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넘이 정변
ㅇㅜㅇㅕㅣㅂㅣ•ㅍㅗㄹㄷㄹㅗㅁ
Sonnenaufgang Putsch
날짜 1663년 12월 31일 ~ 1664년 1월 1일
장소 게파르토 게파르토 제국 뵐케주 모지리 시
원인 키르수스와의 전쟁으로 인한 패전, 경제개혁 진행 부진
결과 반란 성공, 황실 및 확립내각 해산
피안토네 내각 국권 장악
영향 게파르토 제국 몰락, 정치 전쟁 사건 발생
교전국
지휘관
피해
약 820명 약 400명

해넘이 정변(게파르토어: ㅇㅜㅇㅕㅣㅂㅣ•ㅍㅗㄹㄷㄹㅗㅁ 우예비 포라다롬, 키르수스어: Sonnenaufgang Putsch 조넨아우프강 푸치)은 1663년 12월 31일부터 1월 1일까지 피안토네 레파치오 육군 소장을 비롯한 게파르토 제국군 장교들에 의해 시행된 군사반란이다. 기록상 건국력 560년부터 건국되어 약 1103년간 지속되어온 게파르토 제국과 1620년부터 친정을 펼쳐온 제국 황제 게파르토 다카리바고 3세의 치세가 43년 만에 무너졌다. 에세르 지방키르수스 제국의 개입 하에 분리독립하였으며, 피안토네 소장을 주축으로 하는 게파르토 인민단결공화국이 건립되였다.

당시 게파르토 제국군 내부에서는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종전 이후의 경제적 혼란상과 황실의 극단적 정책, 키르수스, 사련의 군사-사회적 압박, 군 개편에 대한 반대 의견 등으로 인해 황실에 대해 반대하는 세력이 존재했다.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에서의 활약으로 인해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한 피안토네 소장과 휘하 회지 너슈트 대령 및 슈탄다르테 사관학교 생도들과 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의 주도 하에 쿠데타가 기획되었다.

당시 군에서는 대규모 숙청 작업이 시행 중이었다.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이후 키르수스군을 상대로 전위적인 전과를 얻어낸 게파르토 제국군은 동원령이 해제되자 황제는 비대한 장교단을 유지하고 전쟁영웅으로서 전국민적인 지지를 얻던 피안토네에게 정치적인 압박을 느꼈고, 피안토네 소장과 그 지인들을 대상으로 강제 예편을 시도하였다. 이에 64년 4월에 예편이 예정된 소장은 군의 부정부패와 비리, 에세르 점령 이후 군에 대한 포상 전무를 이유로 반란을 계획하였다.

군사반란 세력은 피안토네 휘하 제대였던 제3독립기병연대, 제52기병연대, 제1보병사단[1]이 주축이 되었으며, 이 외에도 다수의 예비보병연대 및 포병연대가 동조했다.

12월 31일, 신성수도 모지리 시에서 열병식 도중 기병대들의 갑작스런 돌격과 탱켓들의 사격음을 신호로 반란세력은 열병식을 위해 모여있던 각 부처 대신들과 군 최고사령부 및 최상급제대 사령관, 황제를 비롯한 황실 일가를 포로로 잡아 대부분을 처형 및 전향시켰으며, 게파르토 제국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전권을 게파르토 공화국에 이양시킨다.

혁명 직후 공식적으로 2월까지 반란 세력의 제국군 소탕 작전인 대협상이 진행되었다. 에세르 지방에 잔존한 게파르토 제국군은 소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대협상 이후 1667년까지 게파르토 제국군 소수 잔당들에 대한 토벌작전이 시행되었다.

배경

전후 경제

1663년 당시의 게파르토 제국그란치프의 붕괴와 게파르토의 확장적 행보를 경계하는 키르수스 제국사련 측의 견제 행위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었다. 비대해진 장교단은 동원령 해제 이후에도 축소되지 못했고,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당시 게파르토 제국군의 갑작스러운 행위에 앙금을 품고 급작스럽게 무역을 중단한 키르수스의 행보는 전쟁 당시 키르수스 황립군과 민간에 의존해 호황을 이루어낸 게파르토 경제를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황실은 전쟁에서 획득한 에세르 지방을 산업화하여 돌파구를 모색하고자 하였으며, 이에 국가예산의 약 50퍼센트를 에세르 산업화와 인구 유치에 투자하였다.

정확한 수요조사와 사전 조사 없이 무계획적으로 투입된 에세르 산업화 예산은 전쟁 특수의 극심한 인플레이션에도 턱없이 부족한 임금에 시달리던 관리들과 부패한 각료들의 착복 대상이 되었고, 더불어 에세르 지방에서 준동하던 독립 세력의 사보타주로 인해 혼란상만을 빚어내었다.

극약처방만을 남발하는 제국 측의 행위에 반발하는 데모와 시위, 함께 발생한 약탈행위와 폭력행위 또한 피안토네의 정변 세력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에세르 산업화를 위해 집계상 340만의 게파르토인들이 강제이주 대상이 되었고, 이들은 에세르 지방에서 수백년 이전부터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농지를 헐값에 처분하고 공장에서 저임금 노동자로 근무하며 학대받았다.

군인

전직 군인들 또한 전후 새로운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와중 동원령이 해제된 이후, 게파르토 군인들은 평균 약 32슈바이허를 지급받고 제대했는데, 이는 당시 조부모과 2인 이상 자녀들을 동반하고 생활하는 게파르토의 평균적인 가정에서 1개월치 생활비로도 모자랐다. 호황 당시에는 일자리 획득이 어렵지 않아 비교적 간과되던 문제였으나, 전후 본격적으로 경제위기론이 등장하자 사회 하류층으로 전락한 전직 군인들이 온갖 정치적 사상을 표방하는 정치집단 및 폭력단체에 가입해 치안을 어지럽히자 그간 지역사회와 깊숙히 연계되어왔던 현지 지역연대와 민간과의 관계가 냉랭해졌다.

게파르토가 키르수스와의 전쟁에서 단독으로 휴전협상을 치룬 이래, 에세르 지역 점령은 순전히 일선 장교들의 노력과 능력에 따른 성과로 평가되었다. 전쟁 당시 시행되던 엄격한 정보단속과 보도지침이 폐지되자 극도로 지역화되고 지역과 유착관계를 가지던 게파르토 제국군 자체의 문제들이 각종 언론들을 통해 제기되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봉급과 전역하며 수령한 지원금과 평균 시세 사이에서 발생한 괴리에 불만을 가졌고, 부사관 집단은 전후 필연적으로 발생한 고강도 업무에 시달리며 발생한 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고통을 호소했다. 장교 중에선 하급 임관자들을 주축으로, 계속되는 병사들과 부사관단에 대한 처우 개선책과 봉급 인상책이 발표되는 와중에도 장교 대상으로는 단 하나의 복지책과 처우 인상이 이루어지지 않자 상대적 호소감과 박탈감을 주장했다. 지역 연대마다 다른 복지기준과 지원안은 혼란을 가중시켰다. 갑작스러운 보도지침 해제에 언론은 이를 부추겼으며,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는 주로 가십거리와 거짓 기사를 퍼뜨리며, 혼란을 일으키는 상황 자체에만 주목해 정국의 붕괴를 가속시키기 일쑤였다. 정부의 주도 하에 1657년 6월에 발표된 언론규제법은 역효과를 불러왔다.

외부의 상황

대륙 동부에서 진행되는 사회주의 혁명과 소문으로 들려오는 사련 남부의 반란 소식, 접경국 코르보날 연합국에서 1658년 발생한 코르보날 내전에 사회주의 세력이 연관되어있다는 점은 정치권과 민간에 극도로 관계가 냉랭해진 키르수스를 제외하고는 제국에 주변과 공생할 국가가 존재치 않는다는 불안감을 불러왔다. 이전부터 게파르토는 대륙 서부의 도시국가 및 키르수스, 코르보날, 그란치프와 대륙 동부의 국가들 사이에서 적절한 외교관계를 유지하며 실리를 얻어내는 방식으로 부족한 국가 경쟁력을 보충했다. 호황이 종식된 이후, 전통적인 국제역학적 위치가 깨져버린 게파르토는 경제위기와 지속되는 사회 혼란 속에 새로운 국제전략을 구축하기 버거워했다.

사회와 정치

호황이 도래하며, 국민적인 의식 및 교육 수준 또한 증대하기 시작했다. 특히 전후 대륙 각지에서 몰려든 인간-아인종 난민과 에세르로 강제이주 당한 게파르토인 등 역사적으로 유래없는 격동적인 인구변화가 발생했는데, 이 때문에 인구 구조또한 새롭게 재편되었다. 이는 전후 호황과 더불어 상승 작용을 불러왔고, 이민자들과 하급 계층 민간인들이 여가 시간 동안 지식과 평균 교육 수준을 끌어올리는데 일조했다. 당시 키르수스어와 각 아인종들의 언어가 공용어로 통용되던 게파르토는 각 주마다 조금씩의 언어 차이를 보이곤 했는데, 이를 극복하고자 1654년에 지역간 방언 차와 인간-아인종 간의 지식 격차를 메우고자 제정된 게파르토어와 제국 공용문자 체계가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이미 1645년부터 제정된 초등공용교육 시스템과 함께 가속되어 1658년 전수조사 기준 전 국민의 47.5퍼센트가 문맹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일간지 보급률이 늘어나 외국과 타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신속히 접할 수 있게 되었고, 정치 편향적이고 특정 사상에 대해 노골적으로 우호적인 성향의 언론사들이 판매 증대를 위해 황색 선전을 계속하자 국민들의 강압적인 제국 정권에 대한 불만이 더욱 늘어났다. 경제 침체에 따른 실업자와 국민의식 성장과 동시에 진행된 퇴역군인에 대한 포상 미흡, 에세르로 흘러가는 막대한 양의 국가예산에 대한 착복, 국제 관계 악화는 이내 사회에서 폭력단체의 성행과 함께 정부단체에 대한 불응과 불충이 미덕으로 취급되기에 이르렀다.

정치적 불안은 제국민들에게 불안을 심어주었다. 에세르로 향하는 강제이주민과 막대한 예산들은 대신들 사이에서 주요히 논쟁대에 오르곤 했는데, 다카리바고 3세는 63년 당시 92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8세에 불과한 황태자 대신 친정을 펼치며 잦은 정신분열증, 우울증, 불안과 오한을 호소했다. 게파르토의 경제위기가 가속되며 정신불안 증세가 악화되자 다카리바고 3세는 선황들의 친정을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하며 강압적 행위를 반복했다. 1656년부터 1660년까지 6년간 무려 8차례의 대신단 개각을 단행하였고, 정책은 연속성을 갖지 못한 채 단발적인 미봉책을 남발하기에 급급했다. 당시 정국에선 대신단을 위주로 의원내각제입헌군주제가 공개적으로 논의되던 상황이었으나. 이를 반대하던 다카리바고 3세에 의해 불안함이 가중되자 내부 정치암투에 막대한 정치력이 소모되었다. 황제의 숙청은 매우 일상적인 부류의 것이었으며, 전제군주제 속에서 황제와 대신단은 즉흥적으로 발의된 애매한 법률을 두고 사사건건 대립했다. 대신들의 평균임기는 4개월에 불과해 자신의 업무를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숙청되거나,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교체되는 경우가 흔했다.

제국군

1650년 기준 전후 게파르토 제국군의 평시 전투병력은 약 280만 명에 달했고, 키르수스-그런치프 전쟁 당시 에세르 지방 점령을 위해 동원령을 시행해 700만 명 규모, 보급역량 포함 총군 2100만 명 수준까지 급격하게 팽창했다. 그간 지역과 유착되어 발전이 저해되던 것과는 별개로 동원령 해제 이후 병의 숫자는 축소됐음에도 불구하고 장교단은 급격히 비대해지며 인사적체 현상이 곳곳에서 발생했다. 특히 슈탄다르테주의 유명 군사대학이자 피안토네 소장이 명예교장으로 추대된 슈탄다르테 사관학교의 54기, 55기, 56기 및 57기 졸업생[2] 및 사관학교 생도들의 불만이 극심했다. 그런 상황에서 경제 개발을 위해 군에 투입될 예산이 감축되어 에세르 방향으로 조달될 것임이 알려지자 그들은 황실의 정책에 극심하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제국군은 전통적으로 연대가 지역에 예속되어 자신들만의 군복, 지휘권과 징병권, 영웅과 상징, 지역 언어와, 연대만의 훈장과 지휘체계를 가진 형태로 운용되었다. 다카리바고 황제가 키르수스식 육군모델에 감탄하여 1653년을 기점으로 게파르토군은 최고사령부 아래 개편되어 황제의 주도로 지휘하는 중앙군 위주의 사단 체제로 급격하게 전환을 시도하였는데, 각 연대의 고위 장군들 사회에서 불만이 터져나왔다. 전통과의 단절과 지역연대의 해체, 무작위 사단 재편은 심한 반발을 불러왔으며, 제국군의 혼란과 전투력 저하를 야기했다. 이는 승천 작전 당시 키르수스군의 신속한 진격에도 영향을 끼친다.

군의 혼란과 인사적체 현상은 뇌물과 매관매직으로 이어졌다. 육군의 비대화와 중앙집중 과정에사 수도를 중심으로 발생한 군벌들의 등장과 이들의 파벌화, 독식은 군 전체의 기강을 헤이하게 했다. 또한 봉급 부족 현상과 함께 하급~중견 지휘관의 생계형 비리, 착복과 물자 횡령을 성행케 했고, 수도에서의 권력암투는 군을 여러 차례 흔들었다.

피안토네의 상황

피안토네는 1620년 8월 24일에 슈탄다르테주에서 부유한 농민 출신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농사를 지어오며 지역 주민들이 생활고에 시달릴 때마다, 또는 군이 움직일 때마다 군량을 대며 대대적으로 황실에 충성하는 명문가로 소문난 집안이었다. 피안토네가 1650년대 슈탄다르테 사관학교에서 졸업하고 에세르 전선에서 작전을 펼치는 동안, 그의 집안은 과도한 세금 지출과 군량 차출로 인해 가세가 기울었다. 에세르 점령에서 큰 전과를 세워 국민적 영웅이 되었음에도 그는 그를 시기한 정적들과 집안의 몰락으로 인해 진급이 적체되었고, 평소 총애받던 슈탄다르테 사관학교장 슈탄다르테 하겐다스 예비소장과 피안토네의 동기 노가르슈 훈예디 소장의 열렬한 변호로 살아남았지만 전국민적 영웅을 원치 않았던 황제의 묵인 하에 군 내부 사회주의자 숙군작업에서 색출되어 사형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이후 사상전향을 인정받고, 이어진 육군 원로들의 옹호와 국민적 지지를 감안해 슈탄다르테 사관학교의 명예교장으로 재직할 수 있었으며, 군수기지사령관, 제52기병연대 연대장을 거쳐 동부집단군 제3군단 군단장, 동부집단군사령부 작전참모부장 등 여러 요직을 거쳤다.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의 반란 군벌들과 벌어진 국경에서의 교전에서, 피안토네는 국민적 영웅이라는 위치에서 수시로 전선에서 혹사되었다. 1660년 기준 평시 280만 명에 달하는 게파르토 전군은 에세르 지방에서 구 발키로르 왕국 권역까지 닿는 국경선을 사련의 반란 군벌들과 약탈자들로부터 방어해야만 했다. 사련 정부에 요청한 회담은 수시로 결렬되었고, 기본적으로 한 번의 공세에서 최소 100만 명 이상의 병력이 운용되는 사련 내전의 영향으로 게파르토 제국군은 막대한 손실을 기록하였다. 정부 측에 지원을 호소했지만 군대 예산은 감축된 상황이었고, 거기에 군에 배정된 예산 또한 착복과 급작스러운 인사개편에 경비로 소모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던 1663년 7월 경, 연말에 수도에서 황권 강화 목적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열병식 계획이 수립되었다. 이에 동부집단군에 배속된 건장하고, 비교적 영양상태가 양호한 인원들에 대한 차출 명령이 하달되었다. 피안토네의 반란 계획은 착출 명령과 가까운 시점에 계획 단계에 돌입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반란 이후 게파르토 공화국에선 피안토네의 반란 시도가 매우 이른 시기부터 기획다는게 정설로 퍼져있다. 민간에 알려지길, 그는 명예교장으로서 재직하던 시기에도 생도들을 상대로 전선에서의 피로함과 자신이 겪은 부당함을 공-사석 관계 없이 즐겨 이야기했고, 민간에서 소문이 돌기를, 국경 병력의 손실이 일정 이상이어서 자국 영토 내에서 '후퇴'를 감행해야 했던 때는 과음으로 인해 인사불성이 되기 일쑤였다고 한다. 주류 학계에서는 소장의 반란원인을 국경에서의 혼란 뿐으로 한정하지 않고, 숙군 작업의 희생양이 될 뻔한 것과 집안이 황실의 정책으로 인해 완전히 붕괴한 부분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과정

피안토네는 반란 이전부터 자신의 작전참모부장 직위를 이용하여 용의주도하게 계획을 획책했다. 과거 제52기병연대장과 제3군단장을 역임했던 경력을 이용해 각군 참모부에 지인을 여럿 심어둔 상태였고, 동부전선군 사령관이 무관심과 황실에 대한 아첨, 주색잡기에 빠진 상황에서 피안토네는 실질적인 사령관 직위에 올라 휘하 병력들과 일선에서 전투해 동부전선군 소속 중견 장고들의 절대적인 신임을 확보한 상황이었다.

1663년 연말 열병식은 공식적으로 오후 9시부터 오전 12시 신년사를 끝으로 종결될 예정이었다. 푸른 색 스카프와 목도리를 식별표식으로 삼고,

1663년 12월 31일
- 23 : 30
제52기병연대의 1대대 소속 유커쇠 탱켓의 무차별 기관포, 기관총 사격으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기록적인 폭설과 한파로 인해 병력들은 극도로 피로한 상황에 비가담세력 대부분이 무질서적으로 도주했으며, 황궁 밖으로 퍼져나가 모지리궁 외부에서 데모 중이던 시위대와 뒤엉켰다. 발코니에서 연설을 위해 마침 만찬실을 나가려던 황제는 급히 놀라 권총을 빼어든 대신들과 함께 궁 내부로 피신했다.

- 23 : 50
황궁 근위대가 급히 소집되었다. 반절 이상은 이미 시민들의 데모에 최루탄을 발사하며 시위대를 통제 중이었다. 소집 명령에 제2대대와 제4대대가 급히 황궁 안으로 돌입하는 과정에서 제48보병연대 병력과의 산발적인 교전이 존재했다. 황궁 문 바로 뒷편, 알현실 내부에 급히 모래주머니와 기관총을 동원한 방어선이 축조되었으며, 황제와 측근들은 만찬장(연회장)으로 대피했다. 발코니에서 상황을 지켜보려던 경제대신 노르보 호슈티제48보병연대 소속 보병포의 포탄에 맞아 무너지는 발코니와 함께 폭사했다.


1664년 1월 1일
- 00 : 40
합류한 제48보병연대제43보병연대가 근위대와 계속해서 대치하며 산발적인 교전을 펼쳤다. 제52기병연대의 탱켓이 황궁 정문으로 진격해 군중통제에 여력이 없던 제1대대와 제3대대를 습격했다. 근위대 현장 지휘관은 급히 항복했고, 시위대는 제52기병연대의 강압적인 해산 명령과 기관포 위협사격, 혼란 속에 갑작스럽게 도주 및 해산되었다. 이 시각 황궁 내에선 피안토네의 허가 하에 수류탄과 폭발물 사용이 허가되어 임시 급조된 기관총 진지를 파괴했고, 제52기병연대 소속 탱켓 일부가 지원을 위해 황궁 내부에 들이닥쳐 방어선을 향해 사격을 실시했다.

- 01 : 30
와해된 일부 게파르토 제국군 연대가 상황을 파악하고 항복 의사를 타전했다. 전투가 진행되는 동시에 제3포병연대의 주도로 군복과 총기가 수거된 채 집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 01 : 40
국영방송사 게레트슈탄다르테 사관학교 생도들과 노구의 몸을 이끌고 온 슈탄다르테 교장, 몇몇 장교들에 의해 점령되었다. 10분 후 피안토네에게 점령 사실이 타전되었으며, 준비된 포고문이 긴급방송 스피커 및 라디오를 통해 전달되었다.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 02: 00
일부 현장 장교들에 의해 재규합된 일부 연대들이 황궁 밖 시가지에서 독자적으로 황궁 주위에 쌓인 포위망을 돌파하려 시도했다. 제3독립기병연대의 타격으로 대부분이 사로잡히고 항복해 무기를 반납했다. 40분 경이었고, 5분 후 장교들은 처형되었다.

- 03 : 00
근위대가 축조한 방어선이 황궁에 날아온 곡사포격과 함께 돌파되었다. 10분 후, 피안토네는 병사들을 먼저 돌입시킨 채 각 신료들과 장군단의 개인 무장을 압수했고, 신체검사를 꼼꼼히 마치게 한 후에 전원의 상의를 벗긴 후 연회장에 돌입했다. 각 대신들은 잡작스러운 도주로 인해 다리가 접질러지거나, 자살에 실패한 이도 있어 초췌한 몰골이었다. 30분 경, 강압적인 응급처치가 끝난 후 반란세력이 포승줄을 들이대며 다가서자, 각부 대신들과 황제의 친척들이 고함을 치며 황제 앞을 가로막았다. 피안토네는 막아선 친족들을 전원 사살한 뒤 대신들을 체포하였으며, 황제를 무너진 발코니 앞에 서게 해 근왕파의 항복을 종용시켰다.

- 04 : 00
황제와 각부 대신들이 체포되어 열병식이 벌어졌던 광장 앞에 연행되었다. 방어선이 파괴되어 일부 항복한 근위대가 황제 옆에 무기 없이 섰으며, 열병식을 위해 집결한 황실 종친과 각 부처 장관들 또한 빠짐없이 집결했다. 피안토네와 온건파 사이에서 황실 처형에 관한 논쟁이 권총을 겨누는 상황까지 발전했고, 처형에 합의했다.

- 05 : 20
모지리시 외부로 탈출하려 시도한 장군진들과 병력들이 대한 포획이 완료되었으며, 현장에서 무분별하게 사살되거나 포로로 잡혔다.

- 06 : 00
피안토네 측이 무전을 통해 게레트에 목적 달성을 선언했다. 전보를 통해 국경지대에서 미리 대기 중이던 키르수스군에게 진격 명령이 하달되었다.

- 07 : 00
피안토네의 연설이 황궁 밖 광장에서 진행되었다. 구경꾼들이 다수 몰린 상황에서 전쟁영웅 피안토네가 연단에 섰다는 점이 소란스러운 수도의 민간인들을 끌어모았으며, 침묵 속에서 연설 이후 정확히 7시 28분, 황실과 일가에 대한 처형식이 시행되었다.

- 07 : 50
게파르토 공화국 수립 연설이 치뤄졌으며, 연설 와중에 각부 대신들과 고위 장군들이 운을 맞춰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나갔다. 이미 장군들 전원은 이전 키르수스의 진격명령을 전달할 때 기용 가능한 모든 회선을 통해 자신들의 지휘 제대에게 키르수스군과 혁명에게 항복할 것을 명령한 상태였다.

결과

피안토네 세력은 정변을 통해 국민 지지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개인적 원한을 목적으로 하여금 황제와 각 부처 대신들을 처형했다. 이어 공식적으로 2월까지 게파르토 지방 각지에서 항복하지 않거나 통신수단의 미비로 정변 소식을 타전받지 못한 병력들을 대상으로, 대협상 작전 하에 사관학교 졸업생들과 항복한 병력들을 재편해 회유 및 토벌작전을 실시하게 된다. 에세르 지방게파르토 제국군 잔당에 대한 수속은 키르수스군과 에세르 현지 정부 측에 권한이 이관되었고, 게파르토 방향으로 도주해오는 민간인과 병력들을 수습하고자 정변 이후 가장 먼저 게파르토군이 배치된 방향은 북부 에세르 국경이었다.

키르수스군의 개입으로 인해 사련군과 사련 반란군, 코르보날 지역의 군벌들 모두가 게파르토 국경에 대한 약탈행위와 무단 진입을 극도로 꺼리게 되었다. 피안토네는 외부 키르수스 세력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공화국 임시 지도자 자리에 올랐고, 사상 전쟁이 끝나자 동년 7월 정식적으로 주카레프 불리예트를 공화국 총리 자리에, 자신을 직접 공화국 종신 대통령 직위에 올렸다.

황제 게파르토 다카리바고 3세와 그의 가까운 친척들은 모두 살해했으나, 당시 8살이던 황태자 게파르토 다누비아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살아남아 1664년 7월, 피안토네와 동시에 공화국 추존 황제 자리에 올랐다. 황궁 알현실은 대통령 집무실로 개조되었으며, 황제의 자리에 오른 다누비아 황태자는 피안토네의 의향에 의해 내전 회피, 대외 선전, 회유, 항전 세력의 정통성 약화 등을 목표로 궁 내부 일부 지역, 별궁과 일부 황실 소유 건축물을 영토로 간주하는 소조정을 가졌다.

피안토네는 제국 시기 수립되었던 여러 극약적인 정책들이 막 효과를 보는 시점에 취임했다. 강제 이주로 인해 활성된 지역 경제의 득을 보았고, 극단적인 세율 정책으로 얻어낸 국고를 군에 극단적으로 투자했으며, 과도하게 발행된 채권은 과도하게 민간에 환원하였다. 키르수스의 막강한 투자 지원에 힘입어 정변 직후 게파르토 공화국키르수스의 괴뢰국으로서 독립한 에세르, 나아가 그란치프와의 상호 교역 또한 재개하며 극적인 회생에 성공한다.

게파르토 공화국 측은 해당 정변을 공식적으로 '신년 혁명'이라 함을 고수하고 있다. 공화국 헌법과 민간에서도, 피안토네 개인의 의향과 확보하고자 한 정치적 정당성으로 인해 해넘이 정변은 기념해야 될 일로 취급받았다. 사상 전쟁 당시 좌익 사회주의 세력은 해당 사건을 '신년 반란'이나 '반란' 등으로 우회적으로, 또는 '사건'이나 '그 짓' 등 악의적으로 표현하였다.

정변 직후 피안토네가 공화국 임시 지도자 자리에 오른 뒤 계엄령과 함께 정기 간행물 1000종에 대한 출간 중지 명령 및 언론 사전 검열제가 실시되었으며, 약 7개월간의 군정이 실시되었다. 계엄령은 동년 7월에 피안토네가 대통령 자리에 즉위하며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1. 당시 신편 중이었으며, 구 제48보병연대제43보병연대가 주축이었다
  2. 주로 중견 장교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