廣陽
북광양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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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국 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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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국 제17대 완디
神宗
신종
묘호 신종
(神宗)
시호 없음[1]
출생 1767년 9월 29일
키비크바 원고궁
사망 1840년 4월 1일 (72세)
키비크바 원고궁
능묘 명릉(明陵)
재위 원고국 완디
1780년 11월 9일 ~ 1840년 4월 1일 (59년)
연호 망고우파(萬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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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타시옥(棕星)
하야위(可義)
부모 친부: ???
모친: ???
배우자 인경황후

개요

원고 신종(元高 神宗)은 원고국 제23대 군주이자 제17대 완디이다. 또한 즉위 4년만에 요절함으로써 원고국에서 두번째로 짧은 재위 기간을 보유하게 된 아버지완 정반대로, 59년간 재위하여 원고국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군주이다.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숙부인 쿠한리자의 섭정을 받았으며, 이 시기에는 백성들의 삶에 큰 관심을 가지고 광양인들의 독립전쟁으로 초토화된 반도 서북부를 재건하려 노력하는 등 성군의 자질을 보여주었다. 또한 명종 대에 체계가 갖춰진 교통 사업을 당대에 맞게 정비하는 등, 광양의 독립 이후 침체된 국내 상업을 회복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때 원고국은 일시적으로 세조 대의 쇠퇴에서 벗어나 중흥기에 진입했으며 이를 만경중흥이라 부른다.

그러나 일찍 아버지를 여읜 신종에게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던 쿠한리자가 죽고 난 후, 신종은 조금씩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반 무신 사상을 가졌던 쿠한리자에 의해 억제되었던 무신 정권의 폐단이, 쿠한리자 사후 다시금 성행하여 이것이 마침 숙부를 잃고 슬픔에 잠긴 신종의 판단력까지 흐리게 한 것이었다. 무신들의 부정부패는 세조 이후 다시 성행하기 시작했고, 거기다 헌인대기근에 필적하는 만경대기근이 신종 재위기 중반동안 지속되면서 세조 대에 비해 기근률이 대폭 상승했다 이런 상황에 신종은 국무는 뒷전으로 미루고 자신과 친한 무신들과 놀러 다니는 등 어린 시절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암군으로 전락했다.

거기다 즉위 후반대에 무신 정권이 와무파와 입무파로 분열하자, 자신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와무파를 등에 업고 입무파를 숙청하려 하며 토사구팽을 시전했다. 결국 이로 인해 입무파인 마이시코가 반란을 일으켰고, 후일 반란을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한 예카파에 의해 신관파 정권이 시작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생애

쿠한리자의 섭정과 만경중흥

흑화, 그리고 만경대기근

입무파 숙청 시도

마이시코의 난과 죽음

평가

기타

  1. 황제는 관습적으로 시호를 가지지 않는다. 묘호는 황제만의 것인 반면 시호는 신하의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