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iger von Kircuss
키르수스의 황제
Herbert I
헤르베르트 1세
Eberhard I
에버하르트 1세
Eberhard II
에버하르트 2세
재위
1423년 1월 18일 ~ 1436년 5월 28일
재위
1436년 5월 28일 ~ 1458년 1월 30일
재위
1458년 1월 30일 ~ 1464년 4월 8일
생몰
1372년 2월 18일 ~ 1436년 5월 28일
생몰
1399년 6월 13일 ~ 1458년 1월 30일
생몰
1427년 8월 11일 ~ 1464년 4월 8일
Adelbert I
아델베르트 1세
Herbert II
헤르베르트 2세
Eberhard II
헤르베르트 1세
재위
1464년 4월 8일 ~ 1492년 9월 14일
재위
1492년 9월 14일 ~ 1541년 12월 2일
재위
1541년 12월 2일 ~ 1558년 1월 26일
생몰
1451년 11월 29일 ~ 1492년 9월 14일
생몰
1473년 9월 3일 ~ 1541년 12월 2일
생몰
1495년 5월 22일 ~ 1558년 1월 26일
Adelbert II
아델베르트 2세
Adelbert III
아델베르트 3세
Siegfried I
지크프리트 1세
재위
1558년 1월 26일 ~ 1584년 6월 11일
재위
1584년 6월 11일 ~ 1608년 4월 30일
재위
1608년 4월 30일 ~ 1631년 8월 13일
생몰
1519년 8월 17일 ~ 1584년 6월 11일
생몰
1542년 5월 6일 ~ 1608년 4월 30일
생몰
1568년 9월 11일 ~ 1631년 8월 13일
Siegfried II
지크프리트 2세
Herbert III
헤르베르트 3세
재위
1631년 8월 13일 ~ 1655년 1월 14일
재위
1655년 1월 14일 ~ 현재
생몰
1593년 2월 24일 ~ 1655년 1월 14일
생몰
1626년 3월 19일 ~ 현재
 
헤르베르트 3세
Herbert III
임기 1655년 1월 14일 ~ 현재
전임 지크프리트 2세
후임 현직
이름 디트리히 헤르베르트 하인츠 빌헬름 루트비히 카를
국적 키르수스 키르수스
출생일 1626년 3월 19일
출생지 키르수스 키르수스 카스텔부르크
가문 마그리히가
부친 지크프리트 2세
모친 빅토리아 폰 고첼부르크
배우자 힐데가르트 폰 마인
자녀 지크프리트 폰 키르수스 황태자

힐데가르트 폰 키르수스 황녀
플로리안 폰 키르수스 황자
베른하르트 폰 키르수스 황자
카를 폰 키르수스 황자
프란치스카 폰 키르수스 황녀
요제피네 폰 키르수스 황녀

학력 아델베르트 카스텔부르크 대학교
종교 황제교
군사 경력

헤르베르트 3세(Herbert III, 1626년 3월 19일 ~ )는 키르수스의 황제이다. 본명은 "디트리히 헤르베르트 하인츠 빌헬름 루트비히 카를(Dietrich Herbert Heinz Wilhelm Ludwig Karl)"이며, 지크프리트 3세빅토리아 폰 고첼부르크 사이에서 태어났다.

생애

즉위 이전

출생

헤르베르트 3세는 1626년 3월 19일 키르수스 카스텔부르크 슈텔스부르크성에서 지크프리트 3세빅토리아 폰 고첼부르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부터 황위 계승자였으며, 출생 이후로 요절한 카를 제베 폰 키르수스 황자를 제외하고는 남동생이 없었다. 그의 주변은 대부분의 경우 헤르베르트의 요구를 맞춰줬으며, 욕심없고 유순한 지크프리트 2세 또한 그랬다. 헤르베르트의 유일한 남동생이던 카를 제베 폰 키르수스 황자는 그가 10살일적 요절했는데, 이는 헤르베르트에 대한 황후의 집착이 심화되는 일을 불러왔다. 카를 제베는 태어날 때부터 연약해 잔병치레를 자주 했다. 황후가 제베 황자를 직접 간호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4살에 요절했던 것이였다. 이미 제베 황자를 황후가 간호하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헤르베르트를 향한 여러 제약이 걸려왔었는데, 제베의 사망은 이를 심화시켰다. 10년 가까운 생 동안 원하는 것은 모두 다 했던 헤르베르트에게는 매우 불만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는 여러차례 빅토리아 황후에게 반항하였으나 변하는 것은 황후와의 관계 뿐이었다.

청소년기·성년기

10살이 된 헤르베르트는 여느 키르수스의 황제가 그러했던 것처럼 제1근위보병연대에 소위로 임관한다. 헤르베르트는 군에 흥미를 보이며 적극적으로 임하였다. 군은 황후의 제약으로부터 도망치기에 제격이었다. 점차 부대에서의 생활이 늘어났다. 헤르베르트는 부대에서 생활하는 동안 연대장인 후겐 폰 베조 소령으로부터 군사와 관련된 지식을 교육받았다. 군사적 지식을 소양함과는 별개로 헤르베르트는 결국 차기 황제로쎠의 인문학적 지식이 필요했다. 군대에 빠진 헤르베르트는 정치학을 공부할 것을 요구하는 지크프리트 2세의 요구를 계속해서 거절하다 지크프리트 2세로부터 연대에서 제명되기에 이른다. 헤르베르트는 그의 결정에 분노하며 길길히 날뛰다 지크프리트에 의해 제압되기도 하였다. 무기한의 근신 처분을 받게 된 헤르베르트는 결국 지크프리트에게 승복하며 인문학 공부를 하게되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연대에 다시 복권되었다.

한 차례의 소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헤르베르트는 결과적으로 공부에 재미를 붙이게 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연대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보였기에 지크프리트 2세로부터 아델베르트 카스텔부르크 대학교에 입학을 허락받았다. 하지만 헤르베르트의 공부 환경은 그때까지 오직 황실 내에서 가정교사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대학교와 같이 평범한 학생들과 같이 공부하는 삶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의 사교적이지 못하고 독단적인 성격은 다른 학생들과 자주 충돌을 빚었으며, 심지어 교사와도 갈등을 겪었다. 1년 남짓한 대학 생활 동안 그는 수십번의 결투를 벌이는 등 행실이 좋지 않았다. 결국 1년도 채 되지 않아 헤르베르트는 자퇴를 하게 된다.

아델베르트 카스텔부르크 대학교에 입학할 당시 지크프리트 2세와 이를 두고 논쟁한 끝에 힐데가르트 폰 마인과의 정략결혼을 대가로 입학을 허락받았다. 대학교 입학 직후 둘은 약혼하였다. 비록 자의에 따르지 않은 결정이었으나, 힐데가르트 폰 마인은 순종적이었기에 헤르베르트와 별다른 갈등을 겪지 않았다. 또한 그가 대학교에 진학 중일 때 그의 공부를 보좌했으며, 때때로 그가 다른 학생들과 결투를 벌일 때에는 무운을 빌며 그의 컨디션을 관리했다. 대학교를 자퇴한 이후 마인은 그의 결정을 지지해 줬으며, 이를 계기로 헤르베르트가 마인을 받아들인 것으로 추측된다. 헤르베르트가 대학교를 자퇴한 이후인 1649년, 둘은 결혼식을 올린다.

1650년 8월 2일,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이 발발한다. 그 즉시 헤르베르트 3세는 소장으로 승진하여 제7군의 (명예)최고지휘관이 된다. 최고지휘관에 임명된 직후 국경 전투에서 제7군을 지휘하여 그란치프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냈다. 1651년 봄, 그란치프군이 전열을 재정비해 템페르트 공세를 가했고, 키르수스군의 전선에 혼란이 온다. 키르수스군은 대규모 후퇴를 결정했고, 제7군은 후퇴하는 A 분견군의 후방을 안정시키는 작전에 투입되었다. 제7군은 꽤나 큰 피해를 입었으나 성공적으로 A 분견군의 후방을 보호하는데 성공하고 성공적으로 후퇴한다. 템페르트 공세 이후 1654년까지 헤르베르트의 제7군은 별다른 작전에 투입되지 않았다. 1654년 8월, 추계 공세가 개시되어 키르수스의 전선 전역에서 부대의 공격이 개시된다. 제7군 또한 추계 공세에 투입되어 A 분견군그란치프의 수도를 점령할 때 우익을 보강하였다.

즉위 이후

즉위와 혈색의 기 사건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이후 대륙의 패권은 명백하게 키르수스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많은 키르수스 인민들이 팽창을 외칠 때 지크프리트 2세는 별다른 야욕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헤르베르트는 지크프리트 2세와는 정반대로 전쟁을 불사하고서라도 키르수스는 팽창하고 전 세계의 패권을 잡아야 한다 믿었다. 이는 30년 가까이 별다른 갈등이 없던 부자 관계에 갈등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지크프리트 2세의 건강은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중반부터 악화되어 점차 절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1655년 1월 14일, 지크프리트 2세가 붕어하고 헤르베르트 3세가 키르수스의 황제로 즉위한다.

키르수스의 황제로 즉위한 헤르베르트 3세는 1월 18일 즉위식 당일, 즉위식을 마치고 키르수스 제국의회의사당 앞에서 그의 팽창 정책을 선언했다. 선언을 마치고 헤르베르트 3세가 계단을 내려오려 할 때, 굉음과 충격파가 그의 주변을 뒤덮는다. 키르수스 제국의회의사당이 불순분자에 의해 폭파되었다. 일명 혈색의 기 사건이라 불린 일련의 사건이 시작되었다. 헤르베르트 3세는 키르수스 제국황실부장관이던 헤르만 디트리히 폰 하우스펜젤 덕에 살아남았으나, 그와 제국수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키르수스 제국의회의사당이었던 잔해에 깔려 죽었다. 사건은 슈베른란트 혈색 동맹이라는 지하 공산주의 단체의 짓으로 판명났다.

1월 19일, 슈베른란트 혈색 동맹를 비롯한 키르수스의 지하 공산주의 단체들이 카스텔부르크 외곽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오후 10시에 그들은 2만 명의 규모로 미텔가르텐에 발을 내딪었다. 1월 20일, 헤르베르트 3세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경파로 소문난 페르디난트 폰 리펜슈탈을 계엄군 사령관에 임명한다. 소문대로 그는 반란군에게 화기를 조준했다. 에르반 폰 괴츠 대위가 현장을 맡았다. 대위는 그 어떠한 경고도 없이 발포를 명했다. 슈텔스부르크궁에서 고작 100m 떨어진 곳에서 행해졌다. 이를 본 힐데가르트 폰 마인은 경악하며 페르디난트 폰 리펜슈탈을 임명한 것를 최소할 것을 요청했으나 헤르베르트 3세는 단호히, "반란군들에게 배려하는 순간 우리는 반란군에게서 배려를 바라게 될 거요. 리펜슈탈은 반란군이 잊고 있던 우리의 배려를 가르쳐 줄 것이요."라 말하며 두둔했다.

혈색의 기 사건 이후 헤르베르트 3세는 극단적으로 반공을 추구하였다. 만약 슈베른란트 혈색 동맹대전쟁을 발발케 한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헤르베르트 3세를 성공적으로 암살하지 못했다는 것일터다. 헤르베르트 3세와 함께 키르수스 인민 모두가 반공을 부르짖었다. 여러 차례 공화국 연맹과의 국경에서는 분쟁이 벌어졌으며, 키르수스 내부에서는 공산주의자 사냥이 벌어졌다. 헤르베르트 3세는 혈색의 기 사건 직후 공산주의자들에게 현상금을 걸어 사냥을 선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들은 때때로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헤르베르트 3세는 다시금 이를 진압했다.

계획과 개혁

대전쟁

평가와 비판

가족 관계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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