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고대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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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고대문헌

literature of Utopia
Utopia Utopus de glorias lengalicsh

저자 케인손 마인벨
시기 기원후 717~720년?
언어 유토피아어
분량 기원전 240년~ 기원후 710년 (신정 정치 시대- 카일 1세)
발견인 김선학
소장 아마로트 박물관

개요

유토피아 고대문헌(원어:Utopia Utopus de glorias lengalicsh)은 신정 정치 시기의 대표적 역사가인 케인손 마인벨이 쓴 역사서로, 과거 유토푸스 1세~ 카일 1세 시기까지의 분량을 담고 있다.

1917년, 1차 세계대전 중 전 대한제국 외무아문 상급대신 김선학에 의하여 발견되었으며, 이후 유토피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기의 민족주의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편찬 역사

서문에서 추측하기로는, 제2 유토푸스 가문 혼란 시대때, 무정부 상태의 혼란에 의하여 그 시기동안 역사서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한 케인손 마인벨은 그 시기의 역사도 쓰는 겸, 여태까지의 고대부터 케인 1세까지의 역사를 다시 재정립하려고 편찬하였다.

1660년에 일어난 유토푸스-히픈 가문 전쟁으로 인하여,히픈 가문이 승리한 이후, 왕위에 오른 콘도비스 1세는 '구시대의 유물을 철폐하자'는 명목으로, 대부분의 왕실 기록들과 역사서들을 태우기 시작하였다. 유토피아 고대문헌도 그 중 하나였는데, 남은 복사본을 보존하고자 여러 잔존 학자들이 트란톤 중부의 한 숲에 숨겼다.

이후 유토피아 제국 시절인 1917년, 전 대한제국 외무아문 상급대신이였던 김선학이 12년만에 유토피아의 지형과 지리를 조사하기 위하여 방문하던 차, 트란톤 지역을 여행하던 도중, 한 버려진 집에서, 고대문헌을 발견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총 71권의 분량으로 쓰였으나, 앞서 말한 히픈 가문의 분서 행위로 인하여, 47권만이 존재하였고, 그마저도 유토피아-소련 전쟁, 노드시 작전으로 인하여 많은 분량들이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분량은 30권 뿐이며, 그마저도 품질 상태가 좋지 않는 등, 상당한 문제가 있다.

특징

역사 편찬 방식은 기년체였다. 그 덕에 연도별로 일어난 일들을 쉽게 구별하고 파악하여, 정확한 연대기를 성립시킬 수 있었다.

물론 민간 설화에 의존한 부분도 좀 많다. 한 예로, 유토푸스 1세가 유토피아를 세우고 아마로트 주변 3000큐빗 지역들을 순행하였으며, 가는 곳마다 천령들과 노란 가죽 옷을 입은 사람들이 줄을 섰다고 하는 대목이 있었다. 그 시기는 기원전 227년이여 유토푸스 1세 제위 기간에 부합하는 경향이 크나, 유토피아 망국사를 쓴 빈 에릭손은, 이 대목에 대한 역사적 일치성은 전무하다고 보았다.

227년 기준으로, 유토푸스 1세는 상당히 고령인 나이였고, 3000큐빗 정도의 주변 지역을 순행하기에는, 1년 전부터 통풍에 걸린 점을 강조, 또한 노란 가죽 옷을 입은 이들은 고대에는 '시포그란투스'의 관용어였는데, 당시 문헌을 보면, '총 1000명'이라고 기술하였다.

유토피아 고대사를 쓴 시기 기준으로 해봐도, 시포그란투스는 300명 뿐이다. 사료를 비교하자면, 400년 당시의 시포그란투스는 250명, 100년 전까지 들어가보면 150명으로, 초반에 유토푸스 1세가 100명을 시포그란투스로 선출한 것에 비하여 과장되었다는 측면이 크다. 이는 신정 정치 초반 시기에 돌았던 소문인 (유토푸스 왕위 혈통을 강조하기 위하여 만들었다는 것이 유력한 설이다.) '유토푸스 신격화' 측면이 반영된 바가 크다고 보았다.

또한 유토푸스 8세 시기 활동하였던 '시에라그루스'라는 시녀를 언급하며, 그녀가 예술, 철학, 문학, 언어 등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고 기술하였는데, 사실 이것은 아트포르 주변 지역에서 한 현자를 만난 '라이네그라우스'라는 여성의 이야기가 잘못 와전되어 설화로 전해진 것으로 이 사실이 1980년대 후반에 밝혀진 그리 사실이 아닌 내용으로 판명난지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라서, 한참 유토피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내부에서 독립 열기가 한창일 때, 독립군 대장이였던 시에라 키루스가 자신이 '시에라그루스'의 후손이라 언급하여,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역할로 쓰였기도 한다.

의의

현존하는 유토피아의 제일 오래된 역사서라는 것에 가치가 크다.

사실 이전에 쓰여진 유토피아의 역사서도 많다. 레리포트 신화, 카믈레인 등이 이 문헌에서 참고서로 언급되었다. 특히 카믈레인유토푸스 1세가 유토피아에 도착하기 이전의 이야기도 서술했기 때문에 소실되지 않았으면, 가치가 매우 큰 역사서였다.

하지만, 콘도비스 1세의 분서령으로, 카믈레인은 이 시기부터 역사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에 쓰였던 언어들의 맥락적 표현이나, 의미 파악 등, 고대 유토피아어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고대 유토피아어로 쓰여진 만큼, 고대에만 전해진 신화같은 것도 많이 기술해 왔다.

세부적인 목차


왕대기

  • 1권~13권: 유토푸스 1세~ 유토푸스 4세
  • 14권~19권: 유토푸스 5세~ 유토푸스 7세
  • 20권~24권: 로만트 1세~ 유토푸스 8세
  • 25권~30권: 유토푸스 9세~ 유토푸스 12세
  • 31권~37권: 유토푸스 12세~아반나 3세
  • 38권~40권: 카일 1세~

신하기

  • 41권~46권: 유토푸스 1세~8세 시기 신하들
  • 47권~50권: 유토푸스 9세~ 카일 1세 시기 신하들

열전기

  • 51권~55권: 유토푸스 1세~10세 시기 열전
  • 56권~62권: 유토푸스 10세~카일 1세 시기 열전

표기

  • 63권: 연표, 측량 구조, 표 기록 등

지기

  • 64권~71권: 지진, 한파 등 자연 현상, 당대 관습과 생활 문화, 유토푸스 선언 등과 같은 법률 서약문 등



(물론 당대 시기의 책이라고 하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긴 분량의 책이 아닌, 양파지 몇 묶음 정도를 권수로 쳤으니, 실제 분량은 우리가 상상하던 것보다 더욱 적을 것이다.)

현존하는 기록

'오,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유토피아 왕국은 만세에 길이 남을 유토푸스라는 한 사내의 도전으로부터 쟁취된 것이오니, 유토푸스라는 사내는 즉시 배에서 내려, 유토피아라는 신성한 땅을 처음 밟게 된 구원의 손길이 오게 하였다. 그는 진리의 빛을 밝힐 매우 아름다운 땅을 두고 하시는 말씀은, 자신이 살았던 모국의 언어를 변용시켜 생성하여, '아마로트'라고 지었다. "
― 왕대기- 제 1권, 15페이지
유토푸스 12세께서, 즉시 오파르 왕국으로 출항을 떠나고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하자, 왕의 건강을 챙기는 충정심이 깊었던 '헤미올리우스'라는 신하가 말하길, '현재, 여러 닥친 자연재해로 인하여 떠나신다면, 민심이 매우 불안정해지고 혼란이 올 수도 있습니다.' 라고 간언하였다. 그러자, 유토푸스 12세께서 말하시길, '과인이 나서지 않으면, 누가 유토피아를 대표한단 말입니까? 물론 과인이 떠나면 왕의 부재로 매우 혼란스러울 수는 있으나, 타이그레이누스같은 신앙심이 깊은 대인과, 호르니우스같은 경제학에 능한 신하가 있으니 왕실을 몸소 믿고 맏길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하였으니, 헤미올리우스가 그날 밤, 호르니우스와 나라의 전망에 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그러자 호르니우스가 하는 말이 '과연 전하께서는 단순한 외교 관계 개선을 통하여 간 것이오?'라고 말하자, 호르니우스는 '전하께서는 워낙 현명한 인재들을 많이 두었으니, 왕의 부재 속에서도 잘 할 것이라고 믿을 것이오.'라고 헤미올리우스의 걱정에 자신만의 의견을 답하였다. 그렇게, 하루 후, 유토푸스 12세가 타른포트 해변가에서 먹구름이 낀 채로, 날씨 확인을 하고 있었다. "
― 신하기- 제 48권, 27페이지
하루는, 유토푸스 5세가 길을 걷고 있었다. 말하기를 '선왕 시기때만 하더라도, 길이라는 것을 제대로 다듬지 못하였다네.'라고 말하자, 미시그레이누스라는 신하가 물었다. '그러면, 전하 치세 때는 어떻게 길을 닦을 수 있었습니까?' 하였으니, 유토푸스 5세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느 날, 로우마 사람이랑, 푸락시아[1] 사람들이, 표류하여 유토피아로 온 적이 있었는데, 당시 '에이키누스'라는 파란 눈을 가진 한 기술공이 유토푸스 5세에게 비가 와도 튼튼한 길을 제작하는 기술을 알려주겠다고 했었다고 한다. 그는 괄리아랑 브락타니아[2] 사이를 오가며, 도로를 비롯한 기계들을 정비하는 기술공이라고 로만트 1세때의 기록인 '카다브리카'에 나와 있었다."
― 열전기- 제 53권, 18페이지
카슌과 로만트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을 시기, 갑지기 토리스 부근에서 천둥이 치거니, 사람 10명이 다치고, 2채의 가옥이 파괴되어, 싸움을 10일 동안 잠시 중지하였다고 전한다."
― 지기- 제 65권, 3페이지

각주

  1. 정황상, '로마'와 '페르시아'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2. 프랑스 지역인 '갈리아'와 영국 지역인 '브리타니아'를 일컫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