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세계 무역 센터 테러 사건


【주요 사건】
【주요 국가】
【주요 설정】
1998년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
1998 World Trade Center bombing
수습 중인 2WTC
발생일 1998년 9월 29일 화요일
발생 위치 미국 뉴욕주 뉴욕시 맨해튼
세계무역센터
유형 차량 폭탄 테러
원인 알카에다의 정치·종교적 극단주의
주동 세력 알카에다
피해 재산 2WTC 붕괴
1WTC 부분 파괴
도이체방크 뉴욕 지점 사옥 대파
3WTC 및 4WTC 대파
뉴욕 GDP 153억 달러 감소
뉴욕 증시 11.7% 대폭락
사망자 11,700명 이상[1]
부상자 최소 7,500명 ~ 최대 35,000명
여파 팍스 아메리카나 종식
미국이 중동에서 대규모 군사 작전 개시
테러대책법(USA PATRIOT Act) 제정

개요

1998년 세계무역센터 테러(1998 World Trade Center Attack) 혹은 9·29 테러(September 29 Attack)은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 중 하나인 알카에다가 미 본토, 그것도 미국과 뉴욕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세계무역센터를 대상으로 벌인 테러이다. 심지어 케냐 미 대사관에서 발생한 테러로 230여 명이 사망한지 단 2개월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 사건은 테러가 국가에 중대한 안보 문제로 발전할 수 있음을 당사국인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에 확실히 각인 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미국 내부에서는 테러 주동 세력인 알카에다를 향한 무력 응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이는 미국이 중동에서 대규모 군사 작전을 개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소련 붕괴 이후 냉전이 종식되면서 가장 안정적이었던 미국에 큰 혼란을 가져다 주었으며, 팍스 아메리카나를 한 마디로 종식시켰다.

배경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자연스럽게 냉전은 종식되었고 세계는 미국의 세상이 되었다. 1992년부터 1998년까지 미국은 역사 상 가장 안정적인 시기, 팍스 아메리카나를 경험했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 군사적 충돌은 당연하고 외교적 충돌 역시 적었으며 미국을 중심으로 한 NATO가 전세계를 호령했다. 이때 세계의 경찰을 자처한 미국은 걸프전 당시 미군 병력만 70%에 달하는 다국적군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주둔 시켰고 친이스라엘 정책을 펴거나 중동의 세속주의 정권을 상대로 지원을 하는 등 중동의 정치 상황에 상당 부분 개입하고 있었다. 이에 반발한 알카에다는 전세계 무슬림들이 단결해 이슬람의 공공의 적인 미국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나섰고, 이에 동참하는 일부 극단주의자들이 알카에다에 합류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충분한 세력을 확보한 알카에다는 미 본토에 대한 공격을 계획했다. 그러면서 미 본토가 아닌 외부로 눈을 돌리기 위해 해외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집요하게 테러를 일으켰다. CIA는 1997년 경 사우디 여권을 통해 최소 3인 이상의 알카에다 조직원이 미국에 입국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FBI 역시 미 본토를 대상으로 한 중동발 테러가 곧 발생할 수 있다는 첩보를 습득했다.

그러나 두 정보 당국 간의 협력은 전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연관성은 찾을 수조차 없었다. CIA는 이를 "그냥 여행 왔나 보네"라는 식으로 치부해버렸다. 추후에 이들이 비자 기간 이후에도 귀국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부랴부랴 FBI에 협조 요청을 보냈지만 그때가 1998년 9월 25일이었다. 미군 역시 케냐와 탄자니아 미 대사관을 대상으로 동시 테러가 발생한 이후로도 알카에다의 테러가 국외 체류 미국인을 대상으로 벌어질 것으로 여겨 본토가 아닌 외부의 경계 강화에만 치중하고 있었다. 한편, 이미 완전히 계획된 테러를 실행하고자 총 5명의 테러범들은 1996년부터 차례로 밀입국했다.

왜 WTC가 표적이었나?

세계무역센터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자본주의 체제의 상징이면서 자유의 여신상과 같이 미국과 경제 중심지 뉴욕의 상징이기도 했으며, 다른 시설보다 상대적으로 접근이 용이하다는 등 테러의 표적이 되기에 좋은 요건들이 두루 갖춰져 있었다.

테러의 표적이 되기 좋다는 건 테러범들이 전하고자 하는 뜻을 더욱 더 강력히 전달할 수 있다는 뜻이었고, 절대 무너지지 않는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던 미국에서, 그것도 뉴욕 맨해튼 한가운데에 위치한 WTC가 무너진다면 미국의 체면이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이 뻔한 일이었다. 또한 이를 통해서 뉴욕 뿐 아니라 미국의 경제까지도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이었고 그런다면 미군은 국외에 주둔 중인 병력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전개

1998년 9월 29일 오후 1시 경에 벌어진 이 테러는 1996년부터 계획되고 준비되었다.

준비

행동대장과 다른 조직원 1명은 1996년 12월 사우디아라비아의 여권을 이용해 F-1 비자, 즉 학생 비자로 미국에 입국했다. 이들은 뉴저지에 유학 온 학생으로 위장하여 거처를 잡았고, 그곳에서 폭탄을 제조했다. 다른 3명의 조직원은 각각 1997년 7월에 2명, 1998년 3월에 1명이 여행 비자로 입국하였다. 그 중 1998년 3월에 입국한 하피즈 알-힌디(Hafeez al-Hindi)는 폭발물로 추정되는 설계도를 소지한 것이 발각되어 국외로 추방되었다. 그렇게 해서 5명 중 4명만이 합류하는데 성공했다.

이들은 밴 한 대를 장기 렌트해서 주변 주로 이동하여 소량의 질산암모늄을 1997년 1월부터 9월까지 20차례 이상 구매했다. 그리고 이 질산암모늄들은 당연히 농사가 아닌 폭발물 제조에 이용되었다. 이들은 FBI와 ATF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항상 다른 상점에서 소량만 현금으로 구매한 이후 주유소에서 구한 경유와 질산암모늄을 섞어 ANFO를 제조했다. 하피즈 알-힌디가 가지고 있던 폭발물 설계도는 이 ANFO를 폭발 시키기 위한 일종의 뇌관 역할을 하는 전폭제 설계도였다. 하피즈는 국외로 추방되었지만 이들은 알 수 없는 경로로 셈텍스(Semtex)를 구해 전폭제로 사용했다.

제조된 폭탄은 300kg의 ANFO와 ANFO를 둘러싼 마그네슘, 산화철 분말이 담긴 상자를 압축 수소 탱크 3개가 둘러싼 주 폭발물과 전폭제인 셈텍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총합 무게는 약 660kg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각각의 구성 요소를 먼저 제조한 뒤 그들이 렌트한 밴에 탑재하면서 조립하는 과정을 거쳤다. 셈텍스에 연결된 퓨즈는 24.5m였다.

테러 및 피해

1998년 9월 29일 화요일 오후 1시 19분 경 행동대장 페르와즈 아키르(Firuz Akir)와 행동대원 압둘라 알-아마드(Abdullah al-Ahmad)는 세계무역센터 지하 1층 주차장의 2WTC 중심 부근에 밴을 주차하고 퓨즈에 불을 붙인 뒤 도주했다. 구체적으로 이들은 2WTC와 4WTC 사이에 차를 주차하고 도주했다.

1시 32분 7초 경에 폭발이 발생하여 충격으로 WTC 플라자 전체에 큰 진동이 울렸다. 동시에 2WTC의 우측 토대가 부숴졌고 2WTC는 1시 32분 28초에 잠시 우측으로 기울다가 남쪽 방향으로 그대로 무너져 내리면서 최소 7,000명에 달하는 직원들과 함께 도이체방크의 뉴욕 지점 사옥을 덮쳤다.[2]

붕괴 이후 제 2 세계 무역 센터 수습을 위해 몰려든 뉴욕 긴급 서비스의 차량들과 대원들

붕괴의 충격으로 WTC 플라자의 메인 파워라인이 손상되고 비상 발전기까지 먹통이 되면서 길 건너편의 7WTC를 제외한 모든 WTC 건물들이 그대로 정전되었으며, 각종 잔해를 그대로 맞은 1WTC와 5WTC 의 외벽이 크게 부서졌고 3WTC와 4WTC는 대파되었다. 더불어 미세하게 분해된 석면, 콘크리트, 철골 등의 기자재가 로어 맨해튼 일대를 뒤덮었다. 파편들에 맞고 사망한 사람들도 10여 명 있었다.

영향

  • 미국은 소련의 붕괴와 냉전 종식 이후로 팍스 아메리카나를 경험하면서 외부 위협 따위는 없던 안정적인 시기를 지내고 있었다. 이에 따라 대외정책 및 군사 개입에 대한 명분과 필요성이 점차 감소했고, 그런 전쟁을 장기적으로 펼친 예산도 부족했기 떄문에 차츰 국외 개입을 줄이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테러로 인해 당시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이 군사 개입을 예고했고, 실제로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이라크 등 심기를 건들였거나 건들 가능성이 있는 중동 국가들을 상대로 군사 개입이 시작되었다. 미 국내 여론 역시 전쟁에 강력히 찬성하고 있어서 빌 클린턴의 지지율이 91.4%까지 상승하기도 했다.
  • 미국의 팍스 아메리카나는 이 사건을 시작으로 상술했듯이 중동에 대한 대규모 개입을 시작하면서 종식되었다. 그리고 이 중동 개입은 살인적인 유가 상승을 불러 일으켜 2005년 석유 파동의 계기가 되고 말았다.[3]
  • 미국과 세계의 경제 중심지인 뉴욕, 그것도 로어 맨해튼이 폐허가 되면서 뉴욕 GDP는 153억 달러 감소하고 뉴욕 증시는 11.7% 대폭락했다. 이는 팍스 아메리카나가 종식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1. 폭발과 거의 동시에 2WTC가 붕괴하면서 도이체방크 사옥 건물을 덮쳤고, 건물의 파편이 플라자 전체를 휩쓸었을 뿐 아니라, 3WTC와 4WTC를 대파 시켰기 때문이다. 이것도 최소치이다.
  2. 도이체방크는 해당 건물을 인수한지 단 1년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사옥 건물은 약 700명의 직원들과 함께 붕괴되었다.
  3. 정확히는 예멘에서 내전이 발생해 사우디아라비아는 예멘 정부를, 이란은 후티 반군을 지원하면서 서로 간의 대리전으로 발전한 것이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