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푸스-히픈 가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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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푸스-히픈 가문 전쟁
Utopus- hiffen Kouseholdia civiar warr
기간 1670년 7월 15일 – 1672년 2월 8일
장소 베스탄시니아를 제외한 유토피아 왕국 전역
원인 유토푸스 가문의 연이은 내치 실패
교전국 및
교전 세력
유토푸스 가문 히픈 가문
유토푸스 가문
유토피아 수도방위군
유토피아 남부 수비대
히픈 가문
유토피아 북부 방위군
유토피아 서부 방위군
지휘관 유토푸스 14세
피코 브렌
그렌트 스펜츠
콘도비스 1세
다니엘 메스
파울 브로콜렌
병력 왕실 궁병 500명
수도방위군 1100명
남부 방위군 6500명
북부 방위군 4900명
서부 방위군 2600명
북서 특전대 130명
피해 사망자 1251명
왕실의 여러 재산들
사망자 1098명
결과 콘도비스 1세가 왕위 차지, 유토푸스 14세 폐위
영향 200년간의 왕가에서의 유토푸스 가문 임시 단절, 히픈 가문이 계승









개요

유토푸스-히픈 가문 전쟁(1670년 7월 15일 – 1672년 2월 8일)은 유토피아 왕국에서 벌어진 유토푸스 가문과 히픈 가문 사이에서의 내전이다.

배경

남부 대기근

헤라트 1세의 아들 헤라트 2세는 국민들을 담합시키고자, 단절된 유토푸스 가문을 다시 회복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을 유토푸스 13세로 명칭을 바꾸었다. 하지만 상황이 맞지 않았는지, 당시 소빙하기로 시작된 남부 대기근이 발생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되고 5년 후, 반란으로 인하여 성이 점거되자 도망치던 중 죽게 된다. 하지만, 유토푸스 13세를 죽인 이래로, 왕위를 계승할 사람이 없어 찾던 와중, 어쩔 수 없이 시민들은 유토푸스 13세의 아들, 유토푸스 14세를 즉위시키게 된다. 그에게는 현 심각한 상황인 남부 대기근을 해결하는 것에 주력해야 했었다. 특히, 유토피아는 북극하고 가까워 피해가 극심하였다. 이에 유토푸스 14세는 유통망 개선, 수리공 파견, 농업 보조 지원 등 많은 보조책들을 시행하였으나, 소빙하기가 더 심해져, 결국, 북부 유력 가문인 히픈 가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북부의 동요

1669년 8월 6일, 유토피아 북부의 대도시인 베스케노에서 북부 의회가 열렸다. 당시 이들은 왕실을 향하여 항의를 하자는 강경파와, 왕실을 믿기로 한 온건파로 나뉘어져 대립하고 있었다. 후에 콘도비스 1세가 되는 사람이자 당시 주도자였던 히픈 콘도비스 프레센은 항의는 하되, 평화적인 방법으로 하자고 제의하였다. 1669년 9월 1일, 북부 상인들을 중심으로 시위를 전개하였으나, 왕실에선 아무 응답도 없었다. 결국 일부 과격파 단원들이 한 유토피아 군사를 거칠게 다룬 사건이 펼쳐졌고, 이어 그 유토파아 군사가 한 상인을 죽이면서 폭동은 시작되게 된다.

항의 시위

처음으로 그들은 수도인 아마로트에서 시위를 전개하였으나, 얼마 안가 진압되었고, 일부 이들은 주변 도시인 쿠스타, 코스토바, 타른포트, 토리스 등지로 가서 시민들을 동조하게 하였다. 허나, 유토푸스 14세는 이들에 대하여 강경 진압을 명령하였고, 토리스에서 한 아이가 군인에게 치어 죽으면서, 대반발이 시작되게 된다. 이에, 히픈 가문은 왕실이 천명을 저버렸다면서 전쟁을 선포하였다.

전개

전쟁의 시작

1670년 7월 15일, 히픈 가문이 그들의 거점인 베스케노에서 전쟁을 선언하며, 전쟁이 시작되게 된다. 초반에 북부 방위군이 이들을 상대하였으나, 그들도 식량 사정이 열약하고, 왕실에 대한 불만이 많았기에, 결국, 히픈 가문에게 합류하게 된다. 유토푸스 14세는 이를 보고 의아애하였으며, 루세나 주에 주둔하고 있었던 남부 수비대에게 방어를 지시한다. 한편, 히픈 가문은, 베스케노는 물론, 에른스팔트, 루세틴, 누르, 오트나, 쿠른스트, 괴이나, 카베인, 브로타니애른스팔트 주와 주변 지역들을 손쉽게 점령해 나가며, 아마로트로 가고 있었다.

헤이포스 전투

계속 히픈 가문의 병력이 서쪽으로 진군하는 도중에, 서부 방위군을 구스카르 주 헤이포스에서 만나게 된다. 이곳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던 지역으로, 헤이포스를 함락시키면, 바로 수도권으로 진군할 수 있기 때문이였다. 하지만 서부 방위군의 저항이 심하여, 그들을 북부 방위군처럼 회유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우선, 자신의 군대가 아트포르 방향으로 우회하여 아마로트 함락이 임박했다는 거짓 정보를 퍼뜨려 그들의 사기를 저하시켰고, 합류하면 음식을, 합류하지 않으면 죽음을 주겠다는 제의로, 서부 방위군은 혼란에 빠졌고, 소문의 파급력이 엄청났는지, 결국 서부 방위군도 히픈 가문에게 합류하기 시작했다.

왕실군의 반격

남부 수비대에게 공격을 지시한 지 1개월 후, 그들은 카베인에 도달하여, 탈환하였고, 대도시 루세틴을 공격하였다. 당시 루세틴에는 북부 방위군 670명, 북서 특전대 15명이 지키고 있었으며, 6500명에 달하는 남부 수비대에 비하여 열세였다. 허나, 루세틴 전투는 꽤 치열하게 전개되어, 루세틴은 남부 수비대에게 함락되지만, 남부 수비대도 꽤 많은 손실을 입었으나, 괴이나를 연이어 탈환하는 등, 주요 거점인 베스케노의 포위를 준비하였다.

아마로트 전투

한편, 헤이포스 전투에서 승리하였던 히픈 가문은, 기세를 몰아, 피켈, 쿠스타와 같은 수도권 시가지를 점령하였다. 결국 아마로트까지 도달하게 되고, 수도 방위군 600명, 왕병 500명과 서부 방위군 2000명, 북부 방위군 800명과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수적으로 열세였으나, 한달이 넘게 함락을 시키지 못하고, 파울 브로콜렌 장군이 부상을 입으면서, 후퇴하였으나, 공작 세력이 아마로트 시에 전쟁에서 완전히 패배했다는 헛소문을 퍼뜨리면서, 시내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아마로트가 함락되면서, 유토푸스 14세는 지나가던 군중들에게 해를 입고, 왕위에 오른 콘도비스 1세에 의하여 폐위되어, 쓸쓸하게 죽음을 맞게 된다.

결과

콘도비스 1세가 왕위에 오른 뒤로, 유토푸스 왕가에 대한 소멸 작업이 전국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왕릉 훼손과, 왕실 재산 소각을 진행하였다. 당시 전쟁에 동조하였던 식민지 관리인들을 총독으로 임명하였고, 식민지를 직접적으로 통치하게 하였다. 하지만,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이 시기에 일시적으로 기온이 따뜻해지면서, 식량난이 잠시나마 해결되었고, 이런 강경한 정책에도, 유토피아 시민들은 딱히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전황 지도


빨간색: 초반에 히픈 가문에게 동조했던 지역
주황색: 헤이포스 전투로 얻은 지역
분홍색: 남부 수비대가 탈환한 지역
초록색: 아마로트 전투로 얻은 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