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요약 없음 |
편집 요약 없음 |
||
81번째 줄: | 81번째 줄: | ||
==상징== | ==상징== | ||
==역사== | ==역사== | ||
베르데트 왕조의 초기 역사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4421년 [[사르티노아의 치욕]]으로 | 베르데트 왕조의 초기 역사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4421년 [[사르티노아의 치욕]]으로 수도 [[수도시|케핀토르]]가 함락되었고, [[코나베르 가문]]은 [[숭고한 카니겐의 국가]]에 압송되었다. 송나라에서 일어났던 정강의 변을 연상시키는 이 사건 때문에 [[초공대왕]] 자리가 비게 되었다. 이에 [[베르데트 가문]]이 [[코나베르 가문]]의 가장 가깝고 유력한 방계의 자격으로 왕위를 물려받았고, [[에셀리아시]]라는 망명수도에서 건국됨으로서 제5왕국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 ||
베르데트 왕조는 피란에 성공했고, [[켄디레린 전투]]에서 카니겐군을 궤멸시키며 급한 불을 끄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전시의 혼란과, 한창 전성기를 달리고 있던 [[카니겐 숭고국]]의 압박 때문에 초기에는 나라를 유지하는 데부터 허덕였으며, 엄청난 군사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코나베르 클레도리아 왕국]] 당시만큼의 서방 영토를 유지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쿠그리드 왕]]에 의해 재차 전란의 위기가 촉발되자, 급박해진 왕국은 [[신틀로렌 회의]]를 통해 [[아리에티아]] 남부의 국가들의 방어 동참을 호소하였다. 베르데트 왕조가 [[에레수리아만]] 및 [[이데르강]] 통행을 조금 더 자유롭게, 싸게 풀어준다는 조건까지 제시할 정도로 절박했으나, 결국 남방의 국가들도 적극적으로 가세하겠다고 합의함으로서 비로소 안정화 국면에 접어들 수 있었다. | |||
그러나, 이번에는 위 신틀로렌 회의 및 클레도리아 왕국 쪽 전선에서 다소 동떨어진 서북부의 [[이데리아 대공국]]이 [[카니겐 숭고국]]의 공격을 맞게 되었다. 이때 [[제2차 장성 전투]]가 일어났으며, [[스트론티아 삼림연방]]을 필두로 한 서부 국가들의 필사적인 도움으로 하여금 방어해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데리아는 전쟁으로 인해 크나큰 타격을 입었으며, 이후로 한 세기간 [[이데리아의 2차 은둔]]이라는 철저한 중립/고립주의 노선을 타게 된다. | |||
[[카니겐-이데리아 전쟁]] 이후 베르데트 왕조를 비롯한 [[아리에티아]]계 국가들의 북방 전란은 잦아들었다. 산발적인 국경 분쟁은 끊임없이 일어났지만, 그 정도뿐이었다. 여기에는 [[카니겐 숭고국]]이 [[베루디야]]나 [[지브로이아]]를 침공하는 것에 주력했기 때문이라는 점도 있었다. 이렇게 지속된 어중간한 소강상태로 수십 년을 보내게 되었는데, [[카니겐 숭고국]]도 군주의 아들들 사이 계승 갈등 때문에 몇 나라로 갈라지기에 이르렀다. | |||
그러나 [[아리에티아]]는 [[카니겐 숭고국]]의 본진이었던 [[비후리야]]와 가까웠기 때문에, 그곳과 [[스테보니아주]] 일대를 차지했던 [[수르크사 카니겐국]]이 베르데트 왕조와 상대하게 되었다. 100년 전의 신틀로렌 회의로 얻어낸 동맹들을 통해 조용히 힘을 기르고 있던 베르데트 왕조는 이렇게 북방의 정치적 혼란이 지속됨을 노려 반격을 시작하였다. 초반에는 제대로 나아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4578년에는 [[마르소레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에레수리아현]] 방면으로 향하는 [[카니겐국]]의 보급로를 끊어내었고, 마침내 4589년에는 [[메르세클란의 설욕]]이라는 또 다른 대승으로 하여금 '''[[수도시|케핀토르]]를 탈환'''하였다. | |||
''그러나 [[수르크사 카니겐국]] 자체는 [[아리에티아 통일]]까지도 잔존하는 내내 베르데트 왕조와 힘겨루기를 하게 된다. 이들을 몰아낸 전쟁이 바로 [[제7차 에드렐로 전쟁]].'' | |||
4600년대는 [[카니겐국]]을 꺾었다는 자부심 하에, [[카르미나스 대왕]]과 같은 명군의 치세가 어우러진 '''전성기'''로 꼽힌다. 이 시기의 베르데트 왕조는 아리에티아 최강의 국가로서 군림했으며, 풍부하고 융성환 문화와 함께 [[코나베르 왕조]] 때 활성화되기 시작했던 [[아리에티아 연안항로]]를 통해 [[루메르스 신성 제국]] 등등과도 교역하였다. | 4600년대는 [[카니겐국]]을 꺾었다는 자부심 하에, [[카르미나스 대왕]]과 같은 명군의 치세가 어우러진 '''전성기'''로 꼽힌다. 이 시기의 베르데트 왕조는 아리에티아 최강의 국가로서 군림했으며, 풍부하고 융성환 문화와 함께 [[코나베르 왕조]] 때 활성화되기 시작했던 [[아리에티아 연안항로]]를 통해 [[루메르스 신성 제국]] 등등과도 교역하였다. |
2025년 6월 23일 (월) 00:03 기준 최신판
| |||||||||||
클레도리아 대왕국 կmpպωwiɥ ʮɥıʮmɥ𐒋ı௰iɥ[1] | |||||||||||||||||||||||||||||
---|---|---|---|---|---|---|---|---|---|---|---|---|---|---|---|---|---|---|---|---|---|---|---|---|---|---|---|---|---|
![]() |
![]() | ||||||||||||||||||||||||||||
국기 | 국장 | ||||||||||||||||||||||||||||
가호의 빛이여 초원을 밝히소서 fenin deris ah cleth al idràræidn[2] | |||||||||||||||||||||||||||||
상징 | |||||||||||||||||||||||||||||
국가 | 에운메의 노래 | ||||||||||||||||||||||||||||
스테보니아푸른동백 | |||||||||||||||||||||||||||||
헬리나르불사조 | |||||||||||||||||||||||||||||
역사 | |||||||||||||||||||||||||||||
4589년 6월 21일 메르세클란의 설욕, 수도 탈환 4617년 10월 9일 카르미나스 대왕 즉위 4668년 3월 27일 계곡의 반란, 배경전쟁 발발 4675년 6월 30일 상륙전쟁 발발 4769년 4월 21일 메리에데트 대왕 즉위 4802년 9월 1일 강변전쟁 발발 4811년 3월 19일 직계 단절, 방계 마르카르 가문으로 승계 4816년 2월 9일 아리에티아 통일전쟁 발발 4828년 3월 19일 아리에티아 통일, 클레도리아 제1제국으로 승계 | |||||||||||||||||||||||||||||
지리 | |||||||||||||||||||||||||||||
[ 펼치기 · 접기 ]
| |||||||||||||||||||||||||||||
하위 행정구역 | |||||||||||||||||||||||||||||
[ 펼치기 · 접기 ]
| |||||||||||||||||||||||||||||
인문 환경 | |||||||||||||||||||||||||||||
[ 펼치기 · 접기 ]
| |||||||||||||||||||||||||||||
정치 | |||||||||||||||||||||||||||||
[ 펼치기 · 접기 ]
| |||||||||||||||||||||||||||||
경제 | |||||||||||||||||||||||||||||
[ 펼치기 · 접기 ]
| |||||||||||||||||||||||||||||
단위 | |||||||||||||||||||||||||||||
[ 펼치기 · 접기 ]
| |||||||||||||||||||||||||||||
ccTLD | |||||||||||||||||||||||||||||
인터넷 발명 이전 | |||||||||||||||||||||||||||||
국가 코드 | |||||||||||||||||||||||||||||
도입 이전 | |||||||||||||||||||||||||||||
전화 코드 | |||||||||||||||||||||||||||||
전화 발명 이전 | |||||||||||||||||||||||||||||
![]() |
아리에티아의 지도[7] |
![]() |
개요
클레도리아 초공대왕국(Cledoría Caiclanithía), 약칭 클레도리아(Cledoría)[8], 별칭 클레도리아 제5왕국, 베르데트 왕조, 베르데트 클레도리아 왕국은 헬리나르 남동부 아리에티아 지역 동북부에 위치했던 전제 군주국이다. 베르데트 가문 혈통으로 이어진 초공대왕이 다스린 국가였으며, 407년의 다사다난한 중세 역사를 함께한 강국이었다.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며 아리에티아 동부를 석권했고, 수르크사 카니겐국의 남방 팽창을 저지한 동시에 고대로부터의 전통 문화를 수호하였다.
코나베르 왕조의 뒤를 이어 4421년 8월 26일에 건국, 클레도리아 통일이 완수된 4828년 3월 19일에 비로소 체제가 전환된다. 클레도리아 제1제국 초기에도 후베르데트 가문[9]은 유망한 재상 가문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그들의 행보는 계몽혁명 당시까지 남아있게 된다.
상징
역사
베르데트 왕조의 초기 역사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4421년 사르티노아의 치욕으로 수도 케핀토르가 함락되었고, 코나베르 가문은 숭고한 카니겐의 국가에 압송되었다. 송나라에서 일어났던 정강의 변을 연상시키는 이 사건 때문에 초공대왕 자리가 비게 되었다. 이에 베르데트 가문이 코나베르 가문의 가장 가깝고 유력한 방계의 자격으로 왕위를 물려받았고, 에셀리아시라는 망명수도에서 건국됨으로서 제5왕국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베르데트 왕조는 피란에 성공했고, 켄디레린 전투에서 카니겐군을 궤멸시키며 급한 불을 끄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전시의 혼란과, 한창 전성기를 달리고 있던 카니겐 숭고국의 압박 때문에 초기에는 나라를 유지하는 데부터 허덕였으며, 엄청난 군사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코나베르 클레도리아 왕국 당시만큼의 서방 영토를 유지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쿠그리드 왕에 의해 재차 전란의 위기가 촉발되자, 급박해진 왕국은 신틀로렌 회의를 통해 아리에티아 남부의 국가들의 방어 동참을 호소하였다. 베르데트 왕조가 에레수리아만 및 이데르강 통행을 조금 더 자유롭게, 싸게 풀어준다는 조건까지 제시할 정도로 절박했으나, 결국 남방의 국가들도 적극적으로 가세하겠다고 합의함으로서 비로소 안정화 국면에 접어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위 신틀로렌 회의 및 클레도리아 왕국 쪽 전선에서 다소 동떨어진 서북부의 이데리아 대공국이 카니겐 숭고국의 공격을 맞게 되었다. 이때 제2차 장성 전투가 일어났으며, 스트론티아 삼림연방을 필두로 한 서부 국가들의 필사적인 도움으로 하여금 방어해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데리아는 전쟁으로 인해 크나큰 타격을 입었으며, 이후로 한 세기간 이데리아의 2차 은둔이라는 철저한 중립/고립주의 노선을 타게 된다.
카니겐-이데리아 전쟁 이후 베르데트 왕조를 비롯한 아리에티아계 국가들의 북방 전란은 잦아들었다. 산발적인 국경 분쟁은 끊임없이 일어났지만, 그 정도뿐이었다. 여기에는 카니겐 숭고국이 베루디야나 지브로이아를 침공하는 것에 주력했기 때문이라는 점도 있었다. 이렇게 지속된 어중간한 소강상태로 수십 년을 보내게 되었는데, 카니겐 숭고국도 군주의 아들들 사이 계승 갈등 때문에 몇 나라로 갈라지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리에티아는 카니겐 숭고국의 본진이었던 비후리야와 가까웠기 때문에, 그곳과 스테보니아주 일대를 차지했던 수르크사 카니겐국이 베르데트 왕조와 상대하게 되었다. 100년 전의 신틀로렌 회의로 얻어낸 동맹들을 통해 조용히 힘을 기르고 있던 베르데트 왕조는 이렇게 북방의 정치적 혼란이 지속됨을 노려 반격을 시작하였다. 초반에는 제대로 나아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4578년에는 마르소레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에레수리아현 방면으로 향하는 카니겐국의 보급로를 끊어내었고, 마침내 4589년에는 메르세클란의 설욕이라는 또 다른 대승으로 하여금 케핀토르를 탈환하였다.
그러나 수르크사 카니겐국 자체는 아리에티아 통일까지도 잔존하는 내내 베르데트 왕조와 힘겨루기를 하게 된다. 이들을 몰아낸 전쟁이 바로 제7차 에드렐로 전쟁.
4600년대는 카니겐국을 꺾었다는 자부심 하에, 카르미나스 대왕과 같은 명군의 치세가 어우러진 전성기로 꼽힌다. 이 시기의 베르데트 왕조는 아리에티아 최강의 국가로서 군림했으며, 풍부하고 융성환 문화와 함께 코나베르 왕조 때 활성화되기 시작했던 아리에티아 연안항로를 통해 루메르스 신성 제국 등등과도 교역하였다.
그러나 4668년,
4828년 아리에티아 통일로 인해 마르카르 가문이 통치하는 클레도리아 제1제국으로 승계되었다.
자연 환경
영토
전성기 기준으로, 영토는 서쪽으로 현대의 스테보니아주 일부와 이데르현까지, 북쪽으로는 에르센디아주 전역과 에드렐로 산맥까지, 남쪽으로는 오르세이아주까지 뻗어나갔다. 그러나 계곡의 반란으로 인한 서방 영토 대거 상실, 상륙전쟁으로 인한 남쪽 변경 지역 상실, 배경전쟁으로 인한 지속적인 갈등 등 수많은 영토 변경이 있어왔기에 시대마다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