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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제 1차 아마로트 전투 (1872년 3월 17일~1872년 4월 2일)은 유토피아 왕국과 러시아 제국 간에 통상 요구를 두고 벌어진 전투이다.
러시아 제국 해군 발틱함대 중령이였던 미하일 타라쇼프가 3월 17일 오전 10시, 유토피아 왕국에게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배경
북방 항해
러시아 제국 발틱함대 해군 중장이였던 미하일 타라쇼프는, 5척의 순양함을 이끌고 북방 탐사에 나가기 시작한다. 노르웨이 함대가 이전에 노르웨이 해 이북을 탐사하려고 시도하였으나, 갑작스러운 기상 악화로 실패하여, 유럽인들에게 북극해란 아직 미지의 공간이였다. 미하일은 탐사 이전에, 고틀란트 섬과 오슬로에서 각각 배를 정비하였다. 그 후, 오슬로를 건네 알레순트에 다다를 때 즈음, 갑작스런 기상 악화로 인하여 원래 탐험 항로였던 트롬쇠가 아닌, 노르웨이해 한복판에 표류되게 된다. 다행히도 주변 섬에 거주하고 있던 주민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미하일과 선원들은 살아남게 된다. 베스탄시니아라고 불리는 이 섬의 총독은 유토피아인 토비 코프로, 표류된 미하일과 러시아 선원들을 잘 대접하면서, 그들과의 교감을 쌓게 된다. 어느 날, '여행자여도 일은 하고 먹어라'라는 유토피아 관습에 의하여 타국에서 주거 지역 건설 작업에 투입된 미하일과 선원들은, 땅을 파다가, 다량의 철광석과 은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한시라도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철광석과 은을 몰래 빼돌리고, 토비 코프에게 지원을 청했으나, 아직 항해할 때가 안되었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이후, 저녁 식사 이후, 한 병사의 말실수로 인하여 그들에 대한 의심이 증폭된 토비 코프는, 소지품 검사를 실시한다 하였고, 미하일과 선원들은 반발했으나, 결국 소지품 검사를 실시한다. 미하일과 선원들은 모두 토비 코프의 집 앞에 집합하여, 검사를 실시하려던 찰나, 그러자 그들은, 즉각 토비 코프를 살해하고, 일가족들의 재산을 불태웠으며, 군함에 몰래 숨겨둔 총을 꺼내 마을 주민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기 시작한다. 죽인 토비 코프는 바다에 빠뜨렸으며, 사전에 항구를 정복하여 마을 주민들의 탈출구를 막아, 전 주민들이 학살되게 된다.
식민지 대표 회의
한편, 유토피아 왕국에서는 당시 왕이였던 콘도비스 3세의 주도 아래에서 왕정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유토피아 왕국은, 베스탄시니아 섬에서 사절단이 오지 않자, 그들로부터 연락이 끊겼다는 것을 인지하였으며, 최근 식민지 대표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은 근거로 토비 코프를 유토피아로부터의 독립 혐의로 인한 반역죄로 잡으려 했다. 하지만, 36시간 후, 엔틸노바 앞바다에서 토비 코프의 시체가 발견되고, 파견한 조사단은 연락이 두절되었다. 콘도비스 3세는 원통하면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동생 코비스의 아들 루도비코 2세를 왕으로 세워 주시오' 라고 간청하였다. 7일 후, 루도비코 2세는 왕위에 오르며, 유토피아 왕국의 혼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루도비코 2세의 즉위
루도비코 2세가 즉위한 이후, 왕국에는 혼란이 계속되었다.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계속되었던 자질 문제는, 결국 대신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고, 백성들을 착취하여 왕궁을 확장하는 등의 행각을 보였다. 결국, 폴 로크를 주도로 하여 루도비코 2세 퇴위 운동이 시작되게 되면서, 루도비코 2세는 자신이 핍박해 왔던 신하들 손에 죽게 된다. 하지만, 루도비코 2세가 당시 왕정 가문이였던 하픈 가문의 유일한 장자인 관계로, 왕위는 다시 유토피아 초대 건국자 가문인 유토푸스 가문에게 돌아가며, 유토푸스 15세가 9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즉위, 그리고 혼란
9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유토푸스 15세는, 대신들의 간섭과 계속되는 식민지 통제 부재로 인하여 민심이 하락하였다. 한편, 미하일과 그의 선원들은 베스탄시니아를 정복한 이후, 북방 항로 개척을 위하여 계속 위로 가게 된다. 마침내 그들은 유토피아 본섬에 도착하고, 직접 유토피아 대신들과 통상을 하자고 한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철광석 외에는 거래하지 않아, 그들로부터 더 많은 '광물들'을 차지해야 했었던 미하일은, 1872년 3월 17일 오전 10시 23분경, 유토피아 왕국을 향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전개
오전 10시 23분경, 전쟁을 선포한 이후, 미하일 군대는 유토피아의 수도인 아마로트를 향하여 진격하였다. 당시 러시아군은 상대적으로 매우 약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유토피아군과 다르게, 총을 가지고 있어, 쉽게 적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하루만에 미하일 군대는 항구를 점령하고, 이후 군함을 이용한 포격을 실시하여, 전쟁 발발 7일 만에, 왕궁 성벽 코앞까지 진군하게 된다. 성직자의 임시 중재로 6일 동안 휴전 상태에서 회담을 진행하였으나, 쉽게 성사되지 못하고, 3월 30일, 전쟁이 다시 시작된다. 유토피아 왕궁을 함락시키는데는 단 3일밖에 걸리지 않았으며, 베르테 카벨린과 베르테 카렌스의 제안으로 러시아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4월 2일, 카벨린-미하일 조약이 채결되며, 유토피아는 러시아의 불평등 요구를 수용해야 했다.
결과
유토피아는 러시아 대사관 설립, 외교 주재 허용 등의 통상 뿐만 아니라, 영사 재판권, 유토피아 전역의 러시아 인부 금 채굴 허용 등의 조항을 들먹이며 유토피아를 압박하였다. 이번 사태가 단독 행동이였던 만큼 징계가 클 것으로 예상했던 미하일은, 유토피아에서 수탈한 자원을 통하여 정부 관료들에게 뇌물을 먹인 뒤, 징계를 피하고, 정부의 명에 따라 제 1대 유토피아 왕국 주재 러시아 대사로 임명되게 된다. 한편, 이 전쟁에 참여한 선원인 세르게이 바실렙스키가 페테르스버그에 돌아가 유토피아를 알리게 되면서, 유토피아의 수난은 다시 시작되게 된다.
여담
당시 유토피아 육군들은, 루도비코 2세대에 전개된 혼란 때문에, 미훈련 병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소리가 난 이후, 도망갔다고 한다. 사실 <유토피아>에서 나오는 라파엘 하드리아누스가 방문할 시기만 하더라도, 유토피아는 안정된 치세에 있었으며, 매년마다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으나, 1670년에 유토푸스-히픈 가문 전쟁에 의하여, 군대가 타락하면서, 제대로 된 훈련이 이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