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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수스 제국
Kircusser Foligerreich
1. 국명
2. 역사
2.1. 제국 선포
2.2. 지연에 의한 지연
2.3. 토지와 중앙 정계와 농촌의 변화
2.4. 남부 3왕국과 통일 전쟁
2.5. 전후 개혁
2.6. 의회제 운동
2.7. 산업혁명
2.8. 신성과 산업
2.9. 보수당과 폰 푸스발트
2.10. 남부와 지분계승전쟁
2.11. 황금시대와 대뷔르거
2.12. 대불황
3. 자연 환경
3.1. 지리
3.2. 기후
4. 정치
4.1. 황제
4.2. 행정
4.2.1. 제국수상
4.2.2 제국내각
4.3. 입법
4.3.1. 제국주의회
4.3.2. 제국인민의회
4.4. 사법
4.4.1. 제국대법원
4.5. 종교
4.5.1. 황립종무회
4.5.2. 고등종무회
4.5.3. 신념교구
5. 행정 구역
6. 경제
7. 국방
9. 사회
8.1. 인구
8.2. 민족
8.3. 언어
8.4. 종교
8.5. 교육
8.6. 언론
8.7. 복지
8.8. 군국
9. 문화
10. 대외 관계
11. 같이 보기
키르수스 제국(키르수스어: Kircusser Foligerreich 키르쿠서 폴리거라이히) 혹은 제국(키르수스어: Foligerreich 폴리거라이히)는 헤스페로스벨트에 위치한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서쪽으로 에르미니아와 남쪽으로 베른하이어, 코르보날, 게파르토, 동쪽으로 그란치프, 사회주의 보편국가연합과 접한다. 수도는 카스텔부르크이며, 슈베르부르크, 발츠부르크, 루티지, 호피히스부르크, 아우스하펜 등의 대도시가 위치한다. 키르수스의 영토는 4,550,350km²이며, 주로 온대 기후를 보인다. 1670년 기준 3억 2700만 명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인구의 99.9%가 인간이며, 공용어는 키르수스어이다.
1423년, 라우지츠부르크 왕국에 의해 알레마니아 왕국, 아미시아란트 왕국, 아스크라리아 왕국, 드라이히 왕국, 오타카레 왕국, 지틀란트 왕국으로 구성된 연방 국가로 설립되었다. 슈베른란트 통일 전쟁 이후 완전히 통일된 단일 국가가 되었고, 남쪽의 라그렌센트 왕국을 외부사성국으로 두었다. 이후 산업혁명의 진행이 진행되어 뷔르거가 성장하였고, 의회제 운동을 통해 의회제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제국인민의회는 제국수상을 선출하지 못했고, 의회제는 여러 한계에 부딫쳤다. 1559년 지분계승전쟁에 개입해 승전하며 모르티민 동양 회사의 막대한 지분을 얻어 황금시대라 불리는 대호황기를 누린다. 그러나 1574년 모르티민 동양 회사의 주식이 대폭락하면서 대불황을 겪고, 신념교 세력의 정치화가 이루어지며 정치가 더욱 파편화되었다. 1590년대를 전후로 노동조합이 발달하였고, 사회주의 노조와 신념교 노조로 양분되었다. 1614년 식량위기와 베른하이어 위기로 성장이 정체되었고, 사회민주당의 부상이 이어졌다. 1650년,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이 발발하며 수적·지리적 열세에 성내평화정치로 일시적으로 갈등이 해소되고 단결되었다. 1653년 재림절 선언을 통해 민주주의가 약속되었으나, 55년 사건을 통해 다시금 혼란에 빠져들었다. 신흥 급진 정당이 성장하였고, 외부의 위협에 국가적 긴장감이 조성되었다. 전쟁 당시 이루어진 동원령이 1660년대까지 해제되지 않고 제국최대무장화라는 이름으로 유지되어 제국의 성장력을 약화시켰다.
제국은 입헌군주제 의원제각제 단일 국가이다. 키르수스의 황제를 국가원수로하며, 황제는 키르수스 제국헌법에 의해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 군권, 외교권을 지니고 있으며, 키르수스 제국수상 및 키르수스 제국내각을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다. 또한 키르수스의 황제는 제국을 대표하며, 제국신민의 통합의 주체이며, 신체불가침권을 지닌다. 키르수스 제국수상은 황제에 의해 임명되어 제국내각을 구성한다. 또한 키르수스 제국의회를 주재한다. 키르수스 제국의회는 양원제로써 16개 제국주에서 선출된 키르수스 제국주의회와 제국신민의 투표에 의해 선출된 키르수스 제국인민의회로 구성된다. 키르수스 제국인민의회는 매 4년마다 치뤄지는 제국의회선거에서 각 선거구에서 선출된 422명의 의원으로 구성된다. 키르수스 제국인민의회는 비교적 약한 권한을 지니고 있으나, 키르수스 제국헌법에 의해 예산안을 결정하는 권한이 종속한다. 제국은 삼심제에 의거하여 키르수스 제국법원, 키르수스 제국주법원, 키르수스 제국군법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키르수스 제국법원은 5명의 키르수스 제국대법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목차
1. 국명
2. 역사
2.1. 제국 선포
2.2. 지연에 의한 지연
2.3. 토지와 중앙 정계와 농촌의 변화
2.4. 남부 3왕국과 통일 전쟁
2.5. 전후 개혁
2.6. 의회제 운동
2.7. 산업혁명
2.8. 신성과 산업
2.9. 보수당과 폰 푸스발트
2.10. 남부와 지분계승전쟁
2.11. 황금시대와 대뷔르거
2.12. 대불황
3. 자연 환경
3.1. 지리
3.2. 기후
4. 정치
4.1. 황제
4.2. 행정
4.2.1. 제국수상
4.2.2 제국내각
4.3. 입법
4.3.1. 제국주의회
4.3.2. 제국인민의회
4.4. 사법
4.4.1. 제국대법원
4.5. 종교
4.5.1. 황립종무회
4.5.2. 고등종무회
4.5.3. 신념교구
5. 행정 구역
6. 경제
7. 국방
8. 사회
8.1. 인구
8.2. 민족
8.3. 언어
8.4. 종교
8.5. 교육
8.6. 언론
8.7. 복지
8.8. 군국
9. 문화
10. 대외 관계
11.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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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국명은 공식적으로 "키르수스 제국"(키르수스어: Kircusser Foligerreich 키르쿠서 폴리거라이히)이며, 주로 "키르수스"(키르수스어: Kircuss 키르수스) 혹은 "제국"(키르수스어: Foligerreich 폴리거라이히)라 부른다. "키르수스"는 고대 슈베르어의 원(圓)을 뜻한 circus가 그 어원으로 중세에 이르러 Kircuss으로 변화하며 하늘, 신권 등을 의미하게 되었다. "폴리거라이히"는 "폴리거"(Foliger)에 국가를 뜻하는 reich가 붙어 이루어진 단어로, Foliger는 게이만어에서 수행하다, 복종하다를 의미하는 folgēn에 접미사 -er을 붙인 단어가 변화한 것으로 제정일치의 최고 통치자 및 신(Gott)의 대리자를 의미하여 슈베르부르크 최고대사교와 키르수스의 황제가 해당 칭호를 차용하였다.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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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이 존속하고 있는 슈베른란트 지역에는 약 90만 년 전부터 인간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블린트란트에서 청동기 문화가 꽃피었으며, 암흑력 10세기 무렵에는 비셴란트에서 아사른인에 의한 철기 문화가 이룩되었다. 이러한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비센란트 끝자락에서부터 성장한 슈베로니아 왕국은 슈베른란트를 통일하고 건국력 1년에 슈베로니아 제국을 선포하면서 건국력의 기준이 된다. 그러나 운타란트에서의 긴 기간 동안의 반란과 550년 대의 게이만족의 대이동으로 결국 582년 멸망한다. 슈베로니아 제국의 멸망 이후 슈베른란트에는 슈베른-게이만 민족들의 여러 부족 국가들이 난립하였고, 611년, 플라니아 왕국의 오토 1세와 슈베르부르크의 프리투리크 1세에 의해 4개의 왕국과 3개의 공국으로 이루어진 아슈트카이트 영방국가연합이 결성된다. 건국 이후부터 1002년까지 지속된 협약체제 아래서 헤스페로스벨트의 패권국이 되었으나, 루티지가의 단절과 함께 내분을 겪으며 쇠락해 대영방전쟁에서 패배하고 동서굴욕을 겪었다. 동서굴욕에 반발한 부흥파에 굴욕과 부흥 전쟁이 발발하였고, 5년 간의 전쟁으로 이들 국가의 새 패권이 구성되었다. 여러 차례의 대외 전쟁으로 다시금 부흥하였으나, 라우지츠부르크 왕국과 오타카레 왕국이 신성을 두고 다투어 40년 전쟁이 발발하였다.1411년에 40년 전쟁이 라우지츠부르크 왕국의 승리로 종전했으나, 1391년의 그란치프 공동국의 공격으로 황제교 교황의 정동성이 그란치프 황제교로 넘어가버리며 신성의 정통성에 큰 타격이 있었고, 군대의 피해로 동맹국들에 대한 장악력도 상실하였다. 1422년 11월 3일, 마그리히가 방계 왕국을 포함해 알레마니아 왕국, 아스크라리아 왕국, 아미시아란트 왕국 등 영방국가가 참여한 슈트롬강 조약으로 신성을 인정받았고, 1423년 1월 18일, 라우지츠부르크의 왕 헤르베르트 2세에 의해 라우지츠부르크-플라니아-엔브라-프레니아 동군연합, 알레마니아 왕국, 아스크라리아 왕국, 아미시아란트 왕국, 드라이히 왕국, 오타카레 왕국, 지틀란트 왕국으로 구성된 키르수스 제국이 선포된다.
40년 전쟁이 끝나며 제국의 주요 왕국들에는 마그리히가의 방계 왕조가 들어섰다. 지틀란트 왕국과 오타카레 왕국은 계약에 종속된 임시적인 국가였으나, 드라이히 왕국의 드라이히가는 한참 전인 굴욕과 부흥 전쟁에 세워졌다. 합병 여부가 불분명하여 에버하르트 1세는 드라이히 출신인 올리버 하이덴 폰 이스틴데레를 키르수스 수석각료로 임명하며, 드라이히 왕국의 신분제의원 및 영지귀족을 그들의 편으로 끌여들었다. 1437년 5월 18일, 결국 양쪽으로부터 압박을 받은 드라이히의 왕 라인하르트 4세는 핀첼 조약에 서명했다. 조약을 통해 지틀란트의 왕과 오타카레의 왕은 각 지역의 공작(Herzog)으로, 드라이히의 왕은 드라이히의 대공(Hofig von Dreich, 대공위였으나 호칭은 Hofig)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드라이히 왕국을 제외한 다른 방계 왕국을 비롯해 엔브라 왕국, 프레니아 왕국 등과 같이 동군연합이던 지역 모두 카스텔부르크에 영향을 받지 않는 전통적인 행정을 고수하고 있었다. 남부 3왕국의 경우 슈트롬강 조약을 통해 그 독자적인 행정 및 세제가 보장되었으나, 이들 지역은 동일한 라우지츠부르크 왕국임에도 전통적인 영지귀족 및 신분제의회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더구나 이들 지역 각지에는 새 키르수스 황제교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구 아슈트카이트 황제교(혹은 그란치프 제국으로 신성이 넘어갔음을 인정해 개종한 그란치프 황제교) 의사집단이 남아 종교적인 갈등도 유발하고 있었다. 에버하르트 1세는 각지 행정부의 주요 요직에 타지역 출신인 신념교도를 임명하면서 갈등이 표출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석각료인 하인츠 알브레히트 폰 슈넬은 라우지츠부르크부를 제외한 각 부에 세무위원회(Steuerraten)을 설치하고, 소비세(Akzise)를 신설하되 도시에 한정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영지귀족이 기반하는 농촌 지역은 새로운 세금의 영향을 받지 않아 이들의 반발을 이끌어내지 않으면서 새 영토로부터의 세수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념교는 여전히 카스텔부르크에서조차 자리잡지 못한 상황이었고, 이를 위해 에버하르트 2세는 새 세수에 바탕해 카스텔부르크에 신념교와 관련된 여러 건물들이 들어섰다. 카스텔섬에 카스텔부르크궁(Kastelburger Schloß)를 비롯해 여러 종교·문화·정치적 건물들이 신축되었고, 에버하르트 2세 치기 동안 카스텔부르크는 문화적으로 융성했다. 그리고 그 원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신념교를 정비했다. 신념교구(Gottentischer Kirche)를 지정하고, 황립종무회(Foligerlicher Versammlungsort)를 창설하고, 재림서를 편찬했다. 그 과정에서 구 아슈트카이트 황제교를 흡수하고 그란치프 황제교를 제거했다.
에버하르트 2세가 붕어하면서 8년의 문화적 치세도 끝이 났다. 새로 즉위한 아델베르트 1세는 고작 13살의 나이로서, 에버하르트 2세의 동생인 아리베르트 빌헬름 폰 키르수스 황자가 섭정을 맡았다. 핀첼 조약 당시 에버하르트 1세와 동행해 그 전경에 감명받아 성인이 된 이후부터 드라이히부에 정착해 해당 지역의 영지귀족들과 연을 맺었다. 신앙적으로 불경해 황립종무회에서는 황제대리로서 그 동생인 라이트라트 헤르베르트 폰 키르수스 황자를 내세웠다. 신정일치가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아리베르트 빌헬름 폰 키르수스는 자신의 지인이자 드라이히부의 주요 유력자인 빌리히 헤르만 폰 자이렌도르프 후작, 로이슈텐 발터 폰 슈벨란트 백작, 엥겔베르트 슐뢰트 폰 베스트로덴 백작, 레기날트 레오바파르 폰 슈탈레타움 백작과 유착해 국정을 운영했다. 자연스럽게 이 과정에서 그들과 그들의 지인으로하여금 특혜가 보장되어 정치를 부패시켰다. 더구나 황립종무회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에버하르트 2세의 여러 문화 정책들을 페기했다.
아델베르트 1세가 성인이 되어 즉위식을 거행하면서 아리베르트 빌헬름 황자의 섭정도 끝이 났다. 아델베르트 1세는 빌리히 헤르만 폰 자이렌도르프를 수석각료에서 해임하고 하이덴 슈텔마흐 폰 뢰네슈페인를 새 수석각료로 임명하였고, 섭정시대에 해체된 드라이히부의 세무위원회와 토지세를 부활시키며 업보를 청산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에버하르트 1세 시절 세무위원회와 함께 각부에 설치된 토지관리국(Amtskammer)의 역할을 확대했다. 드라이히부를 비롯해 각지의 영지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나, 대대적인 토지조사를 통해 탈세를 명분으로 이들을 압박해 단행하였다. 이와 함께 남아있던 구 아슈트카이트 황제교의 소유지를 몰수해 신념교에 할당하면서 기반을 견고하게 했다. 중앙에서는 기존에 존재하는 직할령고등관리국(Oberdomänendirektorium)과 궁정관리국(Hofkammer) 간의 역할 충돌을 해소하기 위해 상부에 합의회(Kollegial)란 의사결정기구를 둔 재무총관리국(Generalfinanzdirektorium)으로 통합했다.
1475년, 소비세와 군세를 담당하는 총판무국(Generalkommissariat)을 설치해 소비세와 군세를 총괄하면서 기존 영지귀족들의 연대들에 대해 통수권을 가지고자 했다. 더해서 각 영주귀족이 그들의 영지를 경유할 때 매기는 통행세를 폐기하고자하면서 반발은 극심해진다. 이에 폰 뢰네슈페인은 반발의 중심인 빌리히 헤르만 폰 자이렌도르프 후작을 구속하는 것으로 대처했다―뢰네슈페인의 사적인 감정도 없잖아 있어 보인다―. 그러자 드라이히부의 영지귀족의 군대가 무장하고 지역의 총판무국과 세무위원회가 습격을 받는 등 강력한 반발이 이어졌다. 소요의 책임을 지고 폰 뢰네슈페인은 해임됐고, 빌리히 헤르만 폰 자이렌도르프 후작을 석방했다. 더해서 관공서 습격자들의 처벌은 흐지부지되었고―지역 경찰들이 영지귀족의 지휘를 받았을 뿐 아니라, 보고에 있어서 영지귀족과 유착한 관리들이 영향을 끼쳤다―, 통행세 폐지를 보류했다.
선대인 헤르베르트 1세 때부터 40년 전쟁으로 붕괴된 군대를 재건하고 확충했다. 40년 전쟁 직후 8만 명 34개 연대를 에버하르트 1세 사후엔 30만 명 130개 연대, 에버하르트 2세 사후엔 50만 명 213개 연대로 불어났다. 40년 전쟁을 거치고 제국선포를 거치며 영토가 그 4배에 이르게 되었으나, 병력 증강폭은 그보다 가팔랐다. 행정을 정비하고 통일하면서 그 효율을 높혔고, 조세 또한 정비하며 증강의 기초가 되었다. 아델베르트 1세의 치기에서 그 상승폭은 더욱 증가해 28년의 통치기간 동안―아리베르트 황자의 섭정 기간 동안 잠시 주춤했음에도― 100만명 430개 연대로 두 배 늘어났다. 아델베르트 1세는 직할 연대들의 제식을 통일했고, 제식 훈련을 강화해 전투력을 높혔다. 현재의 구와 리의 원시적 개념으로서 칸텐(Kanten)을 확정해 각 칸텐마다 인원을 징병해 연대를 구성하도록 하였다. 이전까지는 모병관의 강제징집을 통해 모병이 이루어졌으나 칸텐 제도를 통해 불필요한 충돌을 줄였다. 칸텐의 각 연대들은 해당 칸텐의 미혼 남성을 조사해 훈련시켰고, 기본 훈련 이후 수십 년 간 예비병으로서 2~3개월마다 훈련을 받았다. 귀족들 또한 군복무의 의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선별된 청소년기의 귀족으로 하여금 사단학교에 입학시켰다. 이를 통해 점차 귀족으로부터 농민이 분리되고, 귀족이 중앙에 예속되기 시작했다.
하이덴 슈텔마흐 폰 뢰네슈페인 해임 이후 차기 수석각료는 드라이히부의 주요 영지귀족의 추천을 통해 임명되었다. 그 과정에서 영지귀족들 간의 이권다툼이 발생하던 1484년, 폰 베스트로덴의 가주가 된 레슈텔루프 메르테 폰 베스트로덴 백작이 수석각료로 임명됐다. 폰 베스트로덴은 보통의 가주들과 달리 삼남 출신이었는데, 장남과 차남이 자식없이 모두 사고로 사망하면서 백작위를 이었다. 때문에 가주에 오를 당시 카스텔부르크의 재무총관리국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폰 베스트로덴은 취임과 동시에 중앙세무서와 병참총국, 총판무국 등 중앙행정기관을 합쳐 재무전쟁직할령고등총관리국(Generaloberfinanzkreigsunddomänendirektorium, 이하 고등총관리국)을 조직하며 통행세 폐지를 주장했다. 다시금 영지귀족들의 반발이 발생하였으나, 폰 베스트로덴은 전임 수석각료인 크로스문트 발두르 폰 자이렌도르프뮈스마르 백작의 횡령을 고발한 것을 시작으로 주요 요직에 위치한 영지귀족들을 축출했다.
레슈텔 메르테 폰 베스트로덴 수석각료의 영지귀족 세력에 대한 공격에 큰 반발이 발생했다. 그러나 지난 십 여 년간 권세를 누리며 팽창한 그들 세력은 도리어 영지의 인구과잉을 발생시켜 부담을 지게해 소규모 영지귀족들의 경우 토지 담보 부채의 급상승을 불러 일으켰다. 권세 영지귀족들도 이를 이용해 무리하게 팽창하며 막대한 부채를 지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토지거래가 빈번해짐에 따라 토지에 대한 계약이 혼란스러워졌다. 이러한 배경에서 폰 베스트로덴은 귀족들만이 이용가능한 농지신용조합(Landschaftlicher Kreditinstituten)을 통해 융자를 제공해 한편으로 이들을 구제하고자 했다. 사회적으로는 사관학교 제도를 통해 영지귀족으로 하여금 스스로가 국가에 봉사하는 계층이라는 인식이 퍼지고, 정치적으로는 신분제의회의 권한이 약해지면서 그 영향적이 줄어들었고, 중앙행정부는 평민을 주로 채용하는 동시에 귀족들에게 등용의 기회를 주며 충성을 유도했다. 영지귀족의 정치·경제·사회적인 악재로 인해 영지 간 통행세 폐지 뿐 아니라, 영지배분(Allodifikation des Lehen)을 통한 영지 해체에 유의미한 저항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영지배분을 통해 영지귀족들이 해체되어 지주귀족으로 재탄생하였으나, 동시에 봉건적 의무로부터 해방됨으로서 큰 짐을 덜었다. 봉건적 의무가 해체됨으로서 이들이 지니고 있던 연대의 통수권이 중앙(고등총관리국)으로 귀속되게 된다.
영지귀족 해체 직전부터 영지귀족들에 대한 전통적인 특권은 단계적으로 줄어들었다. 고등총관리국을 포함한 여러 중앙행정부는 평민 출신 귀족으로 구성되며 영지귀족이 배척되었다. 그러면서도 유능한 귀족을 등용하며 관료로서의 길을 제공해주엇다. 폰 베스트로덴과 같이 충성스러운 관료는 귀족을 공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각 지역에서는 영지귀족이 해체되었으나 영주재판소(Gutsgericht)에 대한 귀족들의 사법권은 여전했다. 그러나 영지배분을 거치며 독자적인 관습법에 의해 이루어지던 재판이 카스텔부르크에서 제정한 형사법전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영지배분이 이루어졌음에도 소작농에 대한 부역과 강제 노역이 이루어져 영지재판소를 통해 이 갈등을 중재하였다. 그럼에도 제국 곳곳에서는 강제 노역에 대한 반발로서 농민 저항이 이루어졌고, 이들의 태업 속에서 영지는 황폐화되었다. 농민 저항은 임금 노동을 활성화시키며 봉건적 구조를 점차 탈피시켰다. 지주와 소작농 간 갈등 뿐 아니라 영주재판소는 각 영지의 주민의 의해 자체적인 도덕집행기관으로 기능하기도 했다.

라우지츠부르크 왕국 알레마니아 왕국 아미시아란트 왕국 아스크라리아 왕국 라그렌센트 왕국 |
1391년의 투리스문트 전쟁의 타격으로 알레마니아 왕국, 아미시아란트 왕국, 아스크라리아 왕국은 독자적인 군대를 지닌 채 제국의 일원이 되었다. 이들 군대의 숫자는 250개 연대 60만여 명으로 라우지츠부르크군의 절반에 달했다. 더구나 역사적으로 남쪽의 라그렌센트 왕국(현 베른하이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동맹관계를 맺고 있어 항상 이들의 반기를 경계해야했다. 1492년 즉위한 헤르베르트 2세는 즉위 초부터 이들의 군제를 통합하여 키르수스 황립군을 창설하고자 했다. 그러나 헤르베르트 2세의 눈에 1세기 가량의 기간 동안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자적인 행정을 이룬 남부 3왕국은 평화롭게 그 권한을 내어줄 것 같지 않았다. 때문에 그의 군제 통합을 위한 밑작업은 기본적으로 내전을 상정한 것이었다.
종교적으로도 남부 3왕국은 키르수스 황제교를 인정했으나, 그들의 독자적인 고등종무회(Oberversammlungsort)는 황립종무회의 교령의 실천을 거부하는 등 그 정통성에 정면적으로 대치하는 경우가 증가했다. 1498년 재림절을 맞아 제국 전역에 예배를 행하며 제국의 사성자(Hofig)와 그들의 고등종무회 구성원을 아우뎀의 성지로 따르도록 해 의식을 행할 때, 알레마니아 고등종무회 소속의 트라우고트 루크 후버는 이에 응하지 않고 알레마니아 왕국의 아벤슈타트에서 키르수스 황제교를 일부 부정하는 발언을 해 논란이 되었다. 헤르베르트 2세는 트라우고트 루크 후버를 알레마니아 고등종무회에서 퇴출하고 곧바로 카스텔부르크로 압송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루베르트 6세는 그로하여금 사임으로 처리하고 요구에 불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트라우고트 루크 후버가 사망하면서 갈등은 종결되었으나, 헤르베르트 2세의 신성에 타격을 주었다.
1508년 1월 11일, 루티지와 슈베르부르크 경계에서 지틀란트의 무역상과 알레마니아 왕국의 무역상 간의 충돌이 발생해 양군의 무력 충돌로 귀결되었다. 과정에서 알레마니아군 소속의 장교가 신성모독적 발언을 해 라우지츠부르크군 장교들에 의해 구타당해 얼마안가 사망하면서 갈등은 커졌다. 1월 18일 건국기념일의 행사에서 "군과 종교가 신성을 따라야 한다"며 발언한 후 실제로 3왕국에 통첩을 발송하며 내전이 임박했다. 3왕국 모두 이에 불응하거나 거절하며 1월 24일, 슈베른란트 통일 전쟁(Schwernlander Krieg)이 발발한다.
아미시아란트 왕국은 삼면이 라우지츠부르크 왕국에 둘러싸여 있어 전쟁 초기 주요 전쟁터가 되었다. 라우지츠부르크군은 여러 차례 아미시아란트 왕국에 대한 공격을 가하였고, 남부 3왕국은 이를 지원하거나 플라니아주와 오타카레주를 점령하고, 아스크라리아 왕국의 경우 아스크라리아의 산맥을 넘어 엔브라주와 프레니아주에 공격을 가하는 등 아미시아란트 왕국을 보호했다. 룸베르트 오르틀라프 폰 알레마니아회텔 공작의 군대가 분전했으나 1509년 5월, 마로부르크 전투에서 알레마니아군-아미시아란트군 연합이 패배하면서 아미시아란트 왕국은 항복한다. 그러나 아미시아란트군의 여러 부대들은 계속해서 알레마니아군의 지휘를 따르며 수 년간 라우지츠부르크군에 저항했다. 그동안 아스크라리아군은 엔브라주와 프레니아주를 점령하며 카스텔부르크를 향한 공격을 시도했고, 알레마니아군-아미시아란트군 연합군도 프라이멘에서 라우지츠부르크군의 발을 묶었다. 카스텔부르크 공략에 실패한 아스크라리아군은 1509년 중반부터 1510년 말까지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엔브라주와 프레니아주에서 끈질기게 전투를 이어나갔다.
1511년 겨울, 아미시아란트 해방에 실패하고, 아스크라리아군과 알레마니아군이 여러차례 패퇴하면서 점차 라우지츠부르크 왕국으로 승기가 기울기 시작한다. 1512년에 들어서 라우지츠부르크군은 알레마니아 왕국과 아스크라리아 왕국 영내로 진격해 들어갔으며, 가을의 마인과 포겔루에 일대에서의 전투로 중부까지 진격하는데 이르렀다. 여름부터 라그렌센트 왕국의 30만 대군이 참전하며 중부전선을 수호했으나 알레마니아 왕국의 수도인 아벤슈타트는 함략당했다. 아벤슈타트 함략 이후 알레마니아군은 안지아에서 공성전에 들어섰고, 라그렌센트군은 포위당한 이들을 구하기 위해 진격해 무찔렀다. 라우지츠부르크군은 아벤슈타트로 후퇴해 병력을 재정비했고, 1513년 겨울의 두 번의 전투에서 라그렌센트군을 상대로 승리하면서 저항할 여지를 분쇄했다.
1514년 8월 5일, 라그렌센트 왕국이 항복하며 슈베른란트 통일 전쟁은 라우지츠부르크 왕국의 승리로 종전하였고, 남부 3왕국은 합병, 라그렌센트 왕국은 명목상의 제후국이 되며 베른하이어 공국으로 격하당했다. 3왕국의 왕은 공작의 작위를 수여받으며 사성자의 신성을 몰수당했다. 세 왕국의 군대와 고등종무회 모두 키르수스 황립군과 황립종무회에 흡수합병되었다.
남부 3왕국의 합병과 함께 대대적인 행정 개혁이 필요해졌다. 세 지역에 부를 설치하는 것 대신 제국 전역에 걸친 대대적인 행정 개편이 이루어졌다. 모든 부는 주(Provinz)로 대체되었고, 그 아래에는 현(Bezirk)를 설치했다. 주와 현의 수상으로 제국총독(Foligerreichsstathalter)와 현수상(Bezirkspräsident)을 두었다. 거기다 그 아래에도 군(Kreis), 구(Amt), 리(Gemeinde) 등 소규모의 행정 구역이 설치되었고, 당시 제국 대대적인 개혁을 위해 임명된 로이함펠 라테넨 폰 프란텐샤테 수석각료에 의해 각 행정구역에는 대표기관을 설치해 단계적으로 구성했다. 각 시(Stadt, 군급시)에도 행정기관이 설치되어 예산·조세·구빈·교회·학교·보건에 대해 자율권을 위임받았다.
구 삼왕국의 제도와 제국의 제도를 합치는 동시에 전반적으로 개혁하기 위해 로이함펠 라테넨 폰 프란텐샤테 남직이 수석각료로 임명되었다. 당시 제국의 봉건 질서는 농지신용조합을 통해 겨우 유지되고 있었고, 남부 3왕국의 경우도 그와 같거나 이미 붕괴된 뒤였다. 1514년 11월 8일 재림절에 발표된 칙령을 통해 토지에 얽혀있던 봉건 관계가 청산되어 모든 토지 거래에 있어 신분의 제약이 해체되었고, 지주에 대한 농민의 세습적인 종속 제도와 부역 의무가 완전히 해체되었다. 1515년 진리절(2월 3일)의 칙령에선 농민의 경작권을 보장하며 대신 지주에게 대상금을 지불토록 하였다. 두 칙령에서 지주귀족의 반발이 따랐으나, 폰 프란텐샤테는 다수 귀족에게 양보를 통해 반발을 해소하였다. 성 헨데니스 축일 다음날의 칙령에서 도시와 농촌 간의 봉건적 제약을 해체하며 세금 지불을 대가로 농촌에도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상공업의 자유를 부여했고, 도시에서는 춘프트(Zunft)를 해체해 직업의 자유를 부여했다.
폰 프란텐샤테는 중앙집권화를 위해 카스텔부르크에 기계적 집무태도(Dienstmechanismus)를 문제로 가진 고등총관리국을 해체하고 5개의 제국부(외무·내무·재무·법무·전쟁)로 이루어진 근대적 내각을 조직했다. 해방된 농민을 위해 교육 개혁이 동반되어야 했고, 제국내무부 아래에 새로운 부서를 설치해 이를 총괄했다. 교육의 표준화를 위해 교육대학이 설립되었고, 기존의 대학들은 연구를 위한 고등 기관으로 변경되었다. 9년제 중등 교육과정인 오버슐레(Oberschule)를 설치해 대학입학에 필요한 자격(아비투어)을 충족하도록 했다. 그러나 1551년까지 대학 개별의 입학 시험이 잔존했다.
통일 전쟁에서 룸베르트 오르틀라프 폰 알레마니아회텔 공작의 군대는 연대보다 큰 체계적인 조직과 선진적인 전술로 선전했고, 남부 3왕국의 민중 계층에서는 스스로 군대에 입대하는 애국적인 현상이 불었다. 수적으로 동등했음에도 우세한 3왕국의 전투력에 키르수스 황립군은 이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중반부터 임시적으로 채용한 사단 체계와 참모본부인 대장군참모를 확립했다. 이전까지 귀족에 제한된 장교 등용을 해방된 인민에게 확대하며 이들의 양성을 위한 전쟁대학을 설립했다. 또한 모든 인민으로 하여 병력의 의무를 지게 해 국민개병을 달성했다. 제국의 인민은 의무적으로 병역의 의무를 지고 전역 후에도 예비군과 국민군으로 소집되었다.
대대적인 개혁은 1518년 로이함펠 라테넨 폰 프란텐샤테가 공문에서 황제를 언급할 때 붙이던 미사여구를 합리주의적 관점에서 삭제할려고 하자 신성모독을 이유로 해임당하면서 끝이 난다. 개혁은 제국의 전 사회적인 변화를 불러 일으켰으나, 모든 분야에서 부족함을 보였다. 농민이 봉건적 제약에서 해방되었으나, 대상금 지불의 문제로 인해 여전히 지주귀족에 종속되었으며, 지주귀족은 봉건적 의무로부터 해방되고 자본주의적인 경영을 통해 다시금 경제적으로 중흥했다. 도시에서는 춘프트의 해체로 직업 선택의 자유가 이루어졌으나, 춘프트의 보호를 받던 수공업자가 몰락했고, 일자리를 찾아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이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빈민층을 이루었다. 그러면서 상공업이 발달하며 뷔르거 계층이 발달했고, 이들은 도시의 실업자들을 이용해 부를 달성했다. 개혁 도중에 폰 프란텐샤테는 개혁에 대한 반발을 해소하기 위해 선거로 대표자를 선출해 명사회(Notabelnversammlung)을 구성했으나, 이들의 조세와 예산 등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실패로 끝이 났다. 여러 문제점이 존재했고 100년 뒤의 제국에도 영향을 끼쳤으나, 제국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데 기반을 제공했고, 인민 해방과 교육 정책, 명사회의 경험은 이후의 키르수스 의회제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로이함펠 라테넨 폰 프란텐샤테는 인민이 대표자를 선출하는 기관, 의회와 헌법을 암시했다. 그러나 보수파에 의해 사임되면서 해당 묵계는 유야무야되었다. 폰 프란텐샤테의 후임으로 중립파인 이스투르 오스텔 폰 노빌치히가 차기 수석각료로 임명되었는데, 그의 내각은 보수파의 요구에 맞춰 언론에 사전 검열을 적용하고, 대학을 권위주의적으로 간섭했으며, 민중 결집이 이루어지던 체조회를 금지하고, 저항하는 집단을 비밀경찰을 이용해 탄압하였다.
반동적인 횡보 속에서 폰 프란텐샤테의 교육 개혁에 의해 이루어진 대학생의 각성은 학생조합(Burschenschaft)의 설립으로 이루어졌다. 이들 집단은 변화를 촉구하면서 그 방법론에 있어서 분열을 나타냈는데, 황제의 성은에 의해 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타협파와 엘리트적인 혁명을 통해서만 진보를 이룰 수 있다는 혁명파가 그것이다. 당국의 탄압 속에 혁명파의 입지가 커져갔고, 보수파의 수장인 요르텐 구스타프 폰 푀지닝 백작을 암살하고자 했다. 그러나 혁명파 출신의 아돌프 죌른의 암살시도가 실패하면서 잔인한 보복이 뒤따랐고, 학생조합은 금지되고 그 구성원들은 사형에 처해지거나 망명길에 올랐다.
개혁과 서방의 영향으로 산업혁명이 태동되었다. 산업혁명에 의해 상공업 뿐 아니라 농업에까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도입되면서 사회적 변화가 뒤따랐다. 상공업자에 의해 슈베른란트 상공업연합(Schwernlander Handel- und Gewerbeverein)이 결성되며 보호무역과 철도부설을 요구했다. 도시에 공장이 설립되면서 자본가(대뷔르거)계층이 성장했으며, 자본가계층은 조금이나마 봉건적 영향력이 존재하는 전라우지츠부르크 왕국 지역이 아닌, 무주공산이 된 과거 남부 3왕국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농촌에서는 자본주의적인 경영을 통해 지주귀족, 융커(Junker)가 성장했다. 토지개혁을 통해 토지를 확대하고 자본주의적인 생산방법의 덕택을 유용히 본 드라이히주의 융커를 중심으로 융커자유주의(Junkerliberalismus)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다수의 융커와 그들을 비호하는 정권은 대뷔르거 계층의 성장을 막고 융커를 구제하고자 주식버블방지를 명분으로 주식거래령(Börsenordnung)을 반포하는 등 그들을 견제했다.
슈베른란트 통일 전쟁의 전쟁 수혜가 끝이나면서 발생한 경제 침체와 자본계층의 착취로 인해 노동계층의 생활고가 증폭되었다. 이에 따라 전국에서 국지적인 소요가 발생했고, 프라이멘의 방직공들에 의한 소요가 점차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가며 프라이멘 방직공 봉기가 발생하였다. 봉기가 진행되면서 단순히 기계파괴적인 초기 행보에서 자본가와 지배계급에 대한 구조적인 분노표출이 이루어지면서 노동계층의 정치적 성숙이 이루어졌다. 노동계층을 달래기 위해 수공업자의 탄원으로 수공업 및 공장노동자 복지위원회(Verein für die Wohl der Hand- und Fabrikarbeiter)가 설립되었고, 황제와 황립종무회가 주도했다.
정치·사회적 모순이 증대하면서 황제교 내에서도 개혁파가 생성되었다. 소뷔르거 계층을 중심으로 기존의 고지식하고 권위주의적인 생활양식을 개혁하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으나 황립종무회에 의한 탄압으로 실패하였다. 운동을 주도한 소뷔르거 계층의 불만이 축적되었다. 한편, 자유주의자인 베른하르트 가일비히 빌헬름 폰 비를투어가 자유주의적 팜플렛을 당국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배포하면서 자유주의자들의 결집이 이루어졌고, 최종적으로 자유당(Freiener Partei)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1528년과 29년, 농촌에서 감자병이 돌면서 빈민층의 주식인 감자 가격이 상승하면서 생활난이 심화되었다. 생활난의 심화는 곧 전국적인 시위로 발생하였고, 곳곳에서 관료나 지주에 대한 폭력과 살해가 유발되었다. 그러던 중 1530년 4월, 수석각료 이스투르 오스텔 폰 노빌치히가 소요에 대한 책임과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하고 그 후임으로 권위주의자인 헤르만 힌추퓌겐 에르베마르 폰 마젠셔가 임명되었다. 그는 곧바로 반동성향을 드러내며 자유주의자의 반발을 샀다. 그러던 중 신문 『중재자(Zwischenbote)』가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기자를 체포하고 정부를 비판한 교수를 체포하면서 대대적인 시위가 발생한다. 군대를 투입하여 시위를 해산하고자 했으나, 무력시위만을 유발하였다.
1530년 7월 5일, 헤르베르트 2세가 건강상의 이유로 이틀간 기절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하인리히 에버하르트 구스타프 빌헬름 폰 키르수스 황태자가 대리청정을 맡게 되었다. 친자유주의적이던 하인리히 에버하르트 황태자는 시위를 주도하는 자유당 주요 인사들과 협상을 전개했다. 8월 16일 강림절, 협상의 결과로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조직하며, 검열을 해제한다는 강림절 선언이 이루어지면서 대뷔르거 계층의 요구가 수용된다. 그러나 의회가 양원제로서 명사회-삼부회의 논리구조에 따라 구성되었고, 하원인 제국인민의회의 선거가 삼신분투표제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의해 소뷔르거 계층과 노동계층은 개혁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 계층의 정치적 성숙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못함에 의해 추가적인 혁명은 발생되지 못하였다. 키르수스 의회제 운동은 황제에 의해 제국수상이 임명되고, 입법의 실권이 제국참의원에 있는 불완전한 입헌군주제가 성립되며 끝이 난다.
1514년 재림절 칙령을 통해 도시와 농촌의 봉건적 관계가 청산이 된다. 상공업 및 직업의 자유가 보장되며 경쟁상태를 통한 발전이 이루어졌고, 토지에 대한 농민의 종속이 해체되면서 도시에의 농민의 이동이 발생해 상공업 발전에 따른 일자리 증가를 지탱했다. 수공업 등에 적용되던 자본주의적 생산이 점차 산업 전범위로 확대되면서 기계화가 도입되고, 마그니우스와 베른하이어 등지의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양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필요 원자재 및 식료품을 위해 1523년 카스텔부르크-아우뎀 철도 회사에 의해 카스텔부르크-아우뎀선을 시작으로 주요 도시 간 철도가 부설되기 시작했고, 철도를 산업화를 촉진시켰다. 섬유산업과 같은 경공업을 시작으로 1520년대에는 중공업과 건축업, 광산업, 제철업, 인쇄업, 기계공업 등에도 기계화가 이루어지며 생산량이 증대되었다.
재림절 칙령을 통한 토지-농민 종속 관계 해소에 따른 농민의 대상금 지불과 산업혁명을 통한 식료품 수요 증가는 농촌의 사회 구조를 변화시켰다. 농지정리와 생산방법개선, 삼포제 농업 개선을 통해 농산물이 증대되었다. 지주 귀족은 재림절 칙령을 통해 토지와 농민에 대한 봉건적 관계를 청산당했으나 오히려 대상금 지불을 통해 자본주의적 생산을 위한 설비를 마련하고, 대상금 지불 능력이 없는 농민을 통해 토지를 늘렸다. 양 사육을 비롯해 여러 부업을 통해 자본을 축적했으며, 특히 양조업에서의 독점이 대표적이다. 1520년대 말, 지틀란트주에서 감자를 비롯해 사탕무와 순무 등 작물을 도입한 것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해당 생산이 이루어지면서 변화가 따랐다. 감자는 값이 싸 농민과 빈곤층의 주요 식량이 되었고, 해당 작물들이 토양을 변화시키며 수확이 증가되었다. 순무와 같은 사료 작물을 통해 가축이 증가하였고, 그들의 분뇨를 통해 작물 수확이 증가되었다.
산업혁명을 통해 대뷔르거 계층과 무산계층이 등장하고 그들 사이는 시간이 지날 수록 점차 벌어졌다. 전통적인 생활형태가 파괴되어 귀족주의와 집단주의적인 생활방식은 개인주의적으로 변화하였고, 이익만을 추구하는 투기꾼들에 의한 사회 불안이 유발되었다. 생활고에 의해 프리슬란드 등의 타국으로의 이주가 증가하였다. 도시에서 소뷔르거의 소기업, 소상업은 대자본의 경쟁에 패배해 그들에게 흡수되어 프롤레타리아트로 몰락하였고, 프롤레타리아트는 기본적으로 하루 `12시간에 달하는 노동과 열악한 환경에 구조적으로 착취되었다. 반면, 뷔르거 계층은 초창기 수공업 장인이 주도하는 구조에서 상업 자본가에 의한 철처한 자본주의적 경영으로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이들은 보편전기 전후 공황으로 장기 침체를 겪음에도 카스텔부르크에 의한 지원을 바탕으로 계속해서 성장했다. 카스텔부르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공격에 대해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하는 등 이들을 비호했다. 다만 주식거래령과 같이 지주 귀족을 위해 대뷔르거 계층을 견제하기도 하는 등 카스텔부르크는 여전히 지주 귀족에 우선적이었다.
1526년, 플라니아주 프라이멘에서 방직공들이 봉기를 일으킨다. 이전까지 보편전기 전후 공황이 계속 이어짐에 따라 제국 곳곳에서 여러차례 봉기가 발생하였으나, 프라이멘 방직공 봉기는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이전 봉기가 단순 지역적인 기계 파괴로 끝난 것에 비해, 프라이멘을 중심으로 제국 곳곳의 연속적인 봉기를 발생시켰다. 카스텔부르크는 이전과 같이 군대를 동원해 진압하였으나, 봉기 노동자가 이에 저항하면서 최초의 유혈 저항으로 발전했다. 도시 빈민층과 인쇄공, 염색공, 직인 등 주변 도시에서도 봉기가 이어졌고,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봉기는 도시 뿐 아니라 농촌에로까지 전파되어 지주 귀족의 저택이 방화되기도 하였다. 더해서 단순 기계파괴적인 봉기는 시간이 지날 수록 기계를 소유한 대자본가 계층에 화살이 돌아감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대뷔르거의 위기감을 자극시켰다.

제국은 신정일치의 국가로서 국가원수인 황제는 황제교의 수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의회제 운동은 정치부분에서만 인민의 영향력을 확대하는데 그치고, 여전히 황립종무회를 중심으로하는 황제교 세력은 현인신 황제에 의해 주도되었다. 황제교의 대표적인 의식 가운데 미트라스(Mithras)는 신성한 불에 대한 종교제례, 신앙고백, 충성맹세를 하는 정치·종교적인 의식이다. 이를 위한 매개로 불이 사용되는데, 때문에 역사적으로 신성시되어 왔다. 그렇기에 이에 대한 종교세(성화세)가 부여되었고, 불을 주로 사용하는 제철업 등에서는 그들의 신앙생활과 관련 없이 성화세를 납부하여야 했다. 성화세를 비롯한 종교세에 대해 황립종무회만이 관련 의사결정을 할 수 있었고, 성화세에 대한 의무를 폐지하기 위해서는 황립종무회와 제국정부의 권한에 대한 헌법논쟁이 필수불가결했다.
1535년 선거에서 성화세를 비롯한 종교세의 의무 폐지를 지지하는 자유당과 진보연합이 과반 이상을 득석하며 해당 논의는 급물살을 탄다. 자유당과 우호적인 레슈텔루프 뤼셸리히 폰 내치베루스 제국수상은 취임 이후 지속적으로 친자유당 인사들을 상원인 제국참의원 의원으로 임명시켰다. 종교세 의무 폐지론자가 양원의 주도권을 쥐었고, 종교세 의무 폐지안은 1538년 6월 9일 제국인민의회를 통과하고 6월 11일에는 제국참의원을 통과해 에버하르트 3세에게 전달된다.
에버하르트 3세는 강림절 선언을 통해 제국의 입헌주의를 구축했으나 선언문에서도 의지되기를, '하나님께서 혼란스런 세상에 강림해 혼란을 평정하니, (중략) 주를 따르는 인간에게 세상을 맡기고 가셨다. 선제께서 혼란을 평정하시니, 짐또한 짐을 따르는 이에게 세상을 맡긴다.'며 제국의 의회제는 제권이 신성하지 않다는 반레가 아님을 명확히했다. 6월 12일, 종교세 의무 폐지안은 에버하르트 3세에 의해 거부권이 행사되었고, 나아가 6월 14일 에버하르트 3세는 폰 내치베루스를 비롯해 종교세 의무 폐지안을 지지한 제국참의원 의원을 해임했다. 차기 제국수상으로 반동적인 헤레보르트 레미스문트 프란츠 폰 데어 리우슈타인을 임명했다.
에버하르트 3세의 강압적인 태도에 제국인민의회는 반발하며 그에 대한 보복으로 6월 19일 군비를 포함한 예산의 대부분을 삭감한 예산안을 공개하면서 에버하르트 3세 및 데어 리우슈타인 제국내각과 충돌한다. 이에 에버하르트 3세는 반동적인 성향의 지주 귀족과 관료를 대거 제국참의원에 임명하면서 제국인민의회의 예산안을 차단한다.
6월 29일, 에버하르트 3세가 황립군 대장군참모장으로 호르홀트 아에텔불프 폰 한슈탈 남작을 임명한다. 곧이어 폰 한슈탈에 의해 군대가 무장하여 의회를 해산시키고자 한다는 소문이 퍼지며 시위가 발생한다. 6월 30일에는 자유당의 프리드리히 뵈지메를 폰 티셸베르크가 비밀경찰에 의해 암살 미수가 벌어지면서 시위는 격렬해진다. 7월 1일, 에버하르트 3세는 군대의 의회 해산 소문은 거짓이며 자유당 측에 교섭을 제안했다. 빌헬름 알브레히트 폰 크리제스테 전 제국외무장관이 교섭을 진행해 성화세를 비롯한 종교세 의무를 지우고, 대신 군비의 회계연도를 5년으로 연장하는 타협이 이루어진다. 더해서 암살 미수의 음모를 행한 비밀경찰을 해산하고 역할을 제국경찰 제1과로 위임했다. 7월 2일, 폰 데어 리우슈타인이 사임하고 폰 크리제스테가 제국수상으로 타협안을 선포하면서 사건은 종결된다.
보수당은 입헌군주제를 수용한 로센 후베르투스 폰 푸스발트 운트 에를슈타인과 같은 융커자유주의자들에 의해 구성되었다. 그러나 특정 이데올로그의 집합이 아닌 기득권층의 이익을 목표로 한 집단으로서 창당 직후부터 꾸준히 당 내에서는 융커자유주의 푸스발트파에 반대하는 파벌이 산개했다. 폰 푸스발트는 이들에 의해 35년 선거 이후 당권을 잃기도 하는 등 주기적으로 당내 혼란에 직면했다.
성화세를 비롯한 종교세 의무 폐지 의제가 한창일 무렵, 자유당 내 헤르만 마인라트 올리버 폰 올가부르크로틸데와 같은 독실한 의원을 중심으로 반대 세력이 형성되었고, 자유당으로부터 제명된 이들은 보수당으로 전당했다. 폰 푸스발트는 이들 세력을 포용하며 40년 선거에서 다시금 다수당을 차지했다.
1543년 5월, 프람발트 파울 울리히 폰 란덴도르프 제국내무장관이 사임하며 폰 크리제스테 제국수상은 차기 제국내무장관으로 프레니아주의 제국총독인 폴크데겐 지크프리트 카를 폰 할텐하임을 추천했다. 보수당과 자유당은 이에 동의했으나, 진보연합과 자유당 내 좌파가 노동자 탄압에 적극적이던 폰 할텐하임의 제국내무장관 임명에 반대하며 자유당은 원내 동조 세력과 당세가 억제되었다.
1544년, 로센 폰 푸스발트가 선거를 앞두고 그의 아들인 오일렘발트 게오르크 지기스문트 폰 푸스발트 운트 에를슈타인에게 당수를 세습했다. 45년 선거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하면서 대승을 거두었으나, 미약한 정치 능력과 친위세력, 반대파의 공격 등으로 큰 우려를 자아냈다. 오일렘발트 폰 푸스발트는 아우뎀파 및 퀴스테주의 해안파와 연합을 맺으며 보수당을 주도했다.
1548년 2월, 쿤니문트 융굴프 폰 이브레트론데 전 제국재무장관 비리 스캔이 발생했다. 보수당의 여러 인사들이 해당 스캔에 연관되었고, 자유당은 로센 폰 푸스발트가 이에 연관이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2월 19일, 폰 크리제스테 제국수상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사임했으며, 보수당은 호르돌프 오이마르 알프리트 폰 크리기우스로벨을 그 후임으로 추천했다. 그러나 이 추천에 스캔 의혹이 존재하며 정치를 은퇴한 로센 폰 푸스발트가 개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논란이 계속되었다.
1549년 2월 22일, 오일렘발트 폰 푸스발트를 지지하던 해안파가 지지를 철회하면서 정치 연합이 붕괴, 폰 푸스발트는 당수를 사임했다. 폰 푸스발트는 제국인민의회 의원을 사임해 제국참의원 의원으로 정치 인생을 보냈으며, 그의 형부인 린다가스트 일롤프 폰 마이쥘리엔푸스발트가 정치 세력을 계승했다. 오타카레파의 닐제도르프 카를로프레트 엠브레흐 폰 그리제크벨마인 운트 테르마우가 당을 이끌었으나, 8월 14일 에벤트로슈파와 해안파가 이들에 반발해 탈당하면서 오타카레파는 이들에게 당권을 넘겼다. 50년 선거 이후에는 이들과 푸스발트파-아우뎀파의 갈등이 발생하며 자유보수당으로 분당하는 등 보수진영 내 혼란이 계속됐다.
자유주의자가 결집해 설립된 제국 최초의 정당인 자유당은 의회제 운동을 주도하며 보수당과 함께 양당 체제를 구성했다. 그러나 의회제 운동의 마무리를 타협적인 결과로 도출해내고, 성화세 의무 폐지 또한 군비에 대한 권한 양보로 관철해내며, 최초 선거 이전 진보연합이 탈당한 것에 이어서, 45년 선거에서는 진보연합에 의석수가 밀리는 등 당세가 크게 약화되었다. 대패를 겪으며 이전까지 주류로 구성되던 당 내 파벌이 재편되어 알레마니아를 중심으로 하는 남부파가 당권을 장악한다.
자유당은 50년 선거에서 보수당이 분열과 새로운 담론을 통해 71석을 득석하며 다시 다수당에 오른다. 자유당이 제국인민의회를 주도하면서 과거 20년대에 주식 버블을 방지하고자 제정된 주식거래령을 폐지했다. 주식거래령은 본질적으론 뷔르거의 성장을 막고 창출된 자금을 융커에 융자해주는 법령이었고, 자유보수당 및 진보연합의 지지를 바탕으로 폐지했다. 또 다른 활동으로, 광산에 대한 자유로운 투자를 금지한 광산규제법을 폐지하며 석탄을 비롯한 광산업이 발달하였다. 주식거래령의 폐지로 주식시장의 규제를 해체하고, 광산규제법의 폐지로 자원의 생산이 늘어나며 석탄을 사용하는 철도 산업이 발달했다. 또한 증기선을 이용한 운송사가 석탄의 공급 증가에 따른 가격 하락에 수입이 증가하며 철도주뿐만 아니라 상선주도 급등하며 운송 산업이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1553년 알레마니아주 내륙의 상선사가 부실 제정 하에 여럿 파산하며 시장에 위기감을 발생시켰다. 이는 결국 운송주 전체에 대한 급락을 발생시켰고, 이 일련의 사건을 1553년 운송위기(Speditionkrise)라 부른다.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임명된 하일베르트 엘리아스 폰 티스브라크리크 제국수상은 철도를 국영화하고, 주식 거래에 대한 증권거래소법(Börsengesetz)을 상정했다. 진보연합과 보수당, 자유보수당이 해당 제안에 대해 지지를 보냈으나, 자유당은 미온적이었다. 이에 반발한 일부가 자유보수당으로 전당하며 제국철도(Foligerreichseisenbahn)과 이를 관리하는 제국철도부(Foligerreichsministerium für Foligerreichseisenbahn)가 설립되었다.
슈베른란트 통일 전쟁의 패배로 정치력을 거세당한 구 남부 3왕국은 산업혁명과 반백년의 기간을 통해 점차 정치력을 회복해냈고, 구 남부 3왕국의 이익, 뷔르거의 이익을 중시하는 남부파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구 라그렌센트 왕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슈베른란트 통일 전쟁을 통해 탈분리된 베른하이어와 계속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던 1555년 2월, 베른하이어의 주요 가문인 덴다트가와 각국의 주요 가문이 관계된 계약서가 공개되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여러 차례 개정된 계약서는 덴다트가와 여러 가문들의 계약 관계와 그 보상에 대해 기입되어 있었고, 그 중 구 알레마니아 왕국의 주요 가문인 알레마니아마인렐베노트가와의 계약이 존재했다. 차후의 협상을 통해 인정된 알레마니아마인렐베노트가의 지분은 11.06%였으며, 막대한 이익이 발생하는 베른하이어령 모르티민과 관련되어 막대한 이익이 예상되었다.
게다가 당시 자유당의 당수는 알레마니아마인렐베노트가의 당수, 플라데베르트 헬촐트 레슈텔루프 폰 알레마니아마인렐베노트 백작과 사촌관계인 투리스문트 라이터 레오프리트 폰 알레마니아마인렐베노트였고, 해당 건은 알레마니아주에 막대한 이익이 돌아갈 것임이 명백했다. 1556년 3월, 이 계약과 관계되어 내전이 발발하였고, 자유당은 전쟁을 호소했다. 아델베르트 1세는 이를 거부했으나, 얼마되지 않아 1558년 1월 26일 아델베르트 2세가 즉위하면서 상황은 반전된다. 몇개월 후 폰 티스브라크리스크 제국수상을 하트거 로데리크 폰 브라우덴올펜로흐로 교체하고 군비예산안 증가를 요청하면서 해당 내전에 개입할 의지를 내비쳤다. 자유당과 보수당은 이에 찬성표를 던지며 지지했고, 1559년 전쟁예산법은 통과되며 전쟁 시 전쟁예산에 대한 권한은 제국정부에 귀속된다. 제국인민의회의 직권을 거래했다며 비판의 여론도 존재했으나, 대다수 전쟁으로 얻을 막대한 이익을 기대하며 이들을 지지했다.
1559년 5월 18일 협약절, 아델베르트 2세는 지분계승전쟁(Anteilfolgekrieg)이라 명명하며 베른하이어에 개입한다. 초기 6개월 간 제25·38·73사단이 초기파병되었고, 이후 6개월 간 추가적으로 제1근위·13·55사단이 파병되어 외텔슈비어 공방전에 참가했다. 그러나 마그니우스까지 전쟁에 참전하면서 내전 세력 간 외부 세력의 개입을 차단하고자 1560년 5월 내전 세력 간 합의에 의해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해당 협정에서 제국은 1.5%에서 2% 안팎의 지분을 보장받으며 큰 파장을 낳았다. 개입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자유당에 대한 비난이 쇄도했고, 제국인민의회를 제압하고자 한 아델베르트 2세는 이를 이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베른하이어측이 독단적 협정 체결에 '황제가 외부사성국인 베른하이어의 외교 문제에 간섭하는 것은 순리이나, 이번 문제는 내전으로 외교가 아니다'며 휴전 협정에서 황제를 배제해 아델베르트 2세를 분노케했다.
아델베르트 2세는 계속 아군인 북부측에 휴전 협정을 파기할 것을 압박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자, 1661년 1월 18일, '남부는 제국의 적이 아니며, 남부 또한 제국의 군대가 진주할 수 있다'며 제1근위사단을 진군, 남부가 이를 반격하며 휴전이 파기되었다. 황립군 전군이 공세를 개시해 덴다트 인근까지 진격했으나, 북부군의 라그나 백작이 제1근위사단의 후방을 오인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고 공세가 중단되었다. 이후 겨울까지 서로 간 수 차례의 공세가 이어졌으나 결정타를 가하지 못하고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이 기간 제국의 파병군은 제2근위기병·2·6·7사단이 추가 배치되었다.
1561년 11월 __일, 남부측 모르티민의 원정군이 야심한 밤 강을 따라 베른하이어의 궁정인 빈헌을 기습하면서 상황이 바뀐다. 7만의 군대가 빈헌을 점령하는데는 성공했으나, 뒤따라온 마그니우스 왕립 해군에 의해 퇴각로가 봉쇄당하고, 열대 지방의 원정군이 11월의 추위 속에 보름만에 항복하는 참사가 벌어진다. 빈헌 기습과 동시에 다니엘 2세 대공은 행방불명되어 황립군과 왕립 해군이 베른하이어 황립육군-왕립 해군 임시위원회를 수립하며 그 통치를 대신했다. 연합 임시위원회를 통해 베른하이어의 군제가 개편되었고, 이후의 공세에 영향을 끼쳤다.
제17·24·29·41·43·48·65사단, 7개 사단이 추가 배치되며 전력이 증대되었고, 1562년 봄, 다시 전투가 진행되었다. 에르미니아 왕국의 군대가 개입하는 등 사건이 발생했으나 결국 11월부터 1563년 1월 30일까지 덴다트에서 저항을 마지막으로 지분계승전쟁이 종전한다. 전쟁의 결과 제국은 전전 11%의 지분 비율에서 25%까지 인정을 받으며 대승을 거두었다. 베른하이어에 대한 영향력을 확고히 했고, 경제적인 우위를 해체했다. 모르티민 동양 회사의 막대한 배상금은 제국의 경제를 전설적인 호황으로 몰고 갔으며, 1563년부터 1574년까지의 호황을 황금시대(Goldzeit)라 불렀다.

지분계승전쟁의 주요 원인이자 목적인 모르티민 동양 회사는 역사상 최대의 기업으로서 전쟁의 결과 제국은 25%에 달하는 지분을 인정받으며 최대 주주로 등극했다. 막대한 가치를 보유한 모르티민 동양 회사의 주식은 그러나 베른하이어령 모르티민에 위치한 알마트라 주식거래소에서만 거래가 가능했고, 주당 가치도 막대해 주식의 직접적인 교환 대신 주식으로 발생하는 배당을 담보로 한 채권을 발행하며 활용하였다. 채권으로 확보된 유동성은 제국의 적자를 방어하고 동시에 산업 발전을 위한 투자금으로 활용돼 제국의 경제를 호황으로 이끌었다. 대뷔르거나 소뷔르거 등 민간에서 해당 채권에 대한 투자가 증대되었고, 채권에 대한 신용을 바탕으로 공격적인 투자가 이루어지며 경제의 호황이 계속되었다.
지분계승전쟁에서의 승리가 경제의 호황을 이룩하자 개입을 주도한 자유당은 65년 선거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당내에서 폰 알레마니아마인렐베노트를 위시한 남부파가 지지를 바탕으로 당내를 완벽히 장악하고, 알레마니아주가 호황의 최대 수혜를 얻으면서 자유당이 우경화되었다. 폰 브라우덴올펜로흐 제국수상에게 원내에서 과반을 차지한 자유당과의 타협이 강제되었다. 알레마니아주의 관료인 도메트루디스 바헤멘 폰 아르겐 백작과 대뷔르거인 레오바파르 알헬름 헨데 폰 비르헨이 각각 제국내무장관과 제국상공업장관(Foligerreichsminister des Handel und Gewerbe)에 내정됐고, 기본권이 확대되고 공개재판 등 법앞의 평등이 이루어졌다. 그에 대한 대가로 황립군과 황제교에 대한 제국인민의회의 개입을 포기하고 브라우덴올펜로흐 제국내각에 대한 입법·예산적 지원을 가하는 등 정치적 거래가 이루어졌다.
대뷔르거가 정치력을 획득한 것과 별개로, 소뷔르거와 프롤레타리아트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황금시대 속에 경제는 호황을 이루었으나, 호황 속 인플레이션으로 소뷔르거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생활고는 지속되었다. 이들은 각자의 환경 속에서 반동 귀족과 자유주의 대뷔르거에 대항했다. 소뷔르거는 민주적인 선거와 개혁적인 태도를 보이며 현 상태에 불만을 지녔으나, 고도화되는 자본주의 아래서 생활의 위협을 받았다. 프롤레타리아는 1560년대 태동한 베른하이어의 에피크루주의를 바탕으로 정치 의식이 태동하며 이들의 조직화와 파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지역적이고 주도적인 인물이나 조직이 존재하지 않아 제국내무장관을 장악한 대뷔르거에 의해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다. 대뷔르거의 반동과의 타협은 이들 계층의 반발로부터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지킴에 있었다. 폰 브라우덴올펜로흐는 이들의 상황을 이용하여 반동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시키고자 했고, 큰 성과를 거두었다.
70년 선거은 여전히 자유당의 원내 과반을 보장했다. 그러나 소뷔르거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반발이 점차 첨예화되고 자유당의 우경화에 지지자가 감소하며 득표에 있어서 감소가 나타났다. 자유당 우익의 지지가 보수당에로, 좌익의 지지가 자유보수당과 진보연합에로 옮겨갔다. 그러나 여전히 알레마니아주에서의 지지세는 여전했다. 하지만 반동 세력으로부터 슈베른란트 통일 전쟁의 패전국인 알레마니아가 정치 권력을 행사함에 있어 불만이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동 운동은 더욱 심화되었다.
노동 운동은 프라이멘 방직공 봉기를 시작으로 촉발되며 1570년대 초, 노이엘벤 미흐트가 에피크루주의을 소개시키며 이념으로의 무장이 이루어졌다. 제국의 에피크루주의, 미흐트주의는 재산의 분배와 생산수단의 공유를 소수의 프롤레타리아트 정치인이 모든 이가 평등한 의회를 통해 다른 계층을 설득하여 이를 실현시키고자 했다. 때문에 평등한 투표권과 사회적 계급 해체를 요구했다. 또한 노동자 조직을 구성하여 정치 단체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제국경찰의 탄압과 정치 권력 획득에 있어서 관념적이고 소뷔르거적인 태도는 현실적인 저항에 어려움을 낳았고, 미흐트주의는 현상 변화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모르티민 동양 회사의 주식 약 10년의 기간 동안 주가가 20배 증가하는 등 시장 기대감이 막대했다. 그러나 주식의 99%가 제국과 같은 국가 혹은 거대 기업이 소유하며 1%의 주식만이 시장에서 거래되었다. 거래되지 않는 99%의 주식의 주가도 20배가 오르며 점차 과대평가되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제국과 마그니우스 양국 경제학자로부터 모르티민 동양 회사에 의존한 국가예산에 대한 회의가 지속되는 와중, 주식의 과대평가로 양국 정부에서도 불안감이 조성되었다. 그러던 1574년, 제국에서 기근이 발생하며 생활난이 증가했고, 곳곳에서 소요가 발생했다. 75년 선거를 앞두고 정치·경제적 혼란이 발생하자 이를 해소하기 위해 긴급하게 유동성이 필요했다.
모르티민 동양 회사 주식의 배당금은 투자 촉진을 위해 특정 규칙에 의해 거래되었다. 전체 지분의 3% 이상을 소유한 주주의 배당률을 전체 지분의 3%로 제한해 소규모 투자자의 이익을 보장했다. 그러나 양국이 긴급히 유동성이 필요로 해지며 이를 배당금으로 충족하고자 했다. 전체 지분의 40%를 지니고 있던 양국은 해당 규칙을 파기하며 유동성을 확보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주가 변동에 영향을 끼치던 소액 투자자들의 배당률이 급락하자 주가가 급락했다. 이에 모르티민 동양 회사 주식을 담보로 채권을 발행하던 양국에서 채권에 대한 디폴트를 선언하면서 모르티민 동양 회사 주가 급락의 여파가 일반 사회에로 전파되며 대불황이 발생한다.
제국 내 채권 투자자의 파산이 잇따랐고, 기근의 영향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막대한 사회적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자유당은 그란치프 제국을 포함한 국가들과 농산물 관세 협상을 추진하면서 이를 해결하고자 했으나, 75년 선거에서 대뷔르거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자유당은 대참패를 거둔다. 폰 아르겐 제국내무장관과 폰 비르헨 제국상공업장관이 사퇴하였고, 자유당은 국민자유당과 자유인민당으로 공중분해되었다.
미흐트주의와 에피크루주의를 중심으로 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정당이 창당되며 사회주의의 부상이 잇따랐다. 1575년 3월 9일, 루티지에서의 민중 봉기를 시작으로 제국 전역으로 봉기가 발생했다. 초기 진화에 실패한 폰 브라우덴올펜로흐 제국수상이 사임하였고, 엔브라주의 파울 쿠트불프 라트페르트 우르폰 미센 운트 폰 네름펠트렌트 남작이 제국수상에 임명되었다. 우르폰 미센 제국수상은 보수당, 자유보수당, 국민자유당의 지지를 바탕으로 사회주의법을 통과시켜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계급정당을 금지시켰으며, 점진적으로 보험 제도를 도입하며 불만을 잠재우고자 했다. 보수당을 제외한 원내 대부분의 정당이 참여해 건강보험과 산업재해보험 등이 입법되었고, 노동시간 단축, 아동노동 금지가 입법되었다.
사회주의법의 탄압 속에 대표 에피크루주의 정당 인민사회주의연합과 미흐트주의 정당 노동사회당의 간부와 당원 여럿이 체포되었으며, 하인리히 벨제, 노이엘벤 미흐트 등의 사회주의 이론가에 대한 체포령이 발의되었다. 사회주의 이론가들은 외국으로 망명하였고, 제국에 남은 사회주의자들은 이들과 연계된 지하 조직을 조직하며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 함양과 혁명 준비를 지속했다.
지형도 |
제국의 영토는 슈베른란트의 일부로서 서쪽 해안에서부터 남쪽 힘멘트레펠란트까지 이어진 헤스페로스벨트 최대 산맥인 리니츠펠트 산맥과 동쪽 해안에서부터 에세르까지 이르는 팔로렌스 산맥으로 둘러쌓여있다. 슈베른란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크게 5개의 강이 리니츠펠트 산맥에서 발원해 산맥 사이로 흐른다. 슈트롬강, 아미시아강, 플루스강, 란트강, 라우피아강이 리니츠펠트 산맥과 팔로렌스 산맥에서 발원하여 성단양까지 흐른다.
지명 |
지리적 지명의 경우 강을 중심으로 하여 산을 경계로 이룬다. 슈트롬강의 기원지의 남부 고지대는 아스크라리아라 불리며, 강의 상류의 평야를 아일레니아라고 칭한다. 아일레니아에서 조금 더 내려와 평야가 펼쳐지기 시작하는 지역을 알레마니아라 부르며, 역사적인 알레마니아와 구별하기 위해 남안의 루르바니엔에서 따와 루르바니엔알레마니아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강 중류 지역은 플라니아라 부르며, 아미시아강과 이어진 강 하류에 비셴란트라 불리는 거대한 평야가 위치한다. 아미시아강는 아스크라리아의 북부 평야인 마르조니아에서 기원하여 빈탄란트를 거쳐 비셴란트로 흐른다. 플루스강은 아스크라리아 동부의 협곡지인 핀스타를란트에서 기원해 라이흐란트에서 루켄강이 합류하여 멜로니아로 흐른다. 중류 테펜란트에서 잘레강이 합류하고 네벤란트에서 란트강과 인접하게 흐른다. 강 하류의 구릉지를 휘겔란트라 부르며, 강 하류 유역을 주페리아라 부른다. 란트강은 슈슬라티아에서 기원하여 그란치프의 위그노에서 바르테강이 합류한다. 강의 중류에는 블린트란트라 불리는 거대한 평야 지대가 위치하며, 남북의 회랑을 통해 노르트란트와 네벤란트로 이어진다. 네벤란트를 지나 크루시아에서 아르트강이 합류한다. 휘겔란트의 동쪽을 지나며 하구 서쪽의 평지는 카르멜란트라 불린다. 라우피아강은 팔로렌스 산맥에서 발원하여 그 흐르는 유역을 로우판란트라 부른다.
제국의 기후는 온대 하우 기후(Cwb)와 냉대 동계 소우 기후(Dwb), 냉대 동계 소우 기후(Dwc), 스텝 기후(Bsk), 툰드라 기후(ET)가 존재한다. 연안 150km에 온대 하우 기후(Cwb)가 위치해 지틀란트, 휘겔란트, 로우판란트 일대는 여름에 따뜻하고 겨울이 짧아 2기작이 가능하고 온대 구과수림이 나타난다. 대부분의 지역은 냉대 동계 소우 기후(Dwb)로 겨울이 춥고 건조하고 여름이 따뜻해 기온의 연교차가 크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온대 활엽수혼합림이 나타나나, 리니츠펠트 산맥 동쪽은 산맥에 의해 강수가 차단돼 지중해성 삼림·소림·관목지가, 내륙의 일부 고지대에 한해 열대·아열대 초원·사바나·관목지가 나타난다. 아스크라리아 남부 고지대에는 스텝 기후(Bsk)로,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강수량이 부족해 열대·아열대 초원·사바나·관목지가 나타난다. 팔로렌스 산맥 고지대에는 툰드라 기후(ET)가 위치해 나무는 자라지 않는다.
![]() Foliger von Kircuss 키르수스의 황제 |
Herbert I 헤르베르트 1세 |
Eberhard I 에버하르트 1세 |
Eberhard II 에버하르트 2세 |
재위 1423년 1월 18일 ~ 1436년 5월 28일 |
재위 1436년 5월 28일 ~ 1458년 1월 30일 |
재위 1458년 1월 30일 ~ 1464년 4월 8일 |
생몰 1372년 2월 18일 ~ 1436년 5월 28일 |
생몰 1399년 6월 13일 ~ 1458년 1월 30일 |
생몰 1427년 8월 11일 ~ 1464년 4월 8일 |
Adelbert I 아델베르트 1세 |
Herbert II 헤르베르트 2세 |
Eberhard III 에버하르트 3세 |
재위 1464년 4월 8일 ~ 1492년 9월 14일 |
재위 1492년 9월 14일 ~ 1531년 12월 2일 |
재위 1531년 12월 2일 ~ 1558년 1월 26일 |
생몰 1451년 11월 29일 ~ 1492년 9월 14일 |
생몰 1473년 9월 3일 ~ 1531년 12월 2일 |
생몰 1495년 5월 22일 ~ 1558년 1월 26일 |
Adelbert II 아델베르트 2세 |
Adelbert III 아델베르트 3세 |
Siegfried I 지크프리트 1세 |
재위 1558년 1월 26일 ~ 1584년 6월 11일 |
재위 1584년 6월 11일 ~ 1608년 4월 30일 |
재위 1608년 4월 30일 ~ 1631년 8월 13일 |
생몰 1519년 8월 17일 ~ 1584년 6월 11일 |
생몰 1542년 5월 6일 ~ 1608년 4월 30일 |
생몰 1568년 9월 11일 ~ 1631년 8월 13일 |
Siegfried II 지크프리트 2세 |
Herbert III 헤르베르트 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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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1631년 8월 13일 ~ 1655년 1월 14일 |
재위 1655년 1월 14일 ~ 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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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1593년 2월 24일 ~ 1655년 1월 14일 |
생몰 1626년 3월 19일 ~ 현재 |
키르수스의 황제는 제국의 국가원수이다. 1423년 1월 18일 제국 선포와 함께 헤르베르트 1세가 즉위한 이래 25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제국은 신정일치 국가로서 키르수스의 황제는 제국 최고 통치자인 동시에 키르수스 황제교의 수장이다. 헤르베르트 1세 이후 11명의 황제가 즉위했으며, 현재 헤르베르트 3세가 통치를 행사하고 있다.
키르수스의 황제는 키르수스 제국헌법에 의해 그 권력이 보장되고 제한된다. 제국헌법에 따르면 키르수스의 황제의 신체는 신성하며, 이를 침해할 수 없다. 정치적으로 광범위한 행정 특권을 지니었고, 제국수상을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다. 제국인민의회를 소집하고 해산할 수 있다. 모든 공문서와 법령은 황제의 최종 승인을 필요로 하며, 화폐와 여권 등을 황제의 이름으로 발행한다. 군사적으로 최고사령관 및 제국원수의 직책으로 황립군에 대한 최고지휘권을 지녔다. 종교 수장으로서 황립종무회의 활동은 제국정부 및 제국의회, 제국대법원의 제약을 받지 않았다. 제국주의회의 동의를 통해 해외에 대한 선전포고 및 평화조약을 진행할 수 있다. 다만, 제국수상이 모든 조례 및 법령에 대해 부서하며, 제국인민의회 해산을 위해서는 제국주의회의 동의를 얻고 일정 기한 내에 선출을 진행해야 했다. 황립종무회를 비롯한 황제교 조직들은 제국내각 내 제국황실부의 소관으로 존재했다.
1530년 의회제 운동 이후 제국헌법이 제정되며 황제의 권한이 제국헌법에 의해 정의되고 제한되었다. 1538년 성화세 사건을 통해 군예산과 관련해 제국인민의회와의 타협이 있었고, 158_년 황립당 분쟁을 통해 황제교의 조직이 명목상으로 제국내각의 통제를 받았다. 1653년 재림절 선언의 이행을 통해 제국수상의 임명에 제국인민의회에게 권한을 사실상 양도했으며, 황제와 제국수상에 의해 임명되던 상원인 제국참의원을 폐지하고 각 주의 인민이 주정부를 수립하고 해당 주정부의 대표자로 제국주의회를 구성케했다.
황제의 계승에 있어서 라우지츠부르크의 왕의 상속법을 따른다. 장자 상속제로서 남성 후계자에게 신성을 물려준다. 허나 후계자에게 종교적 문제가 존재한다면 황립종무회가 해당 상속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황제가 미성년이거나 건강상의 이유로 통치가 불가능하다면 상속법에 따라 섭정을 내세울 수 있으며, 섭정에 대해서도 같은 이유로 황립종무회에서 섭정의 인정을 거부할 수 있다. 허나, 이 경우 황립종무회는 섭정의 해임이 아닌 황립종무회에 한정하여 황제대리를 따로 내세운다.
![]() Foligerreichskabinett Sanzberg 잔츠베르크 제국내각 |
← | Reichskabinett Sanzberg 1659년 2월 11일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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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igerreichskanzler 제국수상 |
Heinrich Siegfried von Sanzberg 하인리히 지크프리트 폰 잔츠베르크 |
1659년 2월 11일 | |
국민자유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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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igerreichsvizekanzler 제국부수상 |
Ludwig Armein von Stafelwersen 루트비히 아르마인 폰 슈타펠베르젠 |
1659년 2월 11일 | |
국가보수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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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gerreichsfoligerhausminister 제국황실부장관 |
Siegfried Leud-Ausen von Hauspensel 지크프리트 로이트아우젠 폰 하우스펜젤 |
1659년 2월 11일 | |
무소속 | ||
![]() |
Folgerreichsaußenminister 제국외무부장관 |
Friedrich Ostel von Südpehron 프리드리히 오스텔 폰 쥐트페론 |
1659년 2월 11일 | 1660년 3월 1일 |
국민자유당 | ||
Paul Eusen von Char-Kaschwern 파울 오이젠 폰 하를카슈베른 |
1660년 3월 1일 | |
국가보수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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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igerreichsinnenminister 제국내무부장관 |
Ferdinand Orben von Maurinlohe 페르디난트 오르벤 폰 마우린로헤 |
1659년 2월 11일 | |
국민자유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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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igerreichsjustizminister 제국법무부장관 |
Robert Eisel von Ohlfe und Rahesel 로베르트 아이젤 폰 올페 운트 라에젤 |
1659년 2월 11일 | 1660년 3월 3일 |
국가보수당 | ||
Hart Friedrich von Lurheim 하르트 프리드리히 폰 루르하임 |
1660년 3월 3일 | |
국민자유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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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igerreichsmiliärminister 제국군무부장관 |
Karl Florian von Naselse 카를 플로리안 폰 나젤제 |
1659년 2월 11일 | |
무소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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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igerreichspostminister 제국체신부장관 |
Maria Ostel von Möhe-Wez 마리아 오스텔 폰 뫼헤베츠 |
1659년 2월 11일 | |
국가보수당 | ||
![]() |
Foligerreichswirtschaftminister 제국경제부장관 |
Anton Braum 안톤 브라움 |
1659년 2월 11일 | |
국민자유당 | ||
![]() |
Foligerreichsnahrungminister 제국식량부장관 |
Osthart Karl Wilhelm von der Launbe 오스트하르트 폰 데어 라운베 |
1659년 2월 11일 | 1660년 3월 1일 |
국가보수당 | ||
Peter Klaus von Karwergen 페터 클라우스 폰 카르베르겐 |
1660년 3월 1일 | |
농민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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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igerreichsverkehrminister 제국교통부장관 |
Ernst Till von Asfursen 에른스트 틸 폰 아스푸르젠 |
1659년 2월 11일 | |
국민자유당 |
키르수스 제국내각은 제국수상에 의해 조각되며, 총 9개의 제국부로 구성된다. 제국수상에 의해 작성된 임명안은 제국인민의회의 동의를 거쳐 황제의 승인을 통해 현실화된다. 단, 이때 제국황실부장관과 제국군무부장관의 인사등용은 각각 황제와 황립군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1655년 제국인민의회 선거 이전까지는 1개의 여당이 정권을 수립하였으나,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당시의 개혁의 영향으로 정권 구성에 제국인민의회 의석 수의 중요성 증가와 다당제화, 신생정당들의 원내 진입 등으로 연립정권이 구성되고 있다.
![]() Foligerreichsprovinzrat 키르수스 제국주의회 |
← | Foligerreichsproinzrat 7. Sept 1661 - 16. März 1666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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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Reichskonservative Partei 국가보수당 |
Kircusser Nationalliberale Partei 키르수스 국민자유당 |
Kircusser Bauernpartei 키르수스 농민당 |
16석 / 93석 (17.20%) | 12석 / 93석 (12.90%) | 3석 / 93석 (3.22%) |
Opposition | ||
Kircusser Fortschriffpartei 키르수스 진보당 |
Sozialdemotische Partei Kircusses 키르수스 사회민주당 |
Kircusser Vaterlandspartei 키르수스 조국당 |
16석 / 93석 (17.20%) | 6석 / 93석 (6.45%) | 6석 / 93석 (6.45%) |
Ostkircusse 동키르수스인 |
Foligerreichspartei 제국당 |
Weißbund 백색연맹 |
5석 / 93석 (5.37%) | 2석 / 93석 (2.15%) | 2석 / 93석 (2.15%) |
Volkspartei 인민당 |
Parteilos 무소속 | |
1석 / 93석 (0.23%) | 22석 / 93석 (23.65%) |
![]() Foligerreichsvolkstag 키르수스 제국인민의회 |
← | 27. Wahlperiode 3. Febuar 1660 - 8. Januar 1665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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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Kircusser Nationalliberalener Partei 키르수스 국민자유당 |
Reichskonservativener Partei 국가보수당 |
Kircusser Bauernpartei 키르수스 농민당 |
111석 / 422석 (26.30%) | 89석 / 422석 (21.09%) | 19석 / 422석 (4.50%) |
Opposition | ||
Sozialdemotischener Partei Kircusses 키르수스 사회민주당 |
Kircusser Fortschriffspartei 키르수스 진보당 |
Kircusser Vaterlandspartei 키르수스 조국당 |
108석 / 422석 (25.59%) | 57석 / 422석 (13.50%) | 15석 / 422석 (3.55%) |
Foligerreichspartei 제국당 |
Ostkircusse 동키르수스인 |
Weißbund 백색연맹 |
11석 / 422석 (2.60%) | 7석 / 422석 (1.65%) | 2석 / 422석 (0.47%) |
Kircusser Reichspartei 키르수스 국가당 |
Volkspartei 인민당 | |
2석 / 422석 (0.47%) | 1석 / 422석 (0.23%) |
키르수스 제국인민의회는 제국의 양원 중 하원으로써 매 5년 마다 전국적인 선거를 통해 총 422명의 의원을 선출한다. 선거를 통해 구성된 의회는 개회와 동시에 의회의 의원 중 한 명을 투표하여 제국인민의회 의장, 제국인민의회 부의장, 제국수상을 선출하고, 선출된 제국수상에 의해 선출된 각 제국부의 장관은 제국인민의회의 동의를 얻어 제국내각을 구성한다.
제국인민의회의 주요한 권한은 입법의 기능과 예산안 결정 및 승인, 행정부 감사였다. 입법의 경우 의회 내부의 위원회와 황제, 제국정부, 제국주의회로부터 입안된 법안을 심사 및 결정했다. 이때 의회 내부의 위원회를 통해 입안될 경우, 총 세 번의 토론을 거치며, 이후 위원회에서 동의 투표를 거쳐 전체 회의에 부쳐졌다. 일반적인 법안의 경우 과반수에 해당하는 212표의 찬성표가 있어야 통과되었으며, 제국헌법의 개정과 같은 특수한 경우 전체 2/3에 해당하는 282표의 동의가 있어야 진행된다. 예산안의 경우 1년마다 제국정부의 요구와 지출을 세세하게 분석하고 논의의 과정을 거쳐 책정하였다. 군사 예산의 경우 5년 마다 책정되었다. 제국의 여러 세금에 대한 증세/감세/추가세의 경우 또한 제국인민의회의 동의를 거쳐야 했다. 황제가 외국과의 동군연합을 구성하는 경우를 포함한 모든 외국과의 조약, 협정, 선전포고 등에 대해 동의권을 지녔다. 행정부 감사의 경우 제국부 장관의 임명 뿐 아니라 불신임에 대해 영향력을 지녔다. 또한 제국정부는 제국인민의회의 요구만 있다면 언제든지 정부 조치에 대해 설명해야 할 의무를 지녔다. 별개로 제국주의회의 의원 또한 제국인민의회의 투표를 통해 탄핵될 수 있다.
1531년, 의회제 운동을 통해 설립된 이후 1세기 넘게 이어지고 있다. 설립 당시 선거는 4년 마다 이루어졌으나 1535년의 헌법 개정을 통해 현재와 같이 5년을 주기로 선거가 치뤄진다. 기존 제국인민의회는 제국수상의 선출을 비롯한 외국과의 선전포고, 제국주의회 의원 탄핵 등과 같은 거대한 권한들을 지니지 못했다.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도중 개혁 약속과 종전 직후의 개혁을 통해 여러 권한들을 제국주의회로부터 이관해왔으며, 입법 기능을 제국주의회와 동등 혹은 불리하게 나누었던 것을 유리하게 나누어 사실상 제국주의회는 통과된 법안의 거부권 조차 유명무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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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ovinz 키르수스의 주 |
Provinz Alemania 알레마니아주 슈베르부르크 |
Provinz Amisialand 아미시아란트주 마로부르크 |
Provinz Askraria 아스크라리아주 마인 |
Provinz Blindanten 블린단텐주 마이오렌츠 |
Provinz Dreich 드라이히주 핀첼 |
Provinz Enbra 엔브라주 크라델부르크 |
Provinz Flania 플라니아주 루티지 |
Provinz Flenia 프레니아주 엘젠푸르트 |
Kastelburg 카스텔부르크 |
Provinz Kriwesland 크리베스란트주 호피히스부르크 |
Provinz Kundburg 쿤트부르크주 쿤트부르크 |
Provinz Küste 퀴스테주 아우스하펜 |
Provinz Lausitzburg 라우지츠부르크 아우뎀 |
Provinz Otakare 오타카레주 발츠부르크 |
Provinz Sietland 지틀란트주 나젤제 |
Provinz Südellane 쥐델라네주 헨데 |
제국의 행정 구역은 주(Provinz), 현(Bezirk), 군(Kreise), 구(Amt), 리(Gemeinde)로 구성된다.
제국은 단일 국가로서 모든 권력을 중앙 정부인 제국정부가 소유하고 있으나,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도중의 대대적인 개혁 약속에 의해 전후 각 주들의 지방 자치를 인정했다. 기존 상원인 제국참의원을 계승하는 제국주의회는 각 주 별로 일정한 대표로 구성되어 주의 자치를 인정하는 주체이다. 각 주들은 매5년 마다 제국인민의회 선거와 개별된 각자의 선거를 치뤄 각 주의 의원을 선출하고 주정부(Provinzenregierung)을 구성한다.
제국 성립 당시 현재의 주는 부(Land)로 존재하며 그들의 부정부(Landesregierung)는 독자적인 체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슈베른란트 통일 전쟁을 거쳐 주로 재편됨과 동시에 권력은 카스텔부르크의 제국정부로 집중되었다.
제국의 현은 슈베른란트 통일 전쟁 이후 각 지방 정부마다 명칭이 다르던 하위 행정기구를 통일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이루었다. 현은 각 주에 존재하지 않는 경우부터 2개에서 3개로 구성되는 등 차이가 존재한다. 현은 제국정부에서 임명하는 현수상(Bezirkspräsident)이 중심인 현정부(Bezirksprsidium)로 이루어진다. 현정부는 제국정부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지방자치에 의해 구성된 주정부와 대비된다. 현정부는 각 군들의 통합된 행정을 주도하고 주정부와 상호 견제를 이룬다. 제국의 비대한 육군을 관리하는 감찰국을 보조하는 것도 현정부의 역할이다. 현수상과 현정부 관료들의 임기는 정해져 있지 않으며, 순전히 제국정부의 의향에 따라 교체될 수 있다.
주나 현 아래에는 군이 존재하는데, 이때 규모에 따라 일반군(Kreis)와 군급시(Kreisfreier Stadt)로 구별된다. 카스텔부르크나 슈베르부르크와 같이 동명의 군이 존재하지 않는 군급시를 제외하고, 군의 행정은 동명의 군급시에 종속된다. 군의 아래에는 구가 존재하는데, 이때 군급시는 별개의 체제를 가진 채 행정상 1개의 구로 구성된다. 군급시의 하위 행정구역은 구와 구역으로 구성되며, 명칭은 Bezirk, Stadtteil, Stadtbezirk, Ortseil 등과 같이 각 군급시마다 차이가 있다. 제국의 유일한 주급시(Stadtsprovinz)인 카스텔부르크는 군급시를 겸하지만 구로 구성되지는 아니한다. 구 아래에는 리로 구성되는데, 리도 군과 같이 규모에 따라 리(Gemeinde)와 정(Gemeindefreier Stadt)으로 구별된다. 정은 각 주마다 그 기준과 인정이 다르다.
![]() Foligerlicher Armee 키르수스 황립군 | ||
Foligerlicher Heer 황립육군 |
Foligerlicher Marine 황립해군 |
Foligerlicher Luftwaffe 황립공군 |
제국의 인구는 1662년 기준 327,289,120명이다. 인구 1/4이 몰려 있는 스트룸강을 비롯한 4대강과 해안에 인구 대부분이 거주하고 있으며, 내륙으로 갈 수록 인구 밀도는 급격히 낮아진다. 출생률은 34.3명으로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행정 구역 | 면적 | 인구 | 소재지 |
---|---|---|---|
알레마니아주 | 40,617,532명 | 슈베르부르크 | |
아미시아란트주 | 13,376,921명 | 마로부르크 | |
아스크라리아주 | 10,135,378명 | 마인 | |
블린단텐주 | 32,954,693명 | 마이오렌츠 | |
드라이히주 | 37,048,518명 | 핀첼 | |
엔브라주 | 7,958,367명 | 크라델부르크 | |
플라니아주 | 17,138,727명 | 루티지 | |
프레니아주 | 6,694,271명 | 엘젠푸르트 | |
카스텔부르크 | 19,307,231명 | ||
크리베스란트주 | 29,638,166명 | 호피히스부르크 | |
쿤트부르크주 | 21,515,757명 | 쿤트부르크 | |
퀴스테주 | 11,069,537명 | 아우스하펜 | |
라우지츠부르크주 | 26,127,854명 | 아우뎀 | |
오타카레주 | 13,016,933명 | 발츠부르크 | |
지틀란트주 | 24,818,822명 | 나젤제 | |
쥐델라네주 | 15,870,413명 | 헨데 |
제국은 아인종의 존재를 국가적 차원에서 인정하지 않는 대표적인 국가이다. 3억 명의 인구 99.9%가 오직 인간으로 그 중 대다수를 슈베른-게이만 민족이 차지한다.
슈베른-게이만 민족은 고대 슈베로니아 제국을 구성하던 슈베른인과 게이만족의 대이동 당시 슈베른란트로 대규모로 이주한 게이만인의 혼혈이다. 그러나 이름과 달리 슈베른인의 혈통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명칭에서 슈베른인의 역할은 혈통적인 특징이 아닌, 문화적인 것에 목적이 있다. 슈베로니아 제국은 멸망하기 직전까지도 헤스페로스벨트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다. 이는 문화의 영역에서도 동일하여 게이만족의 대이동 이전에도 게이만인 사회에는 슈베로니아의 문화가 흘러들어가 있었고, 슈베로니아 제국이 멸망하고 난 이후 그들이 슈베른란트를 장악하면서 슈베로니아 문화는 게이만인을 완전히 장악하여 현재에 이른다.
제국의 역사적 특성과 신념교의 교리에 따라 제국은 아인종을 강력하게 배척한다. 국경을 접한 게파르토와 달리 제국은 중세부터 아인종을 핍박하고 죽여왔다. 혼란기 동안 아인종은 분노 표출의 수단이 되었고, 동시에 고대 이야기의 괴물과 유사한 형상으로 인해 공포의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40년 전쟁 이후 조직적인 아인종 사냥이 대대적으로 벌어짐에 따라 슈베른란트 내에서 아인종은 자취를 감췄다. 현재 제국은 대부분의 아인종은 입국을 허가하지 않는다. 일부 입국을 허가 받는 아인종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면서 아인종적인 면모를 가릴 수 있는 이들이다. 이들은 제국외무부가 입국 절차와 제국 내에서의 신변을 관리하며 감시한다. 입국을 허가받은 아인종들은 제국에서 생활을 하면서 항상 그들의 아인종적인 신체 부위를 들키지 않게 가려야 하며, 이를 따르지 않아 발생하게 되는 피해는 제국외무부에서 책임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