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평양 테러 (민국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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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국 38(民國三十八)은 가장 대표적인 대체역사 소재 중 하나인 중화민국국공내전 승리를 가정한 세계관 입니다.
민국 38년(1949년) 중화민국의 국공내전 승리 이후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변화한 여러 정치, 사회, 문화,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1967년 평양 테러
1967 Pyongyang terrorist attack
폭탄테러로 인해 전소된 구 평양시청
사건 날짜
1967년 4월 23일
주동자
제6차 조선공산당
발생 장소
평양직할시 3구 칠성문로 평양직할시청[1]
평양직할시 중앙공원[2]
유형
테러
피해
재산
피해
평양 시청 전소
주변 상가 전소
평양 중앙공원 파괴 및 폐쇄
사망자
총 1,003명
평양시 공무원 32명
평양시 방문 정부 관계자 7명[3]
국무총리 경호원 및 헌병 72명
경찰 71명
민간인 및 신원 불명 811명
테러리스트 10명
부상자
약 2,300여명
영향
평양직할시 일대에 1주일간 계엄령 선포
한국 국민의 반공주의 강화
국가보안법의 민의원 상장
대한민국의 정치혼란
5.16 군사반란으로 인한 박정희 내각 집권

개요

“反共은 愛國이며 容共은 賣國이다![4]
― 테러이후 내무부의 반공표어
“共産黨을 打倒하고 容共分子를 몰아내자![5]
― 테러이후 평양시내의 현수막
“우리는 993명을 잊지 않는다![6]
― 당시 평양직할시장 박현숙

1967년 평양 테러는 1967년 4월 23일에 평양 시청과 평양 중앙광장 일대에서 벌어진 테러로 이 테러로 인해 한국 국민의 반공 심리가 강화되었고 또한 5.16 군사반란과 13년간의 민주유신당 장기 집권의 촉매제가 된 사건이라고 평가받는다.

상황 전개

사건의 전개 과정

구 평양시청 자리의 테러추모비
  • 평양시청 테러
  1. 시청 진입(10:23) : 테러리스트들이 평양시청 내부로 진입
  2. 혁명선언문 낭독(10:31) : 테러리스트들이 혁명 선언문을 낭독함, 이 시기에 폭탄을 설치 한 것으로 추정
  3. 경찰의 평양시청 포위(10:37) :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
  4. 경찰의 평양시청 진입(10:56) : 협상을 잔행하던 경찰이 청사내로 진입, 총격전 발생
  5. 폭탄 기폭(11:17) : 건물 하층부 부터 기폭시작, 대규모 사상자, 화제발생
  6. 1차 붕괴(11:18) : 수도관 붕괴로 인한 침수 및 붕괴시작
  7. 2차 붕괴(11:22) : 중앙기둥 붕괴, 청내 내 인원 대부분 사망 추정
  8. 3차 붕괴(11:31) : 화제및 가스폭발로 인한 대규모 붕괴, 건물 주변 화제 진압인원 일부 사망
  9. 건물 붕괴종료(11:57) : 건물 화제 완전진압 및 화제 진압인원 철수
  10. 테러리스트 잔당 체포 및 상황 종료(17:36) : 평양시내 경계령 해제 (그러나 평양시내 경비계엄은 1주일간 지속됨)
  11. 평양시내 경비계엄 종료(4월 30일) : 평양시내 계엄 완전종료

현재 평양 시민의 공원
  • 평양 중앙공원 테러
  1. 장면 총리의 중앙공원 도착(09:10) : 장면총리가 평양중앙공원에 도착함
  2. 연설준비 완료 및 시민 입장 시작(10:00) : 일반시민 입장이 시작됨, 테러리스트가 이때 입장 한 것으로 추정
  3. 장면총리 연설시작(10:07) : 장면 총리의 연설이 시작됨
  4. 총격전 시작(10:17) : 테러리스트들이 단상으로 총알을 발사하기 시작함[7]
  5. 1차 자폭테러(10:21) : 한 테러리스트가 군중 속에서 자폭, 행인 200여명 사망
  6. 화염병 테러(10:25) : 공원 화제시작
  7. 2차 자폭테러(10:32) : 경찰이 본격적으로 공원에 진입하자 약3 ~ 4개의 폭탄이 격발됨
  8. 화제로 인한 공원 면적 대부분 전소(10:38) : 공원면적의 약 70% 가량 전소
  9. 본격적인 화제 진압 시작(10:43) : 테러리스트 대부분의 사망이 확인되자 본격적인 진압 시작
  10. 테러리스트 잔당 체포 및 상황 종료(17:36) : 평양시내 경계령 해제 (그러나 평양시내 경비계엄은 1주일간 지속됨)
  11. 평양시내 경비계엄 종료(4월 30일) : 평양시내 계엄 완전종료

후속조치

600
평양직할시의 계엄령 선포를 알리는 대한늬우스 속보

테러 직후 평양시 전역에 경계령이 선포되었으며 1주일간의 경비계엄 또한 연달아 선포되었다. 또한 남포시[8]등의 인접 도시와 평안남도 일대에도 경계령이 선포되었다. 평양 주변지역에는 급히 검문소가 설치되었으며 주민등록제도가 이때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또한 민의원과 참의원에 국가보안법이 상장되어 고속으로 통과되었다.

여파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 국민들의 반공 심리가 크게 강화되었으며 그 이후 사건의 발생지인 평양은 물론 전국에서 공산주의 정당이 단1석의 의석조차 얻지 못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또한 평양을 방문했던 장면 총리가 사망함에 따라 권력에 공백이 생겼으며 이로인해 권위주의적 반공주의 정권인 박정희 내각이 쿠데타로 집권하는 결과를 만들어내게 된다. 또한 이 여파로 테러이후 현재까지 평양에는 좌파정당이 단 1번도 집권하지 못했으며 노회찬 총리가 집권하기 전까지 사회당은 만년야당 신세를 지게 된다.


  1. 현 평양광역시 보통강구 칠성문로 테러추모공원
  2. 현 평양광역시 시민의 공원
  3. 장면 대한민국 국무총리, 김재순 평양직할시 2선거구 국회의원, 주요섭 평양직할시 5선거구 국회의원, 이범석 평양직할시 1선거구 국회의원, 이태희 국무총리 비서실장, 채병덕 평양직할시 부시장, 석주명 평양직할시의원
  4. 반공은 애국이며 용공은 매국이다!
  5. 공산당을 타도하고 용공분자를 몰아내자!
  6. 테러리스트를 제외한 희생자 993명을 의미함
  7. 장면 총리 뇌에 총알이 발사됨
  8. 현 남포광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