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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국 38(民國三十八)은 가장 대표적인 대체역사 소재 중 하나인 중화민국국공내전 승리를 가정한 세계관 입니다.
민국 38년(1949년) 중화민국의 국공내전 승리 이후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변화한 여러 정치, 사회, 문화,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개요

대한민국 (민국 38)의 역사를 다룬다. 광복 이전의 한국사는 위키백과등의 타 사이트를 참고 바란다. 또한 민국 38 세계관에서의 대한민국의 근현대사 구분법은 큰 헌법 변경이 없었던 관게로 신탁통치기 조선 (조선과도통치위원회)과 각각의 총리 임기로 나뉜다.

신탁통치기 조선

해방 직후 독립만세를 외치는 조선인들

1945년 9월 13일 공식적으로 태평양 전쟁과 중일전쟁이 종료되고 일본이 항복하면서 조선은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해방이후 영호남 이북 지역에는 소련군이 주둔하게 되었고 영호남과 제주 지역에는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중국애 국민당과 공산당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었고 소련이 일본 북부지역을 점령하고 남사할린을 일본에게서 부터 병탄하면서 동아시아 내의 공산주의 영향력 확대가 실체화 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에 반공 방어선을 구축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소련이 조선에 대부분, 특히 공업지대가 집중되어 있는 북부지역을 점령한다는 것은 이 방어선에 구멍이 난다는 것을 의미했고 영호남 지역의 농업생산량이 조선의 농업생산량의 상당한 양을 차지하고 있으나 앞으로 다가올 현대사회 에서는 농업보다는 공업의 중요성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무었보다 소련군의 조선 점령 장기화는 조선의 공산주의 확대가 가속화 된다는 것이였기 때문에 미국은 어떻게든 해결 방안을 찾아야 했다. 우선 미국은 소련에 조선의 공동 신탁통치를 제안했는데, 일단 공동통치가 현실화 된다면 미소양국이 공동으로 조선의 행정권을 행사하게 됨으로 소련이 자신들의 뜻대로 조선을 공산화하는 것을 막을수 있고 무었보다 조선 전체에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 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영국과 중국을 끌어들이려고 했는데 초기에는 소련이 반대했으나 미국이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소련보다 훨씬 일찍 참전하여 더 많은 사상자를 낸 명분을 쥐고 흔들자 소련은 승낙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소련은 동유럽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이미 몰락작전에서 핵무기를 사용한 핵보유국인 미국의 심기를 건들이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리고 앞서 본듯이 명분에서도 밀렸기 때문에 4개국 공동 신탁통치를 승인하고 만다. (이 당시 미국대표는 "우리는 수데텐과 유고슬라비아의 해안가를 당신들의 노고의 대가로 넘겼는데 당신들이 점령지라는 이유로 조선을 가져간다면 우리는 유고슬라비아를 내륙국으로 만들겠다."라고 발언하여 소련측 대표를 침묵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미국은 조선내의 온건 좌파세력을 이용하기로 결심한다.

신탁통치기 중앙청 (구 조선총독부)

당시 조선에는 크게 4개의 세력이 있었는데, 친소적/급진적 공산주의자 (조선 공산당), 민족주의적 온건 사회주의자 (조선인민당), 친중 민족주의자 (한국독립당), 친미 민족주의자 (한국 민주당, 독촉)이 그것이다. 미국은 이 중 양대 민족주의자 세력과 온건 사회주의자 세력을 포섭하기로 한다. 일단 미국은 조선인들에게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온건 좌익 세력을 포섭하기위해, 그리고 지방 행정의 공백을 최소화 하기 위해 지방 인민위원회를 임시 행정조직으로의 전환을 재의했다. 소련은 당연히 찬성했고 중국과 영국도천조국 눈치를 봐서 수락했다. 그리고 조선 과도 민정정관 (임시 행정부 수장)에 여운형을 않혔으며 우익 세력보다는 적지만 어느정도의 지원을 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인민공화국을 정식정부로 인정해주지는 않았다.) 이런 미국의 행보는 한민당등의 극우세력을 자극시켰고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나 현실적으로 지지율이 조선인민당의 발끝에도 못미쳤던 그들이기 때문에 군정당국은 그들의 반발을 상큼하게무시해버렸다. 그리고 우익 민족진영들의 지지를 받기위해 민족주의 정당에 지원을 해주고 이후 과도 입법회에서 차기 국명을 정할때 조선이 아닌 대한민국을 지지하는등의 노력을 했다. 소련또한 이런 미국의 행보를 두고보지 않았고 공산당에 지원을 쏟아붙고 좌익단체의 통합을 장려하는등 조공 몸집불리기에 전념했다. 그 결과 1946년 조선 과도입법위원 선거에서 친미를 표방하는 민족주의 세력이 32%를 차지하고 (독촉 16%, 한독당 15%, 한민당 1%) 조선인민당이 기나긴 타협끝에 한독당, 김원봉의 신민당과 단일화하여 임시민정장관으로 선출되고 독촉과 조공이 암묵적으로 동의하면서 (당시 이승만은 "나는 좌익세력이 싫지만 지금은 타협이 필요한 때."라고 말했고 김구 또한 "좌익 세력이 민족국가와 자주대한(즉 소련에게 예속되거나 소련의 자치공화국이 아닌)을 지지한다면 그들과의 단일정부 구성도 가능하다."라고 발언하몄으며 김원봉도 "남북조선이 통일정부를 구성 할 수 있다면 좌우 어느쪽이든 상관없다." 라고 말하며 연립정부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1946년 개회한 조선 과도입법회

과도 입법회가 46년 5월중에 개회하자 과도입법회 내에서 여러 토론이 오갔고 심할때는 의회폭력까지도 발생했다. 드라마 '야인시대'나 그 이외 해방정국과 정부수립 직후를 묘사한 작품들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에는 여려 정당, 정치단체등에서 조직 폭력배들을 동원하여 반대파를 공격, 습격하는 일도 흔했고 혼란스러웠던 해방정국 초기에 총기가 대량으로 풀리면서 백의사, 민청, 조선청년전위대 등의 여러 단체가 무장하여 사회혼란이 가중되자 과도 입법회는 총기 금지법을 발의하고 통과시켰으나 실질적으로 잘지켜지지 않았고 경찰력의 부제로 조선 주둔 미군이나 소련군의 규모가 점점 가중되자 이것이 조선의 대한 미소양국의 영향력 중대와 치안/민생불안, 그리고 정치갈등을 더 심화 시킬수도 있다는 이유로 여러진영내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일부 전문가들은 연정붕괴의 가능성을 내비치기도 하자 여운형, 안재홍, 조소앙등의 중도파 세력들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하여 연정지속, 통일민족정부수립을 내새우며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 초기에는 조선인민당과 한국독립당 중도파 중심의 정치운동이였으나 점차 한독당내의 중도파가 몸집을 불리며 김구 당주석이 공식 참여를 선언하고 영미의 지지선언으로 독촉또한 참여를 결정하며 통일정부수립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이후 조선신민당도 참여를 선언하며 한민당, 조공을 재외한 모든 주요 정파가 참여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에 반대하는 세력도 존재했다. 한민당은 독촉의 참여 결정이후 성명을 발표, "좌우합작은 조국을 소련에 팔아먹으려는 치욕스러운 행위이며 독촉의 참여는 애국세력에 대한 반역이다."라는 입장을 발표했고 조공과 소련 또한 "좌우합작은 조선을 삼키려는 미국의 계략"이라는 입장을 발표하였으나 이러한 행위는 양당과 소련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떨어뜨리는 행위였을 뿐이다. 좌우는 번목을 번복하면서도 통일 국가수립을 위해 노력하였고 1948년 6월 10일 총선거를 통해 재헌 국회와 (재헌국회의 임기는 2년이였으며 참의원과 민의원 중 민의원만 소집 됨) 여운형을 총리로 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한 의원내각제 민주국가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

여운형 내각

1948년 9월 13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

1948년 9월 13일 정식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내각이 조직되었으나 당시 조선의 상황은 영 좋지 않았다. 당시에는 냉전이 막 시작되려는 시기였고 신생 정부의 가장 큰 후원자 역할을 했던 미국은 저 멀리 태평양 너머에 위치해 있었으며 중국또한 내전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이였다. 여운형 내각은 국가를 안정화 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을 쏟아부었으나 정치, 사회적 혼란과 극심한 좌우대립 그리고 기타등등 여러 요인에 의해 지체되고 있었다. 심지어 독촉의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 권한 확대를 외치며 신생 독립국 대한민국은 시작부터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런 와중에 북방의 소련과 조공의 영향력이 나로 커져가는 중 이였다. 그러던 와중 동년 11월 1일에 북일본 공산정부가 수립되자 조공은 "북부 일본에 사회주의 형제국가가 수립된 것은 매우 기쁜 일이며 조선은 사회주의 신일본과 함께해야 한다."라는 입장을 발표하고 11월 26일에는 "우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무산계급 독재국가를 세워야 한다."라고 국체를 부정하는 발언까지 하자 정부내 좌우 인사들이 합심해서 조공을 불법화 시켜벼렸다. 소련은 이런 조치에 매우 반발하였고 박헌영 위원장은 "민주주의는 종말했다."라고 말하며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한편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승기를 잡아 칭하이성 서부로 공산군을 몰아내고 있었고 미국이 1947년 부터 마셜플랜으로 서유럽을 지원하자 소련은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에 스탈린은 조선공산당에 무기를 지원해주고 결국 1949년 1월 7일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국 내전당시 평안북도 지역의 국군 진압군

1949년 1월 7일, 아직 대통령 권한 확대와 독촉 분당으로 인한 후유증이 한국 정계에 남아있을 무렵 나선과 청진 지역에서 조선공산당이 혁명을 선언하고 자체적인 정부수립을 선언한다. 이들은 조선인민사회주의공화국을 선언하고 대한민국을 "자본주의 부르주아지들이 세운 영미 제국주의자들과 중국 장개석 역적패당들의 괴뢰정권"이라고 폄하하며 이'불법정권'을 타도할 것울 천명했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쿠데타였다, 여운형 국무총리는 "조선공산당의 쿠데타는 우리 민족에 대한 반역."이라는 성명을 발표했고 이승만 대통령도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음모."라는 식으로 쿠데타를 경멸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그러나 초기 조선공산당의 산하 단체인 조선인민혁명전선이 사보타주를 일으키고, 허약했던 국군덕에 공산반군은 점차 세력을 넖혀 나가기 시작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날수록 공산반군의 세력은 확대 되었고 이후 회령, 경흥, 무령 등으로 세력이 확대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1월 중순쯤에는 국군이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성공하고 중국에서 의용군을 파병하면서 어느정도 반군의 세력이 약화되어 가던 그때, 북일본 또한 의용군을 파병하면서 (북일본 정부는 "인민들의 자발적인 행동"이라고 공식 발표) 전선은 다시 교착되기 시작했다. 전쟁은 장기전으로 확대되었고 결국 주일미군이 파병되고 중국이 증원군을 보내면서 결국 조공 주요인사들이 대거 소련으로 망명하며 끝이 났다. 당시 계절이 겨울이였고 부실했던 국군의 장비와 장기전으로의 확대로 수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했으며 그래서 흔히들 이 사건을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라 불려지게 되었다. 이사건으로 인해 조공등 강경 좌익 세력은 한국에서 세를 잃게 되었고 한국인들 사이에 반공주의가 뿌리내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이사태는 미국, 중국 그리고 서유럽권 국가들에 매우 큰 충격을 줬다, 그들은 소련이 자국 내의 공산당과 결탁하여 자국의 체제를 붕괴시킬 수 있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서방권 전체에 매카시즘적 분위기가 넘쳐나게 만들었다. 한편 이런 매카시즘적 분위기가 세계적으로 퍼져나가자 한국은 의외의 수혜를 받게 되었는데 초기 미국의 냉전시 아시아 정책은 중일 양국을 기초로 하였으나 도미노 이론이 급부상 하며 미국이 한국에 엄청난 지원을 넣기 시작했고 그 지원으로 여운형 내각은 국가경제의 기반을 다져놓기 시작했다.

퇴임사를 낭독하는 여운형 총리

전쟁은 너무나도 많은 상처를 반도에 남기고 끝났다. 한국 내전 이후 서구권의 반공 우익정권은 중도좌파 성향의 여운형 내각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여운형 내각을 지원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고 조선이 도미노 이론의 시발점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조선에 엄청난 원조를 쏟아부었다. 여운형 내각이 처음으로 한 일은 토지개혁이였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기반이 농민들에게 있다 생각한 여운형 내각은 유상몰수 무상문배를 기초로 한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원조받은 돈으로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자 농민들은 여운형 내각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공업 육성계획안을 발표하며 반도 산업화의 첫 삽을 떴다. 방직 산업, 소비재 공업을 기초로 경공업을 육성하여 민생경제를 부흥시키고 국민생활을 이전보다 윤택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또한 당시 남는 인력을 소비재 생산 전선에 투입하여 실업률을 줄이고 소비재를 싼 값에 풀어 물가를 안정시켰다. 농업면에서는 곡물 수매제를 실시하여 농업의 부흥과 식량생산의 안정화를 꾀했으며 농업증산 3개년계획을 실시하여 국가안정의 기반을 다졌다. 그리고 우익세력과의 지속적인 연정을 통한 국민통합을 도모했다. 1950년 6월 30일 여운형 총리는 퇴임사를 낭독했다. 한국 현대사를 풍미한 거인의 퇴임식에는 수백, 수십명의 인파가 몰렸다. 여운형 총리는 퇴임식에서 "나는 운이 참 촣은사람이다. 조국의 독립과 민주주의 정부의 수립, 그리고 웃고있는 인민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퇴임사를 낭독했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초대 정부는 성공적으로 임기를 끝마쳤다. 여운형 총리 퇴임 직후 7월 3일에 총선거가 실시되고 또다시 인민-독립-신민 연정이 선포되면서 조소앙이 총리에 취임했고 이렇게 정식으로 여운형 내각이 끝나고 조소앙 내각이 출범하며 대한민국은 세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조소앙 내각

취임 당시 조소앙 총리

1950년 제2대 총선에서 조선인민당과 한독당 내의 중도파가 크게 약진했다. 우선 불법화된 조공의 빈자리를 인민당이 채웠고 대통령제 논란으로 지지율이 바닥을 치던 독촉과 한민당의 빈자리를 중도파가 매꿨는데 한독당 중도파의 수장인 사민주의 성향의 조소앙이 인민당과 합의하여 제2대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조소앙 총리는 기존의 좌우합작정부를 유지시킴과 동시에 합작의 강화를 위해 노력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