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전쟁
Ideenkrieg
날짜 1664년 2월 ~ 8월
장소 게파르토 게파르토 뵐케주 모지리
원인 제정 붕괴에 따른 정치적 혼란
결과 십자방패당의 승리. 정국 장악
교전국
지휘관


개요

사상 전쟁(Ideal War)는 게파르토 인민단결공화국에서 1664년 2월~8월까지 벌어진 정치 단체들의 무력을 동반한 권력투쟁을 의미한다.

게파르토 제국은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에서 패배한 그란치프 제국의 동맹국으로서 참전한 여파로 인해 막대한 배상금과 정치적, 물적 손해를 달게 되었고, 이로 인해 불만을 가진 장교단에 의해 군 고위 장교 ‘피안토네 주카레프’ 장군과이 휘하의 병력, 사관학교 학도생을 이용하여 1663년 12월 31일, 신년 기념 열병식이 벌어지는 사이 ‘해넘이 정변’을 일으켰다.

해넘이 정변 이후 개국된 ‘게파르토 인민단결공화국’의 대통령궁(구 황궁)을 점령한 피안토네는 스스로 비상시국과 계엄령을 선포한 이후 국가 재건을 위한 임시 제왕적 대통령제를 실시한다. 피안토네는 아직 세워지지 않은 의회를 폐쇄하고, 아직 지명되지 않은 총리의 직위를 흡수하여 ‘지극히 일시적인’ 철권을 행사한다.

피안토네 총통은 ‘재건’을 위해 권력과 직위를 인양받는 외에도, 모지리 시 외부에서 단절되어 고립된 구 게파르토 제국군 전체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1664년 1월~2월간 ‘대협상’이라 호칭되는 군 회유 작전을 시작했다. 주요 전략 지점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병력 외에는 쿠데타에 참여한 병력과 혁명 이후 회유된 병력 대부분이 신 체제에 비순응하는 병력에 대한 회유와 토벌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막 혁명이 일어난 게파르토 민간에는 거대한 치안적 공백이 발생하게 되었다.

한편 게파르토 민간에서는 단순히 황제가 권좌에서 끌어내려졌다는 소문만이 알려져 귀족이 아닌 노동자 계층의 정치 참여에 대한 기대감이 웃돌고 있었다. 계엄령이 발동되었으나, 재빠른 치안 수습과 민중 조종이 동반되지 않은 탓에, 일부 지방 도시에서는 구 제국 시기 경찰들이 그대로 등용되거나, 혹은 자발적 의사에 의해 치안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국민들에게는 대외적으로 의회가 폐쇄되었으며, 피안토네가 총리의 권력을 습득해 총통의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이 늦게, 혹은 의도적으로 천천히, 또 조심스럽게 공개되었다. 대협상 작전이 종료된 직후 피안토네가 민간의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한 와중에는, 이미 게파르토의 지방과 수도권에서 수십~수백개에 달하는 군소 정당들이 난립하게 되었다.

역설적으로, 대협상 작전으로 인해 서 정치적 관심이 집중되는 수도 모지리 시와 주위를 둘러싼 뵐케 주에 비해 제국군을 회유하기 위해 투입된 게파르토군과 혁명 소식을 제때 접하지 못한 지방권의 치안이 더욱 안정적이었다.


진행

혁명 이후 게파르토 민중의 이념적 이데올로기는 사회주의, 복고주의, 피안토네의 방식에 순응하는 (유사)공화정까지 총 3개의 분파로서 나뉘어져 있었다. 이외에도 다양한 사상들이 공존하여 아나키즘, 고전적 자유주의, 심지어 파시스트들까지 존재했다. 치안의 부재와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이 끝나며 세계 각국에 헐값으로 퍼진 여러 무기들, 이미 제정 시기부터 기획되던 여러 정치 공작 등으로 인해 대협상 기간 동안에도 정치깡패가 공개적으로 길거리에서 서로 중기관총과 소형 박격포까지 동원하여 교전을 벌이는 상황이었다. 게파르토의 정치깡패 다수가 구 제국군 출신인 경우가 많았기에, 사태는 심화되었다.

사회주의를 주장한 계열과, 아직 잔존한 황실 일가의 방계 혈통을 유입시킨 입헌군주제를 주장한 계열의 지도자격 위치를 점한 단체는 각각 혁명 동맹과 철모 부대였다. 각각 정치깡패 조직이자 당군인 ‘혁명전위대’와 ‘조국소생회’가 서로 수도 모지리 시와 뵐케 주에서 직접적인 교전을 벌이던 와중이었다.

이 와중 피안토네의 질서를 거역하지 않기로 한 ‘주카레프 불리예트’는 물리적 분쟁이 심화되는 수도를 빠져나와 혁명이 알려진, 그러나 공권력의 부재가 심화된 뵐케 주 외곽과 자신의 고향인 노르트란트 주, 또다른 지방 지역을 노렸다. 주카레프가 힘을 얻기 시작한 시기는 4월~5월이며, 피안토네는 대협상 작전이 끝난 이래 수도로 돌아와 그간 지방에 집중되어있던 병력들을 수도에 균형적으로 배치해 소란을 일으키던 왕당파와 사회주의자들을 진압하고 있었다.

피안토네는 키르수스- 그란치프 전쟁에서 키르수스의 편에 서 게파르토 공화국을 양면전선 상태에 빠지게 한 공화국 연맹의 공산주의자들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게파르토 국내의 좌파 혁명 세력은 전부 공화국 연맹의 사주를 받고 적색 정권을 세우기 위한 것임을 암묵적으로 확신한다. 결국 왕당파 인원보다도 공산주의자들을 먼저 수도에서 적출해내기로 결정했고, 몇달에 걸쳐 뵐케 주와 모지리 시의 공산주의자들은 게파르토 공화국군의 공격을 받아 대부분 와해된다.

1664년 7월 12일, 몇 차례의 토벌로 인해 군사집단적인 영향력이 완전히 거세된 게파르토 혁명동맹이 당 청사 겸 연설장으로 사용중이던 ‘뵈뢰조나야 맥주홀’과 일대의 정부 청사에 의문의 화재사건이 발생한다. 화재로 인한 사망한 중 흉기를 소지한 인원 일부에서 몇개의 붉은 목도리를 입수한 혁명동맹은 이러한 사태에 대해 ‘어떤 세력의 명백한 의도적 방화’라는 입장을 고수했으며, 이러한 사태의 책임은 극우 백색테러주의자들인 ‘철모 부대’에게 있다 주장했다. 철모 부대는 이러한 입장 발표를 외면했다.

철모 부대 내부는 지휘부의 혼란으로 인해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철모부대의 지도층은 황궁에서 도망쳐나온 몇 명의 원로 장교들이었는데, 이들 중 몇명이 도피 당시의 충격과 공산주의자들의 암살, 또는 의문사로 인해서 부재한 와중이었기 때문이다.

1664년 7월 15일, 십자방패당 소속 인원들이 일제히 지방과 뵐케 외곽에서 구도 ‘모지리 시’로 진군해왔다. 후일 모지리 진군March on Mojiri라 호칭된 이 사건 이후 당수 주카레프는 대통령궁 앞에 당도했는데, 피안토네는 몇달간 굳게 닫혀있던 성문을 열고 나와 주카레프에게 새로 건설될 ‘비상 국가 재건 의회’의 총리 직을 제안했으며, 주카레프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모지리 진군 이후 주카레프는 게파르토의 총리직을 얻게 되었다. 피안토네와 주카레프는 그렇게 게파르토 공화국의 모든 것이 되었다. 분열한 혁명동맹과 철모 부대는 계엄령 이후 건설된 의회에서 어용정당으로서 사실상 꼭뚜각시로서 움직이게 된다. 원내에 있는 정당 중 십자방패당은 좌석 중 69%를 차지중이었고, 혁명 동맹과 철모 부대는 나머지 31퍼센트를 얻었다. 대통령은 의원 간선으로서 선출되었기에, 십자방패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피안토네의 권력은 더욱 두터워졌다.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