廣陽
북광양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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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국 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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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지니 체제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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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화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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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국 제15대 완디
孝宗
효종
묘호 효종
(孝宗)
시호 없음[1]
출생 ?년 ?월 ?일
키비크바 원고궁
사망 ?년 ?월 ?일 (?세)
키비크바 원고궁
능묘 영릉(寧陵)
재위 원고국 완디
?년 ?월 ?일 ~ ?년 ?월 ?일
연호 와유탄(爲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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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타시옥(棕星)
오세(雪)
부모 친부: ???
모친: ???
배우자 인선황후
원고국 제15대 완디
孝宗
효종
출생 1723년 6월 3일
남경부 숙인궁 만복전
즉위 1755년 1월 29일
남경부 강덕궁 중문
사망 1776년 5월 3일 (52세)
남경부 강덕궁 천금전
능묘 숭릉(崇陵)
재위 원고국 완디
1755년 1월 29일 ~ 1776년 5월 3일 (21년)
연호 와유탄(爲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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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타시옥(棕星)
로(羅)
부모 친부: 효종
친모: 인선황후
형제자매 3남 1녀 중 2남
배우자 명성황후
자녀 2남 1녀
종교 양교
숭덕(崇德)
왕호 덕공대왕(德恭大王)
묘호 세조
(世祖)
시호 없음[2]

개요

원고 효종(元高 孝宗)은 원고국 제21대 군주이자 제15대 완디이다.

선선대부터 시작된 원고국의 최전성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황제로, 명종의 사망 이후 시작된 마코라-오아루 연맹의 침공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고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랴오 고원을 유린하는 등 군사적으로는 꽤 높게 평가받을 만한 황제였다.

그러나 정치적 능력은 전성기의 다른 황제들보다 현저히 떨어졌고, 자신과 가까웠던 무신들과 그 무신들이랑 친분이 있었던 문신들을 카운테에 대거 등용해 이른바 '무신 정권'이라고 불리는 기형적인 정치 구조를 만들어냈다.[3] 이로 인해 현대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업적에 기대어 가까스로 전성기를 유지한 무능한 군주로 평가된다.

이러한 위태로운 전성기는 후대인 세조 때 명주 전투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또한 효종 때 형성된 무신 정권은 세조를 넘어 신종 때까지 이어졌으며 신종 치세 말기 마이시코의 난이 벌어지고 중종 때 신관파 정권이 집권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한편 효심이 깊어 랴오 고원의 아버지의 업적을 칭송하는 비를 새기고 정기적으로 아버지의 묘를 찾아와 직접 풀을 뽑는 등 정치적 행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줬고 이로 인해 효종이라는 묘호가 붙었다. 그의 재위시절 발표한 연호마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위한다는 뜻의 와유탄(위천, 爲天)이었을 정도.

생애

즉위 이전

즉위와 랴오의 침공

원고국-랴오 전쟁

무신 정권

효심 깊은 왕

평가

기타

  1. 황제는 관습적으로 시호를 가지지 않는다. 묘호는 황제만의 것인 반면 시호는 신하의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
  2. 황제는 관습적으로 시호를 가지지 않는다. 묘호는 황제만의 것인 반면 시호는 신하의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
  3. 그러나 신원로파, 신관파 정권과는 달리 황제에게 실권이 있었기에 역사학자들은 무신 정권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권장하지 않는다. 이는 원로파, 탁백파->명공파도 마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