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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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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2243~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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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체제
지도자 (특별 시장)

역사

과두정 부산

대한민국 제 2의 도시였던 부산은 사건 직후 다른 도시들이 그러했듯이 매우 깊은 침체의 늪에 빠져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흐름에 거대한 사건의 현실은 악몽이 되어 흩어지고 있었고 점차 사건의 기억이 희미해져 갈 무렵에 타고난 인구수를 바탕으로 부산은 점차 부흥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당시 부산의 부흥을 이끈 것은 박정배라는 상인이었다 점차 뱃길이 열리고 살아남은 도시들이 상선을 건조해 무역을 재개하던 시점에 박정배는 발빠르게 개인 소유의 선단을 이용해 주변 도시들로부터 무역 협정을 단독으로 체결하는데 성공하며 그와 그의 가문은 부산의 명실상부한 지배가문으로 일약하게 된다

박씨 일가를 주축으로 한 상인 집단은 부산에 과두 체제를 가져왔고 부산을 상인들의 국가로, 부와 성공의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그런 상인 계급의 전반적인 성장을 바탕으로 하여 부산은 다시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라도 하겠다는 듯 괄목할만한 성장세를 보이며 23세기 초 경남의 무역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

부산이 성장함에 따라 다른 상인 가문들이 점차 득세하기 시작하며 박씨 가문의 독점에 반항하고 칼날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당시 떠오르던 남궁씨와 석씨 가문, 남씨 가문은 공화국 개혁의 상징으로서 박씨 가문에게 선거제를 도입할 뿐만 아니라 독재정이 아닌 공화정으로서의 부산을 요구하고 있었다

당시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남궁씨는 원래 서울에서 남하했던 상인 가문으로서 부산에 한국교의 교세를 처음 가져와 부산 전역을 개종시키며 통합파의 뿌리를 내리게 만든 지역 교구의 대귀족이었다 옛 한국의 가장 거대한 항구도시 부산의 정체성과 강력한 대한민국 복원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전면에 내세우며 신흥 상인 계급과 통합파 신자들의 대변자를 자처해 도시의 대귀족들을 결집시켜 공화파를 건설한 이념의 거두였다

거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등에 업고서 공화파는 박씨 가문의 독점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던 상인 계급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공화파의 강경한 압박에 더불어 최근 신안 제국의 약탈이 거세짐에 따라 박씨 가문은 대내외적인 압력을 감수해야만 했다 결국 2242년 가을 도시 전체에서 발생한 대규모의 소요 사태 이후 박씨 가문은 공식적으로 부산에 대한 독점과 지배를 포기하였으며 공화파가 새로운 도시의 지배 가문들로서 부산의 통치권을 위임받는 대신 상인 계급에게 한해 선거권을 보장하는 공화국 체제를 성립시킨다

부산 국제 자유국과 해양 패권

2243년 부산 국제자유국이 성립되었고 부산은 남해안의 독립적인 상업 공화정으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뽐내기 시작했다. 박씨 가문은 곧 축출되어 상권과 상선을 압수당하고선 강서의 김해 평야로 쫒겨났다. 그러고선 부산은 5년을 임기로 하는 선거제를 통해 공화파 대귀족, 남궁씨와 석씨 그리고 남씨 가문이 돌아가며 부산을 통치해 나가면서 박씨 가문의 독점이 사라지고 상인 계급의 권익은 더욱 향상되며 공화파의 파의 거대자본은 남해상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23세기 후반에 들어 부산은 상당한 외교적 마찰을 빚게 된다. 경상도에서 수많은 다른 국가들이 성장하면서 광신적 열정을 바탕으로 지역의 패권을 두고 점차 경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국제자유국의 특별시장 석성은 주나라와 가야연합, 불국토, 포항 등등 주변의 신흥 강소국들을 상대로 조약을 체결하며 영세중립국을 표방함으로써 무역 패권을 안정적으로 유지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세력 균형을 기저로 하여 주변 경쟁국들간의 완충지대와 그에 따르는 경제적 안정성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석성의 외교 정책은 근시안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표면적으로 주변의 신흥 강소국들은 세력 균형에 순응하여 각자의 국가와 영토에 충실하기 보다는 위험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적국에 대한 적대행위를 여의치 않았으며,이는 본질적으로 새로이 등장한 강소국들의 신앙 저변에 '사건'에서 기인한 극도의 불안감과 병적인 광신이 깔려있음을 전제하고 있었다. 극도로 혼란한 주변국들의 외교적 재앙은 부산 국제자유국의 무역 체계에 심대한 악영향을 주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끝내 몇몇 국가가 무단으로 국제자유국의 중립을 침범하기 시작함으로써 정치적인 혼란 또한 늘어만 갔다.

주변국과의 갈등이 군사적 행동으로 이어지기 시작한 사건은 2289년의 남해 독일의 상선 습격이었다. 당시 공화국 내부에서는 중립국을 표방하지 말고서 부산의 국력을 바탕으로 군사적 승리를 쟁취하자는 의견이 빈번하게 나오고 있었다. 이러한 담론을 이끌고 있던 것은 당시 집권 가문이었던 석씨 가문과 석성의 아들이었던 석린이었다. 당시 부산의 외교적 실패로 인해 석성은 공화국 내에서 사실상 퇴출 되었고, 석린은 점차 입지를 잃어가는 가문의 가주가 되었다.

막중한 책임감에 더해 가문의 미래를 짊어진다는 압박이 젊은 석린의 사고를 뒤흔들고 있었다. 그는 외교 정책의 실패를 묻는 상인들에게 지난 일을 만회할만한 속죄는 오직 군사적 성취라는 결론을 내렸다.

다소 무모해 보였던 석린의 모험은 꽤나 성공적인 시작을 경험했다. 단련된 수병들과 견고한 선박의 숫자에서 부산을 이길 국가는 해상에서 존재하지 않았고, 부산의 남해 독일에 대한 보복 전쟁에 크게 성공함에 따라 공화국은 자신들의 군사적 자산을 신용하게 되었다.

이후 부산은 스스로 영세중립국의 조약을 깨버리고 주변국에 대한 본격적인 적대행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점차 가시화되는 공화국 함대의 위협은 주변국들의 시선을 본격적으로 부산으로 돌리게 만들었고, 부산은 주변 강소국들에게 상당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공화국 함대의 승전보에 부산은 크게 고무되며 석씨 가문의 입지 또한 고공행진하고 있었다.

점차 위협을 느끼기 시작한건 단순히 영남의 강소국들 뿐만이 아니었다. 거대한 해상 제국으로서의 신안은 남해안에서 자신들을 제외한 새로운 해상 패권국이 등장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사실과는 별개로 영남의 강소국들도 부산에 대항하여 임시로 동맹을 결성하여 부산의 군사적 행동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부산에 대항한 영남 반국가 전쟁의 정점은 남해안 재해권에 대한 포항, 남해 독일과 진해 해군의 경쟁이었다.

석린의 지휘 아래서 함대는 포항의 주요 항구였던 울산과 포항을 봉쇄하던 중 급보를 받는다. 부산이 해안 봉쇄로 포항을 압박하던 중에 사전에 계획된 포항과의 동맹 협정에 따라 진해 해군과 남해 독일이 합동으로 부산항을 습격하였던 것이다.

급하게 석린은 함대를 돌려 남서쪽으로 향하여 진해와 남해 해군의 봉쇄망으로 돌입하며 부산 앞바다에서 양측 해군은 격돌했다. 격렬히 양측 함대가 통영에서 분전한 끝에 부산은 진해 함대를 섬멸하고 남해 함대는 패주하기 시작했다. 또 한번 얻은 승리에 도취된 부산 함대는 남해 함대를 쫒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부산 국제자유국과 남해안 국가들의 전쟁 동향을 면밀히 주시하던 신안 해군의 척후 함대는 남해 인근으로 접근하는 부산 함대를 포착했다. 신안 제국은 여수 연안에서 대기하던 본함대를 출전시켜 남해 앞바다에 진입하던 부산 함대의 후면을 급습하여 붕괴시켰다. 후방을 공격당한 부산 함대는 급히 뱃머리를 돌려 반격을 시도했지만 해상의 왕자였던 신안 제국의 해전 경험 앞에서는 그저 무의미한 발악에 불과했다. 2299년 겨울, 부산 국제자유국의 함대는 모두 석린과 함께 남해 앞바다에서 수장됐고 석씨 가문은 부산에서 숙청되어 재산을 몰수 당한 채 추방되었다.

되돌아 처음으로, 그리고 다시

함대를 잃은 부산은 상선의 부재로 인한 무역력의 손실을 뼈저리게 감수해야만 했다. 부산이 처한 상황은 단순한 무역과 상권의 부재에 국한되지 않았다. 엄청난 숫자의 인구를 부양해야만 하는 부산의 특별시장과 상선에게는 부산에게 식량을 공급해야만 하는 책임이 있었고 지금 그 책임의 주체가 부재한 최악의 순간에 공화파는 거대한 위기에 직면했다. 그리고 부산이 가공할 만한 식량난에 직면한 그 순간에 마치 혜성과 같이 박언화는 식량을 들고 귀환했다.

부산 국제자유국이 성립될 당시에 강서로 추방되었던 박씨 일가는 집요하게 독기를 품고서 부산의 왕좌를 노리고 있었다. 그들은 곧 지역의 지주로서 다시 발돋움했고 낙동강 삼각주 일대 김해평야와 강서를 본거지 삼아 다시 가문을 견실히 재건해냈다. 박씨 일가는 삼각주 일대의 풍족한 농업 기반에서 뿜어져 나오는 풍부한 인력과 식량을 바탕으로 부산 도심과는 현저히 다른 그들만의 권력체계를 발전시켜 돌아왔다.

그들은 부산에 식량을 무료로 공급해줌과 동시에 부산 도심에 대한 식량 독점권을 받아내며 끝내 과거에도 그러했듯 그들은 결국 다시 특권을 쟁취해내었다. 박언화는 봉건적 세습 영주로서 공화정 부산에 매우 노골적인 군주정의 야심을 드러내며 귀환한 것이었다.

그들은 농촌 일대의 부농과 지주 일대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마치 과거 신흥 공화파가 그랬듯 공화국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다. 박씨 가문의 가주 박언화는 농촌 지주와 도시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민중파를 결성하며 공화파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박씨 일가는 대중주의에 입각해 식량을 싼값에 공급하며 시민들에게 지지도를 얻어내며 자신들의 입지를 단단히 다져나갔다. 뿐만 아니라 보다 강한 힘과 권력을 추구하며 강력한 권력 체계와 결단력 있는 지도자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박언화는 결코 부산 국제자유국의 공화정을 폐지하자고도 민주적 전통을 비판하지도 않으면서도 동시에 군주정의 필수요소인 강력한 지도자와 신권, 민중의 지지를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측면에서 그런 그의 의도는 불보듯 뻔하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견고한 민중의 인기를 얻어내고 지주들에게는 강력한 충성 맹세를 받아내는 카리스마성을 지니고 있었고, 결국 공화국은 곧 민중파와 공화파의 거대한 양대 파벌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민중파를 주도하는 박언화의 박씨 가문과 공화파를 이끄는 남궁양도의 남궁 가문 사이에서 기존 공화파였던 남씨 일가는 어느 파벌에도 참가하는 것을 보류한 채 공화파를 탈퇴하며 정치적 결단을 보류하게 된다. 그렇게 석린 특별시장의 모험의 여파로 다가온 엄청난 후폭풍은 박언화의 4연 집권으로 되돌아 왔다.

2301년부터 시작된 4번에 걸친 박언화의 통치 아래서 박씨 가문은 그들만의 특권을 다시 확보하기 시작했고 독점권을 늘려나가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남궁씨의 공화파에 대한 공작이 물밑 아래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남씨 일가는 중립을 표방하며 자신을 포섭하려는 양측에게서 이익을 취했다. 결국 20년의 임기 동안 박언화의 박씨 가문은 강서와 기장의 농촌 일대에서의 그들 가문을 왕족으로 만들었고, 박언화는 부산의 총통을 자처하는 등 기존 부산 국제자유국의 공화국 전통을 상당부분 분쇄했으며 보다 봉건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일명 '부산의 총통' 박언화의 통치는 24세기를 시작하는 부산의 역사에서 큰 전환점을 남기게 된다. 공화국으로 대표 되던 공화파의 거대한 정치적 위기에 이어지는 과거의 독재정을 추종하는 복고주의자의 창궐, 그리고 2296년 신안 제국의 창건과 24세기 초반 울산을 영향권에 넣은 포항 왕국으로 대표되는 신흥 국가들의 발흥으로 인한 외교적 판도의 전면적 재편,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수많은 정치적 외교적 실패가 공화국을 덮치며 공화국 부산은 지난 반세기 동안 유지하던 무역 패권을 내려놓아야만 했고, 모든 사건의 종점에서 민중파로 대표 되는 포퓰리스트의 득세로 인한 공화정 체제에 대한 근본적 도전에 직면한 부산의 결정은 공화국 체제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는 국가적 안정성과 근본으로의 회귀를 대변하던 박언화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박언화는 2301년 공화국 특별시장으로 취임한 뒤 본격적인 국가의 정비에 집중하였다. 무역로의 상선과 상인 귀족 계급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국가의 경제 구조를 개혁하여 강서와 기장의 농촌에서 부산의 도심으로 이어지는 효율적인 식량 유통망을 건설하였고, 농촌 지대의 지주 계급을 지원하며 공화파의 상인 귀족 계급에 대항할 신흥 봉건 귀족층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도시의 빈민에 대한 주기적인 자선 활동과 상인 계급을 비판하며 민중의 손을 들어주는 등 광범위한 시민의 지지를 임기 내내 유지했으며, 자신의 영지인 강서와 기장 일대가 부산의 변경에 있음을 재차 강조하며 농촌 일대에 성채와 군사 기지를 여럿 건설해 군사적 특권을 얻어내었고, 기존 지주들에게 영지를 하사하여 군사적 의무에서 시작되는 봉건 계약을 바탕으로 대규모의 군제 개혁을 실시하며 군사에 기반한 봉건 귀족 계급을 등장 시켰으며, 또한 기존의 징세 체제를 세심하게 정비하여 십일조를 법률로 명시해 규정하고 소농민의 거주이전권에 제한을 두어 세금에 집중한 국가 경제를 성립 시켰다.

이후 신흥 봉건 귀족 계급에게 투표권을 주는데 성공한 다음 박씨 가문의 정치적 기반과 입지를 완전히 굳힌 박언화는 특별시장에서 퇴임하여 강서로 돌아갔다. 수많은 변혁이 있었던 박언화의 통치는 박씨 가문을 단순히 기존 지배 계급에 편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에 앞서서 국가를 군주정에 적합한 봉건적 질서로 먼저 개편하는 데에서 시작하겠다는 신중한 계산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대부분의 개혁 사항은 강서와 기장의 드넓은 평야에 국한된 것으로 부산이라는 국가를 도시와 농촌이라는 두가지 세계로 양분하는 결과를 남겼다. 박언화는 부산 국제 공화국이라는 거짓된 간판 아래 두 귀족 계급이 등장하여 앞으로 수십년간 국가를 나누고 반목시킬 오랜 경쟁에 불씨를 피운 것이다.

이후 남궁양도의 공화파가 재집권에 성공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인 도시에 대한 개혁 사항을 여럿 실시했다. 자국 상인들의 상권을 보호하고 조합과 연계하여 생산품을 효율적으로 납품하고 유통 시키며 도시의 구획을 체계적으로 나누어 자치권을 보장하고 공화정 이념을 더욱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 법전의 제작을 지시하는 등, 부산 도시의 권익 향상과 부산 공화국 함대의 재건 등등 자신들이 도시를 위해 여러 개혁을 경쟁적으로 실시해 더욱 도시를 발전시키는데 치중하였다. 이런 경쟁이 과열되고 있을 무렵 중립을 표방한 남씨 가문은 두 가문의 다툼을 중재하는 역을 도맡아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에 집중하고 있었다.

금빛으로 퇴색된 영광

24세기 후반에 부산은 지난 실패를 딛고 올라서며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문제가 있었다면 주변국의 성장 또한 그에 못지않게 더욱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해병대를 필두로 하여 강력한 해군 강습 병력을 운용하던 포항의 잇따른 군사적 성공에 부산은 더욱 긴장해야만 했다. 공화국 함대는 수십년간 국가 주도로 하여 재건 되고 있었지만, 석린의 실패는 해상에서 이미 부산의 영향력을 극도로 실추 시킨지 오래였다.

부산만이 함대를 열정적으로 재건하는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포항 뿐만 아니라 남해 독일과 진해 해군도 군비 증강에 열정적이었고, 여러 측면을 고려했을 때 진해 해군과 포항 왕국의 해군력은 이미 부산을 추월해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부산의 무역 입지는 나날이 축소되며 상인 계급은 기록적인 적자를 강요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악재가 계속 이어지는 상황에서 남씨 가문의 특별시장이었던 남일수의 돌연사는 부산 공화국에게 직격탄을 안겨주었다. 특별시장의 부재로 인해 시장 비서가 임시적으로 직무를 수행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으나 박씨와 남궁씨 양 대가문의 정치적 알력으로 인해 특별시장 대행의 직무 수행에는 크나큰 장애가 뒤따르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평소 양 가문을 중재하던 남씨 가문은 남일수의 죽음으로 인한 가장의 손실에 제대로 된 정치적 대응에 실패했다.

2384년 부산은 그렇게 두 국가로 분열된다. 일명 공위 시대의 혼란상에 부산 공화국 지도층의 정치력은 완전히 실종되었고 양대 대가문이 각자도생을 외치며 국가를 둘로 분단시켜 버렸다.

'석린의 모험'과도 비교할 수 없는 국가적 위기가 다시금 찾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부산과 이웃한 포항 왕국은 자신들의 정치적 손익을 교묘히 계산하고 있었다. 이들은 두 가문을 중재할 임무에서 포항이 정치적 술수를 이용해 남씨 가문을 배제해 버리고 자신들이 중재자로 나서겠다 청했다. 포항의 간접적인 국력 행사에서 부산은 한 발 물러나야만 했고, 부산은 포항에게 상당한 이권을 잃고 사실상 포항의 속국으로 자처해 들어가게 된다.

2389년 부산은 공식적으로 부산에 대한 포항의 수위권을 인정하였으며 그 대가로 포항은 부산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이는 포항이 부산을 완전한 종속국으로 편입시켰음을 의미하며 이후 부산은 반세기 동안 포항의 간섭을 받아야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포항의 영향권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부산은 여전히 지속적인 성장과 호황을 누렸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포항 해군의 비호를 받음으로써 안전한 상업 활동이 보장됨에 따라 무역 수치는 몇 년 만에 흑자를 기록하게 된다.

2444년 부산은 여전히 한반도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로서 거대한 자본을 소유한 해상 무역 지대의 동맥으로 기능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강서의 드넓은 낙동강 삼각주와 김해 평야, 기장 농촌의 막강한 생산력으로 대표되는 막대한 잠재력을 소유하고 있다. 이 도시를 지배하는 것은 3개의 대가문으로 확고한 자신들의 정치 질서를 부산에 요구하며 끝내 포항의 멍에를 벗어내고서 다시금 영남의 패권을 되찾으려 한다. 부산은 이제 그러한 가문들의 야망이 성공으로 이어져 한반도 전체를 물들일지 아님 포항의 봉신으로서 점차 역사에서 잊혀질 것인지의 기로에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