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민국 38)/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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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통치기 조선==
==신탁통치기 조선==
[[파일:Prison Release of Korean activists.jpg|섬네일|오른쪽|해방 직후 독립만세를 외치는 조선인들]]1945년 9월 13일 공식적으로 태평양 전쟁과 중일전쟁이 종료되고 일본이 항복하면서 조선은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해방이후 영호남 이북 지역에는 소련군이 주둔하게 되었고 영호남과 제주 지역에는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중국애 국민당과 공산당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었고 소련이 일본 북부지역을 점령하고 남사할린을 일본에게서 부터 병탄하면서 동아시아 내의 공산주의 영향력 확대가 실체화 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에 반공 방어선을 구축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소련이 조선에 대부분, 특히 공업지대가 집중되어 있는 북부지역을 점령한다는 것은 이 방어선에 구멍이 난다는 것을 의미했고 영호남 지역의 농업생산량이 조선의 농업생산량의 상당한 양을 차지하고 있으나 앞으로 다가올 현대사회 에서는 농업보다는 공업의 중요성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무었보다 소련군의 조선 점령 장기화는 조선의 공산주의 확대가 가속화 된다는 것이였기 때문에 미국은 어떻게든 해결 방안을 찾아야 했다. 우선 미국은 소련에 조선의 공동 신탁통치를 제안했는데, 일단 공동통치가 현실화 된다면 미소양국이 공동으로 조선의 행정권을 행사하게 됨으로 소련이 자신들의 뜻대로 조선을 공산화하는 것을 막을수 있고 무었보다 조선 전체에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 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영국과 중국을 끌어들이려고 했는데 초기에는 소련이 반대했으나 미국이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소련보다 훨씬 일찍 참전하여 더 많은 사상자를 낸 명분을 쥐고 흔들자 소련은 승낙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소련은 동유럽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이미 몰락작전에서 핵무기를 사용한 핵보유국인 미국의 심기를 건들이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리고 앞서 본듯이 명분에서도 밀렸기 때문에 4개국 공동 신탁통치를 승인하고 만다. (이 당시 미국대표는 "우리는 수데텐과 유고슬라비아의 해안가를 당신들의 노고의 대가로 넘겼는데 당신들이 점령지라는 이유로 조선을 가져간다면 우리는 유고슬라비아를 내륙국으로 만들겠다."라고 발언하여 소련측 대표를 침묵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미국은 조선내의 온건 좌파세력을 이용하기로 결심한다. [[파일:Sdfsfd.jpg|섬네일|왼쪽|신탁통치기 중앙청 (구 조선총독부)]]당시 조선에는 크게 4개의 세력이 있었는데, 친소적/급진적 공산주의자 (조선 공산당), 민족주의적 온건 사회주의자 (조선인민당), 친중 민족주의자 (한국독립당), 친미 민족주의자 (한국 민주당, 독촉)이 그것이다. 미국은 이 중 양대 민족주의자 세력과 온건 사회주의자 세력을 포섭하기로 한다. 일단 미국은 조선인들에게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온건 좌익 세력을 포섭하기위해, 그리고 지방 행정의 공백을 최소화 하기 위해 지방 인민위원회를 임시 행정조직으로의 전환을 재의했다. 소련은 당연히 찬성했고 중국과 영국도<del>천조국 눈치를 봐서</del> 수락했다. 그리고 조선 과도 민정정관 (임시 행정부 수장)에 여운형을 않혔다. (그러나 조선인민공화국을 정식정부로 인정해주지는 않았다.) 이런 미국의 행보는 한민당등의 극우세력을 자극시켰고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나 현실적으로 지지율이 조선인민당의 발끝에도 못미쳤던 그들이기 때문에
[[파일:Prison Release of Korean activists.jpg|섬네일|오른쪽|해방 직후 독립만세를 외치는 조선인들]]1945년 9월 13일 공식적으로 태평양 전쟁과 중일전쟁이 종료되고 일본이 항복하면서 조선은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해방이후 영호남 이북 지역에는 소련군이 주둔하게 되었고 영호남과 제주 지역에는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중국애 국민당과 공산당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었고 소련이 일본 북부지역을 점령하고 남사할린을 일본에게서 부터 병탄하면서 동아시아 내의 공산주의 영향력 확대가 실체화 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에 반공 방어선을 구축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소련이 조선에 대부분, 특히 공업지대가 집중되어 있는 북부지역을 점령한다는 것은 이 방어선에 구멍이 난다는 것을 의미했고 영호남 지역의 농업생산량이 조선의 농업생산량의 상당한 양을 차지하고 있으나 앞으로 다가올 현대사회 에서는 농업보다는 공업의 중요성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무었보다 소련군의 조선 점령 장기화는 조선의 공산주의 확대가 가속화 된다는 것이였기 때문에 미국은 어떻게든 해결 방안을 찾아야 했다. 우선 미국은 소련에 조선의 공동 신탁통치를 제안했는데, 일단 공동통치가 현실화 된다면 미소양국이 공동으로 조선의 행정권을 행사하게 됨으로 소련이 자신들의 뜻대로 조선을 공산화하는 것을 막을수 있고 무었보다 조선 전체에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 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영국과 중국을 끌어들이려고 했는데 초기에는 소련이 반대했으나 미국이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소련보다 훨씬 일찍 참전하여 더 많은 사상자를 낸 명분을 쥐고 흔들자 소련은 승낙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소련은 동유럽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이미 몰락작전에서 핵무기를 사용한 핵보유국인 미국의 심기를 건들이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리고 앞서 본듯이 명분에서도 밀렸기 때문에 4개국 공동 신탁통치를 승인하고 만다. (이 당시 미국대표는 "우리는 수데텐과 유고슬라비아의 해안가를 당신들의 노고의 대가로 넘겼는데 당신들이 점령지라는 이유로 조선을 가져간다면 우리는 유고슬라비아를 내륙국으로 만들겠다."라고 발언하여 소련측 대표를 침묵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미국은 조선내의 온건 좌파세력을 이용하기로 결심한다. [[파일:Sdfsfd.jpg|섬네일|왼쪽|신탁통치기 중앙청 (구 조선총독부)]]당시 조선에는 크게 4개의 세력이 있었는데, 친소적/급진적 공산주의자 (조선 공산당), 민족주의적 온건 사회주의자 (조선인민당), 친중 민족주의자 (한국독립당), 친미 민족주의자 (한국 민주당, 독촉)이 그것이다. 미국은 이 중 양대 민족주의자 세력과 온건 사회주의자 세력을 포섭하기로 한다. 일단 미국은 조선인들에게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온건 좌익 세력을 포섭하기위해, 그리고 지방 행정의 공백을 최소화 하기 위해 지방 인민위원회를 임시 행정조직으로의 전환을 재의했다. 소련은 당연히 찬성했고 중국과 영국도<del>천조국 눈치를 봐서</del> 수락했다. 그리고 조선 과도 민정정관 (임시 행정부 수장)에 여운형을 않혔으며 우익 세력보다는 적지만 어느정도의 지원을 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인민공화국을 정식정부로 인정해주지는 않았다.) 이런 미국의 행보는 한민당등의 극우세력을 자극시켰고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나 현실적으로 지지율이 조선인민당의 발끝에도 못미쳤던 그들이기 때문에 군정당국은 그들의 반발을 <del>상큼하게</del>무시해버렸다. 그리고 우익 민족진영들의 지지를 받기위해 민족주의 정당에 지원을 해주고 이후 과도 입법회에서 차기 국명을 정할때 조선이 아닌 대한민국을 지지하는등의 노력을 했다. 소련또한 이런 미국의 행보를 두고보지 않았고 공산당에 지원을 쏟아붙고 좌익단체의 통합을 장려하는등 조공 몸집불리기에 전념했다. 그 결과 1946년 조선 과도입법위원 선거에서 친미를 표방하는 민족주의 세력이 32%를 차지하고 (독촉 16%, 한독당 15%, 한민당 1%) 조선인민당이 기나긴 타협끝에 한독당, 김원봉의 신민당과 단일화하여 임시민정장관으로 선출되고 독촉과 조공이 암묵적으로 동의하면서 (당시 이승만은 "나는 좌익세력이 싫지만 지금은 타협이 필요한 때."라고 말했고 김구 또한 "좌익 세력이 민족국가와 자주대한(즉 '''소련에게 예속되거나 소련의 자치공화국이 아닌''')을 지지한다면 그들과의 단일정부 구성도 가능하다."라고 발언하몄으며 김원봉도 "남북조선이 통일정부를 구성 할 수 있다면 좌우 어느쪽이든 상관없다." 라고 말하며 연립정부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파일:과도입법의원.png|섬네일|오른쪽|1946년 개회한 조선 과도입법회]] 과도 입법회가 46년 5월중에 개회하자 과도입법회 내에서 여러 토론이 오갔고 심할때는 의회폭력까지도 발생했다. 드라마 '야인시대'나 그 이외 해방정국과 정부수립 직후를 묘사한 작품들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에는 여려 정당, 정치단체등에서 조직 폭력배들을 동원하여 반대파를 공격, 습격하는 일도 흔했고 혼란스러웠던 해방정국 초기에 총기가 대량으로 풀리면서 백의사, 민청, 조선청년전위대 등의 여러 단체가 무장하여 사회혼란이 가중되자 과도 입법회는 총기 금지법을 발의하고 통과시켰으나 실질적으로 잘지켜지지 않았고 경찰력의 부제로 조선 주둔 미군이나 소련군의 규모가 점점 가중되자 이것이 조선의 대한 미소양국의 영향력 중대와 치안/민생불안, 그리고 정치갈등을 더 심화 시킬수도 있다는 이유로 여러진영내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일부 전문가들은 연정붕괴의 가능성을 내비치기도 하자 여운형, 안재홍, 조소앙등의 중도파 세력들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하여 연정지속, 통일민족정부수립을 내새우며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인민당과 한국독립당 중도파 중심의 정치운동이였으나 점차 한독당내의 중도파가 몸집을 불리며 김구 당주석이 공식 참여를 선언하고 영미의 지지선언으로 독촉또한 참여를 결정하며 통일정부수립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이후 조선신민당도 참여를 선언하며 한민당, 조공을 재외한 모든 주요 정파가 참여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에 반대하는 세력도 존재했다. 한민당은 독촉의 참여 결정이후 성명을 발표, "좌우합작은 조국을 소련에 팔아먹으려는 치욕스러운 행위이며 독촉의 참여는 애국세력에 대한 반역이다."라는 입장을 발표했고 조공과 소련 또한 "좌우합작은 조선을 삼키려는 미국의 계략"이라는 입장을 발표하였으나 이러한 행위는 양당과 소련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떨어뜨리는 행위였을 뿐이다. 좌우는 번목을 번복하면서도 통일 국가수립을 위해 노력하였고 1948년 6월 10일 총선거를 통해 재헌 국회와 (재헌국회의 임기는 2년이였으며 참의원과 민의원 중 민의원만 소집 됨) 여운형을 총리로 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한 의원내각제 민주국가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
==여운형 내각==
[[파일:정부수립기념식.jpg|섬네일|왼쪽|1948년 9월 13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

2021년 4월 22일 (목) 19:3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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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국 38(民國三十八)은 가장 대표적인 대체역사 소재 중 하나인 중화민국국공내전 승리를 가정한 세계관 입니다.
민국 38년(1949년) 중화민국의 국공내전 승리 이후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변화한 여러 정치, 사회, 문화,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개요

대한민국 (민국 38)의 역사를 다룬다. 광복 이전의 한국사는 위키백과등의 타 사이트를 참고 바란다. 또한 민국 38 세계관에서의 대한민국의 근현대사 구분법은 큰 헌법 변경이 없었던 관게로 신탁통치기 조선 (조선과도통치위원회)과 각각의 총리 임기로 나뉜다.

신탁통치기 조선

해방 직후 독립만세를 외치는 조선인들

1945년 9월 13일 공식적으로 태평양 전쟁과 중일전쟁이 종료되고 일본이 항복하면서 조선은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해방이후 영호남 이북 지역에는 소련군이 주둔하게 되었고 영호남과 제주 지역에는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중국애 국민당과 공산당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었고 소련이 일본 북부지역을 점령하고 남사할린을 일본에게서 부터 병탄하면서 동아시아 내의 공산주의 영향력 확대가 실체화 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에 반공 방어선을 구축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소련이 조선에 대부분, 특히 공업지대가 집중되어 있는 북부지역을 점령한다는 것은 이 방어선에 구멍이 난다는 것을 의미했고 영호남 지역의 농업생산량이 조선의 농업생산량의 상당한 양을 차지하고 있으나 앞으로 다가올 현대사회 에서는 농업보다는 공업의 중요성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무었보다 소련군의 조선 점령 장기화는 조선의 공산주의 확대가 가속화 된다는 것이였기 때문에 미국은 어떻게든 해결 방안을 찾아야 했다. 우선 미국은 소련에 조선의 공동 신탁통치를 제안했는데, 일단 공동통치가 현실화 된다면 미소양국이 공동으로 조선의 행정권을 행사하게 됨으로 소련이 자신들의 뜻대로 조선을 공산화하는 것을 막을수 있고 무었보다 조선 전체에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 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영국과 중국을 끌어들이려고 했는데 초기에는 소련이 반대했으나 미국이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소련보다 훨씬 일찍 참전하여 더 많은 사상자를 낸 명분을 쥐고 흔들자 소련은 승낙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소련은 동유럽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이미 몰락작전에서 핵무기를 사용한 핵보유국인 미국의 심기를 건들이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리고 앞서 본듯이 명분에서도 밀렸기 때문에 4개국 공동 신탁통치를 승인하고 만다. (이 당시 미국대표는 "우리는 수데텐과 유고슬라비아의 해안가를 당신들의 노고의 대가로 넘겼는데 당신들이 점령지라는 이유로 조선을 가져간다면 우리는 유고슬라비아를 내륙국으로 만들겠다."라고 발언하여 소련측 대표를 침묵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미국은 조선내의 온건 좌파세력을 이용하기로 결심한다.

신탁통치기 중앙청 (구 조선총독부)

당시 조선에는 크게 4개의 세력이 있었는데, 친소적/급진적 공산주의자 (조선 공산당), 민족주의적 온건 사회주의자 (조선인민당), 친중 민족주의자 (한국독립당), 친미 민족주의자 (한국 민주당, 독촉)이 그것이다. 미국은 이 중 양대 민족주의자 세력과 온건 사회주의자 세력을 포섭하기로 한다. 일단 미국은 조선인들에게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온건 좌익 세력을 포섭하기위해, 그리고 지방 행정의 공백을 최소화 하기 위해 지방 인민위원회를 임시 행정조직으로의 전환을 재의했다. 소련은 당연히 찬성했고 중국과 영국도천조국 눈치를 봐서 수락했다. 그리고 조선 과도 민정정관 (임시 행정부 수장)에 여운형을 않혔으며 우익 세력보다는 적지만 어느정도의 지원을 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인민공화국을 정식정부로 인정해주지는 않았다.) 이런 미국의 행보는 한민당등의 극우세력을 자극시켰고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나 현실적으로 지지율이 조선인민당의 발끝에도 못미쳤던 그들이기 때문에 군정당국은 그들의 반발을 상큼하게무시해버렸다. 그리고 우익 민족진영들의 지지를 받기위해 민족주의 정당에 지원을 해주고 이후 과도 입법회에서 차기 국명을 정할때 조선이 아닌 대한민국을 지지하는등의 노력을 했다. 소련또한 이런 미국의 행보를 두고보지 않았고 공산당에 지원을 쏟아붙고 좌익단체의 통합을 장려하는등 조공 몸집불리기에 전념했다. 그 결과 1946년 조선 과도입법위원 선거에서 친미를 표방하는 민족주의 세력이 32%를 차지하고 (독촉 16%, 한독당 15%, 한민당 1%) 조선인민당이 기나긴 타협끝에 한독당, 김원봉의 신민당과 단일화하여 임시민정장관으로 선출되고 독촉과 조공이 암묵적으로 동의하면서 (당시 이승만은 "나는 좌익세력이 싫지만 지금은 타협이 필요한 때."라고 말했고 김구 또한 "좌익 세력이 민족국가와 자주대한(즉 소련에게 예속되거나 소련의 자치공화국이 아닌)을 지지한다면 그들과의 단일정부 구성도 가능하다."라고 발언하몄으며 김원봉도 "남북조선이 통일정부를 구성 할 수 있다면 좌우 어느쪽이든 상관없다." 라고 말하며 연립정부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1946년 개회한 조선 과도입법회

과도 입법회가 46년 5월중에 개회하자 과도입법회 내에서 여러 토론이 오갔고 심할때는 의회폭력까지도 발생했다. 드라마 '야인시대'나 그 이외 해방정국과 정부수립 직후를 묘사한 작품들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에는 여려 정당, 정치단체등에서 조직 폭력배들을 동원하여 반대파를 공격, 습격하는 일도 흔했고 혼란스러웠던 해방정국 초기에 총기가 대량으로 풀리면서 백의사, 민청, 조선청년전위대 등의 여러 단체가 무장하여 사회혼란이 가중되자 과도 입법회는 총기 금지법을 발의하고 통과시켰으나 실질적으로 잘지켜지지 않았고 경찰력의 부제로 조선 주둔 미군이나 소련군의 규모가 점점 가중되자 이것이 조선의 대한 미소양국의 영향력 중대와 치안/민생불안, 그리고 정치갈등을 더 심화 시킬수도 있다는 이유로 여러진영내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일부 전문가들은 연정붕괴의 가능성을 내비치기도 하자 여운형, 안재홍, 조소앙등의 중도파 세력들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하여 연정지속, 통일민족정부수립을 내새우며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인민당과 한국독립당 중도파 중심의 정치운동이였으나 점차 한독당내의 중도파가 몸집을 불리며 김구 당주석이 공식 참여를 선언하고 영미의 지지선언으로 독촉또한 참여를 결정하며 통일정부수립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이후 조선신민당도 참여를 선언하며 한민당, 조공을 재외한 모든 주요 정파가 참여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에 반대하는 세력도 존재했다. 한민당은 독촉의 참여 결정이후 성명을 발표, "좌우합작은 조국을 소련에 팔아먹으려는 치욕스러운 행위이며 독촉의 참여는 애국세력에 대한 반역이다."라는 입장을 발표했고 조공과 소련 또한 "좌우합작은 조선을 삼키려는 미국의 계략"이라는 입장을 발표하였으나 이러한 행위는 양당과 소련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떨어뜨리는 행위였을 뿐이다. 좌우는 번목을 번복하면서도 통일 국가수립을 위해 노력하였고 1948년 6월 10일 총선거를 통해 재헌 국회와 (재헌국회의 임기는 2년이였으며 참의원과 민의원 중 민의원만 소집 됨) 여운형을 총리로 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한 의원내각제 민주국가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

여운형 내각

1948년 9월 13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