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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시대는 "만약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했다면?"을 바탕으로 제작된 시즌제 대체역사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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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국회의원 선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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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4월 26일 13대 총선 |
→ | 1992년 3월 24일 14대 총선 |
→ | 1996년 4월 11일 15대 총선 | ||||||||||||||||||||||||||||||||||||||||
투표율: 71.9% (▼ 3.9%p) | ||||||||||||||||||||||||||||||||||||||||||||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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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992년 3월 24일에 실시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투표율은 지난 총선보다 3.9%p 감소한 71.9%를 기록했다. 의원 정수는 지난 총선과 동일한 299명으로 지역구는 13석 늘어난 237석, 전국구는 13명 감소한 62석으로 조정되었다. 이 당시에는 각 정당의 지역구 의석비율을 기준으로 전국구 의석을 배분하는 1인 1표제가 실시되었으나, 동시에 지역구 1당이 전국구 1/2를 독식하는 조항이 폐지되었다.
이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민주당, 통일국민당, 신정치개혁당, 변화당, 민중당, 공명민주당이 참여했는데, 같은 해에 열린 대선을 앞두고 벌어지는 '전초전'인 만큼 3당 보수연합의 정당성, 제3지대의 돌풍, 막판에 일어난 군 부재자투표 부정선거 폭로 사건의 여파 등이 큰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과정
3당 합당을 통해 형성된 민주자유당은 217석이라는 역대 최다 의석을 확보하면서, 탄탄한 지역 기반과 야권 분열, 투표율 저조 효과를 보인 끝에 첫 지방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다. 이 덕분에 민자당은 1년 뒤 열리는 총선에서도 무난히 당선될 것으로 보였지만, 막상 선거철이 다가오자 공천 갈등, 계파 갈등이 터져버렸다. 공천에 탈락한 후보자들은 무소속 출마를 선언하거나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에 대거 합류했으며, 180석 확보를 목표로 했던 여당의 기대는 조금씩 우려로 바뀌고 있었다.
한편 광역의원 선거에서 패배한 신민주연합당과 꼬마민주당은 야권 분열의 여파로 패배했다는 것임을 진단하면서 민주당이란 이름으로 통합야당을 구성했고, 개헌저지선 확보를 노리기 시작했다. 이 외에도 현대그룹 사장이던 정주영을 중심으로 창당한 통일국민당이 노태우 정권 타도, 반값 아파트, 전향적인 통일 정책으로 제3지대 진영의 돌풍을 예고했고, 박찬종의 신정치개혁당, 혁신정당인 민중당, 김정식의 변화당도 지역구, 전국구 후보를 내면서 일제히 선거판에 뛰어든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안전기획부는 무소속 후보들에게 압력을 가해 출마를 포기시키려 했다는 의혹이 불거진 이후, 야당 후보를 대상으로 흑색 선전 유인물을 날리며 논란의 중심에 섰고, 선거 이틀 전에는 학생군사교육단 출신 이지문 중위의 군 부재자투표 부정 폭로 사건이 일어나 민자당과 정부에 직격탄을 맞는다. 그럼에도 민자당 내부에서는 선거 당일 자체 조사를 통한 판세 예측에 따라 과반을 확보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는데, 막상 개표가 진행될수록 여당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개표 결과
지역구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지역구 의석 현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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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민주자유당 | 민주당 | 통일국민당 | 신정치개혁당 | 무소속 | 합계 | |
서울 | 16 | 25 | 2 | 1 | 0 | 44 | |
부산 | 15 | 0 | 0 | 0 | 1 | 16 | |
대구 | 8 | 0 | 2 | 0 | 1 | 11 | |
인천 | 5 | 1 | 0 | 0 | 1 | 7 | |
광주 | 0 | 6 | 0 | 0 | 0 | 6 | |
대전 | 1 | 2 | 0 | 0 | 2 | 5 | |
경기 | 18 | 8 | 5 | 0 | 0 | 31 | |
강원 | 8 | 0 | 4 | 0 | 2 | 14 | |
충북 | 6 | 1 | 2 | 0 | 0 | 9 | |
충남 | 7 | 1 | 4 | 0 | 2 | 14 | |
전북 | 2 | 12 | 0 | 0 | 0 | 14 | |
전남 | 0 | 19 | 0 | 0 | 0 | 19 | |
경북 | 14 | 0 | 2 | 0 | 5 | 21 | |
경남 | 16 | 0 | 3 | 0 | 4 | 23 | |
제주 | 0 | 0 | 0 | 0 | 3 | 3 | |
전국 | 116 | 75 | 24 | 1 | 21 | 237 |
전국구
주요 정당별 전국구 득표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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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 득표수 | 의석 |
득표율 | ||
33석 | ||
22석 | ||
7석 | ||
0석 | ||
기타 정당별 전국구 득표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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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인
평가 및 분석
제14대 국회 구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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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계 98석 | 제3지대 32석 | 보수정당 169석 | |
민주당 | 통일국민당 | 신정치개혁당 | 민주자유당 |
98 | 31 | 1 | 169 |
※ 무소속 당선자의 원대복귀가 모두 이루어졌다고 가정했을 때의 의회 구도 |
이번 선거에서 217석이란 초과반 의석으로 승승장구 할 것 같았던 민주자유당은 선거 직전의 194석에서 무려 45석을 잃는 패배를 기록해, 13대의 민주정의당에 이어 과반에 미달하는 성적을 기록했다. 여기에 대구경북, 충청권, 강원도에서의 공천 탈락자들이 대거 통일국민당이나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는 사례가 나타났고, 낙선자 일부가 탈환에 성공한 것, 선거 막판에 불거진 군 부재자투표 부정 폭로 사건의 후폭풍으로 고소득층과 중산층 표심이 이탈한 것도 총선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
민주당은 호남 의석 2석을 여당에게 내주면서도, 서울에서 25석, 경기도에서 8석, 충청권에서 4석을 확보해 개헌저지선에 거의도달하는 데 성공했으며, 통일국민당은 탈락 후보자들의 당선과 더불어 충청권에서의 약진을 통해 총 31석을 확보, 제3지대 정당 최초의 대선전을 일으켰다. 다만 민주당은 97석으로 완전히 개헌저지선에 도달하지는 못했고, 원내교섭단체를 목표로 한 통일국민당이 이를 실천했다고 할 수 있다.
신정치개혁당, 민중당, 변화당은 청년층의 인기를 얻으면서 상당한 득표력을 보였지만, 신정당은 박찬종 본인을 제외한 모든 후보가 낙선했고 민중당과 변화당은 한 석도 얻지 못하였다. 물론 변화당이 전국구에서 10만 표 이상을 얻긴 했지만, 30만 표를 얻은 민중당과 신정당에 크게 밀려버렸다. 결국 민중당과 변화당, 공명민주당은 선거 이후 해산되었으며, 변화당은 두 번째로 종당 해산을 받은 사례가 되었다.
이 선거를 통해 노태우 정부는 큰 타격을 입고 레임덕 현상이 가속화되었으며, 선거를 지휘한 김영삼은 책임론에 시달린 반면 김대중은 총선 승리를 통한 명예 회복과 차기 대권주자라는 자리를 확보했다. 또 정주영과 박찬종도 총선 이후 제3지대 대권주자로 떠오르면서 훗날 대선 출마로 이어질 수 있었고, 민중당이 해산돤 이후 한국의 진보정당은 1997년 재건 운동의 일원으로 건설국민승리21이 창당할 때까지 무려 5년을 기다려야 했다.[1]
각주
- ↑ 이 때 이재오, 김문수, 차명진, 박형준, 이우재 등 민중당의 주요 인사들이 민주자유당에 입당했고, 노회찬, 조승수 등은 진보정당 창당에 꾸준히 매진한 끝에 1997년 그 결실이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