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 사건
55-Zwischenfall
날짜 1655년 1월 18일 - 20일
장소 키르수스 키르수스 카스텔부르크
결과 제국의회의사당 폭파
사회주의자 사냥
사회주의법 제정
교전국
지휘관
병력
약 10,000명 약 20,000명
피해
사망자 : 의원 및 내각 인사 약 350명, 32명의 군인 사망자: 약 14,000명
사형: 약 1,000명
종신형: 5,000명

55년 사건(키르수스어: 55-Zwischenfall 퓐프운트퓐프치히 츠비셴팔) 혹은 혈색의 기 사건(키르수스어: Blutsflaggen-Zwischenfall 블루츠플라겐 츠비셴팔)은 1655년 1월 18일부터 20일까지 슈베른란트 혈색 동맹 등의 사회주의 무장 단체들에 의한 테러이다. 헤르베르트 3세가 건국식 중 키르수스 제국의회의사당 앞에서의 연설이 끝남과 동시에 의사당 건물이 테러로 붕괴되면서 발발하였다. 옥체는 무사하였으나 수 많은 의원이 폭발 및 파편에 사망하였다. 20일에는 사회주의 무장 단체들이 결집하여 카스텔부르크궁 바로 앞의 미틀가르텐까지 진군하였다. 헤르베르트 3세황립군 내의 강경파인 페르디난트 폰 리펜슈탈을 계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리펜슈탈은 그 뜻에 따라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하였다. 이로 인해 키르수스는 한동안 정치적 혼란에 빠졌으며, 헤르베르트 3세를 필두로 강경한 반공주의가 제국에 뿌리박혔다.

배경

1654년 7월 7일, 4년 간의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키르수스의 승전으로 종결된다. 그 시작은 비의도적이었으나 최종적으로 대영방전쟁의 패배 이후 슈베른-게이만 민족의 민족 국가가 숨죽이며 염원한 복수가 완성되었다. 수 백 년에 걸쳐 쌓인 요구가 터져 나왔으며, 승전제 지크프리트 2세는 그 막대한 짐을 짊어져야 했을 터였다. 그러나 나이에 의한 인간의 육체적 한계와 지난 4년 간의 과로, 그리고 개인적 이상에 따라 종전 이후 대대적인 팽창 정책은 수립되지 못했다. 지크프리트 2세의 행보는 제국인민으로 하여금 불만을 가져왔으며, 이는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기간 동안 새싹을 피운 애국주의적이고 국수주의적이며 팽창주의적인 신생 극단주의 정당이 지지를 얻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던 1655년 1월 14일. 지크프리트 2세가 심장마비로 붕어했다. 그의 뒤를 이어 헤르베르트 3세가 새로히 키르수스의 황제로 즉위했고, 그의 익히 알려진 팽창주의적인 성격은 지크프리트 2세의 우유부단한 팽창 정책에 불만을 품던 이들로 하여금 지지를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

키르수스 사회주의

사회주의는 키스수스 이전 아슈트카이트 영방국가연합의 철학자로부터 기원했음이 정론이다. 신념교의 가치관에서 기원한 중세 사회주의는 '모두가 평등히 신과 황제의 은혜를 입을 방도'를 목적으로 해 최초로 '공동재산' 개념을 기록에 남겼다. 굴욕과 부흥 전쟁40년 전쟁을 거치며 기존 통치·사회 질서의 붕괴가 이루어졌고, 이는 복구 과정에서 본격적인 자본주의화를 겪게 했다. 점진적으로 농노 해방이 이루어지자 1520년부터 태동한 산업혁명은 베른하이어에 강한 영향력을 지니게 된 키르수스로 수입되는데 바탕을 완성했다. 산업혁명에 의해 자본가 계층과 노동자 계층으로의 빈부격차를 동반한 양분이 일어났고, 이는 '공동재산' 개념이 다시금 주목받게 만든다. 산업혁명의 최전선이던 베른하이어에서는 평등한 재산 분배를 통해 '공동재산'을 이룩하고자 하는, 일명 에피크루주의라 불린 노동자 계층과 지식인들의 사회적 관념이 형성되어 있었다. 키르수스의 자유주의자인 노이엘벤 미흐트(Neuhelben Micht)가 이러한 에피크루주의를 수입해 최초로 소개한 것을 시작으로 키르수스 내에서도 이, 사회주의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진다. 이러한 연구에 앞서 언급한 노이엘벤 미흐트와 그의 학파가 중심을 차지했고, 그가 키르수스의 의회제 운동의 일원이었던 만큼 그의 이념인 미흐트주의(키르수스어: Michtismus)는 의회로 하여금 사회를 대표시키며, 에피크루주의와 달리 국가를 긍정했다. 당연히 이러한 수정주의적인 시각은 키르수스 에피크루주의자인 하인리히 벨제, 의회로 사회를 대표시키되 국가의 해체를 주장하는 아르멘 카를젠의 카를렌주의자들로 하여금 비판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노이엘벤 미흐트 본인 또한 자신의 이념을 사회적 의회국가주의라 칭한 만큼 전통적인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미흐트주의사회주의의 분파로 보기는 어려우나, 그가 에피크루주의키르수스에 소개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키르수스 사회주의사에 중요한 인물인 것은 확실하다. 키르수스의 사회주의는 앞서 설명한 하인리히 벨제 등의 에피크루주의아르멘 카를젠(Armen Karlsen)의 카를제니즘(키르수스어: Karlsenismus), 국가와 계급을 철폐하되 신념교를 중심으로 사회를 대표하고자 한 카를 폰 오스트크렌(Karl von Ostkren)의 오스트크레니즘(키르수스어: Ostkrenismus) 등 활발한 연구가 진행됐다. 1590년 대에는 코르보날에서 미하우-도만타스주의가 발흥하며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다. 미흐트주의자인 에른스트 라덴슈타인미흐트주의미하우-도만타스주의의 복지국가 이론을 차용해 미흐트-라덴슈타인주의로 발전시켰으며, 하인츠 라일레, 만프레트 페레지엔 등의 미하우도만타스주의 연구자 또한 등장했다.

경과

결과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