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수스
Kircuss
키르수스 제국
Kircusses Foligerreich
1423년 - 현재
국가 제국을 위해 기를 들어라
표어 Aus Schweronia nach Kircuss
( 슈베로니아에서 키르수스까지 )
100%
수도 카스텔부르크
최대 도시
면적 4,550,350 km²
황제
1423년 - 1436년 헤르베르트 1세
1436년 - 1458년 에버하르트 1세
1458년 - 1464년 에버하르트 2세
1464년 - 1492년 아델베르트 1세
1492년 - 1541년 헤르베르트 2세
1541년 - 1558년 에버하르트 3세
1558년 - 1584년 아델베르트 2세
1584년 - 1608년 아델베르트 3세
1608년 - 1631년 지크프리트 1세
1631년 - 1655년 지크프리트 2세
1655년 - 현재 헤르베르트 3세
스톰강 협약 611년 5월 18일
제국 선포 1423년 1월 18일
슈베른란트 통일 전쟁 1508년 - 1509년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1650년 - 1654년
인문 환경
인구 전체 인구 327,289,120명
민족 구성 인간 99.9%
슈베른-게이만 민족 88.3%
기타 11.6%

아인종 0.1%

인구 밀도 71.92명/km²
출생률 34.3명
출생 인구 11,226,016명
사망률 22.3명
사망 인구 7,298,547명
기대 수명 49.3
성비 1.03
공용어 키르수스어
공용 문자 슈베른 문자
종교 키르수스 신념교 94.7%
기타 5.3%
군대 키르수스 황립군
세부 군대 육군 키르수스 황립육군
해군 키르수스 황립해군
공군 키르수스 황립공군
기타군 키르수스 황립향토방위군
행정구역
행정
구역
16개의 주
33개의 현
59개의 군급시, 227개의 군
정치
경제
경제 체제 혼합 경제
명목
GDP
전체 GDP 1142억 8940만 ℳ
1인당 GDP 349 ℳ
화폐 공식 화폐 폴리거마르크 (ℳ)
(1ℳ = 금 약 358mg)
코드와 단위
단위 법정연호 건국력
도량형 MM-DD-YYYY
운전석
(통행방향)
좌측
(우측)
이전 국가
다음 국가
파일:Flag of Aschtkeit.png  아슈트카이트 영방국가연합  
파일:Flag of Kingdom of Lausitzburg.png  라우지츠부르크 왕국  
  알레마니아 왕국  
  아미시아란트 왕국  
  아스크라리아 왕국  


키르수스 제국(키르수스어: Kircusses Foligerreich 키르쿠세스 폴리거라이히) 혹은 제국(키르수스어: Foligerreich 폴리거라이히)는 헤스페로스벨트에 위치한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서쪽으로 에르미니아와 남쪽으로 베른하이어, 코르보날, 게파르토, 동쪽으로 그란치프, 사회주의 보편국가연합과 접한다. 수도는 카스텔부르크이며, 슈베르부르크, 발츠부르크, 루티지, 호피히스부르크, 아우스하펜 등의 대도시가 위치한다. 키르수스의 영토는 4,550,350km²이며, 주로 온대 기후를 보인다. 1670년 기준 3억 2700만 명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인구의 99.9%가 인간이며, 공용어는 키르수스어이다.

1423년, 아슈트카이트 영방국가연합의 맹주인 라우지츠부르크 왕국에 의해 건국되었다. 건국 당시 라우지츠부르크 왕국, 알레마니아 왕국, 아미시아란트 왕국, 아스카리아 왕국으로 구성된 연방 국가였으나, 1508년부터 1509년 사이 중앙집권적 개혁에 따른 반발과 라그렌센트 왕국의 영향으로 인해 발발한 슈베른란트 통일 전쟁에서 라우지츠부르크 왕국이 승전하면서 현재와 같은 단일 국가가 되었다. 슈베른란트 통일 전쟁에 참전한 라그렌센트 왕국을 해외 공국으로 두었으며, 이후 헤스페로스벨트의 산업혁명에 편승하여 공업화를 이루어내었다. 슈베른란트 통일 전쟁 이후 긴 평화시기를 거쳤으나, 제국을 둘러싼 외교적인 긴장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란치프 제국의 혼란을 계기로 발발한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은 수적·지리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승전으로 마무리되었으며, 제국은 대륙 패권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 직후 발생한 사회주의자들의 준동인 55년 사건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 게파르토 제국과의 국지전, 동방의 사회주의 국가 연합인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의 발흥과 제국에 대한 침공 야욕으로 인해 계속되는 긴장감이 조성되었다. 그 결과 제국은 비대한 군대를 계속 유지하게 되어 큰 경제적 짐을 안게 된다. 1664년, 라슬리시 상황을 통해 게파르토 제국 내의 정치 혼란에 개입하며 에세르에 대해 지배권을 지니게 되나, 황립육군 소속의 일개 장교에 의한 64년 위기의 발생으로 외교·경제·정치적 상황은 더욱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제국은 입헌군주제 의원제각제 단일 국가이다. 키르수스의 황제를 국가원수로하며, 황제키르수스 제국헌법에 의해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 군권, 외교권을 지니고 있으며, 키르수스 제국수상키르수스 제국내각을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다. 또한 키르수스의 황제는 제국을 대표하며, 제국신민의 통합의 주체이며, 신체불가침권을 지닌다. 키르수스 제국수상황제에 의해 임명되어 제국내각을 구성한다. 또한 키르수스 제국의회를 주재한다. 키르수스 제국의회양원제로써 16개 제국주에서 선출된 키르수스 제국주의회와 제국신민의 투표에 의해 선출된 키르수스 제국인민의회로 구성된다. 키르수스 제국인민의회는 매 4년마다 치뤄지는 제국의회선거에서 각 선거구에서 선출된 422명의 의원으로 구성된다. 키르수스 제국인민의회는 비교적 약한 권한을 지니고 있으나, 키르수스 제국헌법에 의해 예산안을 결정하는 권한이 종속한다. 제국은 삼심제에 의거하여 키르수스 제국법원, 키르수스 제국주법원, 키르수스 제국군법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키르수스 제국법원은 5명의 키르수스 제국대법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목차
1 국명

제국의 국명은 공식적으로 "키르수스 제국"(키르수스어: Kircusses Foligerreich 키르쿠세스 폴리거라이히)이며, 주로 "키르수스"(키르수스어: Kircuss 키르수스) 혹은 "제국"(키르수스어: Foligerreich 폴리거라이히)라 부른다. "키르수스"는 고대 슈베르어의 원(圓)을 뜻한 circus가 그 어원으로 중세에 이르러 Kircuss으로 변화하며 하늘, 신권 등을 의미하게 되었다. "폴리거라이히"는 "폴리거"(Foliger)에 국가를 뜻하는 reich가 붙어 이루어진 단어로, Foliger게이만어에서 수행하다, 복종하다를 의미하는 folgēn접미사 -er을 붙인 단어가 변화한 것으로 제정일치의 최고 통치자 및 신(Gott)의 대리자를 의미하여 아슈트카이트 연합황제키르수스의 황제가 해당 칭호를 차용하였다.

언어별 명칭
키르수스어 Kircuss
Kircusses Foligerreich
그란치프어 Lausitzbourg
Empire d'Lausitzbourg
알레니아어 Sweronia
Sweronian Foligerrealm
에르미니아어 Kircuss
Kircusan Reino Emperador
에세르어 Kirtus
Kirtusijské foligerříšský
2 역사

제국이 존속하고 있는 슈베른란트 지역에는 약 90만 년 전부터 인간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블린트란트에서 청동기 문화가 꽃피었으며, 암흑력 10세기 무렵에는 비셴란트에서 아사른인에 의한 철기 문화가 이룩되었다. 이러한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비센란트 끝자락에서부터 성장한 슈베로니아 왕국슈베른란트를 통일하고 건국력 1년에 슈베로니아 제국을 선포하면서 건국력의 기준이 된다. 그러나 운타란트에서의 긴 기간 동안의 반란과 550년 대의 게이만족의 대이동으로 결국 582년 멸망한다. 슈베로니아 제국의 멸망 이후 슈베른란트에는 슈베른-게이만 민족들의 여러 부족 국가들이 난립하였고, 611년, 스톰강 협약을 통해 10개의 왕국과 4개의 변경국가로 이루어진 아슈트카이트 영방국가연합이 탄생한다. 일명 협약체제라 불리는 구조로 안정적인 팽창을 가했고, 헤스페로스벨트의 패권국이 된다. 그러나 대영방전쟁에서 대패하고 동서굴욕을 겪으며 쇠퇴, 협약체제가 붕괴되었고, 부흥파황제파굴욕과 부흥 전쟁이 발발한다. 5년의 전쟁 끝에 부흥파가 승리하여 부흥체제가 설립되었으나, 곧 라우지츠부르크 왕국오타카레 왕국 간의 권력 다툼으로 40년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40년 전쟁라우지츠부르크 왕국의 승리로 종전되었으나, 연합은 황폐화되었고, 내부적으로는 마인사냥이 발생하면서 10여 년의 혼란기를 거치게 된다. 그리고 1423년, 라우지츠부르크 왕국을 중심으로 알레마니아 왕국, 아미시아란트 왕국, 아스카리아 왕국이 연합한 키르수스 제국이 건국된다.

2-1 제국 선포

40년 전쟁이라는 거대한 전쟁은 라우지츠부르크 왕국슈베른란트의 지배권을 확립시켜주면서도 동시에 슈베른란트를 황폐화시켜 고난을 안겨주었다. 전쟁이 끝난 후 제국이 선포되기까지 10여 년의 시간은 이러한 데에서 왔다. 라우지츠부르크의 헤르베르트 1세헤르베르트 2세는 제국을 선포하기 이전 그 밑바탕을 세우고 공고히했다. 1423년 1월 18일, 제국이 선포된다. 헤르베르트 2세아슈트카이트 시절 라우지츠부르크 왕국을 초월한다는 명목으로 존호를 헤르베르트 1세로 결정한다. 제국은 황제의 직할령 뿐만 아니라 방계의 오타카레 왕국, 드라이히 왕국, 지틀란트 왕국아스크라리아 왕국, 아미시아란트 왕국, 알레마니아 왕국40년 전쟁에서의 동맹국들로 구성된 연방 국가였다. 그들은 독자적인 정부와 법, 군대를 지녔으며, 이에 대해 불가침성을 지녔다. 그중 가장 문제되던 것이 독자적인 군대로 제국에는 현재 황립군과 같은 통합된 군대가 없었다. 라우지츠부르크 왕국과 위에서 말한 네 왕국의 군대가 독립되어 유지되다가 전시에 하나의 체계로 묶이는 구조였다. 네 왕국의 군대는 그 왕국의 군주에게 충성하며 얼마든지 황제에게 위협이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제국 초기, 제국은 이들의 통합을 우선시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들에게는 40년 전쟁의 유산이 남아있었다.

마그리히가 방계 왕국들의 통합은 에버하르트 1세가 즉위하면서 이루어졌다. 네 왕국들의 반발이 있었으나 방계 왕국들은 성공적으로 카스텔부르크에 통합되었다. 그러나 이들 방계 왕국과 40년 전쟁으로 합병한 왕국들의 행정 체계는 제각각이었고, 이는 제국 선포 이전 10년 간의 기간 동안에도 완전히 통합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에버하르트 1세는 방계 왕국들의 통합을 기회삼아 카스텔부르크에 남은 아슈트카이트의 마지막 흔적을 지우는 개혁을 진행한다. 이를 위해 올리버 하이덴 폰 이스틴데레키르수스 수석각료로 임명한다. 개혁은 새무의 확충을 목적으로 중앙 행정과 지역 행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옛 왕국들에는 지방 정부(Landesregierung)가 수립되어 카스텔부르크에 귀속되었다. 라우지츠부르크 지방 정부를 제외한 각 지방 정부들은 독자적인 세무위원회를 지녔고, 모두 동일한 기준에 따라 세금이 매겨졌다. 라우지츠부르크 지방 정부카스텔부르크의 세무위원회에 소속되었다.

에버하르트 1세 말기, 그는 확대된 세무 수입을 바탕으로 토지 개혁을 목표하였다. 당시 수석각료이던 하인츠 알브레히트 폰 슈넬는 토지 개혁에 반대했기에 그를 해임하고 에리히 폰 메게를 새 수석각료로 임명했다. 그러나 개혁을 시작하기도 전에 건강 악화로 국정에서 손을 놓았고, 이후 에버하르트 2세가 즉위하면서 토지 개혁이 재개된다. 제국토지위원회는 토지 조사를 바탕으로 토지 재분배를 실시한다. 그러나 토지 개혁에 대한 지주 귀족들의 반발, 특히 드라이히 지방의 지주 귀족들의 반발로 인해 토지 개혁은 절반뿐인 성공으로 종료되었고 이에 대한 책임으로 에리히 폰 메게가 사임하였다. 토지 개혁과 동시에 에버하르트 2세의 개인적인 취미로 라우지츠부르크의 문화는 융성하였다. 현재 황제가 거주하는 카스텔부르크성이 이 시기에 지어졌으며, 오페라 하우스와 같은 여러 문화 건물이 속속들이 들어섰다. 이 문화의 시대는 에버하르트 2세가 붕어하면서 막을 내렸다.

2-2 지연에 의한 지연

에버하르트 2세의 8년 뿐인 치세는 어느 하나도 완성하지 못한체 끝이 났다. 새로 즉위한 아델베르트 1세는 고작 13살의 나이로써 그의 삼촌인 빌헬름 폰 키르수스 황자가 섭정을 맡았다. 빌헬름 폰 키르수스 황자에버하르트 1세의 사남으로으로써 완전히 황위 계승으로부터 동 떨어져 있었다. 후계자 수업은 받지 않고 군에 복무하며 지주 귀족 출신 장교들과 연을 쌓고 문화적 소양과 담을 쌓았다. 섭정이 된 그는 에버하르트 2세 치기 동안 세워진 여러 건축물에 대해 예산을 삭감하거나 민간에 매각했고, 생전에 계획된 여러 건설 계획들을 폐기했다. 에버하르트 2세의 문화적 흔적은 궁(그로쓰바움부르크궁)의 궁정명예직과 고용인들로도 남아 있어 그들 또한 일자리를 잃었다. 그렇게 해서 축적한 금고는 그의 지주 귀족 지인들에게 돌아갔다. 폰 자이렌도르프, 폰 슈벨란트, 폰 베스트로덴, 폰 슈탈레타움 등을 중심으로 여러 지주 귀족 가문들이 특혜를 받았다.

빌헬름 폰 키르수스 황자의 섭정은 단순히 6년 간 지속되었지만 그 동안 에버하르트 2세 치기 동안의 개혁을 뒤집어 엎었을 뿐더러 오히려 악화시켰다. 아델베르트 1세는 대관식을 치룬 이후 빌헬름 섭정으로부터 기원한 막대한 짐을 떠받쳐야 했다. 새 수석각료로 하이덴 슈텔마흐 폰 뢰네슈페인을 임명하고 제국토지위원회를 가동하기 시작한다. 아델베르트 1세는 그의 선대가 겪은 저항보다 더욱 거대한 저항을 맛보았다. 4대 빌헬름 지주 귀족가를 중심으로 형성된 지주 귀족들의 집단 반발은 위기를 불러 일으킨다. 당시 군 부대들은 각 지방의 지주 귀족들에 의해 조직되었었는데, 지주 귀족들은 이를 가지고 카스텔부르크를 위협했다. 이러한 반발에 제국토지위원회는 몇 년간 대치 상태를 유지했다. 1469년, 결국 지지부진한 토지 개혁의 성과에 하이덴 슈텔마흐 폰 뢰네슈페인은 해임되고 제국토지위원회는 해산되었다.

제국토지위원회가 몇 년 간 지지부진하는 동안, 아델베르트 1세는 선대가 채워놓은 황실의 금고를 사용하여 라우지츠부르크군을 증강했다. 군대의 증강은 슈베른란트가 통일된 이후부터 계속해서 진행되어 오던 것으로, 40년 전쟁 직후 라우지츠부르크군의 전투 병력이 8만 명 20개 연대(대부분이 미완편 편제)이던 것이 에버하르트 1세 사후엔 30만 명 40개 연대, 아델베르트 1세 즉위 당시엔 50만 명 70개 연대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강되었다. 이를 지탱한 것이 에버하르트 1세의 조세·행정 개혁이었고, 이는 제국토지위원회의 토지 개혁이 미완인 상태에서도 예산에 자금적 여유를 주었다. 아델베르트 1세의 치기는 총 28년의 장대한 기간이었는데, 이 기간 동안에도 군대는 증강되어 최종적으로 100만 명 135개 연대로 증강되었는데, 이는 키르수스 성립 이후로 인구가 약 6천 만 명에서 1억 3천 만 명으로 증가할 동안 군대는 8만 명에서 100만 명으로 증가한 셈이 된다.

아델베르트 1세 치기의 군대 육성은 선대의 군대 육성과 다른 점이 있는데, 기존의 군대 육성이 그들의 숫자만 증가한 것이라면, 아델베르트 1세의 군대 육성은 숫자를 증가시키는 동시에 그들의 전투력 또한 증가시켰다. 육군 전체가 같은 구경의 총기와 총알을 썼으며, 총검 또한 같았다. 복장 또한 각 연대원끼리는 동일한 복장과 그들의 연대를 표현할 연대기, 연대 장식 등을 지정해서 착용하도록 하였다. 열병 훈련체제 또한 발전을 더해 험지에서의 대규모 부대의 기동성이 증가되고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화력 투사 또한 가능케 했다. 부대의 변화 뿐만 아니라 모병제가 아닌 지역적인 징병제의 도입은 완벽한 국민개병을 이루게 하였다. 징병은 일정하게 정해진 연대의 칸톤에서 칸톤의 지역민을 징병하고 휴가와 예비군 제도를 통해 경제적 타격을 줄이는 등 현대적인 체계를 갖추었다.

2-3 토지와 중앙 정계와 농천의 변화

하이덴 슈텔마흐 폰 뢰네슈페인의 해임 이후 네 개의 주요 지주 귀족 가문은 더욱더 많은 권리를 얻고자 서로를 견제하며 분열했다. 그 사이 뢰네슈페인의 후임 수석각료들은 천천히 지주 귀족들의 밑바닥을 갉아먹었다. 주로 이들의 축소되어 보고된 재산을 조사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거대 지주 귀족 가문들도 이를 모르는 것을 아니었으나 당장의 위협은 그들 간의 이권 다툼이었다. 그러던 1474년, 새로 폰 베스트로덴의 가주가 된 요아힘 메르테 폰 베스트로덴이 새 수석각료에 오른다. 그는 삼남으로써 카스텔부르크의 각료 집단에 속한 이었다. 법에 의하면 폰 베스트로덴의 가주는 장남이 되어야 했으나, 장남과 차남이 모두 사고로 사망함으로써 가주의 위치에 오른다. 가주가 된 지 얼마되지 않아 아델베르트 1세에 의해 수석각료로까지 발탁된다.

요아힘 메르테 폰 베스트로덴이 수석각료로 취임한 직후 제국의 세무, 군무, 토지를 아우르는 제국관리총국이 세워진다. 제국관리총국은 카스텔부르크에 완전히 종속된 제국의 세무 뿐 아니라, 일부분 지역 지주 귀족들에게 속해 있는 군무, 지주 귀족들이 그들의 이름대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토지를 완전히 카스텔부르크에 종속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지주 귀족들에게는 40년 전쟁의 혼란으로 붕괴되고 남은 이권을 뺏어가는 것이었기에 소식이 알려지자 폰 베스트로덴을 제외한 세 지주 귀족 가문들을 중심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사교계에서 발이 넓던 요아힘 메르테 폰 베스트로덴은 그에 걸맞는 정보들을 지니고 있었고, 거기다 공권력까지 더해짐으로써 승산이 없는 싸움으로 흘러갔다. 더군다나 이미 5년 가까이 분열되어 있던 지주 귀족들은 연합에 있어서 불협화음을 보였다.

1476년, 폰 하인도렌을 마지막으로 귀족들의 연대들은 모두 카스텔부르크에 통제권이 넘어갔고, 본격적으로 토지 개혁이 시작된다. 그동안 지주 귀족들이 숨기던 토지들을 확보하고, 그들이 소작농으로부터 받는 비용을 제한했다. 그러나 신고되지 않은 토지를 몰수하는 과정에서 지주 귀족 출신 관료에 의한 횡령이 발생하여 관료 집단에 대한 조사를 위해 토지 개혁은 잠시 정지되었다. 관료 내부의 문제를 해결한 이후 1479년, 요아힘 메르테 폰 베스트로덴은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하고, 그의 후임으로 그가 추천한 오이덴 하인리히 폰 라임바겐이 취임하여 토지 개혁을 이어나갔다. 10여 년에 가까운 토지 개혁은 한때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던 네 지주 귀족 가문들을 중앙에서 완전히 내치고 그 자리를 관료들이 차지한다.

토지 개혁은 당연하게도 농촌의 변화를 불러왔다. 기존의 지주 귀족들의 거대 영지는 조각나 새로운 지주들을 만들어 냈다. 토지 개혁 이후 일시적으로 자주농이 증가하였으나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이었다. 오히려 넓은 지역을 다스리던 거대 영지가 농촌 공동체 단위로 줄어들어 지주들 간의 관계가 밀접해졌다. 더군나 지역 연대의 존재는 마을 단위이던 농촌 공동체를 지역 연대로 묶인 다른 마을들 간의 관계로 확장시킨다. 훗날의 이야기지만, 소규모 영지를 지닌 지주들은 과거 중세의 지주 귀족이 아닌 새로운 지주 귀족을 이룬다.

농촌 간의 끈끈한 관계의 형성은 중앙 정부의 관료제가 자리 잡기를 저항하는 주요한 원동력이 된다. 연으로 이루어진 농촌의 관계에 있어서 중앙 정부의 관료제는 일반적인 이방인도 아닌 자신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이방인이었다. 그렇기에 때로는 지주들과 소작농들이 관료들을 찾아가 항의하거나, 심할 경우 무장한 지역 연대원들이 이들을 협박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농촌의 보수성으로 인한 관료제의 미정착은 백 여 년 뒤 산업화와 전쟁으로 무너진다.

2-4 군제통합과 반라우지츠부르크

1492년, 헤르베르트 2세가 즉위한다. 즉위 직후부터 그는 제국 내의 4개의 군제를 통합하여 자신의 명령을 따르는 황립군을 창설하고자 한다. 아델베르트 1세 시기에 라우지츠부르크군은 모든 부대가 카스텔부르크의 지휘를 받게 되었지만, 남부 3개 왕국들은 여전히 독자적인 군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는 왕국들이 행정의 영역 뿐만 아니라 합당한 무력의 수단으로 카스텔부르크를 향해 언제든지 불만을 표출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더해서 헤르베르트 2세는 어렸을 때부터 지주 귀족들의 행포를 보고 자랐는데, 그들이 지역 연대의 통제 권한을 잃자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어렸을 때의 단순한 논리 과정을 거친 것이지만, 실제로 지주 귀족들의 군사력 제거가 이후 토지 개혁에 영향을 미친건 사실이다. 그랬기에 그는 황제의 권력은 그 무엇도 아닌 무력에 기반한다 여겼으며, 이를 위해서 무력을 오직 황제의 휘하에 두고자 했다.

남부 3왕국, 아미시아란트 왕국, 알레마니아 왕국, 아스크라리아 왕국40년 전쟁 당시 라우지츠부르크 왕국과 같은 편에 서 오타카레 왕국 및 그들의 동맹과 대척했다. 전쟁은 라우지츠부르크 왕국 측의 승리로 종결되었으며, 그렇게 제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40년 전쟁이 20년을 바라보고 있을 무렵, 대규모 회전에서 대승을 거둔 동맹은 그란치프의 공격에 거대한 타격을 입게 되는데, 이때의 충격은 전쟁을 40년이나 지속하게 만들고, 나아가 라우지츠부르크 왕국이 남부의 세 왕국들에 대한 영향력을 제국 수립 이전 10년 간의 회복기 동안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박살낼 정도로 거대했다. 결국 영향력 회복을 실패한 라우지츠부르크 왕국은 그들을 동등한 제국의 구성원으로 인정하면서 겨우 제국을 성립할 수 있었다.

헤르베르트 2세라우지츠부르크군의 군사 개혁을 주장하며 즉위 초부터 군 내 조직 개선에 힘썼다. 이 군 개혁은 라우지츠부르크군에게 부대의 단위를 연대에서 사단으로 바꾸는 등 변화를 가져다 주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본질적으로는 새로운 황립군의 성립을 위한 밑바탕을 구축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부의 세 왕국들은 헤르베르트 2세의 낌새를 눈치채고 카스텔부르크의 군제 통합에 대비하기 시작한다. 헤르베르트 2세아델베르트 1세가 중앙의 지휘를 받는 연대를 신설하여 지주 귀족들의 연대를 무력화시킨 것처럼 부대의 증가를 통해 수적 우위를 차지하고자 했으나, 세 왕국들은 모두 제국의 구성국으로서 군무에 대해 쉽게 접근 가능했다. 그들은 효용성을 문제 삼아 라우지츠부르크군의 증강을 거부했다. 카스텔부르크와 세 왕국들은 서로의 정보를 서로 너무 자세히 알고 있었다.

남부의 세 왕국들은 역사적으로 제국 남쪽에 위치한 라그렌센트 왕국, 현재 베른하이어와 긴밀한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과거 아슈트카이트 영방국가연합 시절에는 그들이 연합 남부에 거대한 동군연합을 유지하기도 했으며, 제국 시기에 이르러선 라우지츠부르크 왕국에 대항하는 남부 세 왕국들에게 자금적 여유를 제공했다. 라우지츠부르크 왕국의 제국 통합은 라그렌센트 왕국의 남부 세 왕국들과 긴밀한 관계를 통한 무역 이점 확보라는 목적에 큰 걸림돌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남부의 세 왕국들을 지원하며 반라우지츠부르크 전선을 형성했다.

2-5 슈베로니아 통일 전쟁

1508년 1월 11일, 루티지슈베르베르크 경계의 슈트롬강에서 라우지츠부르크 왕국 지틀란트지방 소속의 무역상과 알레마니아 왕국 소속의 무역상 사이에서 발생한 갈등에 라우지츠부르크군알레마니아군이 모두 출동했다. 양 군대는 서로의 수사권을 우선시하며 갈등을 빗었고, 주먹다짐으로까지 발화되었다. 다음날, 양국이 관련자 처벌을 서로 약속하면서 갈등은 해결된 듯 보였으나, 1월 18일, 건국일 기념식에서 헤르베르트 2세가 해당 사건을 언급하며 군제통합의 기치를 내세운다. 이에 반라우지츠부르크 왕국들은 일제히 반발했다. 그러나 헤르베르트 2세는 물러서지 않고 각 군의 통제권을 양도할 것을 통첩한다. 당연히 3왕국은 이를 거절했고, 1월 24일, 헤르베르트 2세는 이들 세 왕국의 행보를 반란으로 규정하며 슈베른란트 통일 전쟁이 발발한다.

전쟁의 중심은 아미시아란트 왕국이 차지했다. 아미시아란트 왕국알레마니아 왕국과 비슷한 국력을 지녔기에 반라우지츠부르크 전선에 있어서 1/3에 달하는 전력을 차지했다. 라우지츠부르크 왕국에 있어 아미시아란트 왕국 자체가 거대한 돌출부였으며, 엔브라의 산맥만 넘으면 바로 라우지츠부르크였다. 다만 알레마니아 왕국과 교류가 쉽지 않아 고립된 형국이었기에 앞으로의 전쟁 전개를 위해서 아미시아란트 왕국라우지츠부르크 왕국에 있어선 반드시 제거해야하는 목표이자, 반라우지츠부르크 전선에 있어선 지틀란트를 점령해 전선을 연결하기 전까지 버텨야 하는 방패였다.

선공은 라우지츠부르크군이었다. 아미시아강 상류와 하류 양쪽에서 몰아쳤다. 그러나 나엔 전투에서의 패배로 공세는 돈좌됐고, 그 사이 남쪽 산악지대에서 아스크라리아군의 습격을 받아야 했다. 알레마니아 왕국의 공격을 받아치고 재정비한 라우지츠부르크군은 다시금 아미시아란트 왕국에 대해 공세를 개시했다. 헤르베르트 2세가 직접 친정한 공세는 총 다섯 방향의 대규모 공세였고 숫적으로 열세인 아미시아란트 왕국은 수도를 중심으로 방어진을 구성한다. 아미시아란트 왕국의 분전 소식이 전해지자 알레마니아군은 공세를 강화하고, 그로 인해 발생한 틈으로 지원군을 급파했다. 지원군은 무사히 합류하나, 루티지를 넘진 못했다. 반면 지속적으로 산맥을 통해 소규모 공격을 감행해오던 아스크라리아군아미시아란트 왕국의 위기에 대대적인 공세를 가해 엘젠푸르트를 타격했다. 후방에서의 기습에 하이델베르크를 공격하던 라우지츠부르크군의 시선이 분산되어 최종적으로 하이델베르크의 방어에 성공한다.

엘젠푸르트를 사수했으나 이전에도 주요 지역들에 비해 보급역량이 미약하던 엔브라-프레니아의 보급 문제는 더욱 커졌고, 아미시아강 상류로 하여금 동쪽에서 몰아치는 군세를 수정하여 아미시아강 북안에서 남진하도록 변경시켰다. 하이델베르크아미시아란트 왕국 동쪽 지역에 대한 공격력은 확연히 감소하였으나 수도인 마로부르크를 다방면에서 타격할 위치를 선점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아미시아란트 왕국알레마니아 왕국 간의 지원 루트가 미약하게나마 구축되었고, 아미시아란트 왕국 또한 방어선을 충분히 구축하는 등 초기의 항복을 위시한 속전속결 작전은 우려스러웠다. 가을, 공세를 시작한 라우지츠부르크군은 초기에는 마로부르크를 몰아붙였으나, 아미시아란트군 동군의 공격에 돈좌돼 우려대로 공세는 흐지부지 끝나게 된다. 공세의 실패로 총사령관 프리드리히 폰 아젠도르프는 해임되었다. 이후 이루어진 3왕국의 공세에 라우지츠부르크군은 총체적인 패배를 겪게 되었고, 엔브라프레니아, 플라니아 절반을 상실했다. 3왕국의 공세가 소강상태에 이르면서 대대적인 군제개혁을 이루게 된다.

3왕국의 공세가 종료된 1510년 3월부터 1512년 여름까지 전쟁은 소강 상태에 이르렀다. 소규모 전투가 여럿 있었으나 전투의 형세를 바꾸지는 못했고, 서로가 암묵적으로 2년 간의 피해를 복구하였다. 3왕국은 방계 왕가나 중세 귀족들로 점령지에 괴뢰정부를 세우고 통치했다. 3왕국이 단순히 피해를 복구하고 점령지를 유지하는데 2년을 소비했다면 라우지츠부르크 왕국대장군참모 제도를 도입하고, 사단 제도를 보완하고 국민군 제도를 도입했다. 비록 적은 기간으로 인해 본격적인 효과는 기대할 수 없었으나, 당시로서는 충분한 효과를 보였고, 이후 1세기 이상까지 그 효과를 증명했다.

1512년 8월, 알덴부르크, 쿠르마르크, 엘젠푸르트 총 세 방면으로 3왕국의 공세가 시작되며 소강 상태가 깨졌다. 3왕국 측에게 있어 대대적인 공세였으나 라우지츠부르크군은 간단히 공세를 저지하고 되려 공세를 가했다. 역공을 맞은 연합군은 크게 패해 1509년 획득한 점령지 대다수를 잃고 후퇴했고, 다시금 마로부르크가 위기에 놓였다. 엔브라 지역의 탈환이 우선적이었기에 마로부르크를 향한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아미시아란트 왕국아미시아강을 방어선 삼아 겨우 연명했다. 1512년 겨울, 대대적인 공세는 종료되었음에도 계속적으로 이루어진 하이델베르크 공격은 결국 라우지츠부르크 왕국의 승리로 이루어졌고, 아미시아란트 왕국은 제2의 도시를 잃게 되었다. 1513년 봄, 라우지츠부르크군은 기습적으로 헬데니아의 산맥을 넘어 알레마니아아스크라리아를 타격했고, 아스크라리아 왕국은 일시적으로 수도인 마인을 함략당했다. 3왕국의 후방을 타격한 라우지츠부르크군은 대승에도 불구하고 보급 문제가 발목을 잡아 점령지에서 퇴각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전쟁의 승패가 라우지츠부르크 왕국에 넘어갔음을 시사함과 동시에 두 왕국이 이제까지는 거들떠 보지도 않던 국경 산악 지대에 전력이 분산됨을 야기했다.

3 자연 환경
3-1 지리

제국의 영토는 슈베른란트라 불리는 지역으로 헤스페로스벨트 최대의 산맥인 리니츠펠트 산맥팔로렌스 산맥에 둘러쌓여있다. 북쪽으로는 성단양과 접한다. 리니츠펠트 산맥팔로렌스 산맥에서 발원한 4개의 큰 강이 성단양으로 흐른다. 서쪽에서부터 슈트롬강, 아미시아강, 플루스강, 란트강으로, 슈트롬강아미시아강비셴란트로, 플루강란트강휘겔란트로 흐른다.

3-2 기후
4 정치
4-1 황제

Foliger von Kircuss
키르수스의 황제
Herbert I
헤르베르트 1세
Eberhard I
에버하르트 1세
Eberhard II
에버하르트 2세
재위
1423년 1월 18일 ~ 1436년 5월 28일
재위
1436년 5월 28일 ~ 1458년 1월 30일
재위
1458년 1월 30일 ~ 1464년 4월 8일
생몰
1372년 2월 18일 ~ 1436년 5월 28일
생몰
1399년 6월 13일 ~ 1458년 1월 30일
생몰
1427년 8월 11일 ~ 1464년 4월 8일
Adelbert I
아델베르트 1세
Herbert II
헤르베르트 2세
Eberhard II
헤르베르트 1세
재위
1464년 4월 8일 ~ 1492년 9월 14일
재위
1492년 9월 14일 ~ 1541년 12월 2일
재위
1541년 12월 2일 ~ 1558년 1월 26일
생몰
1451년 11월 29일 ~ 1492년 9월 14일
생몰
1473년 9월 3일 ~ 1541년 12월 2일
생몰
1495년 5월 22일 ~ 1558년 1월 26일
Adelbert II
아델베르트 2세
Adelbert III
아델베르트 3세
Siegfried I
지크프리트 1세
재위
1558년 1월 26일 ~ 1584년 6월 11일
재위
1584년 6월 11일 ~ 1608년 4월 30일
재위
1608년 4월 30일 ~ 1631년 8월 13일
생몰
1519년 8월 17일 ~ 1584년 6월 11일
생몰
1542년 5월 6일 ~ 1608년 4월 30일
생몰
1568년 9월 11일 ~ 1631년 8월 13일
Siegfried II
지크프리트 2세
Herbert III
헤르베르트 3세
재위
1631년 8월 13일 ~ 1655년 1월 14일
재위
1655년 1월 14일 ~ 현재
생몰
1593년 2월 24일 ~ 1655년 1월 14일
생몰
1626년 3월 19일 ~ 현재
4-2 행정
4-2-1 제국수상
4-2-2 제국내각

Foligerreichskabinett Sanzberg
잔츠베르크 제국내각
1659년 2월 11일 -
Foligerreichskanzler
제국수상
Heinrich Siegfried von Sanzberg
하인리히 지크프리트 폰 잔츠베르크
1659년 2월 11일
|
국민자유당
Foligerreichsvizekanzler
제국부수상
Ludwig Armein von Stafelwersen
루트비히 아르마인 폰 슈타펠베르젠
1659년 2월 11일
|
국가보수당
Folgerreichsfoligerhausminister
제국황실부장관
Siegfried Leud-Ausen von Hauspensel
지크프리트 로이트아우젠 폰 하우스펜젤
1659년 2월 11일
|
무소속
Folgerreichsauswärtigminister
제국외무부장관
Friedrich Ostel von Südpehron
프리드리히 오스텔 폰 쥐트페론
1659년 2월 11일
|
1660년 3월 1일
국민자유당
Paul Eusen von Char-Kaschwern
파울 오이젠 폰 하를카슈베른
1660년 3월 1일
|
국가보수당
Foligerreichsinnerminister
제국내무부장관
Ferdinand Orben von Maurinlohe
페르디난트 오르벤 폰 마우린로헤
1659년 2월 11일
|
국민자유당
Foligerreichsjustizminister
제국법무부장관
Robert Eisel von Ohlfe und Rahesel
로베르트 아이젤 폰 올페 운트 라에젤
1659년 2월 11일
|
1660년 3월 3일
국가보수당
Hart Friedrich von Lurheim
하르트 프리드리히 폰 루르하임
1660년 3월 3일
|
국민자유당
Foligerreichsmiliärminister
제국군무부장관
Karl Florian von Naselse
카를 플로리안 폰 나젤제
1659년 2월 11일
|
무소속
Foligerreichspostminister
제국체신부장관
Maria Ostel von Möhe-Wez
마리아 오스텔 폰 뫼헤베츠
1659년 2월 11일
|
국가보수당
Foligerreichswirtschaftminister
제국경제부장관
Anton Braum
안톤 브라움
1659년 2월 11일
|
국민자유당
Foligerreichsnahrungminister
제국식량부장관
Osthart Karl Wilhelm von der Launbe
오스트하르트 폰 데어 라운베
1659년 2월 11일
|
1660년 3월 1일
국가보수당
Peter Klaus von Karwergen
페터 클라우스 폰 카르베르겐
1660년 3월 1일
|
농민당
Foligerreichsverkehrminister
제국교통부장관
Ernst Till von Asfursen
에른스트 틸 폰 아스푸르젠
1659년 2월 11일
|
국민자유당

키르수스 제국내각제국수상에 의해 조각되며, 총 9개의 제국부로 구성된다. 제국수상에 의해 작성된 임명안은 제국인민의회의 동의를 거쳐 황제의 승인을 통해 현실화된다. 단, 이때 제국황실부장관제국군무부장관의 인사등용은 각각 황제황립군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1655년 제국인민의회 선거 이전까지는 1개의 여당이 정권을 수립하였으나,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당시의 개혁의 영향으로 정권 구성에 제국인민의회 의석 수의 중요성 증가와 다당제화, 신생정당들의 원내 진입 등으로 연립정권이 구성되고 있다.

4-3 입법
4-3-1 제국주의회

Foligerreichsprovinzrat
키르수스 제국주의회
Foligerreichsproinzrat
7. Sept 1661 - 16. März 1666
 Foligerreichsregierung
Reichskonservative Partei
국가보수당
Kircusser Nationalliberale Partei
키르수스 국민자유당
Kircusser Bauernpartei
키르수스 농민당
16석 / 93석 (17.20%) 12석 / 93석 (12.90%) 3석 / 93석 (3.22%)
Opposition
Kircusser Fortschriffpartei
키르수스 진보당
Sozialdemotische Partei Kircusses
키르수스 사회민주당
Kircusser Vaterlandspartei
키르수스 조국당
16석 / 93석 (17.20%) 6석 / 93석 (6.45%) 6석 / 93석 (6.45%)
Ostkircusse
동키르수스인
Foligerreichspartei
제국당
Weißbund
백색연맹
5석 / 93석 (5.37%) 2석 / 93석 (2.15%) 2석 / 93석 (2.15%)
Volkspartei
인민당
Parteilos
무소속
1석 / 93석 (0.23%) 22석 / 93석 (23.65%)
4-3-2 제국인민의회

Foligerreichsvolkstag
키르수스 제국인민의회

키르수스 제국인민의회는 제국의 양원 중 하원으로써 매 5년 마다 전국적인 선거를 통해 총 422명의 의원을 선출한다. 선거를 통해 구성된 의회는 개회와 동시에 의회의 의원 중 한 명을 투표하여 제국인민의회 의장, 제국인민의회 부의장, 제국수상을 선출하고, 선출된 제국수상에 의해 선출된 각 제국부의 장관은 제국인민의회의 동의를 얻어 제국내각을 구성한다.

제국인민의회의 주요한 권한은 입법의 기능과 예산안 결정 및 승인, 행정부 감사였다. 입법의 경우 의회 내부의 위원회와 황제, 제국정부, 제국주의회로부터 입안된 법안을 심사 및 결정했다. 이때 의회 내부의 위원회를 통해 입안될 경우, 총 세 번의 토론을 거치며, 이후 위원회에서 동의 투표를 거쳐 전체 회의에 부쳐졌다. 일반적인 법안의 경우 과반수에 해당하는 212표의 찬성표가 있어야 통과되었으며, 제국헌법의 개정과 같은 특수한 경우 전체 2/3에 해당하는 282표의 동의가 있어야 진행된다. 예산안의 경우 1년마다 제국정부의 요구와 지출을 세세하게 분석하고 논의의 과정을 거쳐 책정하였다. 군사 예산의 경우 5년 마다 책정되었다. 제국의 여러 세금에 대한 증세/감세/추가세의 경우 또한 제국인민의회의 동의를 거쳐야 했다. 황제가 외국과의 동군연합을 구성하는 경우를 포함한 모든 외국과의 조약, 협정, 선전포고 등에 대해 동의권을 지녔다. 행정부 감사의 경우 제국부 장관의 임명 뿐 아니라 불신임에 대해 영향력을 지녔다. 또한 제국정부제국인민의회의 요구만 있다면 언제든지 정부 조치에 대해 설명해야 할 의무를 지녔다. 별개로 제국주의회의 의원 또한 제국인민의회의 투표를 통해 탄핵될 수 있다.

1562년, 의회제 운동을 통해 설립된 이후 1세기 넘게 이어지고 있다. 설립 당시 선거는 4년 마다 이루어졌으나 1570년의 헌법 개정을 통해 현재와 같이 5년을 주기로 선거가 치뤄진다. 기존 제국인민의회제국수상의 선출을 비롯한 외국과의 선전포고, 제국주의회 의원 탄핵 등과 같은 거대한 권한들을 지니지 못했다.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도중 개혁 약속과 종전 직후의 개혁을 통해 여러 권한들을 제국주의회로부터 이관해왔으며, 입법 기능을 제국주의회와 동등 혹은 불리하게 나누었던 것을 유리하게 나누어 사실상 제국주의회는 통과된 법안의 거부권 조차 유명무실해졌다.

4-4 사법
4-4-1 제국대법원
5 행정 구역

Provinz
키르수스의 주

제국의 행정 구역은 주, 현, 군, 구로 구성된다.

제국은 단일 국가로써 대부분의 권력이 카스텔부르크제국정부가 소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제국의 상원인 제국주의회는 각 주들의 자치를 인정하는 주체이다. 각 주들은 매 5년마다 치뤄지는 각 주들의 선거를 통해 새로운 주 정부를 구성하고, 그렇게 조각된 새로운 주 정부는 제국주의회의 의원을 선출한다. 행정적으로는 주 정부는 각 주들의 행정을 제국정부로부터 하달받아 시행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주 정부들의 권력은 사실상 그것이 전부라 할 수 있다. 주 정부들은 어디까지나 제국주의회라는 상원을 구성하는 수단과 같은 존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제국이 막 성립되었을 당시 제국은 연방 국가로 현재 주 정부(Provinzenregierung)의 전신인 지방 정부(Landesregierung)는 현재와 달리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슈베른란트 통일 전쟁을 거치며 라우지츠부르크 왕국의 중앙집권화가 완료되면서 지방 정부는 해체되어 그 자리를 현재의 주 정부가 채우게 되었고, 대부분의 권력이 신설된 중앙정부인 제국정부로 위임되었다.

제국의 현은 슈베른란트 통일 전쟁 이후 각 지방 정부마다 명칭이 다르던 하위 행정기구를 통일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이루었다. 현은 각 주에 존재하지 않는 경우부터 2개에서 3개로 구성되는 등 차이가 존재한다. 현은 제국정부에서 임명하는 현수상(Bezirkspräsident)이 중심인 현정부(Bezirksprsidium)로 이루어진다. 현정부는 제국정부에 의해 구성된 것과 달리 지방자치에 의해 구성된 주정부와 대비된다. 현정부는 각 군들의 통합된 행정을 주도하고 주정부와 상호 견제를 이룬다. 제국의 비대한 육군을 관리하는 감찰국을 보조하는 것도 현정부의 역할이다. 현수상과 현정부 관료들의 임기는 정해져 있지 않으며, 제국정부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순전히 제국정부의 의향에 따라 교체될 수 있다.

제국의 군은 일반 군과 군급시로 나뉜다. 수도인 카스텔부르크는 주급시이자 군급시이다. 군 아래에는 구가 존재한다. 구는 군과 군급시에 따라 역할이 다르다. 군급시는 군급시라는 이름의 구이며, 일반적인 군에는 마을과 그렇지 않은 구로 구분된다. 마을의 경우 각 주마다 그 기준이 다르며, 때때로 기준을 넘기지 못했을 경우에도 마을으로 인정되는 경우가 있다. 예외로 카스텔부르크는 군급시이나 구가 아니다.

6 경제
7 국방

Kircusses Foligerlicher Armee
키르수스 황립군
Foligerlicher Heer
황립육군
Foligerlicher Marine
황립해군
Foligerlicher Luftwaffe
황립공군
8 교육
9 사회
9-1 인구

제국의 인구는 1662년 기준 327,289,120명이다. 인구 1/4이 몰려 있는 스트룸강을 비롯한 4대강과 해안에 인구 대부분이 거주하고 있으며, 내륙으로 갈 수록 인구 밀도는 급격히 낮아진다. 출생률은 34.3명으로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행정 구역 별 인구
행정 구역 면적 인구 소재지
알레마니아주 40,617,532명 슈베르부르크
아미시아란트주 13,376,921명 마로부르크
아스크라리아주 10,135,378명 마인
블린단텐주 32,954,693명 마이오렌츠
드라이히주 37,048,518명 핀첼
엔브라주 7,958,367명 크라델부르크
플라니아주 17,138,727명 루티지
프레니아주 6,694,271명 엘젠푸르트
카스텔부르크 19,307,231명
크리베스란트주 29,638,166명 호피히스부르크
쿤트부르크주 21,515,757명 쿤트부르크
퀴스테주 11,069,537명 아우스하펜
라우지츠부르크주 26,127,854명 아우뎀
오타카레주 13,016,933명 발츠부르크
지틀란트주 24,818,822명 나젤제
쥐델라네주 15,870,413명 헨데
9-2 민족

제국은 아인종의 존재를 국가적 차원에서 인정하지 않는 대표적인 국가이다. 3억 명의 인구 99.9%가 오직 인간으로 그 중 대다수를 슈베른-게이만 민족이 차지한다.

슈베른-게이만 민족은 고대 슈베로니아 제국을 구성하던 슈베른인게이만족의 대이동 당시 슈베른란트로 대규모로 이주한 게이만인의 혼혈이다. 그러나 이름과 달리 슈베른인의 혈통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명칭에서 슈베른인의 역할은 혈통적인 특징이 아닌, 문화적인 것에 목적이 있다. 슈베로니아 제국은 멸망하기 직전까지도 헤스페로스벨트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다. 이는 문화의 영역에서도 동일하여 게이만족의 대이동 이전에도 게이만인 사회에는 슈베로니아의 문화가 흘러들어가 있었고, 슈베로니아 제국이 멸망하고 난 이후 그들이 슈베른란트를 장악하면서 슈베로니아 문화는 게이만인을 완전히 장악하여 현재에 이른다.

제국의 역사적 특성과 신념교의 교리에 따라 제국은 아인종을 강력하게 배척한다. 국경을 접한 게파르토와 달리 제국은 중세부터 아인종을 핍박하고 죽여왔다. 혼란기 동안 아인종은 분노 표출의 수단이 되었고, 동시에 고대 이야기의 괴물과 유사한 형상으로 인해 공포의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40년 전쟁 이후 조직적인 아인종 사냥이 대대적으로 벌어짐에 따라 슈베른란트 내에서 아인종은 자취를 감췄다. 현재 제국은 대부분의 아인종은 입국을 허가하지 않는다. 일부 입국을 허가 받는 아인종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면서 아인종적인 면모를 가릴 수 있는 이들이다. 이들은 제국외무부가 입국 절차와 제국 내에서의 신변을 관리하며 감시한다. 입국을 허가받은 아인종들은 제국에서 생활을 하면서 항상 그들의 아인종적인 신체 부위를 들키지 않게 가려야 하며, 이를 따르지 않아 발생하게 되는 피해는 제국외무부에서 책임지지 않는다.

9-3 언어
9-4 종교
9-5 언론
9-6 복지
9-6 군국
10 문화
11 대외 관계
12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