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색의 기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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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게모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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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년 7월 7일,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이 키르수스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키르수스는 신흥 강대국으로써 기존 강대국이던 그란치프, 에르미니아 등을 격파하며 헤로페로스벨트의 헤게모니를 확고히 한다. 전쟁의 승리로 제국 내에서는 민족적-국가적 열망이 다시금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여 “게비트Gebiet(영역)”와 같은 민족주의적 이념이 새로히 생겨났다. 민중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지크프리트 2세를 지지하며, 더 강력한 팽창 정책을 실시하길 원하였다. 그러나 지크프리트 2세는 전쟁 이후에도 소극적인 팽창 정책을 지지하였으며, 민중은 이에 대해 적지 않은 불만을 품었다. 그러던 1655년 1월 14일, 지크프리트 2세가 붕어한다. 이에 민중은 새로히 황제가 된 헤르베르트 3세에게로 기대가 집중되었으며, 헤르베르트 3세는 이를 증명하듯이 건국 기념일에 제국의회의사당 앞에서의 연설에서 이를 따를 것을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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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혈색의 기 ===
| 명칭      = 55년 사건
1655년 1월 18일, 헤르베르트 3세의 공격적 팽창 정책의 선언이 종료되자 굉음이 들리면서 황제 뒤를 장식하던 제국의회의사당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헤르베르트 3세는 제국황실부 장관 헤르만 디트리히 폰 하우스펜젤의 도움으로 무사하였으나 그 뿐만 아니라 다른 제국내각 장관들과 제국의회 의원들 대다수가 폭파 잔해물에 깔려 사망하였다. 황제와 제국수상의 생존으로 인해 제국정부는 명목상이라도 존속할 수 있게 되었으나, 외무부나 군무부 등 중요 장관이 사망하면서 권력에 큰 공백이 발생한다. 제국내각과 제국의회가 폭파 사건으로 완전히 궤멸된 상황에서 제국법원은 수사 끝에 카스텔부르크의 지하 공산주의 조직인 “슈베른란트 혈색 동맹”을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한다. 그러나 조사 과정에서 하루가 소비되었으며, 카스텔부르크 외부에서는 이미 여러 무장투쟁 공산주의자 단체들의 조직적인 반란이 발생하여 카스텔부르크로 진군하였다. 오후 10시경, 약 2만명의 반란군들은 미틀가르텐까지 진군하여 근위대 연대 하나가 투입되기까지 하였다.
| 원어명칭  = 55-Zwischenfall
| 전체      =  
| 사진      = <div style="margin: -7.0px -9.0px">[[파일:55-Zwischenfall.png]]</div>
| 날짜      = 1655년 1월 18일 - 20일
| 장소      = {{국기|키르수스}} [[카스텔부르크]]
| 결과      = 제국의회의사당 폭파 <br /> 사회주의자 사냥 <br /> [[사회주의법]] 제정
| 평화조약  =


1월 20일, 헤르베르트 3세는 계엄을 선포함과 동시에 군부 내 강경파로 소문난 “페르디난트 쿠르트 하인리히 하인츠 폰 리펜슈탈”을 임시 야전원수로 임명하고 전군의 통치권을 맡긴다. 페르디난트 폰 리펜슈탈은 카스텔부르크에 일개 보병 사단과 함께 대량의 기관총을 설치한다. 오후 1시, 수만의 군대가 배치되자 반란군들은 더욱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며 카스텔부르크궁으로 진격하였다. 현장 지휘관인 '에르빈 프란츠 괴츠 폰 가우로' 대위는 반란군들에게 어떠한 경고도 없이 바로 발포를 명령한다. 찢어지는 굉음과 함께 수많은 시체와 탄피가 바닥에 떨어졌다. 가우로 대위는 그의 회고록에서 “총탄과 함께 반란군은 세 무리로 갈라져 나갔다. 겁을 상실해 계속해서 돌격해오는 자들, 바닥에 널부러진 자들을 구하려 드는 자들, 도망치는 자들.”이라 회고하였다. 카스텔부르크궁에서 약 100m 앞에서 이루어진 발포는 반란군과 일반 시민들, 배치된 군인들, 심지어 카스텔부르크궁의 황실 구성원들까지 경악하게 만들었다. “힐데가르트 마리아 빅토리아 에밀리아 하이디 폰 마인” 황후는 헤르베르트 3세에게 페르디난트 폰 리펜슈탈을 해임할것을 촉구하였으나, 헤르베르트 3세는 “반란군들에게 배려하는 순간 우리는 반란군에게서 배려를 바라게 될 거요. 리펜슈탈은 반란군이 잊고 있던 우리의 배려를 가르쳐 줄 것이요.”라 말하며 결정의 번복은 없다 하였다.
| 교전국1  = {{국기|키르수스}}
| 교전국2  = {{국기나라 그림|Flag of Schwernland Blutverein.png}} [[슈베른란트 혈색 동맹]] <br /> [[전슈베로니아 사회주의 단결연합]] <br /> [[반군주주의적 사회운동동맹]]


반란군들은 가우로 대위의 기관총 사격에 대항하여 바리게이트를 쌓고 저항하였으나, 가우로 대위는 한술 더 떠 야전포와 박격포를 방렬하여 발포하였다. 대포가 화염을 내뿜을 때마다 바리게이트는 큰 구멍과 함께 열댓명의 반란군을 집어삼켰다. 전방에선 야전포와 기관총이, 하늘 위에선 박격포탄이, 후방에선 다른 보병 사단이 몰려오면서 결국 단 30시간 만에 반란군은 절반도 안되는 6천명만이 살아남아 항복하였다. 항복한 6천명 중 1,000여명은 처형되었으며, 나머지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 지휘관1  = {{국기그림|키르수스}} [[헤르베르트 3세]] <br /> {{국기그림|키르수스}} [[페르디난트 폰 리펜슈탈]] <br /> {{국기그림|키르수스}} [[에르빈 폰 가우로]]
| 지휘관2  = {{국기나라 그림|Flag of Schwernland Blutverein.png}} [[안톤 게르하르트]]


제국의회 의사당 폭파 사건과 반란을 통틀어 혈색의 기 사건이라 부르며, 이 사건에서 제국측에서는 350여명의 의원과 정부 인사들, 32명의 군인이 사망하였으나, 반란군 측은 만 4천명이 전사한다. 제국은 90%의 사망자가 제국의회 의사당 폭파로 인해 발생하였으며, 반란군 대부분은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바리게이트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혈색의 기 사건으로 인해 혁명 이후로 꾸준히 증가하던 반공 정서가 더욱더 심화되었으며, 헤르베르트 3세는 어떠한 정치적 발언을 할 때마다 항상 반공을 주창하였다. 제국 내에서 모든 공산주의 단체들은 금지되었으며, 헤르베르트 3세는 자신의 대관식 비용보다 더 많은 예산을 투자하여 현상금을 걸었다. 이로 인해 현상금 사냥은 제국 곳곳에서 벌어져 1655년 1년 동안 수천명의 공산당원이 체포되었다. 이후 1656년 제국의회 선거로 새로히 선출된 제국의회는 공산주의법을 제정하여 공식적으로 공산주의 단체들을 불법화 시킨다. 외부적으로 제국은 공산주의 국가들의 연합인 공화국 연맹에 대해 혈색의 기 사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였으며, 공화국 연맹은 해당 사건에 대해 연관성이 없다 주장하였으나, 사실과 국가 관계는 별개였다.
| 병력1    = 약 10,000명
| 병력2    = 약 20,000명
 
| 피해1    = '''사망자''' : 의원 및 내각 인사 약 350명, 32명의 군인
| 피해2    = '''사망자''': 약 14,000명 <br /> '''사형''': 약 1,000명 <br /> '''종신형''': 5,000명
}}
|}
 
'''55년 사건'''(<small>[[키르수스어]]:</small> 55-Zwischenfall <small>퓐프운트퓐프치히 츠비셴팔</small>) 혹은 '''혈색의 기 사건'''(<small>[[키르수스어]]:</small> Blutsflaggen-Zwischenfall <small>블루츠플라겐 츠비셴팔</small>)은 1655년 1월 18일부터 20일까지 [[슈베른란트 혈색 동맹]] 등의 사회주의 무장 단체들에 의한 테러이다. [[헤르베르트 3세]]가 건국식 중 [[키르수스 제국의회의사당]] 앞에서의 연설이 끝남과 동시에 의사당 건물이 테러로 붕괴되면서 발발하였다. 옥체는 무사하였으나 수 많은 의원이 폭발 및 파편에 사망하였다. 20일에는 사회주의 무장 단체들이 결집하여 [[카스텔부르크궁]] 바로 앞의 [[미틀가르텐]]까지 진군하였다. [[헤르베르트 3세]]는 [[키르수스 황립군|황립군]] 내의 강경파인 [[페르디난트 폰 리펜슈탈]]을 계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리펜슈탈은 그 뜻에 따라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하였다. 이로 인해 [[키르수스]]는 한동안 정치적 혼란에 빠졌으며, [[헤르베르트 3세]]를 필두로 강경한 반공주의가 제국에 뿌리박혔다.
 
== 배경 ==
1654년 7월 7일, 4년 간의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이 [[키르수스]]의 승전으로 종결된다. 그 시작은 비의도적이었으나 최종적으로 [[대영방전쟁]]의 패배 이후 [[슈베른-게이만 민족]]의 민족 국가가 숨죽이며 염원한 복수가 완성되었다. 수 백 년에 걸쳐 쌓인 요구가 터져 나왔으며, 승전제 [[지크프리트 2세]]는 그 막대한 짐을 짊어져야 했을 터였다. 그러나 나이에 의한 인간의 육체적 한계와 지난 4년 간의 과로, 그리고 개인적 이상에 따라 종전 이후 대대적인 팽창 정책은 수립되지 못했다. [[지크프리트 2세]]의 행보는 제국인민으로 하여금 불만을 가져왔으며, 이는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기간 동안 새싹을 피운 애국주의적이고 국수주의적이며 팽창주의적인 신생 극단주의 정당이 지지를 얻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던 1655년 1월 14일. [[지크프리트 2세]]가 심장마비로 붕어했다. 그의 뒤를 이어 [[헤르베르트 3세]]가 새로히 [[키르수스의 황제]]로 즉위했고, 그의 익히 알려진 팽창주의적인 성격은 [[지크프리트 2세]]의 우유부단한 팽창 정책에 불만을 품던 이들로 하여금 지지를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
 
=== 키르수스 사회주의 ===
사회주의는 [[키스수스]] 이전 [[아슈트카이트 영방국가연합]]의 철학자로부터 기원했음이 정론이다. [[신념교]]의 가치관에서 기원한 중세 사회주의는 '모두가 평등히 신과 황제의 은혜를 입을 방도'를 목적으로 해 최초로 '공동재산' 개념을 기록에 남겼다. [[굴욕과 부흥 전쟁]]과 [[40년 전쟁]]을 거치며 기존 통치·사회 질서의 붕괴가 이루어졌고, 이는 복구 과정에서 본격적인 자본주의화를 겪게 했다. 점진적으로 농노 해방이 이루어지자 1520년부터 태동한 산업혁명은 [[베른하이어]]에 강한 영향력을 지니게 된 [[키르수스]]로 수입되는데 바탕을 완성했다. 산업혁명에 의해 자본가 계층과 노동자 계층으로의 빈부격차를 동반한 양분이 일어났고, 이는 '공동재산' 개념이 다시금 주목받게 만든다. 산업혁명의 최전선이던 [[베른하이어]]에서는 평등한 재산 분배를 통해 '공동재산'을 이룩하고자 하는, 일명 [[에피크루주의]]라 불린 노동자 계층과 지식인들의 사회적 관념이 형성되어 있었다. [[키르수스]]의 자유주의자인 [[노이엘벤 미흐트]](Neuhelben Micht)가 이러한 [[에피크루주의]]를 수입해 최초로 소개한 것을 시작으로 [[키르수스]] 내에서도 이, [[사회주의]]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진다. 이러한 연구에 앞서 언급한 [[노이엘벤 미흐트]]와 그의 학파가 중심을 차지했고, 그가 [[키르수스]]의 의회제 운동의 일원이었던 만큼 그의 이념인 [[미흐트주의]](<small>[[키르수스어]]:</small> Michtismus)는 의회로 하여금 사회를 대표시키며, [[에피크루주의]]와 달리 국가를 긍정했다. 당연히 이러한 수정주의적인 시각은 [[키르수스]] 에피크루주의자인 [[하인리히 벨제]], 의회로 사회를 대표시키되 국가의 해체를 주장하는 [[아르멘 카를젠]]의 카를렌주의자들로 하여금 비판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노이엘벤 미흐트]] 본인 또한 자신의 이념을 사회적 의회국가주의라 칭한 만큼 전통적인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미흐트주의]]는 [[사회주의]]의 분파로 보기는 어려우나, 그가 [[에피크루주의]]를 [[키르수스]]에 소개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키르수스]] 사회주의사에 중요한 인물인 것은 확실하다. [[키르수스]]의 사회주의는 앞서 설명한 [[하인리히 벨제]] 등의 [[에피크루주의]]나 [[아르멘 카를젠]](Armen Karlsen)의 [[카를제니즘]](<small>[[키르수스어]]:</small> Karlsenismus), 국가와 계급을 철폐하되 [[신념교]]를 중심으로 사회를 대표하고자 한 [[카를 폰 오스트크렌]](Karl von Ostkren)의 [[신념교사회주의|오스트크레니즘]](<small>[[키르수스어]]:</small> Ostkrenismus) 등 활발한 연구가 진행됐다. 1590년 대에는 [[코르보날]]에서 [[미하우-도만타스주의]]가 발흥하며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다. 미흐트주의자인 [[에른스트 라덴슈타인]]은 [[미흐트주의]]에 [[미하우-도만타스주의]]의 복지국가 이론을 차용해 [[미흐트-라덴슈타인주의]]로 발전시켰으며, [[하인츠 라일레]], [[만프레트 페레지엔]] 등의 미하우도만타스주의 연구자 또한 등장했다.  
 
== 경과 ==
 
== 결과 ==
 
== 같이 보기 ==
 
[[분류:프론트 포커스]]

2024년 1월 19일 (금) 01:52 판

 
55년 사건
55-Zwischenfall
날짜 1655년 1월 18일 - 20일
장소 키르수스 키르수스 카스텔부르크
결과 제국의회의사당 폭파
사회주의자 사냥
사회주의법 제정
교전국
지휘관
병력
약 10,000명 약 20,000명
피해
사망자 : 의원 및 내각 인사 약 350명, 32명의 군인 사망자: 약 14,000명
사형: 약 1,000명
종신형: 5,000명

55년 사건(키르수스어: 55-Zwischenfall 퓐프운트퓐프치히 츠비셴팔) 혹은 혈색의 기 사건(키르수스어: Blutsflaggen-Zwischenfall 블루츠플라겐 츠비셴팔)은 1655년 1월 18일부터 20일까지 슈베른란트 혈색 동맹 등의 사회주의 무장 단체들에 의한 테러이다. 헤르베르트 3세가 건국식 중 키르수스 제국의회의사당 앞에서의 연설이 끝남과 동시에 의사당 건물이 테러로 붕괴되면서 발발하였다. 옥체는 무사하였으나 수 많은 의원이 폭발 및 파편에 사망하였다. 20일에는 사회주의 무장 단체들이 결집하여 카스텔부르크궁 바로 앞의 미틀가르텐까지 진군하였다. 헤르베르트 3세황립군 내의 강경파인 페르디난트 폰 리펜슈탈을 계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리펜슈탈은 그 뜻에 따라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하였다. 이로 인해 키르수스는 한동안 정치적 혼란에 빠졌으며, 헤르베르트 3세를 필두로 강경한 반공주의가 제국에 뿌리박혔다.

배경

1654년 7월 7일, 4년 간의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키르수스의 승전으로 종결된다. 그 시작은 비의도적이었으나 최종적으로 대영방전쟁의 패배 이후 슈베른-게이만 민족의 민족 국가가 숨죽이며 염원한 복수가 완성되었다. 수 백 년에 걸쳐 쌓인 요구가 터져 나왔으며, 승전제 지크프리트 2세는 그 막대한 짐을 짊어져야 했을 터였다. 그러나 나이에 의한 인간의 육체적 한계와 지난 4년 간의 과로, 그리고 개인적 이상에 따라 종전 이후 대대적인 팽창 정책은 수립되지 못했다. 지크프리트 2세의 행보는 제국인민으로 하여금 불만을 가져왔으며, 이는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기간 동안 새싹을 피운 애국주의적이고 국수주의적이며 팽창주의적인 신생 극단주의 정당이 지지를 얻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던 1655년 1월 14일. 지크프리트 2세가 심장마비로 붕어했다. 그의 뒤를 이어 헤르베르트 3세가 새로히 키르수스의 황제로 즉위했고, 그의 익히 알려진 팽창주의적인 성격은 지크프리트 2세의 우유부단한 팽창 정책에 불만을 품던 이들로 하여금 지지를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

키르수스 사회주의

사회주의는 키스수스 이전 아슈트카이트 영방국가연합의 철학자로부터 기원했음이 정론이다. 신념교의 가치관에서 기원한 중세 사회주의는 '모두가 평등히 신과 황제의 은혜를 입을 방도'를 목적으로 해 최초로 '공동재산' 개념을 기록에 남겼다. 굴욕과 부흥 전쟁40년 전쟁을 거치며 기존 통치·사회 질서의 붕괴가 이루어졌고, 이는 복구 과정에서 본격적인 자본주의화를 겪게 했다. 점진적으로 농노 해방이 이루어지자 1520년부터 태동한 산업혁명은 베른하이어에 강한 영향력을 지니게 된 키르수스로 수입되는데 바탕을 완성했다. 산업혁명에 의해 자본가 계층과 노동자 계층으로의 빈부격차를 동반한 양분이 일어났고, 이는 '공동재산' 개념이 다시금 주목받게 만든다. 산업혁명의 최전선이던 베른하이어에서는 평등한 재산 분배를 통해 '공동재산'을 이룩하고자 하는, 일명 에피크루주의라 불린 노동자 계층과 지식인들의 사회적 관념이 형성되어 있었다. 키르수스의 자유주의자인 노이엘벤 미흐트(Neuhelben Micht)가 이러한 에피크루주의를 수입해 최초로 소개한 것을 시작으로 키르수스 내에서도 이, 사회주의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진다. 이러한 연구에 앞서 언급한 노이엘벤 미흐트와 그의 학파가 중심을 차지했고, 그가 키르수스의 의회제 운동의 일원이었던 만큼 그의 이념인 미흐트주의(키르수스어: Michtismus)는 의회로 하여금 사회를 대표시키며, 에피크루주의와 달리 국가를 긍정했다. 당연히 이러한 수정주의적인 시각은 키르수스 에피크루주의자인 하인리히 벨제, 의회로 사회를 대표시키되 국가의 해체를 주장하는 아르멘 카를젠의 카를렌주의자들로 하여금 비판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노이엘벤 미흐트 본인 또한 자신의 이념을 사회적 의회국가주의라 칭한 만큼 전통적인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미흐트주의사회주의의 분파로 보기는 어려우나, 그가 에피크루주의키르수스에 소개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키르수스 사회주의사에 중요한 인물인 것은 확실하다. 키르수스의 사회주의는 앞서 설명한 하인리히 벨제 등의 에피크루주의아르멘 카를젠(Armen Karlsen)의 카를제니즘(키르수스어: Karlsenismus), 국가와 계급을 철폐하되 신념교를 중심으로 사회를 대표하고자 한 카를 폰 오스트크렌(Karl von Ostkren)의 오스트크레니즘(키르수스어: Ostkrenismus) 등 활발한 연구가 진행됐다. 1590년 대에는 코르보날에서 미하우-도만타스주의가 발흥하며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다. 미흐트주의자인 에른스트 라덴슈타인미흐트주의미하우-도만타스주의의 복지국가 이론을 차용해 미흐트-라덴슈타인주의로 발전시켰으며, 하인츠 라일레, 만프레트 페레지엔 등의 미하우도만타스주의 연구자 또한 등장했다.

경과

결과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