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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국 38(民國三十八)은 가장 대표적인 대체역사 소재 중 하나인 중화민국국공내전 승리를 가정한 세계관 입니다.
민국 38년(1949년) 중화민국의 국공내전 승리 이후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변화한 여러 정치, 사회, 문화,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개요

중화민국 (민국 38)의 역사를 다룬다. 신해혁명 이전의 중국사는 위키백과등의 타 사이트를 참고 바란다. 또한 민국 38 세계관에서의 중화민국의 근현대사 구분법은 헌정 이전시기는 신해혁명-임시정부, 북양정부, 국민정부 순으로 나뉘고 헌정이후 부터는 제1공화국 (1947-1982), 제2공화국 (1982-1994) 그리고 제3공화국 (1994-현재)로 나뉜다.

헌정 이전

신해혁명-임시정부

신해혁명 당시 상하이 시내

1911년 청나라의 무능과 열강의 중국 침탈에 분노한 (한족 중심의) 혁명파들은 10월 10일에 우창에서 봉기를 일으켰다.우창봉기 이후 당시 청나라의 24개의 성 중 17개의 성이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고 16개 성 대표들의 찬성으로 쑨원이 새로운 중화민국의 임시 대총통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공화국의 운명은 바람앞에 등불과 같았다. 청 정부는 위안스카이를 육군대신직에 앉혀 현대화 된 북양군을 지휘하도록 하였다. 위안스카이의 북양군앞에 혁명군은 추풍낙엽처럼 쓸려버리는 수 밖에 없었고 신생 중화민국의 내정은 복잡하기에 그지 없었다. 힌편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청나라의 실권자였던 위안스카이는 허수아비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자신이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싶어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쑨원은 공화국의 보전을 위하여 위안스카이에게 수도를 난징으로 옮기고 공화국을 유지하는 조건(달리 말하자면 청나라를 무너뜨리는 조건)을 전제로 협상을 시작하였고 위안스카이가 이를 받아들여 중국의 군주제는 막을 내렸다.(단 청황실 자체는 청황실 소조정으로 현제까지 북경에 존제한다.)

북양정부

위안스카이의 초상
5.4운동 당시 베이양(현 베이핑) 대학 시위대

이렇게 임시대총통이 된 위안스카이는 혁명파들의 기대와는 다르게도 공화국을 근본부터 뒤흔들기 시작했다. 그는 국민당(1912년)을 해산시키고 의회의 기능을 폐지하였으며 자신의 측근들로 구성된 중앙정치회의에서 모든 국사를 결정하였다. 혁명파는 분개하였으나 실질적인 힘이 없었고 다시 봉기를 시도하나 무참히 진압되어 버린다. 이후 위안스카이는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받아들이고 황제를 자처하여 중화제국을 선포하나 5.4운동이 일어나고 측근들초차 등을 돌리기 시작하자 결국 제정복고를 취소하였으나 이미 막차는 떠난 후였고 그는 중화민국 대총통 직에서 내려와 병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로써 중앙화 된 군 사령부가 사라지자 중국대륙 전역에는 군벌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후 중화민국 국회가 재건되었으나 헌법 제정 문제로 인하여 국회는 혼란스럽기만 하였고 부원지쟁과 장훈복벽을 거쳐 중화민국 국회가 다시 해산되면서 중국 전역은 크게 남부와 북부 그리고 그안에서도 무수히 많은 군벌들로 나뉘어 중국을 혼돈의 도가니로 만들어 버렸다. 심지어 1921년 러시아의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공격으로 인해 1919년 외몽골 출병으로 수복한 외몽골 지역이 다시 날아가는 등 국력의 소모 또한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그러던 와중 봉천군벌의 장쭤린이 대원수 자리에 오르면서 중국을 통일하는가 했으나 1926년부터 국민당의 북벌이 시작되면서 많은 북양정부 소속의 군벌들이 쓸려나가거나 국민정부에 합류하면서 전쟁은 점점 장쭤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는 수도를 봉천으로 옮기고 항전을 이어나가려고 하였으나 동북에서의 영향력을 넓히려던 일본의 무리수로 인해 암살당했다. 이후 그의 아들 장쉐량이 실권을 잡고 동북역치로 국민정부에 합류함으로 북양정부는 완전히 소멸했다.

국민정부

광저우 국민정부

국민정부 자체는 북벌 이전에도 존재하였으며 이 정부의 전신은 1923년에 수립된 3차 광둥정부이다. 1925년 7월 1일 정식 수립된 이 정부를 '광저우 국민정부'라고 부른다. 광저우 국민정부 당시에는 쑨원과 국민당이 북양정부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제1차 북벌을 준비하였으며 제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또한 소련의 지원으로 국민혁명군의 현대화가 이루어졌다. 왕징웨이가 주석으로 추대되었으며 정부제도가 정비되었다, 또한 현대 중국의 행정구역 제도의 기원이 되는 성현제가 광둥성 전역에 실시되었다.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이후 대부분의 중앙정부 기관들이 우한으로 옮겨가면서 소멸하였다.

우한 국민정부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이후 대부분의 중앙정부 기관들이 우한으로 옮겨오면서 성립되였다. 하지만 4.12 상하이 쿠데타가 일어고 제1차 국공합작이 붕괴되면서 국민정부는 난징 정부와 우한정부로 분열 되어버렸다. 초기에는 우한정부가 장제스에 비해서 군사력의 우위를 점하기도 하였으나, 이후 장제스가 양 정부의 통합을 위한다는 구실로 하야하고 광시파벌이 난징 국민정부를 장악하면서 난징과의 통합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광시파벌의 세력과 자금력의 부족으로 결국 장제스가 복귀하였다.

난징 국민정부

1930년대 중국의 거리

대부분 국민정부라고 하면 이 문단에 서술된 정부를 가리킨다. 1928년 공식적으로 국민혁명이 완수되었고 중국은 통일되었다. 난징은 새로운 통일중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모든 정치권력의 중심지가 되어야 했으나.....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난징-상하이와 장쑤, 안후이등의 주변부 지역과 광저우 일대는 국민당과 장제스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중앙 집권체제를 완성시켰으나 그 이외의 지역은 여러 군벌들의 개인 왕국이였고 티베트와 외몽골은 각각 독립국을 형성하였으며 만주는 일본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이후에는 괴뢰국인 만주국이 세워졌으며 대만은 아예 일본의 식민지였다. 또한 공산당은 1931년 장시성을 중심으로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우면서 국민정부는 난관에 봉착했다. 장제스는 국민혁명군을 동원하여 초공작전을 별였고 그 결과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은 멸망하였고 마지막 제6차 초공작전으로 모택동의 사망이 확인되고 시신이 국민정부에게 발견되면서 공산당에 대해서는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렇게 숨을 돌린 국민정부는 강력한 공업화 정책과 농촌 개혁을 시작하였다. 장강 삼각주를 중심으로한 산업화 정책이 실시되었으며 기반시설 확충과 농민들을 위한 은행 설립, 품종 개량, 상업 작물 보급 등이 이루어졌다. 1935년에는 영미 양국의 지원을 받아서 법폐개혁을 단행, 은본위제도 폐기, 은국유화와 관리통화제 등을 실시하였다. 이시기의 중국을 '황금 10년' 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황금 10년'은 1937년에 끝나제 되는데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을 구실로 일본이 중일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1938년, 타이얼좡 전투에서의 중국군

중국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하여금 격렬히 저항하였으나 전술적 미숙과 장교진의 부족, 그리고 군대 내의 부패등으로 베이핑, 상하이 그리고 수도인 난징까지 잃으며 속수무책으로 우한과 광저우 까지 함락되어 버린다. 그리고 국민당 좌파의 거물 왕징웨이가 일본의 괴뢰정부인 왕징웨이 정권을 수립하며 상황은 더욱더 악화되어 갔다. 그러나 충칭의 국민당과 신장의 공산당이 제2차 합작을 선언하고 일본은 점점 진흙탕에 빠진 사람처럼 천문학적인 전비를 쏱아부어도 끝나지 않는 전쟁의 구렁텅이에 빠지게된다. 또한 1941년 일본이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에 선전포고하며 일본의 전황은 점점 기울어가기 시작하였다, 한편 이 당시 중국은 공식적으로 연합국에 가입하였다. 1943년에는 카이로 회담에서 전후 강대국으로 인정받고 타이완, 만주, 관동주등의 반환을 공식적으로 약속받았다.

카이로 회담 당시 장제스, 루즈벨트, 처칠

이후 카보네이드 작전으로 광저우, 우한등의 주요도시를 탈환하기 시작하였고 1945년 8월 17일 미국의 지원을 받고 난징으로 진격하여 난징을, 그리고 23일에는 상하이를 탈환하였으며 9월 8일에는 베이핑을 점령하고 11일에는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과 만났다. 이후 1945년 9월 13일 공식적으로 일본과의 종전협정에 서명하였고 중일전쟁을 매듭지었다. 1946년에는 국공내전을 재게하였다. 초기에는 신장에 위치한 공산군이 닝샤성 지역과 칭하이 지역 등 서북지역을 점령하면서 승승장구 하였으나 1947년 부터는 공산당 내 장궈타오 중심의 소련파 내전에서 전공을 쌓은 국내파 간의 내분으로 1947년 초 이후로 전선이 점점 고착되어갔다. 한편 중국 국민당은 삼민주의 이념의 [ 군정 => 훈정 => 헌정 ] 논리를 바탕으로 1946년 제헌 국민대회를 소집하였으며 1947년에는 행헌 입법원, 행헌 국민대회, 행헌 감찰원을 소집하였다. 이시기의 장제스는 중국 국민당(大) / 중국 청년당(中) / 중국 민주 사회당(小) 연정을 자연스럽게 연출하였다. 이 체제를 1946년 체제 혹은 3당 훈정 체제라고 하며 강력한 총통의 권한을 바탕으로 형식적인 헌정과 사실상의 훈정을 추구하는 이 체제는 75년 장제스 사망과 78년 입법원 선거까지 지속되었다. 1948년 4월 20일 제1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가 열리고 장제스가 총통에 당선되면서 국민정부는 소멸하여 정식적으로 중화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헌정 이후

제1공화국

중화민국 초대 총통으로서 취임식을 가지는 장제스

1948년 중화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중국은 아직 혼란스러웠다. 가장 큰 이유는 국공내전의 재개였는데 당시 중화민국 정부는 신장과 칭하이, 닝샤와 산시등의 서북 지역을 장악하며 승승장구 하고있었다. 중일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혼란스러웠던 중화민국 정부는 공산군을 막지 못했고 공산당은 중국 인민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베이징을 점령당할 것이라는 의견도 나오는 실정이였다. 그러나 이 전세는 48년 중엽부터 역전되기 시작했는데 공산당이 분열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산당과 신장 소비에트는 소련의 지원을 받는 장궈타오 중심의 소련파와 화궈펑-저우언라이 중심의 국내파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진행되면서 펑더화이 같은 국내파 출신의 장군들이 전공을 쌓으며 당내의 지분을 점점 늘려가고 있었다. 이에 소련파는 당권을 잃을것을 우려하기 시작하였고 국내파의 당권 장악이 현실화 되기 시작하자 소련파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국내파 대규모 숙청사건을 일으켰다. 1948년 7월 6일 당시 중국 공산당 당수이자 신장 소비에트의 주석이던 장궈타오는 긴급 당대회를 소집하였고 저우언라이등 국내파를 국민당의 스파이로 몰아갔으며 11일에는 국내파 간부 대부분을 당과 군에서 몰아냈다. 화궈펑 등 일부는 쿠데타 시도까지 하였으나 소련파의 출동 요청으로 출동한 소련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들은 대부분 신장내의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일부는 홍콩이나 프랑스등으로 도피하였다. 소련파와 스탈린은 이에 대해 만족하였으나 이는 커다란 문제를 야기하였는데 당시 공산당 내의 국내파는 군사 관련된 간부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한꺼번에 사라져 버리자 공산당의 군 관련 능력이 크게 감소하였고 군 내에서도 동요가 일어나 점차 중화민국 정부군에 밀리기 시작했던 것이였다. 결국 49년 위슈 전투에서 대패한 공산군은 파죽지세로 밀렸고 49년 5월경에 사실상 소멸하게 된다.

1949년 5월 21일 승전선언을 하는 장제스

1949년 5월 21일 장제스의 승전선언으로 국공내전은 막을 내렸고 그간 신장의 감옥에 수감되어있던 국내파 공산당원들은 중화민국 정부에 넘겨졌다. 전쟁은 막을 내렸으나 중국에는 많은 문제점이 남아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화폐문제였다. 국공내전 당시 공산군이 서북지역을 장악하며 서북지역의 군벌들은 사실상 권력을 잃었고 원난의 룽윈또한 국공내전 기간동안 몰락하였으나 남방의 군벌들과 4대가족이라 불리던 이들은 각자 소유의 은행에서 돈을 찍어냈고 화폐가치는 점점 떨어져 갔다. 장제스 또한 이런 문제를 알고 있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사회혼란과 정부의 권위 추락이 계속 될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 1950년 7월 29일 새벽 장제스는 국민대회와 입법원을 소집하였고 소위 말하는 '1950년 은행법' 정식명칭으로는 '국가와 민족의 안녕과 발전을 위한 은행및 화폐의 관한 법률'을 기습적으로 통과시킨다. 이 법률의 전문은 다음과 같았다.

  1. 1950년 7월 29일부로 중화민국 중앙은행 이외의 은행에서의 화폐발행권을 무효화한다.
  2. 1950년 8월 1일부로 신화폐를 발행하며 신화폐만을 중국의 공식화폐로 하고 이외의 화폐는 무효화 한다.
  3. 1950년 8월 29일까지 기존의 화폐를 신화폐로 교환하도록 하며 신화폐와의 교환비는 100만:1로 한다, 이 이후는 구화폐의 교환은 불가하며 구화폐의 사용은 불가하다, 교환은 중화민국 중앙은행 산하의 은행에서만 가능하다.
  4. 1950년 7월 29일부터 기존의 모든 은행과 이후의 모든 은행은 중앙정부로 부터 허가를 받아야 하며 허가를 받지 않은 은행에서는 모든 경제활동이 불가하다.

요약하자면 중앙정부에서 허가한 은행만 경제활동이 가능하며, 중앙정부에서 찍어낸 돈만 사용이 가능하다라는 소리였다. 이 소식은 다음날 중국 전역으로 퍼졌고 중국 전역은 발칵 뒤집혔다. 마음대로 돈을 찍어내던 군벌들과 재벌들은 경악했고 당시 난징에 머무르고 있던 리쭝런은 장제스에게 따졌으나 장제스는 "이는 당연한 조치인데, 뭐가 불만인가?"라고 받아쳤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하루아침만에 4대가족과 군벌들은 권력의 기반을 잃게 되었고 물가가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중앙정부가 경제권을 틀어잡아 장제스의 권력또한 강화되었다. 장제스는 그들에게 쉴 틈을 주지않고 맹공을 퍼부었는데 9월 11일에 공식적으로 국영 농업, 공업, 상업은행 (줄여서 국영 3업은행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의 설립과 중앙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권을 무효화 한다는 발표들을 하였다. 이로 인해 군벌들과 고리대금업자들은 몰락의 길을 걸었고 국영 3업은행에서 장기 저리로 돈을 대출해 주기 시작하며 경제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일부 군벌들은 반란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나 진압되었다.

1961년 국토경제개발운동 당시 길을 만드는 농민들

민생 경제가 안정되자 중국 정부와 장제스는 전반적으로 국가경제를 개발하기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1951년 4월 16일 북일본이 남일본을 전면 침공하며 일본 전쟁이 시작되자 중국은 남일본 측으로 참전하였고 식량을 팔아 돈을 벌었다. 당시 반대하는 여론도 상당하였으나 장제스는 그런 비판 따위는 무시해 버리고 남일본으로의 지원을 승인하였고 그 대가로 미국은 중국으로의 경제지원을 시작하였다. 장제스는 이 자금으로 그간 계획했던 정책을 실행시키는데 이것이 바로 1954년 3월 2일에 발표 된 국토경제개발운동이다 이 계획은 기존의 농업중심 국가였던 중국을 공업국가로 발전시키고 기반시설이 많은 만주와 화베이 지역 그리고 장강 삼각주을 중심으로 중공업을 개발시키고 철도와 도로를 건설하며 이외의 지역은 경공업을 육성시키고 농업 또한 개발시켜갔다. 또한 곡물 수매제를 실시하여 농민들의 숨통을 틔어주었다. 신장 지역에서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석유채굴을 시작하였고 56년에는 티베트를 침공하여 합병하기도 하였다. 또한 62년에는 버마 정부의 요청을 받아 버마쿠데타를 진압하여 중국의 힘을 과시하였다. 중국의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63에는 중국 텔레비전(CTV)를 개국하여 10월 31일부터 정식방송을 시작하였다. 60년대 중반부터는 우주 진출까지 노리며 어였한 강대국으로 국제사회에 자신의 위치를 각인시켰다. 또한 중국 정부는 이때부터 프랑스 정부와 비밀리에 밀약하여 핵개발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66년 7월 핵무기 개발 사실은 들통나 버렸고 미국이 중국을 비난하며 원조를 끊겠다고 협박을 하였으나 장제스는 7월 8일 성명을 발표하며 "중국은 자주국가이며 미국의 원조 중단 발언은 중국을 종속국화 하려는 미국의 계략'이라고 미국을 비난했다. 그러자 미국은 중국에게 원조를 중단하였고 이후 중국의 경제는 하락세를 걷게된다. 그러나 1967년 중국을 주도로 통칭 '난징 조약기구'라 불리는 상호안보조약기구를 출범시키고 비동맹 회의에 가입하며 비동맹 독자노선을 걸을것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중국은 또다른 국면을 맡게 된다.

시위에 나서는 우한 시민들

1968년 5월 프랑스에서부터 시작된 68혁명과 자유주의적 분위기는 전 유럽을 뒤덮었고 미국으로 번졌으며 6월달에는 동아시아로 번졌다. 당시 중국은 48년 정부 수립이후 장제스의 20년 장기독재와 사회적으로 만연한 유교적, 보수적, 권위적 분위기로 인하여 학생들과 젊은층의 불만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그리고 장제스가 1972년 총통선거에 출마하기 위하여 4선개헌을 시도하자 당시 중국은 마치 벌집을 쑤셔넣은 마냥 혼란스러웠던 참이였다. 그러던 와중 68혁명이 일어나자 중국정부는 학생들에게 나쁜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명분 하에 미국과 서유럽으로 유학갔던 학생들을 귀국시켜다. 그렇게 6월달 초에 학생들은 대규모로 귀국했다. 그러나 이미 학생들은 자유주의적 사상에 물들어 있었고 그들은 20년 간 독재가 지속되는 중국을 보며 사회변혁을 꾀했다. 1968년 6월 11일 상하이 교통대와 푸단대학의 학생들은 일제히 수업을 거부하고 현수막과 표지판을 들고 시위에 나섰다. 이것이 바로 1968년 중국 사회운동의 시작이였다. 학생들은 독재타도, 오권분립, 민주혁명등의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매웠다. 상하이 당국과 정부는 처음에는 학생들의 작은 시위인줄 알고 가만히 놔두었으나 시위대가 점점 불어나자 이를 진압하고 은폐하려 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다음날에는 난징대학과 베이핑대학등의 학생들도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나오기 시작하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정부는 무장경찰을 파견하여 학생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였으나 이제는 일반 시민들도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우한, 광저우등의 대도시는 물론 난닝과 닝보등의 타 도시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기 사작되었다. 시위는 2주만에 전국적으로 퍼졌고 티베트나 타이완 같은 지역에서는 성정부가 통제하지 못할 수준까지 시위가 번지기도 하였다. 대학생, 농민, 노동자, 소수민족들에다가 민주화 운동가들과 구 공산당 당원들도 합세하였고 장제스는 군을 투입하려는 생각도 하였으나 이미 핵개발로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을 투입한다는 것은 국제적으로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왕따가 되는 지름길 이였다. 장제스는 일단 최소한의 무력을 사용하기 위해 경찰과 무경을 이용하여 시위를 진압해 나갔으며 7월 3일에는 본인이 직접 중국 텔레비전(CTV)와 라디오를 통하여 담화를 하였다. 담화의 내용은 야당의 지방과 전국단위의 모든 선거참여를 어느 정도 수용 할 것이며 사회전반으로 자유화 조치를 취하고 지방자치를 활성화 할태니 이만 물러나달라는 것이였고 만약 해산하지 않는다면 더 강경하게 진압하겠다는 내용이였다. 시위대 중 일부는 남아서 시위를 계속하였으나 대부분의 시위대는 해산하고 물러났다. 7월 11일 장제스는 국민대회와 입법원을 소집하였고 '정당법과 사회개혁에 관한 조치'와 '지방자치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에 의거하여 국민당, 청년당, 민사당을 재외한 다른 정당의 창당과 선거 참여가 허용되고 일부 정치범을 석방되었으며 경찰과 무경의 수 또한 축소되었다.(단 최고법원에서 반체제 정당으로 선포된 정당은 해산이 가능하며 공산주의를 당 노선으로 채택한 정당과 중국 공산당이라는 이름의 정당은 창당 불가능)

1968년 중국민주전선의 창당식

그리고 이 당시 국민들의 지지를 받던 민주화 운동가들과 저우언라이등의 일부 공산당원들이 집행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나왔다. 이 당시에 국민당 좌파들이 창당한 국민혁명당과 자유주의 정당들의 통합체인 중국 민주당이 창당되어 중국은 민주주의를 향한 발걸음을 한발자국 내딪었다. 또한 이 당시 민주혁명과 희생의 결실이라 할 수 있는 '중국민주전선' (줄여서 민전)이 창당되었다. 이 단체는 민주당등 자유주의 세력과 좌익 세력이 합작하여 만든 정치단체로 초기 민주파 진영의 힘이 미약할때 모든 민주화 세력이 힘을 합쳐 국민당 독제에 대항해야 한다는 취지로 창설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정당연합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국민당 독재타도'라는 강령으로 인해 당원들은 당국의 감시를 받곤 하였다. 또한 어느정도의 자유화 조치가 이루어졌으나 아직 정부와 국민당의 권력은 상당했고 이전보다는 줄었으나 민주화 운동가들이 잡혀가는 일도 자주 있었다. 그러나 1972년 국민대회 선거에서 국민대의원 3045명중 783명에 민주파 인사들이 당선되고 입법위원 759명 중 103명에 민주파 인사들이 당선되며 민주화 운동과 시위의 대가를 중국 국민들은 맛볼수 있었다. 물론 국민당이 국민대의원 2011명과 입법위원 603을 배출하면서 명목상으로는 국민당이 선거에서 승리하였다고 언론에 보도되었으나 혁명 4년만에 국민대의원 약800여명과 입법위원 약100명을 배출해 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실상은 명백한 민주파의 승리였다. 그리고 3년후 한 사람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거대한 파도가 중국에 들이닥쳤다.

1975년 중국 민주혁명 당시 천안문 광장의 시위대

1975년 4월 5일 중국의 현대사를 풍미한 거인중 한명인 장제스가 입법위원 선거를 2달 앞두고 사망하였다. 장제스의 사망은 이틀 뒤 공식적으로 발표되었으며 당시 부총통이였던 옌자간이 총통 권한대행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실권자는 행정원장이였던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였다.) 정부는 1달간의 애도기간을 선포하였으며 2주간의 비상경계령을 전국에 선포하였다. 그러나 북벌, 중일전쟁, 국공내전등으로 절대적인 위치와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던 장제스와 달리 관료출신 이였던 옌자간은 그런 절대적인 위치와 카리스마를 가지지 못했고 이는 장제스의 아들이였던 장징궈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민주파 진영은 더 많은 자유를 얻고자 하였고 그렇게 그들은 제2의 혁명을 준비하게 된다. 1975년 5월 7일 애도기간이 끝난 직후 난징대학과 상하이 교통대가 연합하여 대규모 시위를 일으켰다. 지난번의 혁명을 통해 뼈저린 경험을 했던 정부 당국은 즉각 해산을 명령하였으나 학생들은 이를 무시하고 행진을 계속하였다. 옌자간 정부는 이를 진압하려 하였으나 진압 병력까지 시위대에 가담하면서 정치적인 지형은 시위대에게 기울기 시작한다. 시위는 난징과 상하이 뿐만 아닌 베이핑, 하얼빈, 시안, 광저우등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고 시위는 통제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의 구공산당 간부들과 팡리즈, 류샤오보등의 민주화 운동가들은 연달아 지지성명을 발표하였다. 시위는 2주간 지속되었고 결국 시위대에 두손 두발 다 든 정부는 공식성명을 발표한다. 1975년 5월 23일 옌자간 총통 권한대행은 국민들의 자유를 억압했던 공안국을 폐지 할 것이며 모든 업부를 경찰로 이관 할 것 이라고 발표했다. 또한 문화검열법, 국가안전법의 폐지또한 발표되었다. 그리고 지방자치의 활성화와 소수민족의 자치권 또한 보장한다는 발표도 뒤를 이었다. 전국의 국민들은 환호했고 청천백일기와 적기는 전국에 나부꼈다. 뒤이어 실시 된 입법위원 선거에서 범 민주파 진영이 376석을 차지하면서 혁명은 그들의 항쟁의 대가를 보여주며 화려하게 막을 내렸다. 3년뒤 실시 된 국민대회 선거에서도 범 민주파 진영이 1731명의 국민대의원을 배출하고 그에 따라 저우언라이가 총통에 당선되면서 길고 길었던 국민당 시대는 종식되었다.

총통당선 직후 연설하는 저우언라이 총통

저우언라이 총통은 사회개혁을 약속하였으며 작지만 하나하나 차근차근 국민당 독재의 잔재를 처리해 나갔다. 지금까지 자국중심주의적 태도를 보이던 장제스 정권 때와는 다르게 국제주의적 관점을 취하였고 소수민족 자치정책을 실시하여 5개 소수민족의 자치지역을 만들었다. 또한 달라이 라마와의 협상을 통해 그가 다시 포탈라 궁에서 살 수 있게 만들어주었으며 56년 티베트 합병과 그 이후의 사건들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사죄하였다. 참고로 이 당시 티베트에서의 저우언라이 총통의 지지율은 98%를 넘었다고 한다. 저우언라이 정권 당시 중국은 장제스 정권 당시 핵개발로 악화되었던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미국은 초반에는 중국 총통에 좌익 성향의 저우언라이가 당선되었다는 소식에 미중관계에 회의적인 입장이였으나 5시간 간의 기나긴 회담 끝에 결국 미국정부는 중국에 대한 관세보복조치등을 완전히 취소시키기로 합의하였다. 또한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개선시키는 것에 열중하였는데 당시 중국은 미소 양국에 휘둘리는 외교가 아닌 세계에 또 다른 세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저우언라이 총통은 여러 아시아 국가들과 아시아 민족회의를 개최하여 아시아 각국의 단결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비동맹 회의에 가입하고 제3세계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한편 여기까지 읽었다면 장제스 정권 시기에도 비동맹 독자노선을 천명하기도 하였는데 도대체 왜 그당시의 비동맹 정책은 짧게 넘어간 반면 저우언라이 정권 시기의 비동맹 정책은 왜 이렇게 강조되는지 궁금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전 장제스 정권 시기에도 비동맹 회의에 가입하고 제3세계에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내는 등의 비동맹노선을 이미 채택하였으나 저우언라이 정권때의 비동맹 노선이 더 부각되는 이유는 장제스 정권때는 아시아 국가들과의 외교에만 집중했던 반면 저우언라이 정권때에는 아프리카와 남미등의 제3세계 국가들과도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정치개혁이 실행되었는데 야당에게 불리하게 만들어진 여러 법들을 폐지하고 반공법, 공안법등의 자유를 억압하던 법들 또한 가차없이 폐지되었다. 그리고 이시기에 '정당 명칭과 노선에 관한 법률'이 사실상 폐지되어 명목상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그렇게 1978년 10월 10일 공산당이 재창당되며 중국 공산당은 최초로 여당이 되었다. (그러나 '정당 명칭과 노선에 관한 법률'이 아직 명목상으로는 남아있었기 때문에 비공식적인 재창당 이였다.) 이렇게 4년이 지나갔다, 저우언라이 정부는 이제 개혁의 가장 큰 부분을 집행하기로 마음먹었는데 그것은 바로 국민대회였다. 국민대회는 장제스 정권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초헌법적인 기관이였으며 어떤정파가 됬든간에 이곳만 장악한다면 국가를 송두리째 쥐락펴락 할 수 있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저우언라이 총통은 1982년 3월 8일 '국민대회와 입법원의 권한 수정 및 정부기관 권한 배분의 관한 법률'을 국민대회와 입법원에 발의하였고 이틀간의 토론끝에 통과되었다. 이 이후 부터를 '중화민국 제2공화국'이라 부른다.

제2공화국

1982년 3월 13일 제2공화국 헌법 공포식

1982년 3월 13일 제2공화국 헌법이 공포되었다. 이 헌법의 중심내용은 국민대회와 총통부의 권한을 줄이고 입법원, 행정원등의 타 국가기관으로 권력을 분배시켜 5권분립과 실질적 헌정체제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때부터 성, 시, 현등의 지방행정구역들의 권한이 확대되고 소수민족 배려정책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명목상 남아있던 '정당 명칭과 노선에 관한 법률'이 폐지되어 중국 공산당 이라는 명칭의 정당도 허용되어, 1982년 5월 6일에 공식적으로 중국 공산당이 재창당되었다. (위에서 보았듯이 75민주혁명 이후 1978년 중국 공산당이 사실상 재창당 되었으나 '정당 명칭과 노선에 관한 법률'로 인하여 공식적인 재창당은 1982년 5월 6일이다.) 또한 경제개혁도 단행되었는데 기존의 경제정책이 상당이 페쇄적인 정부의 통제를 받는 대기업 중심의 국가자본주의 체제 였다면 제2공화국 저우언라이 정권의 경제정책은 일정부분의 경제 자유화 조치였다. 물론 저우언라이 총통과 공산당은 국가주도의 경제체제를 지양하는 사회주의 정당이였으나 당시 중국의 국가자본주의 체제는 친정부 재벌과 정부, 국민당이 유착하여 정부는 국고 보조금 명목으로 기업에게 돈을 퍼주고 기업은 국민당에 돈을 퍼주는, 서로의 주머니를 체워주는 체제였기 때문에 아무리 국가주도의 경제체제를 지양한다 하더라도 국민당의 권력 축소와 건전한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기존의 대기업들 대신 새로운 중소기업들을 육성하고 대기업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였다. 우선 일부 국영기업 민영화를 통해 경제 자유화 정책을 테스트 해보았다. 물론 민생경제에 큰 영향을 주는 기업이 아닌 일부 언론사들과 몇몇 기업을 중심으로 매각을 시도해 보았다. 성과는 나름 괜찮은 편이었고 저우언라이 정권은 그 범위를 점차 확대해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는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에 주로 민간위탁과 민자유치, 혹은 민간투자 확대등의 방식으로 민영화/자유화 조치를 취한 결과 중국의 경제는 다시금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로운 국영 중소기업들을 육성하여 기존 보수주의/친국민당 성향의 대기업들에 맞섰다. 또한 금융업에 대한 투자도 본겯적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국민당 소유의 기업, 은행들은 국유화 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으로 국민당 소유의 은행이였던 '민국은행'과 조선 업체였던 '중화조선'을 국유화 한 것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물론 국민당은 정치보복 이라며 반발했지만 84년 동시에 진행된 국민대회, 입법원, 총통선거에서 공산-민주연합의 범민주파 진영이 압승하고 중국 공산당 당적의 덩샤오핑이 총통에 당선되면서 이러한 반발은 묻혀벼렸다.

당선 직후, 국토경제개발운동 30주년 기념식
당시의 덩샤오핑 당시 총통

덩샤오핑 당선이후 12년간의 덩샤오핑 정권 (혹은 덩샤오핑 체제)기간 동안 중국은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저우언라이 정권 당시의 반(反)대기업 경제개혁과 국민대회 권한 축소 덕분에 덩샤오핑은 국민당과 재벌등 기득권 세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정책을 펼쳐 나갈 수 있었다. 장제스 정권 초기의 경제정책이 국가 주도의 경제계발 초석 닦기, 중후반기의 경제정책이 본격적인 중공업 발전 및 전국적인 경제 계발, 저우언라이 정권의 경제 정책이 금융업 투자 시작과 대대적인 경제개혁이였다면 덩샤오핑 정권의 경제정책은 지방 공업화와 금융업 밀어주기, 그리고 제2차 중공업 개발과 관광업 개발이라고 볼 수 있다. 87년 고르바초프 집권과 중국 공산당의 재집권이 맞물려서 전세계적으로 탈냉전 분위기가 전 세계를 뒤덮기 시작하자 중국은 이를 적극 이용하였다. 덩샤오핑 정부는 소련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여 소련에 막대한 지원을 해주는 대가로 상호경제협력협정을 맺었고 중국의 기업들이 대규모로 소련에 진출하여 막대한 돈을 벌여들었다. 이러헤 벌여들인 돈으로 지방의 경공업을 밀어주기 시작했고 기존경공업이 발달했던 지역은 중공업을 발전시키기 시작하여 제2의 공업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또한 상하이 증권거래소의 금융거래를 활성화 시킴으로써 상하이는 동아시아 금융거래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10%를 찍었고 덩샤오핑과 중국 공산당에 대한 지지율은 하늘을 찔렀다. 덩샤오핑과 중국 공산당은 이기세를 몰아서 1988년 입법위원 선거와 1990년 총통선거에서 대승을 거두며 전성기를 달렸다. 그러나 이시기는 중국 공산당의 마지막 전성기 이기도 했다. 89년 동구권 혁명과 1993년 소련 민주혁명으로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중국 공산당의 18년 장기집권에 국민당등 보수세력과 민주당등 자유주의 성향의 우파 세력도 적지않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다시한번 학생들은 세상을 뒤집을 필요를 느끼게 되고 자유주의의 물결은 전 중국을 뒤덥게 된다.

1994년 광저우에서의 시위

1994년 5월초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수도권과 광둥지역을 중심으로 사회개혁을 요구하는 시위가 대규모로 일어난다. 시위대는 빈부격차 해소, 복지확대 등을 외치며 거리마다, 도시마다, 구호를 외치며 전국을 들끓게했다. 이 대규모 시위의 원인은 연 10%의 초소속 경제성장의 어두운 면이 폭발한 사건으로 경제성장과 함께 사회복지와 민도의 성장이 동반되어야 하지만 그러한 조치들이 동반되지 않았고,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올라온 농민들(일명 농민공(農民工))들의 복지는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또한 소련 신연방 조약이 채결되면서 공산주의가 사실상 몰락해 철지난 사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진보정당이라고 하는 중국 공산당은 게속해서 사회주의, (명목상 이지만) 공산주의를 추구하면서 진보적인 청년들의 지지가 이탈했기 대문에 벌어진 사태였던 것이다. 시위 직후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혼란에 빠졌으며 덩샤오핑 총통은 9월 28일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였다. 담화는 빈부격차 해소를 위해 최선을 가해겠으며 큰 사회문제로 대두된 농민공들을 포함한 노동자들의, 아울러 중국 전체 인민들의 복지를 강화하여 삶의 질을 높이겠다는 내용이였다. 또한 10월 13일 긴급 당대회를 열어 당노선을 개혁적 사회주의, 유럽공산주의로 바꾸었다. 그리고 자오쯔양, 장쩌민등 당내 혁신파를 기용하며 당내 개혁을 밀어 부쳤다. 그러면서 청년층의 지지와 지지층 결집을 위하여 신헌법의 재정을 도모하였고 1994년 8월의 더운 여름날 입법원과 국민대회에서는 소위 '제3공화국 헌법' 이라고 불리는 현행 헌법을 17시간의 길고도 긴 토론끝에 통과 시킴으로써 제3공화국의 막이 열리게 된다.

제3공화국

1994년 8월 26일 제3공화국 헌법 공포식

1994년 8월 26일 제3공화국 헌법이 공식적으로 실행되면서 제3공화국, 즉 현대중국의 막이 올랐다. 이 헌법의 골자는 국민대회의 정원수를 400명대로 줄이고 권한또한 크게 줄이며 입법원의 정원과 권한을 늘리는 것이였다. 이외에도 소수민족 할당의석이 만들어지고 총통의 임기가 6년에서 4년으로 줄었으며 (1996년 선출된 총통부터 적용) 여러 개혁조치가 실시되는 등 중국은 완전한 민주사회로 도약했다. 공산당의 대한 지지율은 신헌법 공포를 통해 크게 늘었고 1996년 총통선거에서도 공산-민주연대가 승리해 자오쯔양이 총통으로 부임했다. 자오쯔양 정권 시기에 현대중국이 사실상 완성되었고 1994년 대규모 시위의 원인이 되었던 빈부격차가 해소되고 복지가 확대되는 등 사회전반으로 안정화가 이루어졌다. 자오쯔양 정권의 지지율은 그럭저럭 안정적으로 유지되나 싶었으나 1997년 11월 수직폭락하게 되었다. 그이유는 공산당이 분당되었기 때문이다. 97년 9월 말 자오쯔양은 당대회에서"공산주의는 몰락했고 우리는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공산주의를 포기해야한다."라는 발언을 하였고 마침 덩샤오핑이 97년 2월 19일에 사망하며 거물급 공산당 원로중에 살아있는 사람은 화궈펑 밖에없었고 이미 당내 주류는 사민주의-민사주의 성향의 혁신파였기 때문에 당대회는 공산주의 포기와 사민주의, 민사주의 노선 공식채택을 결의하였다. 당연하게도 화궈펑등 당내 보수파는 반발하였고 공산주의와 보수사회주의를 지지하던 지지자들의 반발또한 있었기 때문에 공산당은 물밑에서 협상과 파기를 계속하였고 결국 보수파가 당권에서 배제되어 사민주의, 민사주의 노선 공식채택과 당명변경이 현실화 되었다. 1997년 11월 3일에 당명이 공식적으로 중국 사회당으로 변경되고 공산주의를 당강령에서 삭제하자 11월 7일 보수파들은 대거탈당, 중국 인민공산당으로 분당해나갔고 (2001년 해산, 일부 온건파가 원외 좌파정당들과 합당하여 중국 공당 창당) 그동안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던 구공산당 내의 집안싸움의 내막이 보도되면서 사회당의 지지율은 폭락하였다. 결국 2000년 총통선거에서는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민주당 팡리즈에게 총통후보 자리를 내주고 입법위원 선거에서 사회당이 참패하면서 사회당에는 암흑기가 찾아왔다. 이후 국민당이 2004년부터 2016년까지 집권하면서 중국 국민당은 부흥기를 맞았고 2020년까지 다시 사회-민주연합이 집권하다가 2020년 총통선거에서는 국민당 소속의 원자바오가 집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