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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대전
1914 ~ 1917
제1차 세계 대전
1917
심판의 날
1918 ~ 1940
전간기
1941
월면전쟁
1942 ~ 1949
제2차 세계 대전
1953 ~ 1956
지구-화성 전쟁
관련 문서: 백년전쟁 | 나폴레옹 전쟁 | 대공황 | 2차 월면전쟁 | 대아대전
심판의 날
The Judgment day

1차 세계대전의 일부
날짜1917년 8월 29일 02시 14분 ~ 1917년 8월 29일 18시 18분
장소지구 전역
결과 북반구 전역 황폐화
교전국

협상국
대영제국
프랑스 코뮌
러시아국
미합중국
대한-일본 제국
뉴 캘리포니아 공화국

등 23개국

동맹국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비잔티움 제국
이탈리아 왕국

중화제국
지휘관
조지 5세
허버트 키치너
캡틴 브리튼
다이애나 프린스
스티브 트레버 †
조르주 클레망소
루이지 카도르나
모리스 가믈랭
필리프 페탱
보리스 사빈코프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우드로 윌슨
존 조지프 퍼싱
조지 S. 패튼
더글러스 맥아더
태상황 순효제
개성공 이왕
이상설
홍범도
데라우치 마사타케
아론 킴볼
미스터 하우스

빌헬름 2세
파울 폰 힌덴부르크
발데리히 폰 아들러
도널드 모덴
에르빈 롬멜 †
헤르만 괴링
아델라인 히틀러
프란츠 요제프 1세
카를 1세
프란츠 폰 회첸도르프
콘스탄티노스 1세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무스타파 케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
루이지 카도르나
베니토 무솔리니

위안스카이

개요


''심판의 날'' 혹은 ''전면 핵전쟁''은 1차 세계대전 도중 발발한 우발적인 핵전쟁이다. 1917년 8월 2일 02시 14분부터 시작된 각국의 핵미사일은 유럽부터 시작해 지구 전역을 뒤덮었으며 수 억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갔다.


예고

전면 핵전쟁의 조짐은 1차 세계대전 초기부터 이미 존재했다. 러시아 제국과 프랑스 코뮌의 양면전선에 의해 점점 밀려 패전이 확실시 되던 독일 제국 내부에서 핵공격으로 협상국의 본토 진공을 막아야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었다. 물론 이런 기류를 감지한 협상국 측에서도 어느정도 대응할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핵전쟁이 일어난 시점에선 그 어떤 대비책도 무용지물이였다.


핵폭격

1917년 8월 29일, 독일 제국 동부의 드레스덴 핵사일로에서 누가 눌렀는지 모를 핵 미사일이 발사되었다. 이를 감지한 다른 독일 공군 기지들은 ''최후의 날'' 계획이 발동되었다고 판단했고, 곧 이어서 수백 수 천대의 ICBM이 연이어 발사되었다.

협상국에서는 독일 제국의 미사일 공격을 처음에는 단순 기계오류로 판단하였으나, 얼마 후 목표가 런던, 파리 등의 주요 대도시인 것을 파악한 직후 대대적인 보복공격과 미사일 요격에 들어갔다. 동맹국의 나머지 국가에서도 핵을 연이어 발사하였으며, 연쇄적인 핵보복이 진행되면서 북반구 전역에 핵폭격이 시작되었다.

동맹국과 협상국을 가리지 않고 국가 기반이 붕괴되었고, 심판의 날 당일에만 수 억에 달하는 시민들이 핵에 직격하여 사망하였다. 각 국이 자랑하던 MD 시스템은 실전에서 전혀 무용지물이었다. 독일 내부에서는 최고 지도자 빌헬름 2세가 실종되어 섭정 체제가 들어섰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걷잡을 수 없는 피해로 인해 이중제국 체제가 붕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프랑스 코뮌은 미처 대피하지 못한 내각 요인 전부가 핵에 직격해 정부 수반 자체가 소멸당했다. 프랑스 코뮌은 이 날을 기점으로 멸망했으며 전후 프랑스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영국에서는 조지 5세의 지휘하에 네빌 "캡틴 브리튼" 체임벌린이 핵미사일의 요격을 시도했지만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대규모 참사를 막지 못했다. 러시아는 핵공격으로 사빈코프가 실각하여 소비에트 혁명이 발발하였으며, 대한-일본 이중제국 또한 평양, 부산, 에도, 히로시마 등의 대도시가 폭격당하고 참전용사인 개성공 이왕이 사망했다.

가장 피해가 적었던 미합중국미스터 하우스의 재빠른 결단으로 미 동부 지역과 뉴 베가스 일대에 날아온 핵탄두 77개를 모조리 격추시키면서 핵전쟁의 참사에서 조금이나마 비켜 나갈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 또한 서부 워싱턴 주, 산 안드레스 주 등의 해안지대를 폭격당했고 동부에서도 미처 막지 못한 일부 핵탄두로 인해 몇몇 도심지역이 완파되었다.



여파

후속 협상이나 평화조약, 휴전협정 등의 전후 처리과정은 몇년이 지나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핵전쟁의 여파로 1차 세계대전은 즉시 종결되었으며, 피해가 복구되기 시작했던 1920년에 이르러서야 프랑스 제3공화국 베르사유에서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전후 처리에 대한 협상의 일환이자 평화 조약, 전쟁범죄 금지법 등을 담은 '베르사유 조약'에서 프랑스는 독일에게 전쟁의 책임을 물어 ''엘자스-로트링겐''을, 뉴 카멜롯은 ''노드 슐레스비히''를 할양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지구국제연합이 창설되면서 유럽은 전간기라는 짧은 평화를 맞이한다.

1918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심판의 날에 발발했던 핵전쟁으로 인한 핵겨울이 2년에서 최대 5년까지 갈 수 있다고 발표하였다. 실제로도 이 핵겨울이 3여년 정도 진행되었던 것을 보면 그의 추측이 맞았다. 지구 전역에서 햇빛을 몇 달동안 관측할 수 없었고, 일부 지역에선 최장 4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여름이 찾아오지 않았다. 핵겨울의 여파로 전 지구에 걸쳐 1억 명에 달하는 아사자가 추가로 발생했고, 남극의 오존층이 영구적으로 파괴되었다.

세계 정세 또한 급변하였는데, 세계적으로는 미합중국이 초강대국이 되는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동아시아에서는 대한-일본 이중제국이 패권을, 아프리카와 중동에서는 와칸다 제국이 패권을 확보하였다. 유럽 전역이 황폐화됨에 따라 농산물 가격이 급증하였으며 당시 유일하게 피해를 보지 않은 아프리카의 와칸다 제국이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와칸다는 이후 농산물을 이용해 경제적으로 큰 이득을 보았으며 유럽 국가들에게 엿을 먹였으며 이는 2차 세계대전의 원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한편 폴란드는 특히 많은 피해를 입었고, 결국 지구 최초로 외우주로의 대규모 이주를 결정한다.

핵전쟁 이후 힘의 균형이 사라진 유럽에서는 점점 극단적인 민족주의 사상과 인종 우월주의가 발흥하였고, 나치 독일이나 촉진주의자들과 같은 극단주의 세력이 탄생하였다.


어록

기타

  • 이 핵전쟁은 누가 시작했는지는 알지 못하였으나 가장 큰 가설은 당시 협상국 측에서 뫼즈-아르곤 전선쪽에 발사한 미사일을 베를린으로 향한다고 오판한 컴퓨터가 핵을 발사했다는 것이다.
  • 전 세계적으로 독일과 동맹국이 악의 제국 취급을 받았다. 1926년까지 이들이 지구국제연합에 가입하지 못하였다는 것이 대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