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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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Soviett Sokilalistia Republician de Utopia
утопия советская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ая республика
국기 국장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Әхли юртларың пролетарлары, бирлешиң!
상징
국가 소비에트 연방 찬가
국조
참새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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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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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제국 멸망, 유토피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건국 1924년
유토피아 대학살 1937년
2차세계대전 참전 1941년
독일군의 유토피아 점령 1942년
소련군의 재수복 1944년
유토피아 민주화 운동 1976년
멸망,유토피아 공화국 수립 1987년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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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아마로트
최대 도시
아마로트
면적
61,000㎢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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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1,012,618명(본국)
72,167명(도서 지역)
인종
유토피아인,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영국인 등
출산율
2.69명
기대 수명
68세
공용어
러시아어
지역어
유토피아어,오파르어,영어
공용 문자
키릴 문자
군대
유토피아 인민군
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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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본섬
1개의 특별시와 8개의 주
유토피아 도서 지역
4개의 관부 (베스탄시니아 제외)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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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공산주의 체제, 일당제, 주석 체제
국가 원수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부
요인
유토피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 1서기 및 주석
알렉산더 야코브
아마로트 시장
세르게이 에라스트
다인바 주지사
게오르기 례브
타르모겐 주지사
이바노프 키릴
루세나 주지사
마카로프 나자르
에른스팔트 주지사
이바노프 올레그
구스카르 주지사
플로토니코프 마크심
히파노바 주지사
소르킨 이그낱
폴타니아 주지사
오를로프 예핌
도서지사
프로스타코프 콘스탄틴
여당
유토피아 공산당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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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사회주의적 경제 체제
GDP
(PPP)
전체 GDP
$1,256,781
1인당 GDP
$1,014
GDP
(명목)
전체 GDP
$1,342,710
1인당 GDP
$1,213
화폐
공식 화폐
소련 루블
ISO 4217
SUR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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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연호
서력기원
시간대
GMT + 01:00
도량형
미터법
ccTLD
.SUT
국가 코드
SOVUTI
전화 코드
없음.


개요

유토피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북해에 위치한 소련의 연방국이였던 곳으로, 사회주의 일당 체제를 지향하며, 중심 도시는 이전과 같이 아마로트이며, 8개의 주와, 4개의 부속 도서로 이루어져 있다.

역사

설립(1924~1936)

유토피아-소련 연방 조약이 채결된 이후인 1924년, 전신이였던 유토피아 제국이 소련에 합병되고, 연방국으로 전락하면서 유토피아 제국의 내각 의장이였던 알렉세이 로스토프를 제1서기로 하는 유토피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25년~1934년까지는 대규모 독립운동이 폴타니아 주를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아마로트에도 봉기가 발생하였으나, 적벽대전 이후, 소련군이 유토피아 지역에 붉은 군대를 대거 배치하게 되면서 봉기는 서서히 잠잠해져 갔다. 유토피아 제국-소련 전쟁으로 촉발된 반소 감정은, 소련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의 취임 이후에 더 강해짐으로써, 반소 감정이 최고점이였던 1928년에는 봉기가 한 달에 70번 이상이 났다고 한다. 한편 정치계에서는 1929년, 알렉세이 로스토프가 죽자, 유토피아 제국에서 내각 부의장을 맏던 베르테 루스 카벨린을 수반으로 하는 제2내각이 수립되었다. 베르테의 취임으로 인하여, 당연히 반소 여론이 강하였으나, 유토피아 출신이 최초로 고위직에 올랐다는 점에서 이 시기에는 친소파들이 성행하여 독립 세력의 영향이 살짝 위축되는 결과를 낳았다.

유토피아 대학살(1937~1941)

1937년에는,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소련이 자행하던 것과 같이, 유토피아에서도, 기존 스탈린 반대파가 대거 숙청되는 것을 시작으로, 점차 무고한 민간인들까지 학살하는 행보를 저질렀다. 이 시기에는 총 19만 7631명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이때의 유토피아 시민들은 주변 국가인 노르웨이나 영국으로 망명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였다. 날이 갈수록 망명인들이 늘어나자, 소련 정부는, 북해 전체를 봉쇄하여 망명선의 타국 접근을 차단했으나, 영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의 항의로 결국 1년만에 철수하게 되었다. 이러한 대학살은 1941년까지 지속되어 유토피아 경제 전반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2차 세계대전 참전(1941~1945)

유토피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1941년, 노르웨이를 점령한 독일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독일 해군 에리히 레더 제독과 소련 해군 아르세니 골로프코제독이 서로 북해에서 서로 충돌하면서, 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군과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에리히 레더 제독이 이끄는 독일 해군이 소련 함대를 기습공격 함으로써, 영국 해군의 지원이 닿기도 전에 유토피아로 가는 해상을 넘겨주게 되었으며, 독일군은 1941년 8월 21일, 노드시 작전을 거행하여 유토피아 동부인 루세나 주와 구스카르 주 대부분을 점령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독일군 공세를 막기 위해서 소련군이 급파되었으나, 결국 저지에 실패하고 유토피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수도였던 아마로트가 동년 12월 6일, 함락되면서 독일군은 케인스폴 파인을 수반으로 하는 유토피아 국가판무관부를 설치하여 자신의 영향력 아래로 두려고 하였다. 당시 대학살의 여파가 남아있던 유토피아인들은 독일군을 매우 환영했으며, 노드시 작전 당시에도, 공세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유토피아인들의 도움 덕분이였다. 하지만 1944년 1월 7일, 독일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독일군은 결국, 유토피아 국가판무관부를 철수시키고, 케인스폴 파인은 독일로 망명하게 된다. 이후 유토피아인들은 잠시나마 유토피아국을 세워 소련군이 진출하던 1944년 6월 19일까지 스스로의 정부를 세웠으나, 6월 23일, 소련군이 아마로트를 점령하고, 유토피아국은 멸망하게 되면서 다시 유토피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부활하게 되었다. 한편, 독일군이 침공하였던 1941년 9월 3일, 베르테 루스 카벨린 제1서기가 예카테린부르크로 피난을 가고, 1942년에 사망하면서, 결국 유토피아가 아닌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제 3내각을 새로이 구성하였다. 니콜라이 몰찰린을 새로운 제1서기로 정하였으며, 1944년 중반 이전까지 예카테린부르크에서 계속 회의가 이어졌다. 결국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하고, 동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2차세계대전이 종결나게 되었다.

냉전 시기(1946~1975)

냉전 시기의 유토피아는 매우 적막했으며, 젊은 장정들이 모두 전쟁터에서 죽으면서 지역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이 시기, 베이비 붐이 일어나면서 일시적으로 출산율이 유토피아 제국보다도 높은 3.41%를 찍었으며, 아시아와 다르게 유럽에서는 매우 큰 분쟁이 전무하였기 때문에 경제도 안정적으로 성장하였다. 1967년 기준 유토피아 인구는 약 80만 명이였으며, 마셜 플렌 참여 국가를 제외하면, 전후 복구 속도가 가장 빠른 지역 중에 하나로 성장하였다. 베이비 붐 세대들은 기존 세대에 비하여 반소 감정은 그렇게 높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사건의 일환으로 그 분위기는 순식간에 반전되고야 만다...

유토피아 민주화 운동(1976~1986)

1976년, 타른포트의 중심 거리에서 한 소련군이 팔이 부딪혔다는 이유로 한 여자아이를 총으로 쏴 죽이면서, 유토피아의 소련에 대한 여론은 급격히 악화되고 만다. 이 사건의 파장은 타른포트에서 시작되었으며, 순식간에 아마로트를 비롯한 서부 전체로 파급되었다. 결국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소련은 군대를 파견하지만, 서방 세계의 재재와, 계속된 저항, 보급 체계 마비, 민심 확보 실패 등으로, 10년이 넘게 지속된다. 계속 민주화 운동을 억압하였던 소련은,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취임과 함께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등 개혁 개방 정책의 채택으로 인하여, 1986년, 자치권을 보장받았으며, 소련은 유토피아의 이익에 관하여 일체 간섭도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제시하면서 완전히 자치가 이루어졌다.

멸망(1987)

결국 1987년,당시 유토피아 공산당 제 1서기였던 알렉산더 야코브가 러시아로 돌아가면서, 유토피아의 독립을 인정하는 발언을 하여 유토피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붕괴되었고, 유토피아 연방국이 수립되었다.

정치

이름에서도 보았듯이 일원당 공산주의 내각 체제이며, 유토피아 공산당을 여당으로 하고 있다. 1986년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기 전까지 유지되었으며, 내각은 주석(보통 제 1서기가 임명된다.),부주석,유토피아 공산당 상무회 의원들로 나뉘어 있다. 역대 주석은 다음과 같다.
1대: 알렉세이 로스토프: 유토피아 제국의 마지막 내각 의장이였으며(소련의 압력으로 임명되었다.) 제 1대 주석, 초반의 독립 봉기를 저지하고 안정화에 주력하려 했으나, 1929년 사망하였다. (1924~1929)
2대: 베르테 루스 카벨린: 유토피아 왕국의 군인이자 유토피아 제국의 마지막 내각 부의장이자(이 역시 소련의 압력으로 임명되었다.) 유토피아인으로써 대표적인 친소파를 넘어선매국노. 미하일-카벨린 조약의 채결에 관여하였으며, 유토피아 제국의 내각 개혁 시기부터 천천히 친러파가 되다가, 유토피아 제국이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고, 적벽내전이 일어나자, 친소파로 전향하여, 유토피아 공산당에 입당, 알렉세이가 사망하자 2대 주석에 임명되었다. 유토피아 내 친소파가 증가하게 된 원인이자, 1930년대 유토피아 독립군이 크게 와해되는 것에 기여한 사람이다. 그는 강경한 진압을 외쳤으며, 친스탈린파로, 당시 유토피아 공산당 내부에 있었던 반스탈린파를 숙청하려고 소련 정부에 군대 파견을 요청하여 유토피아 대학살이 일어나는 데에 큰 기여를 하였으나, 1941년 독일의 침공으로, 유토피아를 벗어나고, 그 이후로 유토피아 땅을 밟지도 못한 채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사망하게 된다. (1929~1942)
3대: 로만 보로비예프: 벨로루시 공산당의 상임의원이였으나, 1933년, 유토피아 공산당의 고문으로 활약한 뒤,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창설된 내각에서 주석으로 지목되었다. 유토피아의 탈환 이후, 초반에 유토피아에 대한 사정을 많이 몰라 통제에 난항을 겪었던 편, 유토피아 민주화 운동이 그의 집권 후반기에 일어났다. 봉기가 일어나자 그는 라트비아로 망명한 다음 1989년, 리가에서 조용히 사망하였다. (1942~1977)
4대: 알렉산더 야코브: 유토피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마지막 주석이다. 계속되는 민주화 운동으로 인하여 행정에 불편함이 가중된 상태였으며, 민주화 운동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관련자 색출 등 민심을 달래보려고 시도했으나, 1986년, 고르바초프가 유토피아 자치를 보장하면서 러시아로 떠나고 만다. (1977~1986)
민주주의 체제였으나 아직 이름이 유토피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였던 시기(1986~1987)
과도 정부 대통령: 헨리 마르손(1986~1987): 유토피아 임시정부 부통령을 역임하였으며, 고령 등의 이유로 사퇴하였다.

경제

소련 집권 초반(1924~1945)년에는 경제가 이전에 비하여 하락하였고, 사회적으로 불안을 증대시켰다. 실제로 전쟁 중인 1945년 2월 14일, 유토피아의 포트 시가지 근처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6일 만에 진압되었으나, 여러 차례 봉기는 지속되었다. 다행히 경제는 전쟁 이후 베이비붐 세대에 들어서며 급격히 성장하게 되며, 이 시기 최초로 1인당 GDP(명목) 1천달러를 찍게 되었다. 이후 70년대부터 들여온 서방의 기술과 문화는 유토피아를 질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에 성공하였으며, 80년대 개혁 개방 정책 이후로는 크게 성장하여 1987년, 상반기 경제 성장률 예측이 18.2%에 도달하였다.

인구

유토피아의 인구는 제국 시절에 비하여 초반에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제국 시절, 73만명이였던 본국의 인구는 크게 줄어 1939년 기준 49만으로 집계되었다. 유토피아 대학살과, 대기근, 독립 봉기로 인한 사망자 증대 등이 원인으로, 이러한 인구는 전쟁 이후, 크게 증가하여, 1967년 기준으로 80만명 대를, 1982년 기준으로 95만명 대를, 1986년에는 100만명 대를 넘어설 정도로 급속하게 증가하였다.

문화

이 시기 문화는 1917년, 김선학에 의하여 유토피아 고대문헌이 발견되면서 기존 민족주의와 유토피아 독립을 강조하는 형태로 나아가다,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제동이 걸렸다. 이후의 문화 양상은 새롭게 유명한 낭만주의에서 사회비판으로 이어져 갔으며, 1976년 발생한 민주화 운동에도 폴리스턴이 그린 '적막의 타른포트'와 '연방의 애상'등의 작품이 유토피아 미학에서 새롭게 해석되면서, 민주화 열기가 강해지는 것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영화는 초반에 소련에서 직수입한 것만 방영되었으나, 70년대 이후부터는 유토피아인들 사이에서도 영화 제작 열풍이 불어 '유토푸스 일대기','유토푸스-히픈 가문 전쟁'등이 방영되었다. 문학으로는 프래탱의 '형식과 이상'이 크게 유행하였으며, 음악계에서는 민족주의 색체를 담은 '블타바(스베테나의 음악으로, 흔히 알려진 이름은 '몰다우'이다.)' 등이 그 시기 인기곡 중 하나였다. 이후 스펜테인이 직접 작곡을 한 '폴란드의 랭스터' 등의 음악이 연주되면서, 민족 정체성 재인식 열풍이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