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분당사태 (민국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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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국 38(民國三十八)은 가장 대표적인 대체역사 소재 중 하나인 중화민국국공내전 승리를 가정한 세계관 입니다.
민국 38년(1949년) 중화민국의 국공내전 승리 이후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변화한 여러 정치, 사회, 문화,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개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계열 정당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분당사태 (大韓獨立促成國民會 分黨事態)는 1949년 독촉이 의원내각제와 대통령제에 대한 견해 차이로 친 이승만 세력인 대한국민당과 반이승만 세력-한민당 연합인 민주국민당으로 분당된 사건으로 1949년 한국 최대의 우익정당인 독촉의 분당과 해산을 의미한다.

배경

제헌국회 총선이후 헌법제정 단계에서 독촉 주류인 이승만은 정부 체제를 대통령제로 하기를 원했으며 친 이승만 성향의 우익 단체 또한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당시독촉 또한 통일정부수립위원회의 가맹정당 이였고 당시 가장 많은 득표율을 올렸던 좌익정당 조선인민당 당수인 여운형이 행정수반인 국무총리에 당선되었고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할 당시 좌우합작 원칙에 따라 이승만을 선출 할 가능성이 가장 높아지자 이승만과 독촉, 그리고 기타 우익단체는 이승만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대통령제나 최소한 이원집정부제와 같은 형태로의 개헌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대통령에 이승만이 당선되자 이승만은 이런 작업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러나 독촉내에서도 반이승만 세력은 이를 고깝게 보고 있었고 한민당 같은 우익정당 내에서도 대통령제 국가가 된다면 우리 모두 이승만의 거수기 역할만 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했다.

전개

1948년 9월 11일 대통령 당선 이후 이승만은 "국가 전반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서는 국가원수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라는 발언을 하였으며 이것이 분당사태의 시작이였다. 인민당은 즉각 반발하였고 한독당 중도파와 여러 좌익 세력들도 단체로 반대 성명을 내면서 해프닝으로 끝나나 했으나 독촉내 이승만 지지파가 이를 공론화 하기 시작하므로써 사태는 본격적으로 커지기 시작한다. 제헌국회와 독촉내에서도 갑론을박으로 무수히 많은 토론이 이어졌는데 우리는 이중 독촉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많은 이들이 독촉을 이승만이 주도한 우익정당으로 알고있는 경우가 있으나 당시 독촉은 보수주의 성향의 포괄정당이였고 여러 성향을 가지고 있는 인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물론 당시 이승만의 주도로 당이 운영되었던 것은 맞지만 동시기의 소련 공산당과 같이 철저히 개인(스탈린) 중심으로 돌아가는 체제는 아니였고 대통령 권한 강화에 대해서 반대하는 인사도 여럿있었기 때문에 독촉 내에서도 이는 커다란 논란을 불러왔다. 독촉 내 반 이승만 계열 의원 17명은 "이승만 대통령의 권한 강화는 국가 안정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내각제 국가인 우리나라의 헌법을 기초부터 허무는 것." 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여 개헌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고 한민당 또한 좌우합작운동 당시 척을 진 터라 별다른 도움을 주질 않았다. 미국과 중국도 대통령 권한 강화에 반대하는 성명을 냈고 소련또한 반대했다. 한독당 김구 주석 (당시 내무부장)또한 "대통령 권한을 강화한다는 것은 옳지 못한 일" 이라며 반대성명을 냈다. 그러나 독촉내 친 이승만 의원들이 국회에 대통령 권한 강화를 발의하자 반 이승만 의원 17명이 대거 탈당하고 이후 4명의 의원이 탈당하므로써 독촉은 원내 제2정당에서 제3정당으로 규모가 줄어들었고 탈당한 의원 중 15명이 한민당과 합작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하고 이후 독촉이 대한국민당으로 재창당 되면서 독촉은 공식적으로 해산되게 된다.

결과

이 사건으로 인해 이승만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줄어들었으며 이후 대한국민당 또한 민의원 선거에서 의석을 크게 잃게 된다. 또한 민주국민당도 이후 한민당파와 독촉파의 내분으로 해체되어 일부는 한독당으로, 일부는 대한국민당과 합당하여 자유당이 되지만 자유당도 56년 민의원 선거에서 참패하고 결국 1961년 해산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