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 목록 ]
[ 세계관 소개 ]
[ 문서 목록 ]


민국 38(民國三十八)은 가장 대표적인 대체역사 소재 중 하나인 중화민국국공내전 승리를 가정한 세계관 입니다.
민국 38년(1949년) 중화민국의 국공내전 승리 이후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변화한 여러 정치, 사회, 문화,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베트남 공화국
Việt Nam Cộng Hòa
국기 국장
Tổ quốc - Công minh - Liêm chính
조국, 공정, 청렴
상징
국가 공민에게 고함 [1]
국화
연꽃
위치
width: calc(100% + 5px)
역사
[ 펼치기 · 접기 ]
  • 해방 1945년 9월 13일
  • 월남중국군정부 1945년 9월 21일 ~ 1949년 3월 2일
  • 제1공화국 수립 1949년 3월 2일
  • 2.11 쿠데타 1962년 2월 11일
  • 베트남 내전 1962년 3월 28일 ~ 1962년 11월 9일
  • 제2공화국 수립 1964년 5월 18일
  • 1968년 베트남 반권위주의 운동 1968년
  • 4.16 개혁운동 1985년 4월 16일 ~ 1985년 10월 26일
  • 제3공화국 수립 1985년 11월 7일
지리
[ 펼치기 · 접기 ]
수도
하노이
최대 도시
사이공
면적
331,212㎢
내수면 비율
1.3%
접경국
중국, 라오스, 캄보디아
인문환경
[ 펼치기 · 접기 ]
인구
총 인구
98,168,829명
밀도
276명/km2
민족 구성
킨족 85.7%, 소수민족 14.3%
출산율
1.79명
평균 수명
75.32세
기대 수명
75.32세
공용어
베트남어
공용 문자
쯔꾸옥응으
종교
국교
없음
분포
불교 70%, 기독교 8.3%, 까오다이교 등의 신흥종교 6.2%, 기타 0.1%
군대
베트남 공화국 국군
하위 행정구역
[ 펼치기 · 접기 ]
제1급 행정구
58개 성, 5개 중앙직할시
제2급 행정구
707개 타인포, 후옌, 티싸, 꾸언
제3급 행정구
10,614개 티쩐, 싸, 프엉
정치
[ 펼치기 · 접기 ]
정치 체제
이원집정부제, 단원제, 단일국가, 공화제, 대륙법계
민주주의 지수
167개국 중 35위 (결함있는 민주주의)
국가 원수 (총통)
응우옌푸쫑
정부
요인
부총통
당티응옥틴
총리
응우옌쑤언푹
국회의장
응우옌티낌응언
대법원장
응우옌안잡
입법부
베트남 국회
여당
베트남 공산당
신임과 보완
민주당 (베트남)
원내 야당
베트남 국민당, 공화당 (베트남),
전국소수민족동맹
경제
[ 펼치기 · 접기 ]
경제 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
GDP
(PPP)
전체 GDP
$7,699억
1인당 GDP
$7,699억
GDP
(명목)
전체 GDP
$2,603억
1인당 GDP
$8,063
무역
수입
$243.5억
수출
$236.7억
외환 보유고
$630억
신용 등급
무디스 Ba3
S&P BB
Fitch BB
화폐
공식 화폐
베트남 동
ISO 4217
VND, đ
단위
[ 펼치기 · 접기 ]
법정 연호
서력기원
시간대
UTC+7 (베트남 표준시)
도량형
SI 단위
외교
[ 펼치기 · 접기 ]
대한수교현황
1950년 수교
UN 가입
1950년
주한대사관
서울특별시 종로구 북촌로 123
ccTLD
.vn
국가 코드
704, VNM, VN
전화 코드
+84

개요

베트남 공화국(Việt Nam Cộng Hòa) 혹은 줄여서 베트남(Việt Nam)은 동남아시아에 위치해 있는 공화국이다.
1885년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고 1945년 정식으로 베트남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60년대 내전과, 정치적 혼란를 겪었다. 그러나 1968년 베트남 반권위주의 운동과 1985년 4.16개혁운동을 통해 자유화가 되었고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임 국가원수는 총통인 응우옌푸쫑이며 총리는 응우옌쑤언푹이다.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
베트남의 최대도시인 사이공

국가 상징

국명

공식적인 국호는 베트남 공화국(Việt Nam Cộng Hòa)이며 베트남은 옛 베트남 지역의 국가 남월(南越)에서 유래했으며, 공회국은 정체를 의미한다. 베트남어로 하면 비엣남에 더 가깝다. 그러나 영어 국호인 Vietnam을 음역한 일본어 표기인 베토나무(ベトナム)의 영향을 받아 베트남이 정식표기가 되었다. 70에서 80년대 까지는 한문 명칭인 월남(越南)이 대중적인 표현이였으나 90년대부터는 사장되었다.

국기


유산과 자유의 기
Lá cờ tự do và di sản
지위 공식 국기
채택일 1949년 1월 1일
근거 법령 <베트남 공화국 국기법>
비율 3:2

베트남의 국기는 유산과 자유의 기이며 비공식 적으로는 황저삼선기라고 불린다. 응우옌 왕조의 10대 군주 타인타이 황제가 고안한 것으로 붉은색 가로 세 줄은 팔괘의 첫 번째인 건(乾)괘를 형상화한 것으로 태극기 좌상단의 건괘와 같다. 황저삼선기의 노란색은 베트남인과 베트남의 토지, 붉은색은 베트남인의 피를 뜻한다. 그러나 이 깃발의 제작자가 현대 베트남에서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응우옌 왕조의 황제이기 때문에 공산당내 급진파 당원들은 국기 변경을 요구하기도 한다.

국장


유산과 자유의 문장
Lá cục trưởng tự do và di sản
지위 공식 국장
채택일 1949년 1월 1일
사용처
  • 국가기관
  • 국가문서
  • 여권
  • 훈장
  • 해외공관

베트남의 국장는 유산과 자유의 문장이며 비공식적으로는 황저삼선문라고 불린다. 황저삼선기가 들어간 황저삼선문을 두마리의 녹색용이 잡고 있는 형상이다. 한편 민간에서는 정식문장에 들어가는 황저삼선문을 더 자주 사용한다. 민간에서는 국장의 두마리의 용이 국가, 민족, 자유, 독립, 그 이외의 기타등등을 의미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공식적으로 밝혀진 의미는 없으며 가장 유력한 의견은 방패는 국가, 국민, 민족등을 의미하고 두마리의 용은 국가나 민족을 보호하는 존재라는 것이 현재 주류의견이다.

국가


공민에게 고함
Tiếng Gọi Công Dân

지위 공식 국가
채택일 1949년 1월 1일

베트남의 국가는 공민에게 고함으로 원곡은 르우흐우프억(Lưu Hữu Phước)이 작사, 작곡한 노래이다 학생행진곡이다.. 제1공화국 시기에는 '청년행진곡'이라는 명칭으로 개사되어 불렸으나 현재는 공민에게 고함으로 바꾸어 부른다.

역사

독립과 건국

베트남의 제헌 국회의원 선거

1945년 8월 27일에 아시아 전선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사실상 종결되었으며 9월 13일에 공식적으로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결시켰다. 한편 일본이 항복하자 호찌민이 이끄는 독립 세력인 베트민(비엣민)의 봉기로 일본의 괴뢰정권이였던 베트남 제국이 붕괴되었으며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와 동시에 베트남 북부에는 국민혁명군이 들어오고 있었으며 남부에는 영국이 연합국의 자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다시 베트남 전역의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하였으며 영국의 처칠 수상도 베트남의 독립이 인도의 독립운동을 고무시킬까봐 우려하여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국부군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렇지만 중국은 중국대로 베트남을 위성국화하여 전후 아시아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중국과 프랑스 중 어느 한 곳도 포기 할 수 없었기에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하노이로부터 직선거리로 약 9,200km는 떨어져있는 프랑스와 다르게 광시, 운남과 바로 붙어있던 중국에게 군사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더 유리한 판국이였다. 결국 중국은 국공내전이 끝나갈 무렵 국민당의 응우옌 뚜엉 탐을 총리로 하는 자신들의 점령지베트민비엣꾸옥의 연립정권을 출범시키고 베트남 공화국으로 독립시겼는데 프랑스는 결국 1951년에 [1] 영국 신탁통치 이후 프랑스의 괴뢰국이였던 베트남국의 군대를 동원하여 북베트남을 침공하지만 결과는 철저하게 발려버리고 (베트남 내전) 오히려 자신들의 영역이였던 남베트남 (베트남국)을 내주었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붕괴를 초래하며 끝이 났다.

제1공화국과 베트남 내전

50년대 베트남의 거리

초대 총선이 치뤄지고 총통으로는 베트남 국민당 소속의 부홍카인이 당선되었다. 그러나 신생 베트남 공화국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근본적으로 베트남 국민당과 베트남 공산당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 당시 오랜 대립으로 사이가 최악이였고 베트남 공산당이 우위에 위치해 있던 상황에서 중국 군정이 들어서자 군정당국이 어거지로 연립정권을 구성하도록 강요 한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군정당국에 의해 화합이 어거지로 이루어졌어도 중국에서 2차 국공내전이 일어나자 베트남의 국공연립정권을 뿌리부터 흔들렸다. 그러나 베트남 국민당은 실질적인 군사적 능력이 부족했고 공산당은 중국의 심기를 건들이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든 연립정권을 유지하려고 애썻고 여기에 반공주의자였던 장제스가 생각보다는 합리적으로 베트남 내부사정을 파악하여 공산당을 탄압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찌저찌 연립정권은 유지되었고 문맹률 저하 정책과 더불어서 경공업 개발 정책을 실시하면서 점차 국가가 안정화되고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또한 당시 총통인 부홍카인이 비교적 보수적인 국민당 소속이였다고 하더라도 당시 베트남 기준으로는 꽤나 진보적인 정책인 여성 참정권을 허용허고 의회민주주의를 정상적으로 안착시키기도 했으며 중앙은행을 설립하는 등의 근대화 정책을 취한 결과 연립정부에 대한 지지율이 상당히 올라가 나름대로 안정화 되기 시작했으나 이에 큰 반감을 가진 집단이 있었으니 바로 군부였다. 당시 베트남 군부는 구 베트민이나 친국민당 세력등 친정부 성향의 세력도 존재했으나 약 60 ~ 70% 가량이 구 식민지 시절 프랑스군 출신이였기 때문에 매우 반공적이였고 당연하게도 현 정부에 가장 불만이 많은 세력이였다. 결국 1959년 제3대 총통선거에서 공산당의 호치민이 총통에 당선되자 군부의 불만은 더욱더 깊어져가고 있었다. 호치민 정부는 급진적 토지개혁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고 민족주의와 농업지원 정책으로 보수층의 지지또한 얻었다. 호치민 총통의 지지율은 95%대를 웃돌았고 이를 기반으로 더욱더 급진적인 정책을 시행하려고 하자 응우옌반티에우를 중심으로 한 군부는 1962년에 사이공에서 쿠데타를 일으킨다.

베트남 내전 당시 베트남 정부군 전차

1962년 3월 28일 집무실에서 야근을 하며 밤을 지세우던 호치민 총통은 남부로 부터 날아온 급보를 받게된다. 그 내용은 사이공에서 군부의 쿠데타가 발생했으며 빠른 속도로 메콩강 삼각주 일대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였다. 호치민 총통은 즉시 긴급국무회의를 소집하여 반군에 대한 대처를 촉구하였으며 그날 저녁 라디오를 통해 긴급사태를 선언했다. 그러나 위에서도 말했듯이 군의 60% 가량이 구 프랑스 식민군 소속이였던 베트남 군부는 분열하여 빠른 대처가 어렵게 만들었다. 프랑스는 쾌제를 불렀고 미국은 침묵했으며 중국이 분노했다. 이때부터 이 전쟁은 대리전의 성격의 띄게 된다. 초반에는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반군이 압도적인 물량과 기술력으로 우위를 점했으나 뒤이어서 중국이 더 압도적인 물량 공세로 전황이 뒤집히기 시작하여 구 베트민의 종특인 게릴라 전술로 반군의 혼을 빼놓기에 이른다. 프랑스는 슬슬 전황이 불리해짐을 느끼자 중국과 몰래 교섭을 진행, 공동 핵개발을 추진하고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반군에 대한 지원을 완전히 중단했고 결국 1962년 11월 9일에 사이공이 완전히 함락되고 응우옌반티에우가 총살되면서 내전은 종결되게 된다. 내전은 종결되었으나 베트남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였던 점은 이러한 피해가 베트남 남부, 그중에서도 메콩강 삼각주 일대에만 국한되었다는 점이다. 그 덕분에 비교적 빠른 시일내에 경제를 회복 할 수 있었다. 한편 전쟁이 끝난 후 베트남 정부는 헌법개정 절차에 들어갔다. 원래 이원집정부제였던 정치체제를 대통령제로 개헌 하는것이 주된 목표였다. 헌법 개정의 이유는 지난날 쿠데타의 대응 부실의 원인이 권력 분산으로 인한 군통수권의 혼란에 있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1964년에 제1공화국은 소멸했고 제2공화국의 막을 올리게 된다.

제2공화국과 냉전

1968년 베트남 반권위주의 운동

64년 개헌이후의 첫 대통령은 63년 총통선거에서 당선된 쩐반흐엉이였다. 그는 1차 임기때에는 농업에 대한 지원과 초기 단계 중공업에 대한 투자와 발전을 토대로 안정적으로 국가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제2차 임기때에는 경제성장률이 둔화되면서 반정부적 여론이 높아지자 쩐반흐엉 총통은 점차 독선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헌법을 개정하여 편법을 써서 연임을 시도하자 대규모 시위가 사이공을 중심으로 일어났고 결국 쩐반흐엉 총통은 반쯤 권력을 잃은 채로 임기를 마무리 하였다. 이후 총통이 된것은 공산당 출신의 똔득탕이였다. 그는 국가 통제적인 경제정책과 친소 - 친중 정책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후 총통에 취임한 국민당 출신의 판칵스우 총통도 해빙의 기류에 발맞춰 자유주의적 정치를 펼쳐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한편 판칵스우 총통의 뒤를 이어 총통이 된 쯔엉딘주 총통 시기에 베트남의 경제는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공업화와 항구의 발전이 동시에 진행되었으며 대서방 수출의 증가로 경기는 상승세에 오르기 시작했다. 또한 베트남의 민주주의 정착도 이시기에 이루어졌다. 이 당시 쯔엉딘주 총통의 사촌이 대규모 비리를 저질렀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분노한 시민들은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고 (4.16 개혁운동) 이 비리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거물급 정치계 인사들이 연달아 연루되자 자연스럽게 쯔엉딘주 정권의 존립도 위태롭게 되었다. 그러나 쯔엉딘주 총통은 단호하게 비리의 뿌리를 조사했고 자신의 측근들을 실각시키고 실형을 선고하는 초 강수를 두며 아예 전국적으로 반 부패 운동을 벌여 지지율 40% 대를 유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사 과정에서 이들이 제2차 헌법 반포 직후 지나치게 비대해진 총통의 권력을 이용했다는 논란이 일자 쯔엉딘주 총통은 스스로 개헌을 주도, 총통의 권한 일부를 총리에게 위임함으로써 제3공화국이 선포되게 된다.

제3공화국과 현재

개헌 이후 베트남은 이원집정부제적 대통령제 국가가 되었으며 공업화가 상당히 진행되었고 2000년대 부터는 3차 산업 육성에 나서 3차 산업의 비율이 50%를 넘었다.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행정구역

베트남 공화국
제1급 행정구
[ 펼치기 · 접기 ]

베트남의 행정구역(Phân cấp hành chính Việt Nam)은 베트남의 영토를 나누는 구획으로 제1급 행정구, 제2급 행정구, 제3급 행정구로 나뉜다.

베트남 공화국의 제1급 행정구 베트남 공화국의 제2급 행정구
  • 제1급 행정구 : 베트남의 최상급 행정구역이며 우리나라의 도 격인 성과 특별시/광역시 격인 중앙직할시로 나뉜다. 현재 58개의 성과 5개의 중앙직할시가 있다.
  • 제2급 행정구 : 우리나라의 기초자치단체급의 행정구역으로 타인포, 후옌, 티싸, 꾸언이 존재한다. 타인포는 성할시를 의미하며 성도 (성정부 소재지)이다. 티싸는 시, 후옌은 구, 꾸언은 구에 해당한다.
  • 제3급 행정구 : 티쩐, 싸, 프엉으로 나뉘며 티쩐은 읍, 싸는 면, 프엉은 동에 해당한다.

정치

총통


베트남 공화국 총통
[ 펼치기 · 접기 ]
제1·2대 제3대 제4·5대 제6대
부홍카인 호치민 쩐반흐엉 똔득탕
제7대 제8·9대 제10대 제11대
판칵스우 쯔엉딘주 응우옌반린 레득아인
제12·13대 제14대
응우옌반훙 응우옌푸쫑
문랑~키에우조 · 응오 왕조 · 십이사군 · 딘조 · 전레조 · 리조 · 쩐조 · 호조 · 교지

후레조 · 막조 · 버우주 · 찐주 · 응우옌주 · 떠이선조 · 응우옌조 · 프랑스령 베트남 · 베트남국

베트남 총리

베트남 공화국 총통(Tổng thống Việt Nam Cộng hòa)은 베트남의 국가원수이자 군통수권자로 베트남 국민의 대표자이다. 대통령제 (부분적 이원집정부제) 국가인 베트남에서 총통은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외교권, 국회의 동의로 내각의 관료 및 주요직, 대사, 판사등의 임명권, 국회를 통과한 법률을 승인권과 거부권, 헌법이 보장하는 행정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4년 연임제로 부총통과 함께 4년마다 치뤄지는 정부총통 선거에서 선출된다. 현임 총통은 베트남 공산당 소속의 응우옌푸쫑이다.

총리

베트남 공화국 총리(Thủ tướng Việt Nam Cộng hòa)는 베트남의 행정수반으로 베트남 정부의 수반이다. 총리는 행정부의 수반으로써 법률의 제청권과 내각 관료에 대한 제청권을 가진다. 정해진 임기는 딱히 없으며 국회에서 선출된다. 현임 총리는 베트남 공산당 소속의 응우옌쑤언푹 이다.

국회

베트남 국회
원내 구성
[ 펼치기 · 접기 ]

제14대 국회
2021.03.01 - 2025.03.01
여당

베트남 공산당
216석
신임과 보완

민주당
31석
야당

베트남 국민당
193석

공화당
26석

전국소수민족동맹
13석
무소속 4석
재적 483석
공석 0석
베트남의 전국소수민족동맹은 중국의 소수민족대표회와는 다르게 소수민족 할당의석이 아니다

베트남 국회(Quốc Hội Việt Nam)는 베트남의 단원제 입법부로 임기는 4년이다. 주요 권한으로는 총리를 선출하고 법률을 제정하며 관료에 대한 제청권 및 탄핵권, 조약 승인권 등을 가진다.

외교

한월관계

역사적으로는 크게 상관이 없었으나 냉전시대 이후에는 우방국으로써 한국을 베트남을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 즉 중국을 재외하고 가장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중 하나다. 냉전시기에 한국이 베트남 내전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베트남 정부군 편으로 참전하고 베트남 또한 한국을 최우방국중 하나로 분류하고 있으며 실제로 반기문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가장 먼저 진행된 해외순방또한 베트남이였다. 또한 양국은 상호안보협력기구의 원년맴버이며 상호안보협력기구의 전신인 한중월 군사동맹에도 참여한 우방국이다.

중월관계

베트남과 중국은 역사적으로는 사이가 별로 좋지않았으나 현제 베트남 공화국의 수립에 중국이 매우 큰 도움을 주었고 한국과 마찬가지로 우호적인 관계를 맷고 있다. 베트남 또한 상하이 협력기구의 회원국이며 상호안보협력기구의 창립국 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도 양국의 국민감정은 좋지 않은 편이며 2017년 8월에는 남중국해 문제로 양국관계가 악화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어느정도 회복되었다.

미월관계

호치민이 베트민 시절부터 친미적인 색채를 어느정도 띄었으며 나름대로의 지원을 했기때문에 양국은 서로 우호적인 관계이며 베트남 정부는 작년 11월 3일 수교 70주년을 기념하여 '베트남과 미국은 오랜 친구'라는 성명을 냈다.

베트남 - 캄보디아 관계

역사적으로 사이가 나쁜편이지만 크메르 루주와 왕국 정부간의 벌어진 내전에서 왕국군을 지원하면서 그럭저럭 미적지근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경제








베트남의 산업별 GDP 비중      1차산업 (14.57%)     2차산업 (34.28%)     3차산업 (51.15%)

베트남의 경제사

여타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농업 중심 경제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태평양 전쟁 종전 직후 중국 군정기를 거쳐 독립하자 신정부의 주도로 경공업 발전을 주도하였으며 이후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공업을 육성시켰고 남부의 메콩강 삼각주 일대의 농업 현대화와 사이공을 중심으로한 무역업 발달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1차산업

동남아사아 국가답게 1년에 농사를 3번이나 지을정도로 농업이 활성화 되어 있으며 전체 GDP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14%에 이를정도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으며 정부차원에서 농업에 아낌없는 지원을 하고있다.

2차산업

주로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공업이 발달했으며 중공업보다는 경공업, 특히 소비제 공업이 강세를 보인다. 그러나 중국의 인건비가 올라가며 인도와 함께 세계의 공장 후보지로 곱히는 국가이다.

3차산업

베트남인의 절반이상이 종사하는 업종으로 그 비율은 더욱더 커지고 있다.

화폐

베트남 동 (민국 38) 참고

군사

베트남 공화국 국군(Quân lực Việt Nam Cộng hòa) 혹은 베트남군(Quân lực Việt Nam)은 베트남의 군대이다. 공식적인 전신은 베트민과 베트남 국방경비대이다. 육군, 해군, 공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육군의 비중이 가장 크며 공군과 해군의 비중은 서로 비슷하다. 과거 쿠데타와 내전의 경험으로 인해 문민통제가 굉장히 강한 군대로 평가받는다.

사회

원래 유교중심적인 사회였던 만큼 꽤나 보수적이였으나 공산당의 집권과 내전, 국민당의 온건화를 거치며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진보적인 국가로 꼽힌다.

문화

유교적인 문화와 불교적인 문화가 섞여있는 듯한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하다.

매체

공영메체가 매우 비대하다. 이는 국토의 상당수가 나무로 뒤덥혀있기 때문에 통신에 어려움이 많았고 국가가 매체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물론 90년대 들어서는 공영방송인 NBS(Vietnam National Broadcasting System)보다 민영방송의 시청률에서 우위를 보이고 있으며 이런 분위기는 점점 강화되는 추세다.

종교

타 동남아 국가와 달리 상좌부 불교가 아닌 대승불교가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까오다이교등이 그 뒤를 있고있다.

민족

주류민족인 킨족이 85.7%를 차지하고 있으나 53개에 달하는 소수민족들이 존재하며 이전에는 소수민족들에 대한 차별 문제가 심각했으나 현재에는 상당히 완화되었다.

교육

5-4-3 제도를 채택하고 있으며 초등교육은 의무이다. 교육열이 매우 높으며 사교육 지출도 늘어나는 추세이다. 단 아직까지는 대학보다는 취업을 선택하는 청년들도 많은편이다.

각주

  1. 왜 국공내전이 진행중일때 중국을 치지 않았는지 의아할 수 있겠지만 당시 공산당과 내전중이던 중국에 전쟁을 선포해 중국이 베트남으로 일부 군대를 빼야 했다면 공산군이 내전에서 더 유리해지는 결과를 초래 할 수 있었고 만약 내전에서 공산군이 승리해 중국이 공산화 될시 베트남으로 공산군이 밀려들어오는 최악의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