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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실 ===
=== 황실 ===
{{역대 구주 황제}}
과거에는 전제군주제 국가였던 구주의 특성상, 막강한 권력을 가졌었으나 19세기 일본과의 합병으로 구주 왕실은 사실상 실권 없는 허수아비 영주로 전락했다. 독립 이후, 전제군주제로 복귀하자는 여론이 있었으나, 서양 사상의 유입으로 인해 입헌군주제가 더욱 지지를 받았다. 따라서 구주는 독립 이후 제국 선포에 상관 없이 입헌군주제로 평화롭게 국가 운영의 주체가 전환될 수 있었다.
과거에는 전제군주제 국가였던 구주의 특성상, 막강한 권력을 가졌었으나 19세기 일본과의 합병으로 구주 왕실은 사실상 실권 없는 허수아비 영주로 전락했다. 독립 이후, 전제군주제로 복귀하자는 여론이 있었으나, 서양 사상의 유입으로 인해 입헌군주제가 더욱 지지를 받았다. 따라서 구주는 독립 이후 제국 선포에 상관 없이 입헌군주제로 평화롭게 국가 운영의 주체가 전환될 수 있었다.



2021년 9월 11일 (토) 15:21 판

구주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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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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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북한 일본 구주 중국
몽골 대만
구주제국
九州帝國 | Empire of Gujyu
파일:구주 국장.png
국기 국장
황권, 평화, 안민
상징
국가 구주 황실찬가
국화
목화꽃
국수
기러기
위치
width: calc(100% + 5px)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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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골의 일본 침공 1281년 8월 29일
  • 구주왕국 성립 1363년 1월 17일
  • 구주-조선 전쟁 1437년 5월 10일
  • 일본의 일부로 합병 1890년 1월 1일
  • 일본으로부터 독립, 제국 선포 1945년 9월 2일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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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평주황도시
최대 도시
장도시
면적
36,782km2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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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14,349,180명
밀도
390.1명/km2
민족 구성
구주인 85.1%
한국인 8.4%
일본인 4.4%
기타 2.1%
출산율
1.9명
기대 수명
80세
공용어
구주어
지역어
한국어, 일본어
공용 문자
한글
종교
국교
불교
분포
불교 56.3%
기독교 15.3%
기타/무종교 28.4%
군대
구주국방군
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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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 행정구역
3개 시, 7개 도, 1개 자치도
기초 행정구역
33개 시, 105개 구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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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단일 국가, 단원제, 다당제
민주주의 지수
7.88점, 결함있는 민주주의 (2020년)
(168개국중 27위, 아시아 4위)
국가 원수 (태황)
융계제
정부
요인
수상
노순형
부수상
금창준
사법원장
한태길
여당
화평당
연립 여당
구주민정당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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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GDP
(PPP)
전체 GDP
$7,031억 982만 0,000
1인당 GDP
$49,000
GDP
(명목)
전체 GDP
$6,170억 1,474만
1인당 GDP
$43,000
신용 등급
무디스 A1
S&P A+
Fitch A
화폐
공식 화폐
구주 환
ISO 4217
GJH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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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연호
융계 (隆械)
시간대
GMT + 09:00
도량형
SI 단위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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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수교현황
대한민국 : 1948년 12월 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1995년 7월 18일
UN 가입
1960년
주한대사관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ccTLD
.gj
국가 코드
GUJ, GJU, 433
전화 코드
+92

개요

동아시아에 위치한 국가이다.

상세

일본 열도의 구주섬과 충승 군도 일대에 위치해있다. 면적은 총 36,782km2 가량이며, 인구수는 총 1,400만명에 이른다. 정치 체제는 입헌군주제이다.

13세기 원나라에 의해 점령된 규슈섬이 14세기 독립하여 세워진 구주왕국이 기원이다. 이후 한번 왕조가 바뀌었으며, 15세기경 조선과의 전쟁에서 패해 조선과 군신관계를 맺었다. 20세기에는 일본의 식민통치는 약 55년간 받기도 하였다. 1945년 독립 이후 황제국을 선포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으며, 정치적으로 민주주의를 조기에 받아들이고 경제적으로도 크게 발전했다.

대한민국, 싱가포르, 대만, 일본 등과 함께 동아시아에서 가장 발전해있는 선진국으로 분류된다. 국민소득과 삶의 질 모두 전세계적으로 최상위권에 속하며, GDP 역시 매우 높다. 공용어는 한국어의 방언인 구주어이고, 한글이 공용 문자로 쓰인다.

현재 구주는 UN, G20 등 다양한 국제기구에 소속되어있으며, 일본, 한국,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다.

상징물

파일:구주 국장.png
구주의 국기 구주의 국장

구주의 국기와 국장은 법으로 정해져있는 공식 국기, 국장이며, 이는 황실에서 사용하는 어기이자 어보이기도 하다.

약 15세기부터 사용되어져왔으나 정확한 제작 시점은 불명이다. 조선과의 전쟁 이전에 만들어진 것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봤을때 확실하나 그 이전의 기록은 묘연하다.

역사

원나라

13세기 원나라의 일본 침공으로 인해 규슈 지역이 일본 본토로부터 분리되었다. 또한 고려에서 수많은 이주민들이 넘어오면서 구주는 원나라 최동단 영토로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의 정치적 혼란이 심해지자, 구주 지역에 대한 원나라의 통제가 크게 약화되었고 이는 금이형 등 수많은 지역 유력자들이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구주 왕국

금씨 구주

원나라가 14세기 정치적 혼란으로 인하여 구주 지역에서 철수하면서 구주왕국이 세워졌다. 이때 독립 국가를 형성한 것은 몽골의 장수 출신이자, 고려계 주민이었던 금이형이다. 금이형의 성을 따와 이때부터 16세기 반정까지 이어진 구주의 체제를 통틀어 금씨 구주라고 부른다.

15세기 중반경에는 조선과 2년간의 전쟁을 치뤘으며, 구주가 패한 이후 조선과 군신관계를 맺어야했다. 이러한 군신 관계는 19세기 후반, 일본이 구주 식민화를 위해 조선에서 구주를 떼어내면서 끝났다.

황씨 구주

패전으로 인한 왕실에 대한 여론 악화와, 연이은 흉작으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진 가운데 황승이 일으킨 16세기 반정으로 인해 금씨 왕가는 조선으로 도망치고 황씨 왕조가 설립된다. 이때를 나누어 14~16세기를 금씨 구주, 17~19세기를 황씨 구주라고 부른다.

네덜란드와의 교역으로 일찍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으며, 이를 통해 한중일 삼국중 가장 먼저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18세기 이후 기독교 관련 파문이 커져 쇄국정책을 추구하면서 점차 기술은 덜떨어졌고, 반대로 19세기 초반 이후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에 뒤쳐지는 결과가 일어났다. 그 결과 19세기 중후반 이후로는 일본의 내정간섭이 심화되었다.

일제 강점기

1890년, 구주는 회령 협약을 통해 일본에 합병된다. 황실은 일본 정부의 배려로 유지되었지만 가혹한 식민통치가 이어졌고, 1930~40년대 2차대전 당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에 끌려가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구주에 현대 문물이 대거 유입되면서 경제가 성장하는 등의 사회적 발전 역시 존재하였다.

국가가 상대적으로 작았던 탓에, 경제 발전의 이익을 대부분의 국민들이 누릴 수 있었기에 독립운동은 조선에 비하면 활발하지 않았다. 또한 일본 정부가 황실을 존중하면서 구주는 약 50년이 넘는 기간동안 큰 동요 없이 식민지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1930년대 이후 청년층을 통해 사회주의가 인기를 얻고, 중일전쟁으로 식민지 통치 정책이 강경하게 돌변하자 일제 강점기 후반기에는 독립 단체가 여럿 설립되기도 했다.

구주 제국

1945년, 2차 대전이 일본의 패전으로 끝나자, 구주 역시 미군정으로 독립하게 된다. 2년간의 미군정 체제를 거친 이후 자주 독립을 쟁취하였다. 또한 구주는 조선, 일본, 미국으로 이어지는 수백년간의 식민 통치 기간을 끝내고 독립을 이뤘다는 것을 자축하기 위해 제국을 선포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 당시에는 남한을 도왔고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많은 군사를 파견한 국가였다.

구주는 경제가 매우 좋지 못한 국가였으나, 1960년대 중공업 위주의 강력한 군사 정책으로 경제가 크게 발전하여 선진국의 반열에 들었다. 현재 구주는 대만, 남한, 일본, 싱가포르 등과 함께 동아시아 국가중 가장 국민소득과 삶의 질이 높은 국가로 분류된다.

지리

구주는 섬나라이다. 수백여개의 섬 중에서는 일본열도에 속해있는 의 구주섬이 가장 큰 섬이다. 대한해협으로 부산을 사이에 두고 대마도가 위치해있으며, 구주섬 남서쪽에는 충승제도가 길게 이어져있다. 충승제도는 과거 구주의 영토가 아니었으나 15세기 구주에 편입되었다. 이 때문에 구주 본토와는 다른 독특한 문화가 발전했다.

기후로는 열대기후에 속하며 쾨펜의 기후표에서 Cfa에 속한다. 여름에는 40도에 가깝게 올라가고, 겨울에도 영하로 내려가는 일은 굉장히 드물다. 이 때문에 대만과 마찬가지로 열대 작물 농사가 발달하였다. 한편 충승의 경우에는 해양성 기후 때문에 저위도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본토에 비해 날씨가 온화하다.

한국과 굉장히 가까우며, 특히 북쪽의 기창도는 부산과 배로 단 2시간이면 오갈 수 있는 짧은 거리에 위치해있다. 대마도는 기창도 본토보다도 한국에 더 가깝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특히나 한국 시민들이 가장 많이 찾는 구주의 관광지이기도 하고, 한국인들도 상당수가 이주했기 때문에 한국 문화와 구주 문화, 그리고 섬의 토착 문화가 결합하여 구주 본토와는 다른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행정구역

3개 시, 7개 도, 1개 자치도로 이뤄져있고, 그 밑에 33개 시, 105개 구의 기초자치단체가 존재한다. 7개의 도는 각각 기창도, 정사도, 형평도, 소림도, 백경도, 신자도, 천초도이며, 시는 창성시, 장도시, 평주황도시가 존재한다. 1개 자치도는 충승자치도이다.

구주는 1960년대 일찍이 지방자치제도가 실현되었으며, 도지사와 시장을 직선으로 선출한다. 또한 각 지역에 주의회, 시의회가 존재하여 매우 높은 지방 자치의 수준을 누리고 있다. 특히나 충승자치도는 그 자치의 수준이 거의 연방제나 다름 없다고 평가받는다.

정치

민주적인 정치가 발달한 국가이다. 옆나라인 대만이나 한국과는 달리, 독재 정권이 들어선적이 없고 안정적으로 다당제 민주주의가 유지되어왔다. 민주주의 지수에서 구주는 매우 높은 순위에 올라있으며 특히 동아시아 국가중에서는 대만, 일본, 한국 다음으로 높은 순위를 기록하고 있다.

구주는 입헌군주제 국가이자, 의원내각제 국가로 일본과 비슷한 정치 체제를 운영중이다. 표면상으로는 강력한 황권을 표방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 국정 권한은 수상이 이끄는 내각에게 있다. 수상은 다른 내각제 국가가 그렇듯이 원내 1당이나 연립여당으로 국회 의석수에서 과반을 차지한 정당의 당수이다. 수상에 대한 불신임 투표와, 수상의 조기 사퇴 역시 매우 활발하나, 이는 일본에 비해 빈도수가 적기에 수상의 평균 임기는 3~5년으로 상대적으로 긴 편이다.

구주 입법원
원내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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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116석

15석
야당

102석

5석

5석

2석

2석
무소속 3석
재적 250석

종전 이후, 중국 국민당의 삼민주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민족주의자들이 정치적 우세를 점했다. 처음에는 진보, 리버럴 성향이 우세했으나 점차 보수주의가 우세해졌다. 이후 구주국민당의 일당 독주 체제가 1970년대까지 이어졌으나, 1970년대 뒤늦게 닥쳐온 68혁명의 여파로 국민당의 대항마로 진보 성향의 화평민정당이 국민당과 양강 구도를 확립했다. 1990년대에는 화평민정당의 우클릭 행보에 반발한 사민주의자들이 보다 더 진보적인 정당인 구주민정당을 창당해, 화평민정당은 화평당과 민정당으로 분당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특별한 정치 구도에서의 이변 없이, 보수주의를 지지하는 국민당과 진보주의를 지지하는 화평당 그리고 그 틈사이에서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는 사회주의 성향의 민정당이 2.5당제 구도를 이어나가고 있다.

2021년 기준으로, 2020년 총선에서 승리해 재선에 성공한 노순형 수상의 화평당구주민정당과 연립내각으로 정권을 잡고 있는 상황이다.

황실


구주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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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전제군주제 국가였던 구주의 특성상, 막강한 권력을 가졌었으나 19세기 일본과의 합병으로 구주 왕실은 사실상 실권 없는 허수아비 영주로 전락했다. 독립 이후, 전제군주제로 복귀하자는 여론이 있었으나, 서양 사상의 유입으로 인해 입헌군주제가 더욱 지지를 받았다. 따라서 구주는 독립 이후 제국 선포에 상관 없이 입헌군주제로 평화롭게 국가 운영의 주체가 전환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주 황실에 대한 국민의 여론이 압도적으로 좋지는 않은데, 이는 1970년대부터 이어져온 유서깊은 사생활 문제 때문이다. 현 황제인 융계제는 별다른 구설수가 없으나, 그의 아들들은 각각 음주운전과 폭언으로 큰 논란에 휩쌓인적이 있으며, 2000년대에는 황실 인사들의 마약 남용 문제가 수면위로 떠올라 한때 황실 폐지 여론이 30%까지 올라간적도 있다.

하지만 황실이 이에 따라 적극적으로 범죄 행각에 적법한 벌을 내리고, 세금을 납부하고 기부금도 쾌척하는 등 민심 다독이기 행보를 적극적으로 보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황실은 대다수의 국민들에게서 지지를 받는다.

경제

무역이 크게 발전하였다. 그 외에는 경공업, 금융업, 관광업 등도 발전했다. 예전에는 중공업이 발전했으나, 중국의 영향으로 현재 중공업은 예전만하지 못하다.

예로부터 구주는 일본과 조선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하였고, 이 두 나라에서 이민자들이 많이 유입되었기 때문에 경제가 크게 발전하였다. 또한 네덜란드와도 교역하면서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19세기, 일제에 의해 강제병합을 당한 이후에도 경제가 크게 발전했으며 오히려 근대화를 통해 이전에 비해 경제가 더욱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20세기와 21세기에 들어서도 일본, 대만, 중국, 한국 등 다양한 경제대국 사이에 위치한 국가로서 재미를 톡톡히 보고있는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무역 강대국이다. 그중에서도 장도시에 위치한 장도항은 세계에서 가장 큰 항구중 하나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구주의 국민소득은 명목 4만 3천불로, 대만, 한국은 물론 일본보다도 높은 수치를 자랑한다. 아시아 전체로 범위를 확장해도 일부 산유국들을 제외한다면 싱가포르 다음으로 높은 수치이다. 탄탄한 국민소득과 더불어, 삶의 질 역시 매우 높다고 평가받는다. 국민중 대다수가 중산층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저출산으로 인한 실업률 증가, 미중 무역 전쟁의 타격, 코로나19로 인한 무역 감소와 관광업 직격타 등으로 인하여 정부 차원에서 많은 고민을하고 있다.

복지

구주는 GDP의 총 16.4%를 복지로 지출하고 있으며, 그중 40% 정도가 노인 연금으로 지출된다. 복지의 수준은 한국과 비교했을때 매우 양호한 수준이지만 의료보험은 한국에 못미친다는 평가다. 그럼에도 청년 취업 지원금, 무상 대학 등 서유럽, 북유럽의 복지 체제를 일정부분 받아들여, 복지가 다른 아시아 국가들ㅇ에 비해 발전했다.

경제난으로 인하여 긴축을 실시해야한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어 1980년대에는 잠깐 복지 비용이 축소되었으나 1990년대부터 다시 점차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2010년대 중후반 이후, 급변하는 국제 사정으로 인하여 구주의 경제 형편도 점점 나빠지자, 구주 정부 당국에서는 긴축은 하지 않겠지만 복지 증액 또한 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했다. 이에 대한 저소득층의 큰 반발이 있었으나, 국민적으로 조금만 참고 버티자는 여론이 다수였기에 이 정책은 지지를 받고 있다.

사회

동아시아 특유의 유교적 사상 때문에 경직되고 보수적인 분위기가 특징이다. 이 때문에 동성혼도 아직은 통과되지 않았고, 낙태도 정말 오랜 기간동안 불법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점차 개방된 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1970년대, 68혁명의 영향으로 사회 개혁운동이 있었으며 최종적으로는 반쪽짜리 혁명으로 그쳤지만 페미니즘, 반봉건사상, 자유주의 등 여러 진보적 아젠다가 경직된 구주 사회에서 논의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보수적인 중장년층과 진보적인 젊은 세대들 사이 갈등이 있는 편이다. 하지만 한국과는 달리 세대 갈등이 그렇게 심각한 사회 문제는 아니며, 남녀 갈등은 국민적으로 여성주의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어느정도 이뤄졌기 때문에 일부 극우파들이나 급진 페미니스트들을 빼면 거의 갈등이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나 구주 사회는 갈등이 일어나도 구주 황실을 중심으로 뭉쳐야한다는 의식이 전제로 깔려있기 때문에 국론이 크게 분열되지는 않는 편이다.

민족

구주 내에서 가장 많은 파이를 차지하는 민족은 당연히 구주인으로, 전 인구의 85% 이상이 구주인이다. 그 다음으로는 한국인, 일본인, 대만인, 중국인, 베트남인 등이 잇는다. 충승인을 구주인에서 분리시킬경우 약 5%정도의 구주인이 충승인 또는 충승계로 분류된다.

구주가 경제적으로 발전하던 시절 한국에서 수많은 이민자들이 이민을 왔고 지리적으로 가까운 일본에서도 이민자들이 몰렸다. 베트남인들은 보트피플 출신으로, 1970년대경 구주에 정착했다. 세계적 무역항으로서 이민자들이 몰렸던 탓에 구주는 중국, 일본, 한국에 비해서는 단일국가로서의 정체성이 약하고 보다 다문화적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동아시아권에 국한된 문제이며, 베트남인 등 동남아계나 다른 인종에 대한 인종차별은 일본, 한국에 못지 않다. 특히 최근에는 외노자 인권 문제가 큰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충승 독립 문제

충승은 상술했다시피 구주와는 다른 문화권을 지니고 있었으며, 현재까지 구주 본토와는 다른 독특한 문화가 발전하였다. 이 때문에 구주 지역의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꾸준히 있어왔다. 특히나 1960년대 이후 구주 독립 운동은 좌파 학생운동 및 공화주의 운동과 결합하여 더욱 과격해졌다. 1967년, 충승 독립위원회가 창단되고, 2년 뒤 충승공화당이 창당되었다. 충승공화당은 과격한 공화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를 주장하며 충승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구주 정부의 통치에 불만이 없었던 대다수의 시민들은 독립에 관심이 없었기에, 공화당의 활동은 수그러들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1980년대, 충승공화당은 노선을 온건화하여 사회민주주의, 충승 지역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으로 변모하였고, 이후 충승의 의견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대중화되어 국회에 꾸준히 의원을 내보내고 있다.

언어

문화

외교

한구 관계

구일 관계

구중 관계

구주-대만 관계

구미 관계

기타

대중매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