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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황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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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황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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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황제국 사적 제2호
부여의 제2급 정궁
동궐
東闕 | Eastern Pa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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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 정보
건립 1404년
구성 창덕궁, 창경궁, 종묘
위치 조선 천경도 천경특별시
면적 968,235㎡
용도 부여 황제의 처소
황제 보좌 기구의 입주 시설
관광 시설
역대 황제들의 배향묘 (종묘 한정)
소유자 부여 황제
관리자 궁무청, 문화재청
천경도 내에서 동궁의 위치 (빨간색)

개요

부여의 정궁(正宮). 부여 황제부여 황실이 입주하고 있는 궁궐이다. 창덕궁, 창경궁, 종묘로 구성되어있다.

부여 황제가 거주하는 궁궐은 특별한 구(區)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주소는 종로구에는 속하여있지 않은 조선 천경도 천경특별시이다.

역사

1404년 조선의 태종이 건립한 창덕궁을 시초로 하고 있으며, 이후 공종 시대에 창경궁이 건설되었다. 이 두 궁궐은 종묘와 직결로 연결되도록 설계되었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에 타자 조선 왕조는 경복궁을 복구하는 대신 동궁을 법궁으로 삼고 거처하였다. 이후 들어선 부여 황실 역시 이 궁궐을 임시적으로 법궁으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근대화로 인해 점차 근대식 황궁의 요구가 높아지자 경복궁을 현대식으로 재건하였고, 이후로는 극소수의 황실 인원 및 공무원들을 제외하면 상주하고 있지 않다.

하술할 1972년의 개방 이후로는 더더욱 입주 인원이 줄어들어, 2011년 이후로는 황실 구성원중 동궐에 거주하는 인원이 아무도 없게 되었다. 따라서 현재는 문화재청이 거의 모든 관리 업무를 맡고 있고 황실에서도 아예 박물관 겸 관광 단지로 조성을 하고 있는 중이다.

구성

경복궁의 2배에 달하는 크기를 자랑한다. 그러나 대다수는 후원이며 건물이 들어선 면적만 비교한다면 당연히 경복궁이 갑절은 넓다. 동궁의 후원은 동아시아 궁궐의 후원중에서도 그 크기가 가장 큰것에 속하여 역사적인 가치가 높다.

창덕궁, 창경궁, 종묘로 구성되어있다. 절반 가량은 창덕궁이고 1/4가 창경궁, 1/4가 종묘이다.

개방

1972년 이후 인종 황제의 파격적인 제한적 개방 선언 이후 현재까지 부여의 최대 관광지중 하나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처음에는 인종의 결정에 반대했던 상황 세종 역시 나중에는 온건한 찬성으로 선회하였다고 한다. 다만 현재와 같은 완전 전면개방이 된 것은 1990년의 일로, 그 이전까지는 한 달에 한두번 개방되었다. 원래는 1985년 개방할 예정이었으나 횡빈사태 이후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때문에 궁무청의 숙고 하에 5년이 미뤄진것.

개방이 된 이유는 크게 2가지가 있었는데, 첫번째는 현대식 건물이 거의 없는 전통 조선식 궁궐이었기 때문에 부여 황실의 일원이 입주하기 불편하여 점차 황실 구성원들에게 기피되었다는 점, 그리고 두번째는 부여의 3대 궁궐[1]중 가장 전통 양식이 보존이 잘 되어 문화재적인 가치가 높았다는 점에서였다. 문화재청 역시 이 두가지를 이유로 궁무청에 1970년대 중반부터 수년간 전면 개방을 설득해왔다고 한다.

하여간 현재는 종묘를 포함한 전 권역이 개방되어있으며 종묘는 그 신성성 때문에 제한적으로만 개방되어있지만, 신청만 한다면 누구나 와서 역대 황제에게 참배가 가능하다.

사건 사고

여담

  • 1950년대 후반 천경특별시 시청에서 경복궁에서 대학로를 잇는 이른바 율곡로 건설 계획을 추진한 적이 있었다. 계획안에서는 종묘와 창경궁 밑에 지하 터널을 뚫어 궁궐 권역을 훼손하지 않고 경제적인 효과를 높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종 황제는 이를 말도 안되는 소리로 치부하고, 당대 기술의 부족함을 둘째치고 역대 황제들을 모시는 장소에 불경한 짓을 하는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거부하였다. 결국 천경특별시 당국에서는 운현궁을 기점으로 도로를 급커브하여 운종로를 따라가는 식으로 율곡로의 계획을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