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베른하이어의 총리

카를 판 하이네스 무어
Karl Van Heiness Moore
이름 카를 판 하이네스 무어

Karl Van Heiness Moore

국적 베른하이어 공국
출생일 1616년 2월 21일
출생지 아른하임 주 아인델
가문 무어가, 판 하이네스 가 (외가)
부친 제임스 무어

James Moore

모친 알다 판 하이네스

Alda Van Heiness

배우자 아이비 스펜서 무어

Ivy Spencer Moore

자녀 아델하이드 판 하이네스 무어

Adelheid Van Heiness Moore

학력 외텔슈비어 고등대학 졸업

경제학·정치학 박사

신체 신장 188cm
몸무게 78kg
정치
정당 시민당
의원 선수 .
의원 대수 .
지역구 .
현직 베른하이어 공국 7대 총리
약력 이델스테르트(Eldelstert)

전 알레머스 대학 연구교수
전 레스터체이스 칼리지 교수
전 베른하이어 공국 5·6대 총리
현 카를무어 금융그룹 총수
현 국제평화재단 이사장
현 외텔슈비어 고등대학 명예교수


개요

베른하이어 공국의 정치인, 경제학자, 기업가.


상세

카를 판 하이네스 무어(Karl Van Heiness Moore, 1616~)는 베른하이어 공국의 5,6,7대 총리이자 이델스테르트이면서 무어그룹의 회장직과 국제평화재단 이사장직을 역임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키르수스 제국의 최우방국인 동시에 세계경제를 좌우하는 베른하이어의 총리이자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기업 중 하나인 카를무어 금융그룹의 총수이다. 학계에서도 계량경제학의 초석을 닦은 인물이자 현대경제학의 시조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렇듯 정계, 재계, 학계에서 3관왕을 달성하고 정치적 성과도 흠잡을 데가 없어 엘리트주의가 뿌리깊은 베른하이어 내에서는 그의 집권에 대한 반대가 거의 없고 국외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가족으로는 아내 아이비 스펜서 무어(Ivy spencer Moore)와 딸 아델하이드 무어(Adelheid Moore)가 있다.

생애

출생과 유년기

카를은 1616년 아른하임 주 아인델(Eindell)에서 저명한 경제학자인 아버지와 대지주의 딸인 어머니 슬하의 유복한 가정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인델 백작이자 베른하이어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에카르트 판 하이네스(Eckart Van Heiness)가 그의 할아버지였기 때문에 카를의 유년기는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로웠다. 카를은 어린 나이부터 두뇌가 비상하기로 유명했는데 출생 24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글을 읽기 시작했으며 3살에는 문법을 완벽히 알고 수많은 책을 읽었다고 한다. 카를의 비상함을 깨달은 부모는 일찍이 그를 가르치는데 힘을 쏟았는데 지역 고등학교의 교사였던 어머니는 읽기와 쓰기, 역사, 문학을 가르쳤고 아른하임 주립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는 교수였던 아버지 제임스 무어는 산수와 대수학, 회계를 가르쳤다. 할아버지인 에카르트 또한 카를을 기특하게 여기면서 손자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특히 카를에게 연설, 토론, 협상 등을 가르쳤으며 사람을 대하는 법에 대한 교훈을 많이 남겼다. 유명 시인이었던만큼 시와 문학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가르쳤다.

카를은 특히 수학에 재능이 있었는데 5살 때 이미 대학에 다니는 대부분의 학생들보다 수학에 능숙할 정도로 천재라고 부를 만한 수준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아침에 출근하면서 내주는 수학 문제에 몰두했는데 대부분 그날 오전에 해결했지만 간혹 풀리지 않는 날에는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을만큼 집요하게 문제를 파고들고는 했다. 할아버지 농장에서 회계 문제가 발생하면 나서서 도와주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그가 온종일 집안에서 책만 읽고 수학문제나 풀면서 지낸 것은 아니다. 그 또한 또래의 아이들처럼 밖에서 노는 것도 좋아했는데 나이에 비해 성숙했기에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아이들하고 놀았다. 주로 그 당시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병정놀이를 했는데 언변이 뛰어난데다 가문의 위세 덕분에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카를은 곧장 대장 역할을 맡았다.

하루는 그와 어울리던 무리 중에서 나이가 많고 덩치도 큰 프란츠라는 아이가 언제나 카를이 대장 역할을 맡는 것에 불만을 표했다. 그가 '네가 대장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카를은 웃으며 '그 이유를 모르겠다면 너가 원하는 승부를 아무거나 해보자. 네가 이긴다면 이제부터 대장은 너다'라고 대답했다. 프란츠가 레슬링을 하자고 제안하자 카를은 '자신에게 유리한 승부만을 원하는 너에게는 대장의 자질이 없구나. 하지만 대장의 자질이 있는 나는 기꺼이 그 승부를 받아들이겠다.'라며 프란츠는 도발했다. 구경하던 아이들은 카를의 대담함에 놀라면서도 걱정했는데, 프란츠는 카를보다 4살이나 많고 또래에 비해서 덩치도 컸기 때문이다. 카를도 결코 작은 체구는 아니었지만 둘이 레슬링을 하면 카를이 당연히 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레슬링이 시작되자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프란츠와 달리 카를은 자세를 낮추고 거리를 벌리면서 도망치기만 했는데 프란츠는 화를 내면서 카를을 쫓아다니면서도 카를이 언제 공격을 시도할지 모르기 때문에 경계를 늦추지 못했다. 또한 카를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했기 때문에 무슨 숨겨진 수가 있을지 몰라 쉽게 경계를 풀 수 없었다. 경계자세를 유지한 채 한참동안 뛰어다닌 프란츠는 결국 지치고 말았고 카를은 그때를 노려 프란츠의 다리를 밀어 넘어뜨렸다. 프란츠가 비겁하다며 항의하자 카를은 '자기보다 명백히 강한 상대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용맹한 게 아니라 멍청한 것이다. 어떤 불리한 상황이라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것이야 말로 대장의 자질이다. 대장이 용맹하기만 하고 머리를 쓰지 않는다면 부하를 전부 죽일 것이다. 그러나 프란츠 너는 대장의 자질은 없더라도 힘이 세고 용감하니 장군의 자질이 있다.'라고 말하며 프란츠에게 장군 자리를 즉석으로 만들어서 주었다. 그러자 프란츠는 물론 다른 아이들도 카를이 내리는 지위를 받기 위해서 더욱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 일화는 훗날 카를 무어의 리더십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주 회자되는데 그가 어렸을 때부터 정치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부하의 도전을 거절하지 않고 오히려 공공연한 승부로 만드는 대담함과 치밀함, 불리한 승부라도 패배하지 않기 위해 발휘한 기지와 전략적 사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명분을 세우는 뛰어난 연설 능력, 그리고 적을 감동시켜 아군으로 포섭시키는 능력과 '지위'라는 상을 활용해서 자연스럽게 대장 자리를 공고히 하고 부하들을 충성스럽게 만드는 능력까지 그가 어린 나이에 인간과 조직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 카를의 나이는 5살이었다.

외텔슈비어에서

한편 1621년, 카를이 6살이 된 해의 겨울, 아버지 제임스 무어가 마침 외텔슈비어에 있는 대학교로부터 러브콜을 받자 카를은 외텔슈비어에 있는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 외텔슈비어로 향한다. 그의 수학실력은 이미 대학생 수준을 뛰어넘었기 때문에 상급학교에서도 수학에 대한 흥미는 별로 없던 카를은 외국어 공부에 전념한다. 당시 식민제국 경영으로 세계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마그니우스의 언어인 알레니아어를 익히고 키르수스 주류를 물리치고 새로운 문화적 주류가 된 그란치프의 그란치프어도 터득했다. 훗날 카를 무어의 취미가 된 언어 공부는 이때부터 시작했는데 이 뒤로도 게파르토어, 크레스터프어, 에르미니아어는 물론 신대륙과 오플란티엠의 여러 나라의 언어들을 틈틈히 공부했다.

입학 당시 7살이었지만 편입시험에서 전 과목 최고점을 맞았던 무어는 상급학교 2학년으로 편입되었다. 그는 학교를 다니면서 전 과목 1등을 놓치지 않았을 뿐더러 교우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또래에 비해 키가 크고 정신적으로도 매우 성숙했기 때문에 급우들에게 어린애 취급을 받지는 않았다. 또한 당시 베른하이어에는 월반이나 편입이 흔했을 뿐더러 유급제도 또한 엄격했기 때문에 같은 학년이라도 나이가 다양했으므로 나이가 어린 것이 큰 단점이 되지는 않았다. 학교 생활 외에도 그는 다양한 학문적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수학에 관심있는 카를이 식견을 넓힐 수 있도록 여러 수학자와의 만남을 알선해주거나 그가 학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허락을 맡아주었다. 처음에는 팔불출 아버지의 과장이라고 생각하고 부정적으로 봤던 학자들도 실제로 만나서 카를의 비범함을 확인한 뒤에는 그의 재능을 인정하며 다양한 주제로 토론을 나눴다.

특히 당시에 통계학의 난제를 풀어낸 젊은 수학자로 이름을 날리던 프레데릭 펠슈타인이 카를에게 큰 흥미를 보이며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카를과 함께 식사도 하고 토론도 하며 대학에서 통계학을 진학할 것을 권유했다. 카를 또한 통계학에 대해 상당히 많은 매력을 느꼈지만 결국 경제학과로 진학하게 된다.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경제학에 통계적 기법을 적용해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프레데릭이 카를에게 준 영향이 무의미하진 않았던 것이다. 한편 프레데릭 펠슈타인의 동생이 바로 훗날 펠슈타인 전기회사의 대표이자 카를 무어의 측근이며 마도공학의 선두자가 되는 마르크 펠슈타인이다.

한편 7살에 2학년으로 편입했고 상급학교가 4년제였기 때문에 9살에 졸업시기가 다가온 카를은 졸업논문으로 당시 구상 중이던 경제학, 특히 증권거래에 통계적 기법을 도입한 정량적 투자 모델에 대해 작성했다. 선생님들은 그가 평소에 하던대로 정석적인 통계학 논문을 작성하길 바라던 한편 참신한 시도라고 평가했다. 그 당시에는 납득이 어려운 아이디어이긴 했지만 논문의 질 자체는 매우 우수했고 평소 카를에 대한 평가가 좋았기에 그는 높은 논문평가를 받아 수석으로 학교를 졸업한다. 졸업 이후 그는 베른하이어 최고의 학교인 외텔슈비어 대학교 입시를 치렀고 결심한 대로 수학과 대신에 경제학과를 지원했다. 금융혁명이 불던 당시에 경제학과는 철학, 정치학과 같은 전통적인 최고경쟁률을 이루는 학과들과 같은 수준으로 높은 입결을 자랑했다. 결국 그는 외텔슈비어 대학교 경제학과에 차석으로 합격했다. 자랑할 만한 업적임에도 불구하고 인생 처음으로 경험하는 2등에 당황한 카를은 그를 제치고 외텔슈비어 대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한 장본인과 얼마 안 가 같은 학과 동기로 마주하게 된다.

대학생활

입학 시험에서 카를을 제치고 수석을 차지한 이는 용트 코발스키(Jonte Kowalski)라는 코르보날계 소년이었다. 입학 당시 15살이었던 용트는 상급학교 출신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추천장을 받아서 외텔슈비어 대학 입시를 치를 수 있었다. 그의 집안은 가난했지만 용트는 명석했고 성실했으며 남들과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카를은 용트에게 흥미가 생겼지만 그가 다가가기보다 먼저 용트가 카를에게 접근했다. 용트는 나이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차석으로 합격한 카를이 대단하다고 이야기하며 카를에게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말했다. 이후 두 사람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졌다. 용트는 친화력이 좋은 편이었기에 친구가 많았지만 그중에서 특히 카를과 친했다. 카를은 수학실력이 좋고 분석력이 뛰어났지만 용트는 경제의 역사적 흐름을 읽고 전체적인 맥락을 짚어내는 데에 탁월했다. 두 사람은 경제와 정치, 사회에 대해서 끊임없는 토론을 즐겼다.

가난했던 용트는 장학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먹여살리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대학 도서관에서 보조사서로 일을 했다. 초일류 대학이니만큼 대부분의 학생들이 책 정리도 깔끔하게 하고 소란도 일으키지 않아서 근무 시간 대부분을 독서하며 보낼 수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딱 좋은 일이었다. 카를 또한 책을 읽으러 도서관에 자주 방문하면서 용트와 토론을 즐기기도 하였다. 베른하이어서 대학 도서관은 조용하고 엄숙한 장소가 아니라 활발한 토론의 장이었기 때문에 문제시될 일은 없었다. 한편 용트는 당시 헤스페로스벨트에서 비주류로 취급되던 사회주의에 대한 책을 접하고 사회주의에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용트는 사회주의 경제에 대해서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사회주의 경제에 대해서 카를에게도 말했지만 카를과는 생각이 달랐다. 카를의 아버지가 시장주의 경제에 극단에 서 있는 경제학자인만큼 카를은 시장주의학파였다. 물론 서로의 견해가 다르더라도 두 사람은 서로의 견해와 학문적 사상을 진지하게 존중해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1627년, 카를이 대학 3학년째 되던 해에 베른하이어에는 거대한 바람이 분다. 카를의 아버지인 제임스 무어를 중심으로 구성된 혁명연합이 베른하이어에 만연한 반지성주의, 부패권력, 키르수스 영향력을 뿌리 뽑기 위하여 정부에 맞서는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혁명은 당시 대공이었던 그리우스 2세가 입헌군주제를 승인하면서 양측의 협상으로 싱겁게 막을 내리게 된다. 이는 추상협상으로 불리며 베른하이어의 민주화를 시작하게 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추성협상 이후 혁명을 주도한 학자들인 이델스테르트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개혁정책이 시도되는데 이때의 교육개혁 중 일부로 카를이 다니던 외텔슈비어 대학교는 고등대학으로 승격된다. 그의 아버지가 베른하이어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로 올라서면서 카를에게도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는 금새 학교의 유명인이 되어 학생이고 교수고 할 것 없이 주목받게 되었다.

한편 카를은 대학에서도 통계적 기법을 증권 거래에 적용하려는 연구를 계속 이어나갔다. 이 과정에서 예전부터 친분이 있던 프레데릭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그가 외텔슈비어 고등대학의 교수로 부임하면서부터는 더 교류가 많아졌다. 프레데릭은 카를에게 당시로서는 이름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계산경제학에 대해 연구하던 하인리히 코트(Heinrich Koat)를 소개시켜준다. 하인리히는 카를이 시도하던 것처럼 경제모델을 정량적이고 변화하지 않는 방정식으로 계산하고 설명하려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 카를은 그의 연구에서 가능성을 찾았고 하인리히를 지도 교수로 하여 함께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집안의 경제사정이 크게 어려워진 용트는 학교를 휴학하고 가정교사 일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후로도 카를과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용트는 일로, 카를은 연구로 바빠지기 시작하자 점차 교류가 어려워졌다. 하인리히와 카를의 연구는 제법 성과가 있었고 카를은 주식 투자를 시작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적용해보며 실험을 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카를은 제법 높은 투자 수익을 기록하며 연구가 효과적이라는 것을 몇번이나 입증하며 재산도 유의미하게 쌓기 시작했다. 학계에서도 계산경제학은 더 이상 비주류취급을 받지 않았으며 카를 무어의 이름도 높아졌다. 그러나 더 이상 용트와는 거의 연락을 주고받지 않는 사이가 되어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박사 논문 집필이 거의 다 이루어질 무렵인 1633년, 정부에서는 국민 교육 수준 향상과 엘리트주의 정책을 시도하며 첫번째 시민시험을 시행하였다. 이때는 전국민이 시민시험에 응시하였으므로 당연히 카를 무어도 응시했는데 당당하게 전국 수석을 차지하였다. 그는 외텔슈비어 대학교 입학 시험에서 차석을 한 일을 떠올리며 용트 코발스키에게 오랜만에 연락해 보았으나 무슨 일인지 답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용트 코발스키와의 재회

다음해에 카를은 박사논문을 발표했고 하인리히와 카를이 정립한 수학적 거래 모델은 수학적으로 증명 가능하다는 것을 수많은 경제학자에서 발표했다. 처음에는 계산경제학을 인정하지 않았던 고전주의 경제학자들도 그의 주장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카를 무어는 베른하이어 경제학계에 새로운 초신성이 되었다. 틈틈히 작성하던 정치학 논문까지 포함해서 그는 경제학과 정치학 학위를 동시에 취득했다. 이때 그의 나이가 19살이었다.

한편 1634년은 시대적으로는 헤스페로스벨트 곳곳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벌어지던 불안한 시기였다. 사회주의보편주권연합이 국제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자 헤스페로스벨트의 다른 국가들에서도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혁명 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특히 코르보날의 상황이 심각했다. 베른하이어는 자유주의 진영이 강력해서 비교적 덜했으나 여전히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존재했다. 어느날 외텔슈비어의 거리를 산책하던 카를 무어는 사회주의 단체의 시위와 이를 진압하는 경찰들의 모습을 목격했는데 폭력을 사용하지 않은 채 시위를 하던 청년이 경찰에게 제압당해 쓰러지는 장면을 보고 그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그는 다름 아닌 용트 코발스키였다. 카를은 재빨리 달려가 경찰을 제지시키고 용트를 구해낸다. 정말 예상하지 못하던 재회였다.

오랜만에 재회한 용트의 몰골은 처참했다. 가난하긴 했으나 언제나 말끔한 차림에 웃는상이었던 그는 관리되지 않은 차림에 무척이나 초췌한 상태였다. 카를은 장소를 옮겨 용트에게 사정을 물었으나 용트는 빚 때문에 집안이 와해되고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했다고만 말하며 자세히는 대답하지 않았다. 과거에는 서로의 이상을 존중해주던 두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각자 현실을 마주한 뒤였기에 대화가 계속될수록 갈등이 심해졌다. 카를은 여지껏 사회주의에 심취해있던, 심지어 이론적 사회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 운동에 가담하는 용트를 이해할 수 없었고 결국 두 사람은 크게 싸운 뒤 헤어지고 말았다. 다음날이 되자 냉정을 되찾은 카를은 다시 한 번 용트를 진지하게 설득하기 위해 그를 찾아가지만 용트는 사련으로 망명한다는 편지 한 장만 남긴 채 종적을 감추었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카를은 그곳에서라도 절친이 정치적 이상과 뜻을 펼칠 수 있기를 빌어주었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사련에 대한 기사에서 용트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 훗날 베른하이어의 총리가 된 카를 무어는 용트에 대해 수소문 해봤지만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아마도 제대로 뜻을 펼쳐보기도 전에 연고도 없는 땅에서 기록도 없이 인생을 끝마쳤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이길 정도로 천재적이었고 또한 누구보다도 사회주의 이상에 진심이었던 남자가 다름아닌 사회주의에 땅에서 어떤 인정도 받지 못한 채 인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훗날 카를이 사련의 정치 체제에 대해 증오를 품게 만들었다.

마그니우스로 향하다

용트와의 갑작스러운 재회와 이별 후에 카를은 슬슬 다음 커리어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모교인 외텔슈비어 고등대학을 비롯해 베른하이어 내의 여러 대학에서 그를 교수로 임용하겠다는 러브콜을 보내왔으나 카를은 다름 아닌 마그니우스로 향하게 된다. 여러 나라의 학문과 문화를 경험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자신의 이론을 마그니우스의 증권가에서 실험해 볼 생각이기도 했다. 열렬히 러브콜을 보내온 베른하이어의 대학들과 다르게 마그니우스에서는 아직 계산경제학이 주류로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 그는 로디언 광역권 남동쪽에 위치한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알레머스 대학교에서 근무하게 된다.

알레머스에서는 당연하게도 계산경제학에 대한 학제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다른 비주류경제학을 연구하는 교수들과 연구실을 공유하게 됐다. 처음에 마그니우스 학계에서 취급은 좋지 않았지만 연구의 질도 논문의 질도 좋았기에 인정을 얻게 된다. 특히 사람을 다루고 조종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카를은 금새 경제학과에서 힘을 얻었고 특히 비주류 경제학을 연구하던 다른 교수와의 친분을 쌓았다. 약 1년쯤 뒤에 마그니우스 경제학계에서도 통계학적 기법을 적용한 증권 거래 이론이 유명세를 얻자 카를은 동료의 추천으로 로디언 중심부에 위치한 레스터체이스 칼리지(Lesterchase Collage)로 이적할 수 있게 된다.

레스터체이스에서 강의를 시작한 뒤부터 로디언의 은행가를 중심으로 그의 계산경제학 이론이 실제 금융에 적용될 수 있다는 반응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하자 카를의 이름은 점점 학계뿐 아니라 사교계에서도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공식적으로 로디언의 작은 사교 모임에 초대받기 시작한 카를은 로디언의 교수, 사업가, 귀족들과 조금씩 인맥을 쌓기 시작한다. 외가가 귀족 가문이었고 베른하이어에서도 상류층이었기 때문에 사교 문화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던 그는 금새 모임에 적응하기 시작했고 그의 가문, 이력 등이 밝혀지면서 모임 내에서도 카를을 알아보는 이들이 많아졌다. 특히 카를이 키가 크고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에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자주 회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