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mmunist 1968, 2022 | CC-0
부여황제국
관련 문서
[ 펼치기 · 접기 ]

부여의 구성국
[ 펼치기 · 접기 ]
대청국
(1917~ )
대조선국
(1813~ )
일본국
(1910~ )
유구왕국
(1878~ )
대만국
(1893~ )
북이국
(1900~ )
부여의 구성국 및 관구
다이칭 구룬 ・ 대청국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 大淸國
국기 국장
國蒼穹保
국가는 하늘의 보우를 입는다
역사
• 누르하치의 겅옌 한 추대 1616년
• 대청국 선포 1636년
• 부여의 보호국화 1917년
• 부여의 제후국화 1922년
행정구역 정보
국가 부여
수도 묵던현급시
최대도시 장춘현급시
하위 행정구역 6개 도[1]
면적 1,192,081km2
인구 8,362만 7,900명[2]
인구밀도 70.15명/km2
민족 구성 만주족 63.6%, 한족 13.4%, 조선인 13.1%, 몽골인 3.3%, 러시아인 2.5%, 기타 4.1%
GDP $4조 7,918억 7,867만
1인당 $57,300
국성 부여 황실
아이신기오로 하라
황제 고신언링여 한
청왕 현양왕
책임장관
(정부 수반)
무소속 김영인 / 제32대
자치의회
(220석)
163석
28석
8석
5석
2석
무소속 14석
도지사
5석
1석
지역번호 064
ISO 3166-2 KR-632
위치

개요

부여의 관급 행정구역이자 부여의 6개 구성국중 하나. 국성은 아이신기오로 하라이며, 부여의 6개 구성국중 가장 인구가 많고 경제력이 높은 지역이다.

역사

제국 시기

1636년 대청국을 선포한 이후의 시대가 청나라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이자성의 난을 틈타 청나라는 명나라를 무너트리고 중원을 차지하였으며, 강희제의 치세에 지역 군벌과 잔존 명나라 세력을 분쇄함으로서 세계 최강대국으로 올라섰다.

지방의 반란 세력들을 진압한 청나라는 이른바 강건성세라고 불리는 최고의 태평성대를 맞이하였지만, 기나긴 태평성대 속에서 니오후루 허션으로 대표되는 정부 관리들은 부패하였고 군사 기술은 노후화되었으며, 지방 관리들의 백성 착취는 심각해졌다. 결국 이 태평성대 가경제 시기 백련교도의 난이 터지면서 끝장이 나고 만다.

그 이후로도 청나라는 쇠퇴를 면치 못하였으며 2번에 걸친 아편전쟁과 의화단의 난 등으로 인하여 그야말로 말이 국가이지 실질적으로는 식민지나 다름이 없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부여의 제후국으로서

1912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중국 각지에서 군벌들이 일어나 중국 본토는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고 청나라 중앙 정부는 중원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했다. 이에 부여에서는 밀사를 파견해, 청나라의 황실을 부여황제군의 호위 하에 선양으로 옮겨 몸을 피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청나라 황실은 이것이 청나라를 자신의 신하 국가로 두려는 부여의 속셈인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이에 응하고 1912년 선양으로 궁을 옮기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이후 1917년, 지속되는 중화민국 정부의 위협에 결국 청나라는 부여의 보호국화를 자처하게 되었고, 중화 황제의 옥새를 부여 황제에게 넘기면서 자발적으로 부여의 속국이 되었다.

1920년 즉위한 세종 황제는 청나라 자체를 부여의 제후국으로 편입시킴으로서 만주 지역에 대한 완전한 영유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청나라 황제는 이후 황제 작위를 박탈된 이후, 한단계 낮은 왕의 작위인 청왕의 작위를 받았다. 초대 청왕인 부의왕은 1917년부터 1973년까지 즉위하였다.

정치

아이신기오로 하라


청왕
[ 펼치기 · 접기 ]

부여황제국의 제후왕
[ 펼치기 · 접기 ]
황족 皇族
파일:대한제국 용보.png
부여 황제
융정제
황족
현율왕 상건왕 진청왕
육왕족 六王族

청왕

조선왕

일왕
애신각라씨 왕조
현양왕
이씨 왕조
강왕
본화씨 왕조
덕인왕

유구왕

만왕

북이왕
소씨 왕조
위왕
정씨 왕조
기헌왕
가씨 왕조
유천왕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愛新覺羅

이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 가문으로, 부여의 6개밖에 없는 세습 왕작(王爵) 작위를 보유하고 있으며, 특히 구 청나라의 황실을 이어받는다는 점에 있어서 그 권위는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런만큼 아이신기오로 하라의 왕족들은 다른 왕족들보다도 사회적으로 많은 특혜를 누리고 있다. 청왕과 8촌 이내의 사촌이라면 정부에서 관용차를 대접할 정도이다.

일부 중화 민족주의자들은 아이신기오로 하라가 나라를 동이족들에게 팔아먹고 자신은 오랑캐들에게 빌붙으면서 호의호식한다고 비판하기도 하나, 애초에 아이신기오로 하라는 한족이 아닌 만주족이기 때문에 이 주장은 부여인들에게 그다지 설득력을 얻고 있지 못하다.

조선어 음차로는 애신각라(愛新覺羅)라고 한다. 따라서 아이신기오로 하라와 애신각라씨 왕조는 같은 말이며, 만주 지역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는 보통 부르기 쉬운 애신각라라고 더 많이 하는 편이다.

현재의 당주는 현양왕으로, 2011년 7월 10일 즉위하였다. 왕족들은 선양에 위치한 선양행궁에 거주하고 있다.

사회

언어

만주어가 공용어로서 사용되고 있으나, 국민어는 조선어이다. 만주어는 제2의 언어, 혹은 사료 연구용 고(古)언어의 위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 청제국 시절의 영향을 받는 노년층들은 만주어를 대부분 사용할 수 있으며, 부여 정부의 의욕적인 교육 하에 현대 청년층들도 만주어를 잘 하지는 못해도 읽고 쓰며 일상 대화는 가능한 수준으로 구사한다.

한편 만주 문자 역시 보존되어 사용되나, 너무나도 어려운 탓에 지금은 일상 생활에서 거의 소멸되었다. 대부분은 조선글을 사용한다.

역사성 논쟁

중국부여 정부는 누가 청나라 역사의 적통한 계승자인지에 대해 분쟁을 빚고 있다. 중국 정부가 주장하는 바는 중화 황제국이란 중국 국민들의 의지로서 구성되는 공동체이지, 황실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 부여 당국에서는 청나라 황제가 직접 옥새를 부여 황제에게 바쳤고, 애신각라 왕족들도 청왕 작위를 이어받으면서 존중받고 있기 때문에 청나라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일부는 청나라 뿐만 아니라 모든 중화 황제국의 역사적인 정통성이 부여에게 있으며 중국은 단지 반란 세력에 불과하다고 폄하한다. 당연히 중국 정부에서는 이를 역사공정이라고 여기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 때문에 역사적인 분쟁을 자극할 것을 우려하여, 중국 정부는 청왕아이신기오로 하라 일족들이 중국에 방문하는 것을 제한하고 있다. 사실상 뒤늦은 추방 조치를 내린 것이다. 아이신기오로 하라 왕가는 장제스쑨원을 위시로 한 국민당 세력 자체가 좌익 세력의 난동이라고 평가한다.

한편 중소공과는 이렇다할 역사 분쟁이 없는 편인데, 이는 중소공이 국민당 정권을 무너트려야할 파시즘 독재 정권으로, 부여 황실과 아이신기오로 하라를 썩은 전제군주 구체제의 산물로 강하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1. 길림도, 요녕도, 흑룡강도, 내몽골도, 봉천도, 연변도
  2. 2022년 주민등록인구 통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