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 복음 연합-신안 제국 전쟁

(나주 전투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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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마천루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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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 22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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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건 발생
2137 신안 문명
2189 러시아 공산당 출현
23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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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0 백두산 화산 분화. "신의 징벌"
2234 정교회의 정비
2235 아르세니예프 공의회
2235 - 2395 프리모리예 군벌 시대
2298 신안 제국 형성
24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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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4-2327 신안의 인천 정복
2317 신성 복음 연합 건국
2322 - 2324 제1차 신안-복음 전쟁
2327 고려국 선포
2332 제2차 신안-복음 전쟁
2349 - 2365 인천 독립 전쟁
2351 신미년의 역
2365 인천 연합 출범
2371 - 2374 1차 강화도 전쟁
2377 - 2381 2차 강화도 전쟁
2383 서해안 연합 형성
2387 - 2402 인천 제 1 군정
2395 - 2396 대 조국 전쟁
2396 동해 제국 건국
2399 - 2415 동해안 식민 계획
2399 제3차 신안-복음 전쟁
25세기 - 본편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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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0 - 2413 대반란
2402 기계교 반란
2405 조선인민공화국 건국
2410 경오정난과 대요 건국
2416 - 2418 1차 화북 원정
2419 요양 조선족 폭동
2420 - 2421 2차 화북 원정
2421 - 2422 묵던 원정
2423 얄루 제국 건국
2427 - 2439 인천 제 2 군정
2428 - 2432 주체교도의 난
2432- 신성혁명
2439 - 2442 얄루 전쟁
2440 대진의 분열
2440 인천의 봄
2444- 인천 내전
244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등장
본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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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동해 제국의 분열
24?? 얄루 제국의 분할
2666? 스포일러의 등장
신성 복음 연합-신안 제국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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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2322년 – 2399년
장소 신성 복음 연합신안 제국 전체
원인 호남의 패권을 두고 벌인 경쟁
교전국 및
교전 세력
복음 신안
신성 복음 연합 신안 제국
지휘관 황제 김무홍

황제 이문호
황제 박중현
그 외 다수

황제 김대주

황제 김웅
황제 김구리
그 외 다수

병력 알 수 없음 알 수 없음
피해 알 수 없음 알 수 없음
결과 1차,2차 -> 신안의 패배 3차 -> 신복련의 패배
영향 신안 제국 - 반란으로 인해 영토 대부분 상실, 신성 복음 연합 - 중앙군의 와해로 인한 황권 추락

개요

신성 복음 연합-신안 제국 전쟁은 호남의 두 강대국 신성 복음 연합신안 제국이 3차에 걸쳐 정면으로 맞붙은 전쟁을 의미한다. 최종적으로는 둘 모두 이 전쟁으로 약화되거나 몰락하였다. 마지막 전쟁이 있었던 2399년 이후 현재까지 45년간 둘 사이는 전쟁이 없으나, 앞으로 두 나라가 힘을 되찾는다면 다시금 누가 호남의 지배자인지 겨룰 기회가 올 것이다.

제1차 전쟁

2322~2324 신성 복음 연합이 아직 무역 연합일 시기로, 신안의 약탈에 시달리던 전북의 소군주들이 힘을 합쳐 신안에 대항한 전쟁이다. 편제의 차이로 인한 신안군의 허점을 잘 간파하여 연합군이 승리하였다. 이를 계기로 신안의 확장은 주춤하게 되며, 승리한 연합 측은 지도자 김무홍을 정식으로 황제로 추대한다.

제2차 전쟁(호남대전)

제3차 전쟁

2399 빨리 끝났으나, 여파는 가장 컸다.

편의상 신복련군을 간단히 "제국군"으로, 신안 제국군은 "신안군"으로 호칭한다.

배경

신성복음연합의 군대는 이전의 강군이 아니었다. 줄어든 봉급과 관심으로 인해, 신복련 제국군은 어중이떠중이들로 들어찼으며 장비의 질도 하락했다. 신안 측도 상태가 나쁘기는 마찬가지였다. 귀족들의 사병은 늘어만 갔고, 부와 영광을 찾는 이들이 지원하던 신안 제국군도 이러한 싸움에는 관심이 덜했다. 결국 범죄자들이라도 끌고 와서 머릿수를 맞춰야만 했다.

신안 황제 김구리는 암살당한 김훈 황제의 아들이었다. 그는 눈치빠르게 귀족들과 친한 척을 해서 살아남았고, 황제 자리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귀족들은 황제를 자기 아랫사람 보듯이 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귀족들에게 병력을 징집해 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신성복음연합 황제 박중현 역시 꼭두각시에 가까운 인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뛰어난 정치력으로 전주 이씨의 3대 세습을 막고 황제가 되는 것까지는 성공했으나, 제국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는 무능의 극치에 달했다. 그는 자신을 도운 귀족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제국군 예산을 극도로 삭감했고, 귀족들이 짊어지는 의무도 경감하였다. 제국군은 훈련도, 보급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진행

박중현 황제가 이끄는 신복련군과 땅을 탐내는 귀족들은 비옥한 나주 평야를 목표로 삼았다. 본토에서 이어지는 보급망은 해체되었기에, 보급품을 광주국에서 비싼 값에 사올 수밖에 없었다. 신복련군이 진군한다는 소식을 듣고 목포의 신안황궁은 경악했다. 그럼에도 귀족들은 자신의 병력을 보내면 황제의 지휘를 따라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김구리 황제는 시민들 중에 모아서 꾸린 5천 결사대만으로 나주로 나섰다.

막상 나서 보니, 신복련 측은 훨씬 약체였다. 숫자는 훨씬 많았으나, 대부분 마구잡이로 집어온 농민들이었다. 신안인들에 비해 복음인들은 자신의 제국에 대한 강한 자부심 같은 것이 없었으며, 게다가 나라를 지키는 것도 아닌, 공격전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기가 약할 수밖에 없었다. 신안군은 몇 배의 적군을 상대로 밀리는 기세가 아니었다. 오직 한 장군, 임요한이 담당하는 제국군만이 승세를 보였다.

전투가 계속 진행되고, 신안군은 교환비에서 여전히 우세를 보이고 있었으나, 제국군이 너무 많았다. 제국군의 장수들은 아군이 무작정 후퇴하여 패주하는 것만 막아도 쪽수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임요한군은 몇 발 더 앞서, 아예 신안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김구리 황제는 후퇴도 고려하였으나, 그는 더 이상 꼭두각시로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여기서 자신만으로 신복련을 밀어내야만, 귀족들에게 맞설 명분이 생기는 것이었다. 박중현 황제는 전투의 결과는 관심도 없는 듯, 후방에서 술판만 벌이고 있었다.

전투는 날을 넘겨 며칠째 이어졌다. 양군 간의 필사적인 싸움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보급품의 문제가 발생했다. 신안 측은 풍부한 후방에서 안정적 지원을 받았으며, 자체 경제력도 풍부하였다. 그러나 신복련은, 광주로부터 보급품을 웃돈 쳐서 사오는 상황이었고, 신복련이 광주에 줄 돈이 바닥난 시점에서, 보급은 끊겼다.

무기의 교체가 막힌 시점부터, 결국엔 며칠 안 가 군량이 바닥날 것이란 소문이 신복련의 병사들 사이에서 돌기 시작했다. 그들의 사기는 0을 찍었고, 회군을 요구했다. 박중현 황제는 상황을 아직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고, 단지 지금 이기고 있으니 계속 밀어붙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오히려 신안 측이 먼저였다. 김구리 황제는 적진에 보낸 정탐을 통해 보급이 끊겼다는 것을 알고 총공격을 진행했다. 서로가 활에 맞고, 칼에 베이고, 물에 빠지는 죽고 죽이는 아비규환 끝에 패주한 것은 제국군이었다. 박중현 황제도 결국 자신의 본채 앞까지 적군이 보이는 것을 보고서야 뒤늦게 퇴각 명령을 내렸다. 싸우다 죽은 제국군만큼이나 많은 숫자가 그대로 진영을 이탈해 도망갔다. 임요한 장군만이 필사적으로 병사들을 수습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그를 시기한 다른 장수들에 의해 좌천되고 만다.

제국군이 도망가고, 전장에 남은 것은 수많은 병사들의 시체와, 피로 물든 강이었다. 김구리 황제가 병력들을 추스린 결과, 1천 명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추격은 불가능했다.

이 피로 물든 싸움을 지켜보던 것은, 나주의 지방민들이었다. 이들은 신안의 압제에 큰 원한을 가지고 있었고, 신안군이 5천을 끌고 왔다가 1천만이 남아 돌아갔다는 소문은 금세 전남 전체에 퍼졌다. 신복의 피해가 더 크다는 내용은 빼고서.
이후 신안에서 일어난 일은 대반란에. 신복련에서는 제국군이 복구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황권은 없는 것이나 다를 바 없어졌다. 이는 이후 신성 혁명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