지배에 협조했던 이들을 처벌했다. 1946년, 제3회 코싱가 의회 선거에서 승리한 이후에는 본격적인 토지 개혁 정책을 펼쳤다. 류하오샹은 먼저 평균지권사상(平均地權思想)에 의거한 경자유지전책(耕者有其田策)을 실시해 지주들의 토지 소유량을 제한, 표준 지가에 해당하는 금액을 정부에서 구입해 확보한 공유지를 소작농에게 판매함으로서 중산층 자작농을 양성했다. 그 이후 교육제도를 정비하여 5년제 의무교육제도를 확립했다.[13] 한편 경제에 있어서 미국의 원조 자금을 유치하고 한국전쟁을 통한 공산품 수출에 따른 전쟁 특수로 공업이 재활성화하면서 점차 재건되었다.

1955년, 류하오샹이 지역순방을 목적으로 탑승한 경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로 서거함으로서 정계는 급격한 혼란을 맞이했다.[14] 후임 내각에서는 정부 물자의 횡령과 정치 뇌물이 빈번했으며, 각 정당들은 권력 다툼에 빠져 시민들의 지지를 잃었다. 한편 원주민말레이인을 중심으로 코싱가 공산당이 재건되고 무제한 파업과 가두 투쟁을 벌였다. 그 중에서 전간기 시절과 마찬가지로 우수한 능력을 갖추었던 군인들은 박봉과 낮은 대우, 인사적체로 인해 불만을 느꼈다. 이에 염증을 느낀 군부 장교들은 1959년, 바이칸뎬 건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이용해 기해군사정변(己亥軍事政變)을 일으켰고, 대다수의 왕족과 당시 내각 인사들을 유폐하고 실권을 장악했다. 성종은 위기를 느끼고 뤄창으로 도피했으나 군부의 최종통고[15]를 받고는 청톈으로 돌아와 쿠데타의 성공을 승인해야 했다.

쿠데타의 주동자였던 슝시옌(熊系炎)은 인민행동당(人民行動黨)을 창당하고 군사혁명위원회를 통한 간접선거로 총리직을 차지하였으며 군사 관료들로 이루어진 내각을 조직했다. 그는 곧장 옌핑대법을 개정하여 총리의 실권을 강화했으며 평시에 '비상조치'(非常措置, 계엄령)를 선언할 수 있도록 함으로서 정적, 야권 재야인사들을 무력화시켰다.[16] 그는 강력한 정권 운용력을 바탕으로 경제 개발을 추진했는데, 인도네시아 등과 함께 동남아시아의 강력한 친미 자본주의 우방을 자처하였다.[17] 그러면서도 미국 원조의 삭감과 국제수지적자의 지속으로 외화 수급 사정이 악화되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수출주도 공업화를 추진했다. 이에 해외자본의 직접투자를 약화시키고, 국내시장을 보호하고자 유지했던 환율 과대평가와 복수 환율제를 포기한 후 개방적인 경제 체계를 갖추기 위해 1962년, 환율 개혁 조치로 자국 화폐의 가치를 하락시켰다. 그는 낮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바탕으로 단체교섭 및 쟁의 행위를 비상조치 선언으로 금지하면서 외국 자본의 유인을 이끌었다.

건설업과 제조업의 성장률은 농림수산업을 크게 능가하면서 산업 전체의 성장을 견인하였고, 철강업, 조선업과 같이 이미 상당 수준에 올라선 기반산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후 서구로부터의 기술 도입 속도가 빨랐다. 중간재의 국내 조달 역시 빠른 시일 내에 달성하였으며 이로 인해 산업 연관성이 높은 고도의 기계·전기공업 대량생산체제가 필요한 자동차, 가전산업 등이 발전할 수 있었다. 정부에서도 수출장려 정책, 기술지도 정책 등을 발휘하여 경제 성장을 지탱하면서 고도 성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슝시옌은 경제 성장을 통한 정권 안정을 통해 철권 통치를 유지했다. 그는 반공주의를 재창하면서 코싱가 공산당을 해체시키는 것은 물론, 사회주의와 관련된 서적, 언론 등을 모조리 검열하였다. 브루나이인과 토착 원주민들 사이에서 주장되던 분리주의 운동에도 강경한 태도를 지녀 코싱가 전역에 강제 수용소를 세우고 정권을 위협하는 이들을 핍박하였다. 그의 통치기간인 1959년부터 1981년까지 약 3천 명에 달하는 이들이 사망하였으며, 약 7만 명에 달하는 인원은 행방불명 처리되거나 처벌되기도 했다. 미국은 코싱가를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화에 대한 견제도구로 유용하게 쓸수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슝시옌 내각에 대한 지원을 계속했다.

1973년에 시작된 오일 쇼크로 코싱가의 경제는 단기적으로 위기에 빠졌으나,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들이 대량생산되면서 막 회복된 국내시장과 수출시장에서 순조로이 판매되었고, 이로 인해 근로자의 소득이 확대되어 소비시장이 재확대 되었으며, 생산자들은 장래의 생산 확대를 노리고 설비투자를 확장하여 경기가 활성화되는 구조였다. 이는 곧 기존의 낮은 임금이라는 개발도상국의 장점에서 벗어나 코싱가 산업 시스템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정으로 수출경쟁력이 더욱 확대되었음은 물론, 산업·노동 생산성의 향상을 의미하기도 했다.

민주화와 청허 시대

1981년, 독재 체제를 유지하던 슝시옌이 타계하자, 군부 내에서는 그의 후계 자리를 두고 대립이 일궈졌다. 그 중에서 생전에 슝시옌의 측근으로서 가장 신임을 받던 궁무싱(鞏木行) 육군 참장은 여타 군부 인사들을 권력에서 배제시키는 한편, 민주화를 요구하던 지식인, 재야 정치인들과 타협하여 1982년 4월에 국민대회를 통한 간선제를 바탕으로 과도 내각(過渡內閣)을 수립했다. 그는 '비상조치'를 바탕으로 했던 공포 정치를 종식시켰으며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함으로서 사회 복지 체계를 확립했다. 경제면에서는 2차레에 걸친 오일쇼크 이후, 높아진 임금과 지속적인 환율의 평가절상 요구, 개방화의 요구로 코싱가의 기존 공업 체계가 수출 산업의 중심으로 남아있는 것이 어려워짐에따라 1980년대부터는 정부 주도로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정책들이 상정되었고, 1980년대 중반 무렵에는 기계기구, 반도체, 컴퓨터, 통신, 로봇공학, 생명공학 등이 새로운 전략산업들이 부상하였다. 이중 특히 성공한 것이 반도체였고, 이 결과 PC와 관련 기기들이 주요한 수출 산업으로 1980년대 이후 크게 부상했다.

한편 군부 인사들을 정계에서 퇴출시키고 문민통제민주주의 도입이라는 두가지의 과제를 해결하려던 궁무싱을 향한 내부 강경파들의 비난이 오갔고, 1985년에는 궁무싱 암살 미수 사건으로 이어졌다. 이는 국민적 반발로 이어졌고, 군부 내부에서도 문민 정권의 수립과 정치 개혁이 시대적 필연이라고 여긴 리신후이(李心慧) 소교를 필두로 한 하급 장교들의 조직, 계몽회(啓蒙會)가 보수파를 억누르고 도리어 그들을 회유하며 군의 정치 개입을 지양했다. 1986년 필리핀피플 파워 혁명(People Power Revolution)의 자극을 받은 민중들은 비폭력 투쟁을 벌였고, 성종을 위시한 왕실은 민주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미국 내에서는 레이건 독트린의 대대적인 수정과 함께 친미 성향의 독재 정권들이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이런 국내외적 상황에서 궁무싱은 야당의 합법화, 구색정당의 해체, 언론 자유화를 선언했고 마침내 1989년, 류하오샹 통치 이후 43년만에 실시된 제4회 코싱가 의회 선거에서 코싱가 민주당이 승리했다. 또한 총리직선제를 새로이 채택, 제1회 코싱가 총리 선거에서 옌메이룽(炎美隆)이 당선되면서 민간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 시기에 코싱가는 플라자 합의를 통한 엔고 현상에 힘입어 여타 신흥국들처럼 상대적인 가격 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함으로서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또 금융·무역업의 확장을 위해 낮은 법인세남중국해 중심지에 있다는 지리적 특성, 해외 자본 유치에 적극적인 국외 시장 정책이 맞물리면서 세계 굴지의 금융 기관들을 유인했다. 고부가가치 산업에 대한 관심도 급증하면서 전자제품, 의료기기, 의약품의 개발 및 수출이 급증했으며, 그동안 저임금을 통한 노동집약적 산업 체계로 더 이상 이득을 볼 수 없다는 점을 파악하고 노동조합의 결성이 인정,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등의 친노동자 정책도 동시에 이루어졌다.[18]

1991년, 해방과 독재 정권의 형성, 그리고 종식과 민주화를 모두 목격하고 코싱가를 지탱했던 성종이 승하하였다. 그 뒤를 이은 장남, 선종 승화왕이 즉위함으로서 청허 시대(承和時代, 1991~2019)가 시작되었다. 옌메이룽 정권은 본격적으로 군부 독재의 차단, 자유민주주의의 존속을 위해 옌핑대법을 개정함으로서 오늘날의 코싱가 헌법을 만들어냈다. 이후 간선제를 통해 독재 정권과 과도 내각을 지탱했던 군사혁명위원회국민대회 역시 해체되었다. 정부의 임명직이었던 지방직들도 지역 주민들의 선거를 통한 직선 선출직으로 바꿈으로서 지방자치제가 실현되었다. 1993년에는 잔재했던 군부 강경파들이 계유년 쿠데타 모의 사건으로 정국 개입을 완전히 포기해야했으며, 민주화된 코싱가 사회를 인정해야 했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맞닥뜨렸지만 대만과 함께 높은 금 보유고와 화교 자본이 갖춘 해외 자산의 처분으로 통화 가치를 지켜내고 외환보유액을 다변화로 구성하는 등 성공적으로 극복했다. 허나 그 해 측근들의 림방 스캔들로 청렴 정치의 시작이라는 이미지가 훼손되었고, 결국 정치 지도력 부재의 문제를 떠앉은 옌메이룽은 퇴임 직전 내내 레임덕을 겪어야 했다. 그 후 펑충위(彭仲于) 총리의 당선과 1999년 제6회 코싱가 의회 선거에서 인민공치회(人民共治會)가 승리하면서 평화적인 정권 교체가 이어졌다.

펑충위 총리는 사회 통합을 위해 소수 민족들과 말레이인에 대한 지원 정책을 펼쳤으며, 인종간의 갈등을 차단하기 위한 교육 의무화, 일부 소수민족 지역에 대한 자치권 등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칭관 총리'(清官總理)로 불리던 그는 공무직들의 임금을 인상하는 한편, 부패조사국을 설치하여 밀매, 마약 단속, 정계유착을 해소하고자 했으며, 인사청문회 도입과 행정 개혁 등 정치 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허나 정권 내부에서도 기업 부호들과의 연착이 많았기에 그 한계가 있었으며, 2001년에는 닷컴 버블로 전세계적인 경기 침체와 함께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허나 그 충격에서 회복하고자 했으며 2003년에는 반도체 산업 등에서 국외 대기업들이 초격차전략 공세가 이어지자 스팡가르만 전자 등의 국내 대기업이 이에 맞섰다.[19]페이민다오역외 금융 센터이자 자유무역지대로 지정해 해외 자본 유치에 더 적극적으로 대처코자 했다.

2004년, 제7회 코싱가 의회 선거에서도 인민공치회가 다수당을 차지, 2005년에는 제5회 코싱가 총리 선거에서 장카이화이(張開懷)가 당선되었다. 장카이화이 정권은 2007년 4월에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2008년 9월부터는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세계금융위기를 맞닥뜨리면서 일시적으로 흔들렸으나, 중국 개방기와 맞물려 수많은 소비자와 값싼 인력을 확보함으로서 경제 회복의 동력을 마련했으며, 역내 무역권을 활성화하여 대구미 시장 중심에서 벗어나 동남아시아 시장 진출을 위한 정책을 펼친 것이 성과를 보이면서 2009년에 동시에 치뤄진 제6회 코싱가 총리 선거에서 재선 성공, 제8회 코싱가 의회 선거에서 인민공치회가 여당 지위를 유지하는 등 순조롭게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장카이화이의 친인척을 중심으로 주가조작, 뇌물수수 문제들이 불거졌으며, 본인 역시 공금유용 의혹에 휩싸이면서 급격히 여론의 몰매를 맞게되었다. 특히 2012년, 정경유착을 통한 친정권 기업 부호들의 비자금을 돈세탁하여 개인 자금으로 확보한 것이 언론에 의해 밝혀지면서 정권 지지율은 한자리 수 이하로 급락하였다. 결국 2013년 제7회 코싱가 총리 선거에서 코싱가 국민당 출신 천웨이원 후보가 총리로 당선되는 파급을 맞이했고, 2014년 제9회 코싱가 의회 선거에서도 인민공치회는 겨우 개헌저지선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에 그쳤다.

천웨이원 정권은 경제면에서는 2015-2016년 중국 증시 폭락에 피해를 입었던 원자재 수출 중심 국가들의 타격을 반면교사삼아 IT 산업 등 수준 높은 과학 기술과 이를 활용할 인재 육성을 위한 경제 성장에 주목했다. 이에 벤처 기업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고 해당 사업을 진흥시키기 위한 정부 주도의 창업 지원 정책을 펼치면서 다양한 형태의 신흥 기업들이 대거 국내외 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또 2015년에는 MIXKA[20]로 불리는 G20 가입국들의 일부 국가협의체를 함께 결성함으로서 지역강국이자 선진국으로서의 입지를 강화했다. 사회적으로는 2016년, 시민결합 합법화와 의료용 대마초의 제한적 사용 인정 등 비교적 급진적인 변화가 꾀해졌다. 이는 곧 2017년 제8회 코싱가 총리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율로 천웨이원 총리가 재임에 성공하는 발판으로 작용했다. 2018년 미중 무역 전쟁에서 천웨이원 정부는 양국의 조속한 해결을 바라는 의사를 전달했고,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 참여에 대해선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중국 당국에서 코싱가를 상대로 상용비자 발급을 제한하는 등의 보복 조치가 이뤄지자 반중 감정이 격하게 일궈지기도 했다.

신세대와 전밍 시대의 개막

2019년 3월 18일, 그동안 지병을 앓고있었던 선종이 끝내 붕어하였고, 장남인 정시안(鄭斯庵)이 왕위를 포기하고 영국으로 이민을 가게됨으로서 차남 정밍위가 새로이 왕위에 올랐다. 이후 새 연호를 전밍(貞明)으로 결정함으로서 전밍 시대(貞明時代, 2019~현재)가 시작되었다. 전밍 원년에는 제10회 코싱가 의회 선거가 진행되었고, 인민공치회코싱가 민주당의 연정 선언에도 불구하고 루이샨 스캔들과 주요 당 대표들의 뇌물수수 의혹, 의원 후보들의 막말 논란이라는 연정의 최대 악재로 인해 코싱가 국민당이 과반수는 물론 개헌 저지선까지 돌파하는 의석을 확보함으로서 향후 정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천웨이원의 국민당 정권이 2선 연임제를 폐지하고 최소 3선 연임제 및 중임제를 채택하여 1인 독재 혹은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하려 한다는 비판도 이뤄지고 있다.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자 천웨이원 정부는 위기경보를 '上급'(비상국정)으로 조정하고 국가재난안전성을 편성한 후 강도높은 사회적 거리두기, 해외입국자 검역강화 등을 통해 국내 확진자들의 감소를 위한 안전책을 내놓고 있으며, 국내 소비 시장에 안정을 위해 양적완화를 시도하려는 등 여러 방면으로 대처에 나서고 있다.

지리

코싱가의 지형

코싱가의 지리대순다 열도에 위치한 보르네오 섬에서 약 26.4%를 차지하고 면적은 200,565 km2에 달하며, 이는 미국사우스다코타주(199,905 km2), 영국그레이트 브리튼 섬(209,331 km2)과 비슷한 크기다. 국토 전체가 적도 부근에 자리잡고 있어 우기와 건기가 있는 고온다습한 열대성 기후에 속해 있다. 연평균 기온이 21~32℃로 연평균 강우량 2,000~2,500mm, 평균 습도는 63~80%이다. 최저 기온과 최고 기온의 기온 차는 9~12℃ 전후로 낮에는 30℃를 웃돌다가도 저녁과 밤에는 매우 선선한 기후를 유지한다.

동남아시아에서 10번째로 높은 웨이왕산(未亡山)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다양한 토착 식생이 형성된 웨이왕 국립공원2000년 11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기도 했다. 그외에 엘리뇨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때때로 강수량이 줄어들고, 기후 변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 등의 문제를 겪고 있기도 하다.

코싱가 지형은 순다 판에 놓여 있다. 기반암은 일반적으로 고생대 시기에 형성된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퇴적암이다. 가장 오래된 암석의 형성시기는 약 5억 4천만 년 정도이다. 특히 코싱가는 카르스트 지형으로서 다양한 동굴이 만들어져 있는데, 메이리 인근에 위치한 바퉁 국립공원(八通國立公園) 내 루산(鹿山)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동굴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편 코싱가에서 가장 긴 강은 760 km에 이르는 라랑 강(拉讓江)으로 인도네시아와 경계를 이루는 척량산맥(脊梁山脈)인 쿠위산맥(哭魚山脈)에서 발원하여 서부 지방을 지나 남중국해로 이어진다.

대표적인 열대 우림 지역인 코싱가 저지대우림은 1헥타르 당 각기 다른 240종 이상의 나무들이 자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열대 우림의 주요 수종은 딥테로카르푸스과에 속하는 나무로 보르네오 섬에 자생하는 것으로는 155종의 딥테로카르푸스과 나무가 보고되어 있다. 미개발 해안가에는 맹그로브가 발달하여 있으며, 저지대 곳곳에 늪 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코싱가의 해안선은 2,607km(1,620마일)이며 해안지대, 언덕지대, 계곡지대, 산악지대 등으로 보통 구분한다. 쿠위 산맥이 서부 지방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며, 동부 지방에서 나뉜다. 이를 기준으로 코싱가와 인도네시아 간의 자연경계를 형성하고 있다.

적도무풍대(赤道無風帶)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태풍의 영향이 거의 미미하다. 또한 화산 활동도 거의 없는 안정된 지형이지만, 동부 지방의 경우 순다 판의 경계와 멀리 떨어져 있어 이따금씩 지진이 발생한다. 1976년 동부 지진2015년 동부 지진이 대표적인 예시다. 이때문에 1980년대부터는 지진 법률에 대한 제정과 함께 동부 지방은 내진 설계를 필수 및 의무적으로 하고 있으며, 2002년부터는 서부 지방도 동일하게 적용시키고 있다.

인문환경

인구


코싱가의 민족
한족 코싱가 원주민
다야크족
카다잔 두순
말레이 인종
브루나이인
타밀인 코싱가 백인
당산인 본산인
민남인 객가인

2020년 기준으로 코싱가의 추산 인구는 34,265,730‬명으로서 세계 40위권에 위치하고 있다. 출산율은 1.34명으로 세계 216위로서 대한민국, 싱가포르, 타이완과 같은 여타 아시아 선진국과 함께 최저 기록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인구 밀도는 170.8명/km2으로서 세계 47위에 안착하고 있지만, 도시 광역권을 향한 인구 집중화로 인해 실질적으로는 더 높은 가용 면적 대비 인구 밀도를 유지하고 있다.

코싱가는 말레이시아, 호주처럼 다민족 국가이다. 허나 약 90% 이상의 국민이 한족 출신이며, 정씨 정권의 정착 이후에는 푸젠성, 광동성 등의 남중국 지역에서 넘어온 이들과 하카(客家)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취업 및 영주권을 목적으로 이주한 말레이 인종이 전체 인구의 4% 이상을 차지하며 이외에는 코싱가 왕조의 안착에 도움을 주었던 다야크족이 토착 민족 중에서 가장 번성했다. 그외에 이반족, 카다잔 두순, 바자우, 무룻 등의 소수민족들이 있다. 영국계/네덜란드계 코싱가 백인은 물론 타밀인과 같은 인도계 민족들도 적게나마 살아가고 있다.

보르네오 중앙 산맥이 넓게 펼쳐진 내륙 중부 지방이나 루샨 전쟁 이후에야 편입된 동부 지방을 중심으로 토착 민족 비율이 높다. 하지만 대다수 지방에 인구 과반 이상은 한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코싱가는 싱가포르, 타이완 등과 함께 심각한 저출산 국가이며, 대다수의 소수 민족들이 인구 대체 출산율을 유지하고 있지만 전체 인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외국인 경제이민 활성화 지원 정책 등을 펼침으로서 인구 문제를 해결코자 하고 있다.

본산인과 당산인

본산인(本山人)은 정씨 왕조 시절 코싱가로 이주한 한족들의 후손과 청나라 말기 이전까지 이주해 온 민남인, 객가인들을 일컫기도 한다. 당산인(唐山人)은 1912년 청나라의 멸망 이후 이주해 온 한족들을 일컫으나 더 넓게는 국공내전 이후 넘어온 대륙 및 대만 민주화 인사, 탄압을 피해 도피한 파룬궁 신자들까지 아울러 말한다. 대부분의 본산인들은 엄연히 한족 혈통이지만 이들은 중국 대륙보다 코싱가 그 자체로서의 독자적 정체성이 매우 강하며, 또한 중국인으로서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 큰 거부감을 느낀다.[21] 당산인들은 스스로를 중국인이라 여기는 경향이 크며, 코싱가 역시 같은 중화권이자 한자 문화권의 일원임을 강조하고 있다.[22] 특히 1930년대의 코싱가 공산당은 당산인들이 중심이 되어 중국 공산당과의 교류를 통한 혁명 노선을 걸었으며, 해방 이후에도 소수민족들과 협력해 무장 투쟁 노선을 지향했음을 근거로 군부내각에 의해 철저히 탄압받아야 했다. 이를 기점으로 당산인들은 사실상 '반국가단체'에 준하는 잠재적 불순분자로 판단되어 사회 진출이 단절되었고, 이를 피해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와 같은 해외로 도피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허나 군부내각의 종식과 민주화 이후로 당산인들의 정치 참여가 활발해졌으며, 다수의 본산인과 당산인들이 사회적으로 결합하거나 한족 중심주의에 입각하여 통합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현재 여당인 코싱가 국민당시민국민주의를 내세워 '코싱가인을 위한 코싱가'를 강조함으로서 코싱가 사회가 배타화된 한족 집단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모든 민족이 동등한 코싱가 국민임을 강조하는 등 민족간의 차별과 분쟁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는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넘어오는 이주민들이 이른바 '신세대 당산인'의 위치에 서고 있으며,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신주민'(新住民)을 쓰고 있다.

언어

코싱가의 공용어는 법적으로 명확히 정해져 있지 않다. 교육부에서는 표준중국어영어를 궈워(國語) 또는 제1언어로 지정하여 필수적으로 배우도록 하고 있으며, 말레이어타밀어, 네덜란드어 등을 제2언어로 지정하여 하나 이상 습득할 것을 요하고 있다. 이 중에서 영어는 역사적 맥락에 따라 영국식 영어의 철자법과 문법을 따르도록 하나, 최근에는 미국과의 교류가 늘고 외교적 중요성이 커지면서 미국식 영어를 습득하는 이들도 적지않게 있다.

중국어의 경우, 대부분의 한족들이 중국 대륙 남부에 해당하는 광동성, 푸젠성, 차오저우에서 건너왔기 때문에 방언의 일종인 민남어광동어가 표준 중국어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많이 쓰여왔다. 하카인 역시 독자적인 방언인 객가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에 정부에서는 이러한 방언 사용의 난립으로 국민간의 의사소통이 어려워지는 것을 막고자 각급 학교에서 표준 중국어의 사용을 권장하고 있다. 표기법은 대만, 한국과 거의 동일한 정체자를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주음부호도 발음 표기를 위해 이용되고 있다.

한편 원주민들은 마인어, 타갈로그어와 같이 오스트로네시아어족에 속하는 독자적인 언어를 가지고 있다. 절대 다수가 한족으로 이루어진 코싱가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기에 대부분 표준중국어를 사용할 줄 안다. 그럼에도 원주민 언어를 보존하려는 노력 역시 이어지고 있으며 2001년 제정된 원주민어기본법(原住民語基本法)에 따라 소수민족 비율이 높은 지자체에서는 공문서를 공표할때 중국어, 영어와 함께 소수민족 언어를 함께 병기할 것을 법적으로 정해놓고 있다.

말레이인들이 주류를 차지하는 지역에 위치한 국공립, 사립 학교에서는 아랍어, 아랍문자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무슬림과 연계된 정당들은 아랍어아랍문자를 다른 국어들과 마찬가지로 정규 수업과정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다양한 언어를 쓰는 나라이기 때문에 코싱가 철도청 소속 열차에서는 '표준중국어 - 영어 - 말레이어' 순으로 방송하고 있으며, 네덜란드어타밀어의 경우에는 따로 방송 멘트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물론 제1국어로 지정된 중국어, 영어를 하나 혹은 둘다 구사할 수 있는 화자 비율이 90% 이상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큰 문제로 여기지 않고 있다.

또한 일시적으로나마 일제 식민지를 거쳤기 때문에 일본어에서 유래된 어휘도 종종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까지는 동남아 언어들이 코싱가 내에서는 비인기 언어였지만 교역 범위가 넓어지고 이들 국가에 대한 수출/수입 비중도 커지면서 베트남어, 인니어, 태국어를 배우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종교


청톈츠딩구(赤定區)에 위치한 다톈사(大天寺)

전체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한족은 대략 절반이 도교기독교를 믿으며 그 외에 불교, 한자 문화권에서 유래된 민간 신앙이나 무신론 내진 무종교 등의 종교상을 보이고 있다. 말레이인의 절대 다수는 수니파 이슬람교을 믿으며 타밀인 중에서는 힌두교시리아 정교회 출신 신자들도 있다. 중화권 종교와의 교류도 깊어서 일관도(一貫道), 파룬궁(法輪功) 신자들의 새로운 거점이자 도피처가 되어주고 있기도 하다. 군부 내각 시절에는 인도네시아처럼 '종교 선택의 자유'만 있었으며 코싱가 공산당와 극좌 성향의 반체제 인사, 무신론자들을 색출하여 탄압한 과거가 있다. 옌메이룽 정권과 민주화 이후에는 정교분리와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게 되었다. 허나 현재까지 종교를 믿지 않는 무종교, 무신론 성향의 사람들은 전체 인구의 약 20%밖이 차지하지 않을 만큼 아직까지도 종교 정책의 후폭풍이 남아있다.

이슬람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말레이시아브루나이와는 달리 싱가포르처럼 세속 국가를 지향하기 때문에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한편, 이러한 종교가 국정 운영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을 철저히 경계하고 있다. 허나 말레이인 출신 이슬람 신자들이 추진하는 다와(دعوة, 이슬람 신앙 운동)가 과격화되고 비무슬림 신자에게 차별 및 폭력을 행사하는 일도 있기 때문에 전국민적 악감정이 말레이시아브루나이로 향하는 일이 잦다. 일부 말레이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에서는 샤리아 자치법 채택과 히잡, 차도르의 착용 의무화를 내세우고 있지만 지방 당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종교의 평등화'를 이유로 이러한 요구를 묵살하고 있는 형편이다. 대신 무슬림들을 위한 예배 시간을 보장하는 조례를 제정하는 등 타협책을 모색하고 있다. 한편으로 무슬림 내에서도 정당을 통한 공식적인 국정 참여를 표방하고 있으나 종교와 관련된 정책안을 우선시할 뿐, 민생과 관련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탓에 원내 정당으로 입성하지 못하는 경우가 매우 잦다.

도교의 경우, 옥황상제(玉皇上帝) 외에도 북극성의 상제인 현천상제(玄天上帝)를 수호신 내지 주신(主神)으로 여기는 사원이 국내 곳곳에 조성되어 있다. 이는 대만 정씨 정권 시절 정성공이 대만의 수호신으로 현천상제를 숭상했던 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허나 실용성 있는 종교 문화를 요하는 코싱가 한인들의 인생관에 영향을 받아 한 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도교와 불교, 토속 신앙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것을 추구한다. 코싱가 왕조 최초의 도교 사원인 베이지사(北極寺)가 이러한 모습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예시이며, 이러한 사찰들은 유교, 불교, 도교만 합쳐진 것이 아니라 민간 종교까지 혼합되어 있다고 이해하면 된다. 한편, 민간 신앙의 독특한 종교 색채의 영향을 받아 왕실, 독립운동가, 정치인 등을 신으로 숭상하는 이들과 사당들이 일부 있다.

보통 중국에서 유래된 도교는 크게 정일교(正一敎)와 전진교(全眞敎)로 나뉘며, 이를 남북종이라고도 부르고 교리 또한 많이 다르다. 코싱가는 대만과의 교류를 통해 남종 정일교가 대세이며, '타력교'(他力敎)라고 하여 귀신의 힘을 빌려 복과 불로장생을 추구한다. 사찰의 수장들을 톈스(天師)라고 부르며 특정 가문 등이 세습한다. 대표적으로 명 황제의 후손이자 주밍궁(朱明宮)의 세습 가문인 남명 주씨가 있다. 또한 도교 사원에서 일하는 이들을 홍두사공(紅頭司公), 오두사공(烏頭司公)이라 부르며 이들은 사원을 직장으로 생각하고 자택에서 출퇴근한다.

불교복건도교 여산파(福建道敎閭山派)와 같이 민남 지역의 세속화된 문화에 영향을 받았으며, '사(寺), 궁(宮), 각(閣), 당(堂), 단(壇)' 등의 명칭을 사용한다. 종파로는 진종본원사파(眞宗本願寺派), 조동종(曹洞宗), 일연종(日蓮宗), 정토종(淨土宗) 등을 주로 믿으며, 위에서 언급했듯 유불도의 융합으로 관세음보살부처를 도교 사원에서 모시는게, 혹은 현천상제를 불교 사원에서 모시는게 일반적이라고 여기고 있다.

기독교헌종 조영왕(憲宗 潮永王)이 스페인, 네덜란드 출신의 선교사의 포교를 인정하고 1697년에 천주교 청톈대교구가 설정되면서 시작되었다. 초창기에는 조상의 위패, 재물신 등의 사당을 차려놓고 복을 구하는 다신교적 사상이 지배적이었던 코싱가 한인들에게 있어 그리스도교 신앙이 내세와 구원을 말하며 절대신에게 순종할것을 요구하는 종교로 생각해 적개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1939년에 비오 12세가 제일성성훈령(第一聖省訓令)을 발표해 한자 문화권의 전통 문화를 인정함에따라 교세가 크게 확장했으며, 일본 제국의 침략에 맞선 평신도들의 활약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쳐 군부 독재에 대한 저항,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오늘날에는 코싱가의 3대 종교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현재도 많은 기독교 신도들이 미사/예배를 드리기 위해 각종 종교 행사와 모임에 참석하고 있다.

대다수의 성당교회들은 편의점 혹은 인근 시장이나 교통이 왕래한 곳에 세움으로서 많은 신도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는 등 침체기에 놓여있는 가톨릭의 대중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19세기 도미니코회 소속 페르난도 사인스(Fernando Sainz) 신부와 류핀쥔(劉品君) 토마스 신부가 세운 최초의 근대식 성당인 메이허다오 주교좌당(美和道主敎座堂)도 레이샤 야시장(雷夏夜市場)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한편 개신교천주교보다 더 늦게 유입되었으며 1836년에 코싱가기독장로교회(國姓爺基督長老敎會)가 설립되었고 이들은 주로 원주민 선교에 큰 비중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

행정구역

코싱가의 행정구역
國姓爺行政區域
직할시 直轄市
청톈 (承天)
행정시 行政市
청궁 (成功) 메이리 (美里) 뤄창 (羅昌)
현 縣
완톈 (萬田) 가오옌 (皋堰) 난시 (南溪) 무중 (木中)
안핑 (安平) 첸자오 (犍早) 웨이저우 (蔚州) 레이볜 (雷邊)
지아루 (駕樓) 타이핑 (泰平) 헤이징 (黑經) 푸푸 (復甫)
코싱가 주요 행정 중심지
코싱가 주요 행정구역
청톈
메이리
청궁
뤄창
완톈
가오옌
난시
안핑
무중
첸자오
지아루
웨이저우
타이핑
푸푸
레이볜
헤이징

코싱가의 행정구역은 1개 직할시(直轄市, Direct-controlled municipality) 3개 행정시(行政市, Administration City) 12개 (縣, Prefecture)으로 구성되어 있다. 코싱가에서는 대만이나 일본처럼 몇몇 시 / 현을 묶어서 지역 구분을 하는 경우가 있다. 단순하게는 서부지방동부지방으로 나누기도 하고, 수도권·중부권·동북부권으로 묶이기도 한다. 그외에 청톈청궁을 합쳐 부르는 톈궁(天功), 가오옌·완톈·난시를 이르는 가오완시(皋萬溪), 무중안핑을 이르는 무핑(木平), 메이리·웨이저우메이저우(美州), 동부 지방 전역을 이루는 사바(沙八)[23] 등의 지방 지칭 용어들이 있다.

  • 직할시는 최상위 지방 자치체로 인구가 600만 명 이상이고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발전에 중요한 지역인 곳에 설치된다. 현재까지는 수도인 청톈만이 이에 해당하며, 하위 행정구역으로 (區), (村), (隣)을 두고 있다. 해방 직후부터 1955년까지는 특별시(特別市)로 불렸다.
  • 행정시는 차상위 지방 자치체로 인구가 250만 명 이상이며 경찰·광역도로·광역하천 등의 사무를 제외하고는 그 권한을 대폭 이양받아 직할시에 준하는 권한을 행사하며, 산하에 자치권이 없는 행정구(行政區)를 둔다. 행정구에는 사무소(구청)를 두고, 구청의 장은 해당 도시의 공무원 중에서 시장이 임명한다.
  • 은 코싱가 행정부가 직접 관할하며, 광역행정구역의 역할을 한다. 해방 이전까지는 성(省)으로 불렸으며, 각 현의 이름을 딴 현할시(縣轄市)가 존재한다. 현할시는 인구가 50만 명 이상 250만 명 미만, 상공업이 발달해 독자 재정이 충실하고, 나아가 교통이나 공공 설비가 완비된 지구에 설치된다고 지방제도법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수도권

수도권(首都圈)은 좁은 범위로는 청톈청궁만을 포함한 톈궁 지방을, '수도권정비관리법'에 따라서는 주변 휘하 위성도시들과 가오옌, 완텐까지 이르는 '코싱가 남서구릉지대'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인구, 경제, 문화, 교육, 의료 등 코싱가 내 최대의 도시권을 자랑한다. 광역 인구를 통틀어 약 900만 명에 달하며 이는 전체 인구의 약 1/4 이상에 달한다. 수도인 청톈 인근이 무역 상업도시로서 기능하였으며, 도쿄와 같이 아시아에서 매우 이른 시기에 근대 도시로 발전하였다. 이 때문에 본격적인 도시계획이 고려되기도 전에 스프롤 현상으로 시가지가 계속 팽창되었기에 도시공학적면에서는 문제가 있는 편에 속한다. 현재는 이를 극복하고자 주상복합 위주의 재개발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난개발아파트를 처리하거나 노후화된 철도를 철거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다.

현재 코싱가의 수도권은 인도네시아자카르타(약 1,000만 명)를 제외한 동남아시아 제2위의 도시 규모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 뒤를 잇는 방콕(약 820만 명)과 하노이 광역권(약 600만 명)을 상쇄하는 도시의 질을 만족하고 있다. 한편으로 현재도 뤄창과 함께 관광도시로서의 기능을 전담하며 수많은 고층 빌딩과 함께 고풍스러운 문화유산을 위시한 풍부한 관광자원, 동서양을 잇는 아시아의 관문으로서 세계 60여 개국의 항공사들이 취항하고 있다. 특히 류하오샹 국제공항은 매년 수백만 명에 달하는 관광객이 드나드는 등 이른바 '동방의 베네치아'를 자칭하고 있다.

중부권

중부권(中部圈)은 난시·안핑·무중·첸자오·지아루·메이리·웨이저우를 통틀어 일컫는다. 보통 중부권이라는 용칭보다는 더 세세한 단위의 지방들로 나뉘는데, 코싱가 한족을 비롯한 중화권 출신의 화교들이 다수인 난시·안핑·무중시베이 지방(西北地方), 말레이인, 인도네시아인이 많거나 브루나이와 밀접해 있는 첸자오·메이리·웨이저우[24]후이부 지방(回部地方), 코싱가 원주민들이 주류를 차지하는 지아루 현 전체를 네이궈 지방(內國地方)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코싱가 내에서 가장 넓은 지역인 특성상 각 현할시를 비롯한 주요 도시권에 지방 공항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 수도권 과밀화 현상을 방지하고 국가균형발전을 위해 조성되고 있는 시베이 지방은 일부 정부기관 및 국책기관들이 입주했으며, 정부의 시베이 투자 정책을 통해 형성된 주롱 공업단지(竹龍工業團地), 허우란 과학연구단지(后蘭科學硏究團地) 등의 국내 산업 지대를 비롯한 유수의 외국 기업들이 진출해 있는 형세다. 특히 수도광역생활권에 위치하고 있다는 특징과 함께 주거 도시의 기능을 확보하기 위해 과거에는 소규모 택지 개발이 이어졌으나, 현재는 대형 신도시들의 개발이 줄줄이 진행되고 있다.
  • 후이부 지방의 경우 전형적인 농촌 사회를 유지하고 있다. 주요 도시권은 원유 개발과 관광 산업을 통해, 그외 지역은 팜나무, 고무, 사탕수수와 같은 수익성 작물을 바탕으로 플랜테이션 농업을 통해 소득을 올리고 있다. 메이리에 속해 있는 페이민다오의 경우 역외금융특구로서 지정되어 기업 유치 및 금융업 중심 지역으로 촉망받고 있다.
  • 네이궈 지방은 보르네오 중앙 산맥과 정글이 자리하고 있어 주변 지역과의 접근이 원활하지 않으며 포장 도로가 드물고, 철로를 통한 교통에 치중되어 있다. 다수의 원주민 자치 지역들로 구성되어 있고, 코싱가 저지대 우림를 포함한 다수의 생태 국립 공원들이 있다. 또한 이 지역은 인도네시아, 브루나이와 함께 맺은 보존 협약인 보르네오의 심장(Heart of Borneo) 프로젝트를 통해 보호받고 있다.

이처럼 정부의 적극적인 관심과 함께 막대한 천연자원과 원유 매립지, 쿠위 산맥을 중심으로 순수하게 보존된 정글, 동굴 등의 천혜의 자연 환경과 이로 벌어들이는 관광 수익을 바탕으로 2010년대부터 다른 지방권들보다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코싱가 전역의 운송 수요를 해결하고자 하는 광역 간선도로코싱가 고속철로(國姓爺高速鐵路) 등의 교통 개발, 여타 도시들의 시가지 확장이 요인이 되어 많은 숲의 벌채, 동식물 서식지 축소에 따른 생물 다양성의 훼손과 같은 환경 문제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기도 하다.

동북부권

동북부권(東北部圈)은 뤄창·레이볜·헤이징·푸푸·타이핑을 말한다. 인구 대부분은 카다잔 두순이나 한족 위주다. 특히 동북부 출신 원주민들은 보수적인 이슬람교를 신봉하며 이들은 샤리아를 현 단위로 지방 조례 혹은 법률로 적용시킬 것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슬람포비아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기도 하며, 이슬람 신자와 기독교 혹은 무신론자들간의 충돌이 자주 발생한다. 또한 이들은 루샨 전쟁으로 불법 합병되었다는 주장을 근거로 사바 독립운동을 일으키고 있으며, 술루족들도 술루 술탄국의 재건을 명목으로 분쟁을 일으키고 있다. 이들은 반국가단체로 규정되어 코싱가 왕립군 북부사령부[25]코싱가 유안특근대(國姓爺維安特勤隊)[26]가 상시 대응하고 있다. 2015년에 일어났던 쿠닷 전쟁도 레이볜 현 북부에서 발생한 술루족들의 분리주의 내란이었을만큼,[27] 가장 치안이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있는 지역이다.

허나 깊숙이 굽은 만(灣)이 많은 덕에 뤄창과 같은 관광업을 위시한 항구도시들이 많이 조성되어 있고, 이들 도시는 남중국해오세아니아의 해양 물류 시스템을 지탱하고 있는 주요 거점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또한 금광과 같은 지하 자원은 물론 해양 유전이 풍부하며 웨이왕산과 같은 훌륭한 자연 관광지도 존재하기 때문에 높은 발전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정치


코싱가 정치 정보
부패인식지수 77점 2019년 기준, 세계 12위
언론자유지수 29,85 2019년 기준, 세계 82위
민주주의지수 7.14 2019년 기준, 세계 45위

코싱가의 정치대만과 함께 중화권에서 민주주의가 정착하고 있는 유이한 사례다. 공산주의를 채택한 민주집중제 국가, 중화인민공화국이나 게리맨더링을 통해 일당 우위 정당제를 유지중인 싱가포르, 일국양제로 인해 형식적인 민주주의는 보장되나 기형적인 선거제도와 중국의 개입으로 민주주의가 제약받고 있는 홍콩마카오와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180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까지는 전제군주제를, 195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는 중국이나 싱가포르, 대만과 같이 일당 체제를 중심으로 한 독재 국가였지만 1980년대 중후반과 90년대에 걸쳐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현재 코싱가는 동남아시아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올바르게 정착한 국가로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다.

왕실

연평왕 | 延平王
King of Koxinga

현직:
정밍위
2019년 3월 19일 즉위
호칭 비샤(陛下, Majesty)
관저 바이칸뎬(白崁殿)
임기 종신직
초대 국왕 태조 조무왕(太祖 潮武王)
성립 1661년 4월 29일

코싱가의 왕실은 코싱가의 국왕과 그 일족을 일컫는 말이다. 코싱가는 중화권 중 유일하게 군주가 존재하며,[28] 왕실은 본관을 따서 동녕 정씨라고 불리기도 한다. 대만정씨왕국을 확립한 이후 역성혁명 없이 유지되고 있으며, 수많은 정치적 굴곡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코싱가 사회를 굳건히 지탱하고 있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고 있다. 젠궈 정권 시절에는 실권과 권위가 훼손되었으나, 1850년대의 중앙집권제를 확립하면서 다시끔 권세를 행사하게 되었으며, 1930년에 경오항쟁으로 입헌군주제를 채택함으로서 국정에서 벗어나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형태로 변모하였다.

서방 유럽 열강제국주의적 팽창에 맞서 근대화를 이룩함으로서 태국과 함께 동남아시아에서 유이하게 식민지가 되지 않고 독립을 유지했고, 공산주의 열풍이 불어닥쳤음에도 불구, 왕실을 중심으로 꿋꿋이 체제를 유지했기에 나라의 자주성과 정체성을 지키는 수호자의 역할로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 허나 이러한 점 때문에 군부 내각은 왕실을 정치적 목적으로 조종하는 과정에서 '국왕모독죄'로 불리는 불경죄를 부활시키고, 코싱가 헌법에 왕실에 대한 법률 조항을 성문화하는 등[29] 왕실을 '신격화'한 작업이 현재까지도 후유증으로 남아있다.

이러한 성격 탓인지 일부 극우주의자들은 외국인 관광객과 인터넷 사회에서 이뤄지는 코싱가 왕실에 대한 비판을 문제 삼아 보복하거나 사이버 테러를 감행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해외 거주 코싱가 외교관들도 공무원 신분 및 헌법에 의거해 왕실을 비판·비난하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일부 건물이나 상가에는 현 국왕 혹은 선왕들의 어진을 내걸고 있는 경우가 잦고, 또한 달력, 도로 광고판, 택시, 버스 등의 사회 전반에 왕실을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

코싱가의 국왕은 국가원수이자 입헌군주로서 의회를 소집하고 해산하며, 국민들의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된 총리를 임명하는 등 국사(國事)로 규정된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업무를 주로 담당한다. 허나 국왕의 암묵적으로 인정된 권위를 통해 정계에 입김을 행사한 사례도 있다. 성종은 치세 동안 군부내각의 비민주적인 통치와 인권 탄압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곤 했으며, 선종의 경우, 왕실이 직접 대중을 상대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자제하는 방향을 고수해왔지만 2011년, 즉위 20주년 기념사에서는 도호쿠 대지진으로 발생한 일본 이재민들에 대해 위로를, 2018년엔 중국의 일대일로 보복에 대해서 강경한 발언을 내비치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총리와 행정부

국무총리대신 | 國務總理大臣
Prime Minister of Koxinga

현직 천웨이원(陳偉文) 2017년 8월 25일 취임
관저 수상 관저(首相官邸)
임기 4년 연임제
최근 선거 제8회 코싱가 총리 선거 (2017년)
차기 선거 제9회 코싱가 의회 선거 (2021년 예정)

코싱가의 총리는 정부수반이자 행정부를 대표하는 수장으로서 국무총리대신(國務總理大臣)으로 불린다. 이스라엘 이후 세계에서 유일하게 총리직선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인 코싱가의 특징상, 총리의 지위는 사실상 대통령 중심제 국가의 국가수반과 비슷한 역할을 행사하고 있으며, 임기는 3선 이상이 불가능한 4년 연임제를 채택하고 있다. 국왕으로부터 위임받은 코싱가 왕립군 대행 통수권을 비롯해 조약 체결, 법률 공포, 주요 행정부 인사 임명권, 의회 해산권 등을 가지고 있다. 총리 선거에 입후보하려면 25세 이상이여야 하며,[30] 귀화한 국민·전현직 군인·선관위 공무원은 출마 자격이 없다.

코싱가의 행정부는 총리와 부총리, 비서대신 1인, 부비서대신 2인, 여러 명의 무임소 정무대신, 각 부처 부서대신, 주임대신 등으로 구성된다. 부총리는 각 부처 대신, 각종 위원회 주임, 총리 대변인, 동방흥업은행 총재, 궁내부(宮內府) 대신을 제청하고, 총리는 이에 따라 인사권을 행사하여 임명, 행정부를 구성한다. 단, 일부 독립된 위원회의 주임대신은 입법의회의 동의를 받아야 임명될 수 있으며, 주어진 임기를 보장받는다. 또한 행정부회의(行政府會議)를 열어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데, 총리·부총리를 비롯해 각 부처의 대신, 정무대신은 의무 참석 대상이며, 그 외의 내각 구성원이나 청톈 직할시장, 기타 인사들은 필요에 따라 참석이 가능하다.

입법부

입법의회 | 立法議會
Legislative Assembly

의회체제 단원제
의회 의장 유쉬청(尤栩誠)첸자오 1구 코싱가 국민당
사무총장 샤오슈시안(邵書賢)
의회 의원 정원 153석 중 재적 153인
최근 선거 제10회 코싱가 의회 선거 (2019년)
차기 선거 제11회 코싱가 의회 선거 (2024년 예정)

코싱가의 의회는 입법의회(立法議會)로 불리며, 민선 의원으로 구성된 합의체로서 코싱가의 입법권을 행사하는 기관이다. 1930년 경오항쟁으로 의원내각제가 실시된 후 선거를 통해 115명의 의회 의원들이 선출됨으로서 첫 의회가 출범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류하오샹 총리 사후 후임 내각의 보궐 선거 미실시 및 군부 내각의 간선제를 통한 민주주의 훼손으로 입법의회의 기능이 정지되었으며, 1989년 민주화 이후 제4회 코싱가 의회 선거가 실시되면서 다시 입법부의 권리를 회복했다. 이후 지역구 시스템을 소선거구제로 채택하고 의원 정수를 153명으로 결정하였다.

유권자는 코싱가 주민 중 18세 이상인 자로 규정되며, 입법위원 정수 153명 중 111명은 각 지역구에서 선출된 소선거구제 의원들이며, 33석은 재외국민(화교)과 주민에 의해 선출된 비례대표들이다. 나머지 9석은 원주민, 말레이인 등으로 등록된 소수민족 유권자들끼리만 선거를 치러 당선된 민족 대표로 구성된다. 비례대표의 봉쇄조항 기준은 5% 득표이다.

소선거구제의 특성상 군소정당의 난립이 어렵고 양당제를 기반으로 삼고 있다. 허나 2019년 제10회 코싱가 의회 선거에서 인민공치회코싱가 민주당의 대연정 합의에도 불구하고 코싱가 국민당이 지역구 선출 의원·비례대표 의원 및 친국민당 성향의 민족 대표까지 합하여 총 123석을 확보하는 대성과를 거두고 개헌저지선을 돌파함으로서 합법화된 일당 독주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원내 정당 목록

정당명 창당일 대표 이념
코싱가 국민당 (여당) 1993.4.24. 린먼빈(林穈斌) 진보주의, 사회자유주의, 시민국민주의, 다문화주의
인민공치회 (제1야당) 1990.8.11. 우시푸(吳士復) 온건보수주의, 사회보수주의, 평화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코싱가 민주당 (제2야당) 1986.5.17.[31] 옌중슈(嚴中秀) 국수주의, 국민보수주의, 엘리트주의, 자유보수주의, 아시아적 가치
코싱가 공산당 1931.3.12[32]. 루다쉬안(鲁大玄) 마르크스주의, 반사회주의, 시장 사회주의, 평화주의, 좌익 내셔널리즘
민족재건당 2004.9.28 양퉁(楊同) 중화민족주의, 소중화주의, 제정복고[33], 대중영합주의
원주민 총동맹 1998.2.25 주하르 셴타오(珠蛤 先燾) 자유주의, 원주민 권리주의, 중도주의, 평화주의, 녹색 정치

사법부

코시강의 사법부는 코싱가 내 사법권을 행사하는 기관으로서 여타 민주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최고법원-고등법원-지방법원삼심제를 채택하고 있다. 이 중 집행원(執行院)은 헌법 해석 및 법 해석의 통일과 위헌정당 해산, 총리/부총리의 탄핵 결의 심사하며 최고법원은 상고법원의 역할을 맡는다. 대만과는 달리 대법관 중에서 사법원장을 선임하는 것이 아닌, 집행원장이 사법부의 수장을 맡는다. 대법관은 총 12명이며 임기는 7년이다.

영미법계, 즉 판례법주의를 채택한 나라답게 선례구속의 원칙이 적용된다. 그 밖에 법의 지배원리배심제법조일원화(변호사 경력자 중에서 판사를 임용하는 것)를 실시하고 있다. 또한 캐나다홍콩처럼 법학석사는 LL.M이라 부르며, 코싱가에서 변호사가 되려면 법학과를 졸업한 후 대한민국의 사법연수원에 해당하는 법조국시(法曹國試)에 합격, 자격을 취득한 후 1년(풀타임)/ 2년(파트타임) 과정으로 이수하고, 'Solicitor'(사무변호사) 및 'Barrister'(법정변호사) 중 하나를 택하여 실무 수습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코싱가의 사법체계는 여타 영미법 국가들처럼 자국 밖에서 한 행위에 대한 관할권이 없다. 속지주의를 채택하고 속인주의 예외를 규정해서 자국민이라고 할지라도 국외범은 범죄가 발생한 국가로 인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반대로 외국인에게도 국내의 법을 적용하며 자국민을 해외에 인도하는것을 금지하는 국가들은 대리 처벌을 요청할 수 있고 수사 자료를 넘길 수 있다. 또 병과주의로 인해 범죄자에게 죄목 별로 형량 모두를 더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이 때문에 전과 누적범의 경우 수십, 수백년 징역형이 나오는 경우가 잦은 편이다.

교육

코싱가의 교육중국, 대한민국, 일본, 싱가포르, 홍콩과 더불어 교육열이 세계에서 높은 수준인 나라에 속한다. 당장 중·고등학교 입시가 존재해 학생들이 각종 명문 중·고등학교에 진학하기위해 공부하는 경우가 잦다. 일본처럼 일부 사립학교와 왕립학사는 일관제(一貫制)를 시행하고 있으며[34] 이러한 형태의 교육기관들은 전문적인 영재를 양성하거나 자원 배분의 효율성으로서 특화되어 운영되고 있다.

1989년, 12년제 의무 교육 시행과 교육법 개정에 따라 '6-3-3-4' 학제를 채택하고 있다. 코싱가의 교육체계는 중고등학교의 평준화가 거의 없고 비평준화처럼 서열화 되어 있다. 시·현립 중학교의 경우 거주 지역별로 나누어진 '쉐취'(學區)에 따라 지정된 학교에 자동으로 배정된다. 고등학교부터는 완전 비평준화이므로 입시를 치러 합격하거나 추천을 받아야 입학할 수 있다. 시·현별로 조금씩 다르지만 사립고는 각 학교에서 개별적으로 출제하는 입학시험을 준비해야하며, 일반고의 경우 지역 교육청이 주관하는 고입고사(高入考査) 점수에 따라 지원할 수 있다. 한편으로 일본의 유토리 교육(餘裕教育), 이스라엘하브루타(חַבְרוּתָא)에 영향을 받아 주입식·입시 위주 교육에서 탈피하여 학생간의 토론 수업 확대, 자율 동아리 실시 등의 교육 정책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대학 입학고사를 8월 중에 보며, 상위권 명문대로 불리는 국립청궁대학·왕립옌핑대학·국립청톈대학·국립융화대학[35] 등 국립대 및 왕립대의 선호도와 질이 높다고 평가받는다. 특히 이들 대학은 학부과정부터 박사과정까지 등록금을 여러 장학금과 교육비 지원 명목으로 면제받으며, 매년 한화 30만 원 정도의 학생노동조합 기금을 내는 것으로 대체한다.[36] 하지만 이공계열 학부에서는 메이리 기술대학이, 법학계열에서는 가오옌 대학이 꼽히는 등 일부 분야에서는 사립대가 높은 성과를 이루고 있기도 하다. 비교적 대학들이 여러 지역에 퍼져있기에 대한민국과 같은 수도권 대학 선호 현상이 드물다. 또 전국 단위 대입 점수에 맞춰서 합격 가능한 대학이 있는 곳으로 진학하기 때문에 출신 지역에서 대학까지 졸업하는 경우는 적다.

국내 최고 명문대 학벌은 국립청궁대학으로 평가받고 있다. 옌메이룽·펑충위·장카이화이 등의 민선 총리 3명을 배출해냈고, 왕립옌핑대학도 최근 천웨이원 총리를 비롯해 등 많은 정치인, 기업인들을 배출함으로서 정경 지도층의 양대 양성소임을 표방하고 있다. 국립청궁대학은 QS 세계 대학 랭킹 2020년 기준으로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와 함께 세계 27위, 왕립옌핑대학은 세계 38위로서 호주 멜버른 대학교와 동급으로 인정받으며 THE 세계 대학 랭킹에선 국립청궁대학과 왕립옌핑대학이 각각 세계 43위, 세계 85위로서 아시아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높은 교육 우위를 점하고 있다 볼 수 있다. 그외에 교육청과 다수의 기업들이 협력하여 조성한 연구 거점 교육도시(学園都市)이자 학생 자치도시신롄 학원특구(新蓮學園特區)에 위치한 학교들이 학술, 연구 실적 평가에 중점을 둔 ARWU(세계 대학 학술 평가)에서 100위권에 진입하는 등 괄목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일찍이 서구와의 교류한 영향으로 영국 혹은 네덜란드국제학교의 수가 굉장히 많다. 제3외국어로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의 유럽 언어 혹은 한국어, 일본어와 같은 동아시아 언어를 배우도록 구성한 점도 큰 장점으로 부각되고 있으며, 21세기 들어서는 국제학교 유치에 더욱 더 많은 힘을 기울이고 있다. 한편으로 한자 문화권 교육기관들과의 교류가 활발하기 때문에 일부 영재들은 싱가포르 국립대학(NUS), 홍콩대학과 같은 국제적 명문대를 비롯해 대만중국 대륙의 주요 대학 등으로 진학하는 경우도 잦다. 오세아니아와도 가깝다는 특성상, 호주뉴질랜드로 유학을 가는 학생들도 더러 있다.

군 간부를 키우기 위한 사관학교는 '무관학교'(武官學校)라 부르며, 대부분 난시 현에 위치해 있다. 이 중에서 1842년에 설립된 옌핑 왕립무관학교에서 다수의 장성급 출신들이 배출되고 있으며, 통합 무관학교난시 국방대학에서도 다수의 군 장교들을 배출해내고 있다. 이들 교육기관은 교육성 관할이 아닌, 군무성 산하 기관으로 분류되고 있다.

경제


코싱가 경제 정보
인구 34,265,730‬명 2020년 기준, 세계 40위
명목 GDP $1조 1,215억 2020년 기준, 세계 16위
PPP $9946억 5680만 2020년 기준, 세계 28위
1인당 명목 GDP $32,729 2020년 기준, 세계 27위
1인당 PPP $29,027 2020년 기준, 세계 56위
GDP 대비 공공부채 비율 38.7% 2020년 기준, 세계 140위

코싱가의 경제는 20세기 초부터 높은 기술력과 경쟁력을 기반으로 한 제조업 수출과 함께 고무, LNG 가스, 팜유, 목재, 쌀, 주석 등의 농업·천연 자원을 생산하고 있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아시아의 다섯 마리 용 가운데 하나에 포함될 정도도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을 이록했고, 현재는 첨단 산업 투자 및 금융허브 플랜, 관광업의 활성화를 통한 해외 투자유치에 적극적으로 어필하고 있다. 대만과 더불어 ODM과 같은 후방 산업에 강해 '하청 강국'으로도 불리지만 유수의 대기업들이 자동차, 반도체, 석유화학 등의 완제품을 전세계로 수출하고 있다.

코싱가의 주요 기업들로는 국내에서 가장 큰 대기업으로 손꼽히며 전자제품과 여러 반도체 계열사를 거느리는 브룩 그룹, 쿠칭건설로 유명한 쿠칭 그룹, 생명보험과 은행과 같은 금융업을 중점으로 둔 마르게리타 그룹과 편의점 및 백화점 사업에 나서고 있는 키나발루 그룹 등이 대표적이며, 그 외에 코싱가중유공사, 코싱가플라스틱석유화학과 함께 국왕의 사유재산으로서 왕실자산국(王室資産局)이 관리하는 왕립양회공업, 왕립연협공사가 있다.[37]

민주화 이전까지 코싱가 경제에서는 국영기업이 코싱가 전체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았다. 각종 산업부문에 있어서 국영기업들이 자리를 잡고있었으며, 민영 대기업이 성장하기 시작한것은 1970년대 이후의 일로 세간에서는 '자본주의를 채택한 공산주의 국가'로 불릴 정도였다. 현재도 이런 면모가 남아있는데, 예를 들어 코싱가의 맥주 브랜드들은 코싱가주류공사라는 국영기업이 양조 및 독점생산했다. 현재는 주세법이 개정됨에따라 크래프트맥주의 생산이 자유롭게 가능해졌다.

1945년 해방 이후인 류하오샹의 통치 시절부터 토지개혁을 대대적으로 단행했고, 물가를 조절하기 위한 고금리 정책을 실행했는데, 물가가 안정되고 저축률도 크게 불어나면서 해방 전후의 경제적 어려움을 조기에 진화하는 역할을 맡았다. 또한 중국의 공산화와 6.25 전쟁이 연달아 터지자 도미노 현상을 우려한 미국이 코싱가에게 경제원조를 단행함에 따라, 막대한 원조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었고, 1953년부터 경제 계획을 짜냄으로써 초기부터 체계적인 경제성장과 기간 산업 등을 통해 코싱가의 발빠른 경제성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유엔 아시아극동위원회(ECAFE)가 발간한 '아시아 극동 경제 보고서'에 따르면 코싱가는 1945~1955년 연평균 10%의 경제성장률로 당시 아시아 지역에서 필리핀대만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1960년대 들어서 미국이 원조금액을 감축하자, 새로 출범한 군부내각은 수출에 유리하게끔 환율제도를 개편함으로서 수출 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수출장려정책은 성과를 거두면서 1960년대에도 코싱가는 고도성장을 유지할 수 있었다.

IMF를 기준으로 볼 때 코싱가가 선진국으로 분류된 것은 1989년이다. 개발도상국(Emerging Country)이 중진국 함정에 빠지지 않고 선진국(Advanced Country)으로 넘어간 사례중 하나이며, 플라자 합의로 경제 성장이 절정에 이르기도 했다. 이 결과로 아시아의 다섯 마리 용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고, 한때나마 대한민국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높았기 때문에 한국에서 모범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한 나라이자 따라잡아야 할 국가로 대만과 함께 언급되었다. 이미 1970~80년대에 걸쳐 컬러TV가 일상에 보급되었고 자가용 보급도 한국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이루어졌다

현재 코싱가는 정부 차원에서 생필품의 물가를 낮게 유지토록 통제하고 있고, 국민들은 풍부한 농산·천연 자원과 발달된 국내 정제 기술을 바탕으로 바탕으로 여타 국가들보다 값싼 식료품, 연료·기름을 구매할 수 있다. 다만 말레이시아와 같이 공산품보호관세 등의 이유로 높은 가격대가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은 왕립주택발전청(RHDB)에서 '환매조건부 분양제도'[38]를 기반으로 임대주택을 마련하기 때문에 국민주거 보급율은 매우 높은 수준에 있으며, 이에따라 실질적인 국민 생활의 질은 더 높게 평가받고 있다.

싱가포르와 함께 계좌 개설이 자유로워 돈세탁조세피난처로 유명하기도 했다. 이는 국민정서에 따라 잦은 사형 등의 체벌 중심 사법 체계가 유지되면서 타국과의 범죄인 인도조약을 맺은 것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게 한몫했다. 허나 펑충위 총리 시기에 부패조사국이 정식 출범한 이후 공직에서 민간까지 금융과 관련된 수사를 확대하면서 많은 은행과 여러 기관에서 개설방어가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의 각종 부패 정치인과 독재자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의 부유층들이 주 고객으로 애용하고 있다.

코싱가는 태평양 항로유럽 항로를 연계하는 환적허브로서 자리잡고 있다. 중국 상하이항싱가포르항에 이어 제3위의 물동량을 기록했던 청톈항이 있다. 상하이항이 세계 최대 수출입 항만이고, 싱가포르항이 세계 최대의 환적 항만이라면, 청톈항은 이 둘을 잇는 중계 항만으로서의 역할에 전담하고 있다. 특히 코싱가 항만공사(PKA)는 세계 3위에 이르는 항만 운영사이기도 하다. 해양 플랜트를 위시로 한 조선 기자재 산업 등도 발달하고 있다.

OECD에서 평가한 바에 따라, 평균임금 대비 최저임금의 비율은 코싱가는 44%, 일본이 33%, 한국이 52%로 책정되어 있다. 다만 높은 최저임금을 유지하는 한국과는 달리, 코싱가는 법정임금보다 높은 암묵적인 시급 시세가 유지되고 있으며, 이 점에서 오히려 일본과 유사한 방식을 보이고 있다. 특히 주휴수당법정 공휴일에 대한 정부의 통제 정책이 효과적으로 작용되고 있으며, 이를 잘 수용하는 기업들에게 국가에서 세제 감면, 지원금이 지원되는 등 당근과 채찍을 활용하고 있다. 한편으로 경기 침체가 진행되면서 장기간의 실업에 절망한 청년들 사이에서는 값싼 식료품·주거 비용을 바탕으로 아르바이트만으로 생활하는 프리터들이 생겨났다. 이는 곧 연애, 결혼, 자녀, 직장 등을 포기한다는 시예 세대(失業世代)의 대두로 이어졌다.

교통

코싱가의 교통동북아시아 국가들(대만, 한국, 일본 등)의 교통과 비슷한 점이 많다. 일본과 같이 고속철도철도 위주 교통시스템이면서도 한국과 유사하게 닝허고속공로(寧河高速公路) 등 고속도로를 이용한 도로교통도 발달하여 시외버스 운행이 활발하다. 또한 항공기가 아니면 이동시간이 오래 걸리는 경우가 많고, 아직 육로로 접근하기 어려운 내륙 및 동부 지방의 특징상 국내선 항공편이 자주 취항하며, 그 규모 또한 상당하다. 이때문에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보다 높은 정시성(定時性, Punctuality)을 가지고 있다.

코싱가의 내륙 중앙을 쿠위 산맥이 차지하고 있는 형태라 도로 대부분이 순환선 형태로 형성되어 있다. 오지 혹은 맹그로브로 인해 동서를 오가는 교통로는 몇 개 없고, 주요 교통로는 인구가 밀집된 서부 지방, 특히 청톈-청궁-가오옌-완톈-난시 간선 위주의 수도권 교통로가 발달했다. 다만 대대적인 동서 교통 개발 정책과 함께 해안선과 가까운 동서 지방의 도시 간을 잇는 관통도로가 마련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청톈메이리고속공로, 서부뤄창고속공로 등이 있다. 코싱가의 도시간 주요 도로는 국도, 쾌속공로, 성도 세 부류로 나뉘는데, 이중에서 국도는 고속도로 체계이며 고속도로 운영 기관인 교통성 코싱가국도고속공로국에서 운영한다. 그리고 쾌속공로는 고속화도로 역할을, 성도는 일반 국도의 역할을 한다.

주요 도시권을 기준으로 잘 갖춰진 도로망을 이용한 시외버스 노선들이 잘 발달해 있다. 이로인해 버스 업체 간 경쟁으로 가격 경쟁이 함께 일어나고 있고, 고속철도 운임의 절반도 안 되는 요금을 받고있다. 1980년대의 '버스체계 운영관리법'이 개정된 이후 대한민국처럼 특정 버스 터미널의 버스 회사와 버스가 집결하고 있다. 대만이 수준 높은 시외버스 체계를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스 회사의 장소가 난립되어 외국인 관광객이 이용하기 불편한 모습과는 대조된다. 한편 내륙으로는 험준한 산악지형으로 인해 도로망이 매우 부실한 만큼 버스도 네이궈 지방을 잇는 노선은 드물다. 현재는 내륙 중심 도시인 첸자오와 청텐을 잇는 내지공로가 유일하게 이용되고 있다.

항공 교통에 있어서는 코싱가 고속철로가 개통된 이후에도 국내선 규모가 어느 정도 되다보니 옌핑항공, 코싱가퍼시픽, 스다야 항공 등 여러 지역 항공사가 국내선을 운항하고 있다. 이들 항공사는 대형 항공사보다 저렴한 요금으로 경쟁을 주도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형 항공사로부터 지분 투자를 받고 코드셰어[39]를 맺는 등 의존하는 경향도 있다.

서부와 동부를 잇는 고속철도 노선이 운영되고 있다. 2006년 초 개통한 코싱가 고속철로(KHST)이다. 알스톰지멘스가 주도해서 만든 독불 합작회사, 유로트레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자체 제작한 HS400형 전동차 등이 운행 중에 있다. 또한 19세기부터 코싱가의 주요 교통 수단은 노면전차와 철도였기 때문에 현재도 화물철도를 애용하고 있다. 특히나 항공기를 통한 화물 운송이 적자를 내는 만큼, 마일 트레인이 어느정도 보편화되어 있다. 수도권 내에서는 도시철도에 해당하는 첩운(捷運)이 운행하고 있으며, 대표적으로 청톈 첩운, 청궁 첩운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청톈에 경우 청톈 국제공항과 시내를 연결해 일찌감치 공항철도로서의 역할도 수행 중이다.

사회

의료복지

코싱가는 의료복지는 사회보장제도이자 공공의료보험의 하나로서 사회복지성 관할인 국립건강보험공사(國立健康保險公社)가 운영하고 있다. 1940년대부터 대기업 등 일부 사회 계층을 중심으로 선별적 의료보험이 처음 시행되었으며, 코싱가 공산당을 위시한 사회주의 지지 세력의 대대적인 무상교육·무상보건 선전에 맞서기 위해 군부내각에서는 1970년대부터 '전민건강의료보험법'(全民健康醫療保險法)을 제정해 전국민들은 물론, 중장기 국내 재류자들도 필수적으로 가입토록 했다. 이후 1981년에 현립의료보험과 직장의료보험을 통합하여 현재의 체계를 만들었다. 또한 의료 재정 적자를 막기 위해 세금에서 건강보험료를 따로 지불하며, 총액예산제[40]를 시행하고 있다. 이처럼 현재 코싱가는 여타 선진국처럼 훌륭한 의료 시스템을 갖추고 있으며, 공공의료에 대한 국가적 책임과 의료진에 대한 재정 지원을 통해 양질의 의료와 첨단 의료기술 확보에 나서고 있다.

왕실 재정으로 운영되는 왕립공민의료공단(王立公民醫療公團)은 국립건강보험공사를 대신하여 일부 질병에 대해 전액을 부담해 진료를 대체한다. 대표적인 예로 에이즈소아폐렴구균 등이 있다. 또한 의료 사각지대에 몰리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저소득층 의료급여 수급권자를 선정하는 제도가 도입되면서 일부가 사회복지기금 및 왕립공민의료공단의 도움을 받아 진료 혜택을 받고있다.

2020년 코로나19 확산사태 당시,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서방의 주요 외신들은 대한민국과 함께 코싱가의 바이러스 검사와 각종 방역조치 등의 대책을 칭찬했으며, "이런 판데믹(범유행전염병)에서 따라야 할 모델"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특히 국가재난안전성 등 보건기관과 시민간의 신뢰도가 높으며, 정부가 권고하는 방역지침을 잘 따른 국민들의 행동이 질병확산속도를 억제하는 결과를 내놓았다고 분석했다. 이외에 병상수의 풍족함 및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축적된 국내 의료계 및 민간의 선진적 대응능력 또한 구미 국가들 및 일본에서 보여준 의료붕괴 현상에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기여했다.

각주

  1. 회의(Meeting), 포상관광(Incentives), 컨벤션(Convention), 전시(Exhibition)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며, 포상 관광, 각종 전시·박람회 등 복합적인 산업의 의미로 해석되면서 생겨난 개념이다. '비즈니스 관광(BT)'으로 불리기도 한다.
  2. 민남어로 'Lân-pêng-ông'이며 남명의 영력제가 1655년에 책봉한 군왕의 작위이다. 그 뒤를 이은 정경은 더이상 명 황제를 추대하지 않았으며, 따로 책봉 없이 신하들의 지지를 받아 연평왕의 작위를 유지했다.
  3. 표트르 슈로프스키는 이후 시암 왕국에서 1888년에 왕실가인 국왕찬가(สรรเสริญพระบารมี)를 작곡하였다.
  4. 표준 중국어로는 '황썬핑'(Huáng Sēn Píng)으로 불리며 브루나이에서는 '펜기란 마하라자 렐라'(Pengiran Maharaja Lela)로 기록되어 있다.
  5. 鄭得瀟, 대만 정씨 정권에서 중서사인(中書舍人)을 맡았다. 북보르네오에 정착한 이후에는 코싱가 왕조에 충성하며 대학사(大學士) 등의 고위직을 역임했다.
  6. 黃良驥, 대만 정씨 정권의 장군으로서 1679년 청에게 패전 이후 타이완 섬으로 건너왔다. 이후 가장 적극적으로 루손 혹은 보르네오 섬으로의 이주를 간언했으며 정착 이후에는 도독(都督) 등을 역임했다.
  7. 이를 주선했던 인물은 이탈리아 출신의 이과라(李科羅)로 이탈리아어로는 '빅토리오 리치'(Victorio Ricci)였다. 본래는 정성공 부대의 선교를 담당했으며 정씨 정권과 함께 북보르네오로 이주했다. 이후 다오밍후이 성당(道明會教堂)을 세우며 1686년에 사망하기 전까지 선교 활동에 치중했다.
  8. 주로 무역 수출입, 영기 대여, 세금 징수, 인력 중개, 여객 운송 등의 복합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9. 정씨 왕실과 함께 코싱가로 넘어간 주홍환(朱弘桓)과 주이호(朱怡鎬)는 형식상 노왕(魯王)과 익왕(益王)의 작위를 유지했으나 1690년대에 각각 노국공(魯國公), 익성공(益聖公)으로 격하되어 현재까지 남아있다. 다만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표방하는 코싱가의 사회 특성상, 봉건적 특권을 모두 잃고 형식화된 사회 신분 계층임을 내세우고 있다.
  10. 대한민국 외래어 표기법 제4장 제2절 동양의 인명, 지명 표기 제3항에 의거하여 코싱가 인명은 영녕수호조약을 기준으로 전근대 인물은 종전의 한자음으로, 현대 인물은 중국어 표기법에 따라 구분한다.
  11. 이러한 태도를 보인 이유는 상기한 왕실-자본가의 결탁과 함께 친위 세력의 양성으로 직접적인 무력 투쟁에서 성과를 거둘 수 없다고 판단한 점과 함께 진몽구가 왕실 가문과의 혈연 관계를 맺어 확보한 권위를 스스로 붕괴시켜야 한다는 리스크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12. 여기서 말하는 보통선거의 선거권을 갖춘 유권자들은 23세 이상의 성인 남성에게만 해당되었으며, 여성은 태평양 전쟁의 종결 이후인 1945년 대법 개정안으로 선거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13. 1965년에는 8년제 의무교육으로, 1989년에는 12년제 의무교육으로 고등교육 혜택의 범위가 점차 확대되었다.
  14. 일각에서는 재벌 및 지주 사회를 해체하려던 행태에 위기감을 느낀 이들이 사주하였다는 음모론이 제기되고 있다.
  15. 수도 왕궁으로 복귀할 시 왕실의 존속은 물론, 왕족과 구 내각 인사들의 신변을 보호할뿐 아니라 이들의 국외 망명까지 인정하겠다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16. 슝시옌의 법 개정으로 1931년에 폐지되었던 불경죄가 부활했으며, 왕실을 나라의 자주성과 정체성을 지키는 수호자로 칭송하여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포장했다. 또한 왕실을 내세워 군부 정권 유지와 국민결속을 위해 '위국맹사'(衛國盟辭)를 홍보하고 이를 비판하는 언론을 탄압하는 행보를 보였다.
  17. 이에따라 미국은 군부 내각의 체제 유지와 비민주적 행태를 묵인함으로서 확고한 반공 전선을 구축했고, 슝시옌 정권은 미국 공산품 및 전쟁 무기, 군수 물자에 수입국이 되었다.
  18. 노조 결성의 경우, 경제 정책의 요인도 있었지만, 군부 내각을 비판하는 단체 형성을 엄격히 규제하려던 당시 정치적 상황도 다분했다.
  19. 하지만 이 IT버블 위기로 대기업 보호 정책이 유지되면서 벤처기업/중소기업 육성책은 동결되었으며, 201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다시 스타트업 등의 방식으로 재개될 수 있었다.
  20. 멕시코(Mecico), 인도네시아(Indonesia), 코싱가(Koxinga), 대한민국(Korea),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를 지칭한다.
  21. 오히려 본산인들은 진정한 '중화 문명의 후계이자 적통'임을 강조하며 청나라에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이어지는 대륙사의 계보를 부정하는 이들도 있다.
  22. 이를 지지하는 일각에서는 코싱가의 국명을 '중화코싱가'(中華國姓爺), '중화동녕'(中華東寧)으로 교체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23.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과거 동부 지방을 부르던 현지 말레이어인 '사바'(Sabah)를 음차하였다.
  24. 다만 메이리의 경우 광역권이 아닌 단일 도시로만 따졌을때 청톈, 청궁을 잇는 세번째로 큰 도시이자 1900년대에 이르러 한족들이 진출해 석유 산업 및 관광업의 중심지로 개발한 역사에 따라 독자화된 도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메이리 출신 사람들도 자신들을 후이부 지방 사람으로 묶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
  25. 본래 이름은 제3군단지휘부(第三軍團指揮部)이다.
  26. 대테러 임무를 수행하는 경정성(警政省) 소속 부대로서 코싱가 국민이 얽힌 테러 및 전투 상황에서 활동한다.
  27. 허나 이 문제는 2015년 동부 지진에 대한 정부의 대처가 미숙했던 점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28. 20세기 초중반까지는 1915년부터 1916년까지 존속한 중화제국, 1932년부터 1945년까지 유지된 만주국 등이 있었으며, 이들의 멸망 이후 유일하게 군주정을 유지하고 있다.
  29. 제2조 코싱가 왕실은 신성한 지위에 있으며, 누구도 이것을 침범할 수 없다. 코싱가 헌법
  30. 대통령 출마 연령 제한이 미국은 35세, 한국중화민국은 40세인 것을 감안하면 굉장히 낮은 연령대이다. 다만 프랑스의 경우 18세 이상의 국민이면 대통령에 입후보를 할 수 있다.
  31. 비공식 창당 기준, 정당 신고일은 1989년 7월 21일이다
  32. 코싱가 내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 1932년에 해산된 후 지하정당으로 활동했다가 1955년에 다시 설립되었다. 허나 1959년에 군부내각에 의해 강제 해체되는 등의 수난이 반복되었다. 공식 정당 신고일은 1997년 11월 21일이다.
  33. 지금의 상징화된 왕실 체제에서 탈피해 실질 통치권을 행사하는 전제군주로의 지향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왕실이 동녕제제(東寧帝制)를 선언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34. 대표적으로 1850년대에 왕실 및 일부 상류층을 위해 성립되었으며 현재는 대형학교법인이자 종합교육기관인 시우쉐위엔(修學院)이 있다. 한편 카이화 대학(開華大學) 부속 셴쉬 중고교(賢旭中高校)가 최고 명문 중고등학교로 거론되고 있다.
  35. 이른바 '청핑톈화'(成平天華)로 불린다.
  36. 코싱가 학생노동조합에 가입함으로서 학생들은 학생 할인 및 학생 전용 기숙사 거주, 각종 설비 및 서비스 이용, 학생용 렌트카 서비스 등 여러가지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이는 핀란드의 교육복지체계에서 영향을 받았다.
  37. 참고로 국왕은 왕실자산국의 자산에 대한 상속세를 내지 않는다. 대신 왕실 연회 및 국가 행사와 왕립 교육·복지 기금을 내탕금으로서 직접 사용한다.
  38. 왕립주택발전청에서 건설한 주택은 오직 본 기관에서만 분양받을 수 있으며, 처분 및 이사를 이유로 되팔 시 처음 구매한 집값 원가만을 되돌려 받는다.
  39. 어떤 항공사가 다른 항공사의 좌석을 빌려 자기 항공사의 이름으로 판매하는 것을 말한다.
  40. 연간 전국 진료비를 위해 사용될 예산을 사전적으로 결정하고 개별 병원에 예산을 할당하는 방식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