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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시대는 "만약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했다면?"을 바탕으로 제작된 시즌제 대체역사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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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국회의원 선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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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2월 12일 12대 총선 |
→ | 1988년 4월 26일 13대 총선 |
→ | 1992년 3월 24일 14대 총선 | |||||||||||||||||||||||||||||||||||||||||||||
투표율: 75.8% (▼ 8.8%p) | |||||||||||||||||||||||||||||||||||||||||||||||||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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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988년 4월 26일에 실시된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75.8%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제6공화국 수립 이후 제도적 민주주의가 정착되면서 실시한 첫 선거이자 대통령 직선제에 따라 조기에 실시된 선거이기도 하다. 국회의원의 임기가 4년인 만큼 원래대로라면 1989년에 치러졌어야 할 선거였지만 1987년 개정된 헌법에 따라 조기 실시되었다. 이 총선부터 기호를 추첨제로 정하지 않고 원내 다수당 순서대로 상위 순번의 기호를 부여받도록 했다.
의원 정수는 299명으로 12대 총선 때보다 23명이 늘어났는데, 지역구 의원 수는 40명 늘어난 반면 전국구 의원 수는 17명 줄어들었다. 또 기존의 선거 제도도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전환되었으며, 지역구 의석수 1위 정당이 가져가는 기존의 선거법이 완화되어 1/2로 감소되었다. 이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한겨레민주당, 민주한국당, 신한민주당, 한국국민당, 민중의당, 우리정의당, 제3세대당, 변화당 등이 참여하였다.
과정
민주정의당은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양김의 분열[1]과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으로 정권 재창출에 성공하긴 했지만, 동시에 4당 지지세가 뚜렷한 지역구도가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때문에 노태우 정부는 지지 기반이 상당히 불안정한 채로 임기를 시작했으며, 야권에서는 정부여당을 저지하고자 단일화를 한다면 민주당계가 총선에서 압승을 거둘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야권의 단일화 실패는 물론, 5공 인사 배제 등의 승부수로 여당의 호재가 지속되었고,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바뀐 것 역시 여당의 호재로 여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년대부터 이어져 온 관권, 혼탁선거는 민주화가 된 후에도 개선의 여지를 보이지 않았는데, 이 때 "이번에 민정당에게 몰아주면 다시 의원 내각제 개헌을 통해 이전으로 돌아갈 것"이란 불안감, 전경환의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비리 사건 등으로 야권 지지층이 결집하면서 선거의 양상은 더욱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정의당은 과반 의석을,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은 제1야당 지위 확보를, 신민주공화당은 원내교섭단체(20석 이상)을 목표로 정했다. 한편 김정식이 주도한 변화당은 사회 개혁과 5공 비리 청산을 내세우며 원내 진입을 약속했고, 최대 2석 확보를 예상했다.
개표 결과
지역구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지역구 의석 현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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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민주정의당 | 평화민주당 | 통일민주당 | 신민주공화당 | 한겨레민주당 | 무소속 | 합계 |
서울 | 10 | 17 | 10 | 3 | 0 | 2 | 42 |
부산 | 1 | 0 | 14 | 0 | 0 | 0 | 15 |
대구 | 8 | 0 | 0 | 0 | 0 | 0 | 8 |
인천 | 6 | 0 | 1 | 0 | 0 | 0 | 7 |
광주 | 0 | 5 | 0 | 0 | 0 | 0 | 5 |
경기 | 16 | 1 | 4 | 6 | 0 | 1 | 28 |
강원 | 8 | 0 | 3 | 1 | 0 | 2 | 14 |
충북 | 7 | 0 | 0 | 2 | 0 | 0 | 9 |
충남 | 2 | 0 | 2 | 13 | 0 | 1 | 18 |
전북 | 0 | 14 | 0 | 0 | 0 | 0 | 14 |
전남 | 0 | 17 | 0 | 0 | 1 | 0 | 18 |
경북 | 17 | 0 | 2 | 2 | 0 | 0 | 21 |
경남 | 12 | 0 | 9 | 0 | 0 | 1 | 21 |
제주 | 0 | 0 | 1 | 0 | 0 | 2 | 3 |
전국 | 87 | 54 | 46 | 27 | 1 | 9 | 224 |
전국구
주요 정당별 전국구 득표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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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 득표수 | 의석 |
득표율 | ||
38석 | ||
16석 | ||
13석 | ||
8석 | ||
기타 정당별 전국구 득표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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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인
평가 및 분석
제13대 국회 구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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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계 92석 | 보수정당 166석 | |||
한겨레민주당 | 평화민주당 | 통일민주당 | 신민주공화당 | 민주정의당 |
1 | 70 | 62 | 35 | 131 |
※ 무소속 당선자의 원대복귀가 모두 이루어졌다고 가정했을 때의 의회 구도 |
선거 결과, 민주정의당은 125석으로 제1당 지위를 유지하는데 성공했지만, 지역구 1당이 전국구(비례대표) 의석 절반을 배정받는 제도에 따라 전국구 38석을 얻었음에도 지역구 87석(득표 34%)을 얻는데 그쳐 과반 확보에 실패했다. 민정당은 영남 지역에서 여전한 강세를 보였고, 여당 지지세가 상당한 인천을 거의 석권하는 등의 선전을 보였는데, 정작 수도권에서는 77석 중에서 32석 밖에 흭득하지 못한데다 신민주공화당으로 결집되는 양상도 일부 나타났기 때문에 , 지난 총선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낮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야당인 통일민주당은 금정구를 제외한 부산 지역을 석권하고, 호남을 제외한 전국에서 고른 득표를 얻어 2위를 기록했으니 끝내 원내 3당에 그쳤다. 다만 강남 지역에서는 8석 중 4석을 확보해 여당 후보를 꺾는데 성공했고, 평화민주당도 전국 득표율과는 별개로, 호남 석권과 호남 원적 유권자가 많은 서울에서 17석을 확보하며 단숨에 원내 2당을 차지했다. 반면 신민주공화당은 충청권과 경기도에서 선전하였을 뿐, 충북 지역을 민정당에 내주면서 충남 맹주로 자리잡게 되었다.
제3야당을 표방한 한겨레민주당은 전남 신안의 박형오가 당선되었을 뿐, 변화당은 김정식을 비롯한 후보자 전원이 낙선해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다. 박형오가 당선된 이유는 한화갑의 후보 등록이 무효 처리되면서 평화민주당이 박형오를 밀어줬기 때문인데, 사실상 자력 당선이라기보다는 민정당 후보를 막기 위한 선거 전략에 불과했다. 결국 그나마 당선된 박형오마저 평화민주당에 입당하면서 한겨레민주당은 소멸되었고, 변화당도 원내 입성을 노리는데 실패해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다. 또 지난 총선에서 참여했던 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 신한민주당 등은 아예 당선자조차 내지 못하고 역시 해체된다.
결국 총선을 통해 여소야대로 시작한 13대 국회는 노태우 정부의 국정 운영에 타격을 입게 되고, 민주화 열풍과 맞물려 광주특위 구성 등으로 5공 비리의 존재, 사회 각지에서의 각종 부조리한 문제점 제기가 활발히 이루어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소야대 구도는 1989년 공안 사건을 거쳐 1990년 3당 합당으로 전세가 완전히 뒤집어졌으며, 이 선거를 통해 지역주의가 더욱 극대화되기도 했다.
각주
- ↑ 이 사건의 여파로 양김의 화해와 단일화를 주도했던 김정식과 몇몇 인사들이 결별하여 변화당을 창당하는 계기를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