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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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스페로스벨트  ·  바네버베센  ·  투디아  ·  낸팬  ·  신디아  ·  헤르니소스  ·  바필리아  ·  펜데아시아  ·  디흐트에이븐
국가
키르수스 제국 게파르토 제국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베른하이어 베른하이어 공국  ·  에르미니아 에르미니아 합중국  ·  마그니우스 마그니우스 제국  ·  프리슬란드 프리슬란드 자유국  ·  그란치프 그란치프 국민국  ·  코르보날 코르보날 연합국  ·  크래스터프 크레스터프 왕국
사련 구성국과
혁명수도
헤스페로스벨트  ·  바네버베센
투디아  ·  낸팬  ·  신디아
헤르니소스  ·  바필리아  ·  펜데아시아  ·  디흐트에이븐
연표


-546
1423
고전고대
고대 후기
중세 초기
중세 성기
중세 말기


1423
1664
근대
현대


보편전기
연표
-546
1483
1664
고전 고대
고대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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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성기
중세 말기
근대
현대














보편전기
무기
권총  ·  기관단총 소총  ·  기관총 차량

게파르토 ㅔㄱㅣㅋㅔㅈㅔㅅ·ㅍㅜㅅㅡㅋㅏ 49M

게파르토 Moosmeier 32M pistol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26식 수포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엘빙거 권총



게파르토 ㅍㅜㅅㅡㅋㅏ1651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41형 표준 영도진 보병소총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이리야-야조프 45식 보병용 소총

그란치프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르브 소총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무흐타레프 장비

키르수스 Maschinen Gewehr 57

게파르토 ㅗㅌㅗㅁㅏㅌㅏ·ㅍㅜㅅㅠㅋㅏ

키르수스 Panzerabwehrkanonen 1656

게파르토 49M 6.3qb bombarde

게파르토 51M 6.3qb Bergbombarde

게파르토 52M 6.3qb bombarde

게파르토 50/54M 33qb Bergbombarde

키르수스 1656년식 야전차량 경형

키르수스 1654년식 전선장갑차량

게파르토 53M 3톤 중형트럭 어비거일



잠수함 함선 전투기 폭격기
키르수스 퇴브리크크루비엔 Ddkf.V

그란치프게파르토 가르당 17

게파르토 53M 반도르

마그니우스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피어스마린 F.3 키드

마그니우스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피어스마린 F.5 돌핀

키르수스 그니베겐 GFz.III

마그니우스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하디 베넷 타입P

아인종
카노쿠겔
Kanokugel
드베르그
Dweorg
리겔
Ligel
테살리데스
Teßalides
죄뢰이
Jöröi
라퓰러이
Lafülöi
오르바나 학회  ·  케네우스 의사회  ·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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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수스 1656년식 야전차량 경형

키르수스 1654년식 전선장갑차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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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함 함선
전투기 폭격기
키르수스 퇴브리크크루비엔 Ddkf.V

그란치프게파르토 가르당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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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파란(알레니아어: Great Turmoil 그레이트 터모일 , 라그렌센트어: Grote Onrust 흐로트 온루스트)는 1629년부터 1639년까지 이어진 프리슬란드 자유국의 경제 위기이다. 이 시기 프리슬란드는 대량 실업과 빈곤을 겪었고, 산업과 농업 생산이 크게 감소하였으며 대량의 은행 및 사업체 파산을 겪었다. 이 위기는 1629년, 프리슬란드의 나쁜 작황을 시작으로 프리슬란드의 부동산 시장이 붕괴하고, 10월 19일 말루스 주식 시장이 대폭락하며 시작되었다. 대파란은 프리슬란드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고, 현재 프리슬란드에 만연한 포퓰리즘과, 안드레아스 해방 전쟁연방 전쟁 등 노골적 확장주의적 대외 정책의 시발점이 되었다.

목차
1 배경
1-1 백금시대

1559년 자유국 내전이 남부의 승리로 종결되고, 1560년 자유 헌법으로 제2자유국, 혹은 자유 헌정 체제가 열린 이후, 프리슬란드는 약 70년간의 경제적 번영을 맞이하였다. 백금 시대로 불린 이 70년 동안, 프리슬란드는 빠르게 근대화했고 사회 간접 자본, 즉 철도와 도로 및 항만 같은 인프라 시설에 대한 투자 및 제조업과 농업의 성장으로 꾸준한 경제 성장을 이루어냈다. 국내에서는 중산층이 성장했고, 대외적으로는 마그니우스의 자유 무역 정책등에 힘입어 잉여 농산물을 해외에 수출하며, 프리슬란드의 경제는 막대한 이익을 거두고 있었다. 이후 16세기 말에 전기 및 석유 화학 분야를 중심으로 일어난 석유혁명신대륙에 전파되며, 프리슬란드의 밝은 미래에 대한 기대감은 사회 전반에 팽배해 있었다.

이러한 기대 심리에 힘입어 프리슬란드의 시장은 70년간 꾸준한 가격의 상승을 겪었다. 말루스 주식 시장은 연일 상한가를 기록했으며, 농업의 기계화와 늘어나는 농업 생산량, 꾸준한 수출과 이익에 힘입어 농지를 비롯한 부동산 시장도 지속적인 확장을 겪었다. 이러한 경제적 번영 속에, 프리슬란드마그니우스베른하이어, 키르수스 등 선진 공업국가들을 꺾고 세계 최대의 경제 강국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낙관론은 하나의 사실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또한 경제적 번영을 보고 몰려든, 외텔슈비어의 자본가들을 위시한 해외 투자도 프리슬란드의 경제 발전을 더더욱 촉진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해외 이민과 농촌에서의 이주로 프리슬란드의 도시들은 크게 성장하였으며, 말루스 등의 경제 중심지는 구대륙의 유서깊은 도시들과 어깨를 견줄 정도로 성장했다.

중간 중간 성장세가 주춤한 적은 몇 번 있었으나, 이런 추세는 꾸준하였다.

1-2 1620년대 중반

그러나 이러한 경제 성장이 영구적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1620년대 중반에 이르러, 사회 간접 자본에 투자된 자금에 대비해 얻어지는 수익률이 떨어지기 시작하며, 기존 경제 성장 모델에 한계가 오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제조업의 성장세도 점차 둔화되기 시작하고 있었으며, 프리슬란드가 국제 시장을 석권하리라 기대되었던 조선업 및 섬유 산업 등에서는 마그니우스베른하이어 등 이미 시장을 선점한 국가들의 경쟁이 거셌고, 역시 산업에 투자된 비용 대비 이익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석유혁명의 산업 분야에서도 경쟁은 치열했고, 아직 투자 대비 수익률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즉, 1620년대 중반에, 프리슬란드 경제는 전반적으로 투자 비용 대비 수익이 하락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프리슬란드 투자가들의 낙관론은 굳건했다. 자동차, 전기, 화학 등 석유혁명이 약속한 세계는 장밋빛이었고, 이러한 기술 발전이 프리슬란드의 항구적인 경제 성장을 보장할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해외 투자가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해외 투자는 다소 주춤했으나, 프리슬란드 투자가들의 열정적인 투기는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성장세가 꺾이기 시작한 현실, 또는 실물 경제에 비해 낙관론이 강했던 프리슬란드의 주식 및 부동산 시장은 강세를 유지했고, 그 결과 시장 가격이 과평가, 즉 버블이 끼면서 프리슬란드의 주식 및 부동산 시장과 프리슬란드의 실물 경제는, 1620년대 중후반을 기점으로 분리되면서 괴리되기 시작했다.

2 진행
2-1 1629년 초중반

경제적 재앙의 신호는 1629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해, 프리슬란드의 실물 경제는 본격적으로 식기 시작했다. 연초부터 철강 생산량은 줄어들었고, 건설도 주춤했으며, 소매점과 백화점들의 매출이 눈에 띄게 하락하기 시작했다. 투기 심리에 힘입어 부동산 거래가는 증가하고 있었지만, 정작 실 거래량은 감소세를 보이고 있었다. 장기간의 저금리로 인해 빚을 내기가 쉬워진 프리슬란드의 소비자들은 상당한 양의 빚을 떠안고 있었다. 기업 파산은 조금씩 증가하고 있었고, 실업률도 느리게 증가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2월, 금정양을 건너던 금정양 증기선 회사의 상선단이 통째로 실종되는 사건이 터지며 프리슬란드를 뒤흔들었다. 금정양 증기선 회사덴다트 상인조합을 통해 보험을 들어놓은 상태였고, 막대한 보험 지급액으로 인해 양측간 법정 공방이 발생했다.

이러한 불안한 경제적, 사회적 상황 속에서도, 실물경제와 괴리되어 있었던 프리슬란드의 주식 시장과 부동산 시장은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었다. 투기 심리가 꽃피었으며, 투자가들은 일확천금의 희망을 안고 말루스의 금융 중심가인 리버프런트로 몰려들었다. 말루스 주식 시장의 승승장구에, 경제학자 에드바드 웰치는 자신있게 선언했다.

주식 가격은 영구적으로 높은 가격대에 도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에드바드 웰치, 1629년 8월 20일

1629년 8월 26일, 프리슬란드의 우량 대기업 12개를 묶어 그 주식들의 가격을 나타내는 드렌트 그로딘 산업평균지수(Drent Grodine Industrial Average)상한가를 쳤다. 이때 드렌트 지수는 158.64이었다.

2-2 1629년 9월

1629년 9월부터 시장에 버블이 끼었다는 전문가들의 조심스러운 경고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심각한 경고를 한 이는 말루스 시립 대학의 경제학 교수 로버트 피어리였다.

붕괴는 이르나 늦으나, 언젠가는 올 겁니다. 그 규모가 거대할지도 몰라요.

로버트 피어리, 1629년 9월 4일

이러한 경고에, 프리슬란드의 시장은 조금씩 요동치기 시작했다. 8월 26일에 상한가를 쳤던 드렌트 지수는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했고, 시장에 서서히 불안감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농업 쪽에서 들려온 소식도 좋지 않았다. 1629년프리슬란드는 50년 만의 최악의 작황을 앞두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프리슬란드 수출액의 상당한 부분은 농산물 수출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좋지 않은 작황은 그대로 수출액의 적지 않은 감소로 이어졌다. 이는 높은 부동산 거래가와 농촌의 기계화에 투입된 자금으로 인하여 많은 부채를 지고 있던 농부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해외에서의 비보도 시장 불안정성을 강화했다. 1629년, 프리슬란드가 식량 및 농산물 등의 원재료를 수출하는 가장 큰 무역 대상국이었던 마그니우스 제국이 총선을 앞두고 대프리슬란드 관세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 것이다. 안 그래도 수출량이 감소할 예정에, 감소한 수출 이익마저 주 수출 시장의 관세 부과로 더욱 줄어들 위기에 처하자, 농산물 선물 시장이 불안정해지며, 말루스 주식 시장의 가격 불안정성은 점점 심해져갔다.

9월 말, 리버프런트의 은행가들이 주식시장에 투자 자금을 풀면서 시장이 다소간 안정되었으나, 주식 시장은 여전히 요동치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로버트 피어리의 경고를 뒤따른 시장의 요동침을, 언론들은 "피어리 쇼크"라고 불렀다. 많은 투자자들은 피어리 쇼크를 무언가 크게 잘못되어간다는 징조보다는 시장의 가격 조정 쯤으로 생각하고, 불안감 속에서도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런 와중, 외국인 투자자들은 프리슬란드 주식 시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2-3 1629년 10월

이러한 경제적 압력에, 연일 상한가를 기록하던 프리슬란드 부동산 시장의 가격은 9월 내내 그 상승세가 둔화되다, 10월의 첫날부터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후 본격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부동산 가격이 계속 상승할 것을 예상하고, 은행들에서 많은 대출을 얻어 부동산 시장에서 투기 중이었던 많은 투자자들이 파산하기 시작했다. 토지를 담보 삼아 대출을 받고 자신들의 농장을 기계화 했던 많은 농부들 또한 파산했다. 10월 초, 프리슬란드 전역, 특히 북부에서 토지 담보 대출 및 주택 담보 대출, 또는 모기지에 채무불이행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채무자들이 빚을 갚지 못하고 파산함과 동시에, 그들이 담보로 걸고 있었던 부동산 가격까지 폭락하자, 관련 사업에 발을 깊게 담그고 있었던 몇몇 은행들이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이중 가장 심각했던 사례는, 부동산 및 농업과 토지 관련 대출 상품을 주력으로 영업했던 당시 프리슬란드 금융계 5위의 거대 은행, 노던 토지 & 농업 은행(Northern Land & Agriculture Bank)였다. 노던 은행이라고 불린 이 은행의 채무자들이 시시각각 채무불이행을 선언하고, 노던 은행이 지급했던 대출금이 갚아지지 못한 채 증발하면서, 노던 은행은 천문학적인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10월 12일, 분기 보고서에서 노던 은행은 공식적으로 막대한 적자를 발표했다. 이 내용이 신문에 대서특필되었고, 불안해진 예금자들은 10월 12일 오후부터 프리슬란드 전역의 노던 은행 지점들로 몰려들어 예금을 인출하기 시작했다. 뱅크런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태가 더 커지면 프리슬란드 금융계 전체로 뱅크런이 전염될 수 있었으므로, 13일 오후 프리슬란드의 가장 큰 은행이었던 C.T.잭슨 & 피트의 대표 이사 필립스 잭슨은 신문 인터뷰에서,

노던 은행의 재무구조는 견실하고, 자산도 매우 우량합니다. 기초가 튼튼하니 문제는 전혀 없습니다!

필립스 잭슨, 1629년 10월 13일

라며, 노던 은행이 무너질 일은 없으며, 행여 그런 사태가 생기더라도 C.T.잭슨 & 피트는 노던 은행을 보증할 것이라며 예금자들을 안심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이러한 필립스의 호언장담에도, 뱅크런은 멈추지 않았고, 노던 은행은 10월 16일에 이르러 파산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이에 그 날 저녁, 리버프런트의 대형 은행의 수장들이 필립스 잭슨의 저택에 모였고, 노던 은행의 구제책을 위해 주말 내내 협상하기 시작했다. 협상에 들어가기 전, 은행가들은, "이것은 노던 은행을 구제할 지 말 지를 논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구제할 지를 논하는 것"이라며 다시 한번 시장을 안심시켰다.

한편, 잠재적인 금융적 시한 폭탄이 이런 긴박한 상황 밑에서 째깍거리고 있었다. 10월 12일, 2월부터 질질 끌어온 금정양 증기선 회사덴다트 상인조합 사이의 법정 공방이 마침내 끝이 났다. 프리슬란드 법원금정양 증기선 회사의 손을 들어주었다. 따라서 상인조합은 그야말로 막대한 액수의 보험금을 지급해야했고, 이 보험금을 지불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0년 만기의 연 8% 이율이라는, 매우 매력적인 조건의 채권을 상인조합이 발행할 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10월 17일부터 18일까지, 주말 이틀 간 프리슬란드 재계는 노던 은행의 구제 금융과 상인조합의 채권 발행에 대한 소문으로 들끓고 있었다.

2-4 운명의 일주일

1629년 10월 19일, 월요일. 오전 8시 45분에 모든 것이 무너졌다.
주말 내내 노던 은행의 구제 방식을 두고, 은행의 장부를 샅샅히 뜯어보던 리버프런트의 은행가들은 필립스 잭슨이 호언장담했던 바와 매우 다르게, 노던 은행의 재무 구조가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파산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협상장에서는 격론이 오갔다. 그 누구도 노던 은행을 함부로 인수할 수 없었다. 단순히 투자를 할 수도 없었다. 누가 망할 것이 뻔한 은행에 투자를 한단 말인가? 말루스 주식 시장 개장 15분 전인 오전 8시 45분, 마침내 은행가들의 회동이 결렬되었다. 소문은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오전 9시, 주식 시장이 개장했고 지옥문이 열렸다.

무엇이 더 빨리 떨어질까? 사람? 혹은 그 사람의 주식 가격?

어느 프리슬란드인 투자가, 1629년 10월 19일

말루스 주식 거래소는 노던 은행의 주식을 매도하려는 투자자들로 아비규환이 되었다. 노던 은행의 주식 가격이 떨어지며 다른 블루칩, 또는 우량주 주식들의 가격까지 함께 떨어지기 시작했다. 주식 시장에 공포가 확산되며 모든 주식에 매도세가 쏟아졌다. 가격이 폭락하기 시작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전 11시 드렌트 지수는 상한치에서 60.5%가 빠진 62.66 포인트를 기록했다. 말루스에서 주식 거래량이 쏟아져 나오면서 이를 다른 거래소들에 전하는 티커 테이프(Ticker Tape), 혹은 주식 시세 중계기에는 과부하가 걸렸다. 프리슬란드 반대편의 시우다드 거래소에서는 티커 테이프의 과부하와 오보 등으로 오전 동안 잠시 상승장을 기록하는 가 했으나, 뒤늦게 말루스의 상황이 전해지며 대폭락했다. 거래가 마감된 오후 4시, 말루스 거래소에서만 주식 1,400만 주가 거래되었고 드렌트 지수는 25%가 빠진 119.07을 기록했다. 티커 테이프는 장이 마감한 뒤 3시간까지 작동하기를 멈추지 않았고, 말루스에서만 투자자 16명이 자살했다. 언론은 이 끔찍한 월요일을 애도의 날(Mournday)라고 불렀다.

1629년 10월 20일 화요일. 시장 개장과 함께 다시 가격은 폭락하기 시작하는가 했으나, 이내 C.T.잭슨 & 피트 등 프리슬란드의 대형 은행과 금융사들이 연합해 주식 시장에 자금을 공급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 날 리버프런트는 말루스 주식 시장에서 시가 이상의 가격으로 대량의 우량주를 매입하며 엄청난 자금을 시장에 공급했고, 가격은 다시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자유 방임 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있었던 당시의 프리슬란드 정부가 이례적으로 노던 은행에 자금을 공급할 지도 모른다는 희망적인 소문이 돌았고, 이날 오후 4시 장이 마감했을 때 드렌트 지수는 150.22까지 회복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희망에 불과했다. 1629년 10월 21일 수요일, 프리슬란드 정부 재무부는 노던 은행을 구제할 계획은 없다고 공식 발표하며 전날의 소문을 전면 부인했다. 시장은 다시금 폭락하기 시작했다. 오전 11시, 노던 은행은 파산을 선포했다. 리버프런트의 은행가들이 여전히 자금을 공급하고 있었지만, 한참 역부족이었다. 이 날 하루 말루스는 주식 2,200만 주를 거래하며 월요일의 기록을 박살냈다. 여기에 더해, 덴다트 상인조합이 소문으로만 이야기가 돌던 문제의 채권을 정말로 발행하기 시작하면서, 극도로 불안하고 암울한 주식 시장 및 리버프런트에서 돈을 빼내려는 사람들의 자금이 해당 채권으로 몰렸다. 리버프런트의 다른 대형 은행들도 뱅크런 위기에 몰리기 시작하며, 위기는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중소형 은행들이 추풍낙엽처럼 파산하기 시작했다. 티커 테이프는 장 마감 후 4시간 동안 멈추지 못했다. 심연의 날이었다.

2-5 1629년 말

1629년 10월 말 내내, 프리슬란드 경제는 파산의 해일에 끊임없이 강타당했다. 은행들과 보험사들이 우후죽순으로 무너져 내렸고 주식가격은 바닥을 모르고 추락했다. 그리고 이 위기가 경제의 다른 부분으로 넘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당시 프리슬란드의 많은 기업들은 은행을 끼고 수표와 어음을 통해 대금을 결제했는데, 이 수표와 어음을 써 준 은행들이 일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자, 그대로 그들이 들고 있었던 수표들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많은 제조업 등의 기업들이 다른 은행들로 몰려가 수표를 인수해 줄 것을 간절히 요청했으나, 전국적으로 은행 파산의 물결이 휩쓰는 가운데 그런 용감한 일을 해줄 은행은 많지 않았다.

10월 말부터 이런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수표와 어음들의 만기일이 다가오며, 마침내 수표를 현금으로 바꿀 희망이 없어진, 끝까지 버티고 있었던 기업들이 도산하기 시작했다. 은행에 이어, 제조업과 농업, 교통업 등 금융업 이외의 사업을 하던 기업들의 파산과 도산이 다시 한번 프리슬란드 전국을 휩쓸기 시작했다. 실업율이 수직 상승하기 시작하면서, 프리슬란드본격적인 경제 공황에 빠져들었다.

3 결과

70년간의 백금 시대라는 번영기를 그야말로 참혹하고 급격하게 끝장낸 1629년의 주식 시장 및 경제 붕괴 뒤, 프리슬란드는 경제 공황의 늪에 빠졌다. 실업률은 끊임없이 오르기만 했고, 거리를 실업자와 노숙자들이 배회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프리슬란드 정부는 끝끝내 경제에 개입을 하지 않았다. 중앙 은행이 없었던 당시의 프리슬란드에서는 정부가 경제에 개입할 수단이 비교적 제한적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실업자 구제 한 번 하지 않는 정부에 대한 거부감과 배신감이 프리슬란드 시민들을 사로잡기 시작했고, 결국 이대로 가면 내전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경고와 함께 시민들의 어마 어마한 압박을 받고 1630년, 대통령이 사임했다. 1630년 9월 3일, 휴버트 론이 부통령으로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휴버트 론은 대통령직을 승계받은 이후로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이미 붕괴한 경제를 재건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대파란이 정점에 달한 1631년, 실업률은 30%를 기록했고, 1631년 10월 29일 드렌트 그로딘 지수는 사상 최저치인 23.82를 기록했다. 프리슬란드의 경제가 다시금 제 궤도에 오르는데에는 1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으며, 말루스 주식 시장이 1629년 8월의 상한가를 넘어서는 데에는 2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4 영향

대파란은 프리슬란드 사회에 전반적으로 폭넓은, 그리고 지울 수 없는 영향을 깊게 남겼다. 70년 간의 번영기의 끝은 처참했으며, 한 세대의 프리슬란드인들은 가난과 경제적 고통 속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대파란 세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베른하이어덴다트 상인조합이 주식 시장 붕괴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한 일들이 조명되며 베른하이어를 상대로 한 음모론이 팽배해지게 되었고, 여기에 더 나아가 프리슬란드인들의 기저에 깔려있던 외세에 대한 경계가 편집증적인 형태로 터져나오게 하며, 프리슬란드가 적대적이고 노골적으로 팽창주의적인 외교 노선을 걷는 주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또한 프리슬란드자유방임 자본주의를 완전히 버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중앙은행을 만들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휴버트 론을 위시한 포퓰리스트 정치가들이 프리슬란드 정계의 전면에 대두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대파란으로 인하여 자유국 내전의 종전으로 도입된 자유 헌법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개혁 헌법으로 통칭되는 현행 자유국 헌법이 도입되었다. 경제 회복의 미명 아래, 유권자들을 사로잡기 위해 각종 복지 정책이 도입되었으며 프리슬란드 정계의 전통적인 양당 구조가 크게 뒤흔들렸다.

경제적으로도 큰 영향을 남겼다. 대파란은 프리슬란드의 기업들이 규모를 키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는데, 이는 대파란을 살아 넘긴 은행과 제조업 업체 등이 "경제적 폭풍을 살아남기 위해서는 큰 기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확장적 재정정책을 위해 많은 액수의 세금이 필요했던 휴버트 론 행정부가 이러한 대기업들에 대해 반독점법 행사를 유예하겠다고 사실상 거래를 한 것도 큰 요인이 되었다. 또한 조선 및 섬유 등 전통적인 산업 분야가 프리슬란드에서 기세가 기울게 되었으며, 자동차, 전기 등 신산업 분야가 대두되는 계기가 되었다. 자영농의 비교적 소규모 농장 위주였던 프리슬란드의 농촌이, 대규모 농업 기업의 주도 하에 놓이게 된 것도 대파란이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대파란으로 인해 프리슬란드는, 거의 새로운 국가로 재탄생한 셈이 되었다.

5 같이 보기
경제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