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동맹
Revolutionäres Bündnis
약칭
RB
표어
한 점의 불꽃이 제국주의의 심장을 꿰뚫는다.
창당일
1664년
이념
좌익 내셔널리즘

국가주의적 사회주의

스펙트럼
극좌
당수
페레차코프 루마니스키
당색
적색 (#FF0000)

“한 점의 불꽃이 제국주의의 심장을 꿰뚫는다.” -페레차코프 루마니스키

개요

‘혁명 동맹’은 사상전쟁 시기 주로 활동한 공산주의 정당이다. 해넘이 정변 이후 정치적 급변을 이룬 게파르토 공화국에서는 일시적으로 정당 활동과 의회 설립이 미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소식 전달 수단이 미비해 이 사실이 전해지지 않아 각종 정치 단체의 설립, 활동이 난무하였는데, 이러한 혁명 동맹은 해넘이 정변 이전의 ‘게파르토 제국’ 시기부터 활동을 지속하던 여러 공산주의 비밀결사 단체가(제정은 공산주의 활동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당수 ‘페레차코프 루마니스키’의 하에 결집해 설립된 단체이다.

설립

페레차코프는 공화국 연맹 발키로르 공화국 출신 이민자이며, 과거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당시 대좌 계급에서 공화국 연맹군에서 복무하다 포로 신분으로서 수용소에 수감되었으며, 종전 직후 석방되어 게파르토 제국 국적으로 전환한 이중국적자다. 감옥에서의 정치 선전 활동으로 인해 독방으로 이감된 전력이 있었으며, 해넘이 정변 직후까지 페레차코프의 신원을 아는 이는 없었다.

게파르토 제국 첩보부는 게파르토 제국- 공화국 연맹 국경으로 이동한 이후 행방불명된 페레차코프의 신원에 예의주시하였으며, 뒤따라 강도가 거세진 공화국 연맹의 국경 침범 및 도발이 더욱 거세졌다는 점과 게파르토 내부의 ‘불법적 단체’로 지정된 공산주의 단체들이 조직적으로, 또 서서히 결집중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게파르토 첩보부에게는 유감스럽게도, 이들의 정보력이 빛을 볼 날은 없었다.  해넘이 정변으로 인해 게파르토 제정은 총체적인 붕괴를 맞이했으며, 이는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에 있어 크나큰 이점을 주었다.

공화국 연맹의 간섭이 있었던, 그렇지 않았던 게파르토의 공산주의자들은 대부분 고학력자를 중심으로 저학력자와 노동자 계층, 사회 하층민들이 많이 포섭되어있었다. 정변 이후 무정부 기간동안, 모지리 시 외곽의 농민들과 공장 노동자들을 결집하기 시작한 혁명동맹은 급격히 세를 불리기 시작했다. 혁명동맹의 수뇌부가 게파르토 공화국 측에서 모든 정치 활동을 일시적으로 금지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알 도리는 없다.

혁명동맹의 궁극적인 목적은 게파르토의 ‘키르수스화’를 배제하고, 정국에 개입하려는 키르수스에게 맞서 공화국 연맹과의 친선을 도모하며, 게파르토 공화국의 사회주의화와 추후 피안토네의 정권 이양 대상이 자신들로 정해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활동

좌익 공산주의 노선을 주장하던 혁명동맹은 당군이자 준군사조직으로서 ‘혁명전위대’를 보유중이었는데, 이들은 우익 노선을 주장하던 왕정복고단체 ‘철모부대’와 수시로 충돌하며 사상 전쟁 기간동안 모지리 시에서 수시로 교전했다. 혁명전위대는 공련제 소총과 기관총, 소대단위용 박격포와도 같이 지난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에서 공화국 연맹군이 운용한 여러 무기들을 보유중이었고, 또 교전에서도 자주 사용했으나 구성원들이 대부분 공장 노동자와 농민, 사회 하층민들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의 퇴역 군인들이 주축을 이루던 철모 부대와의 교전에서 조직력 부문에서 밀려 수시로 손실을 입었다.

혁명 이후 게파르토 공화국에서 좌파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일반 민중들에게 큰 미움을 받았다. 구 제정은 공산주의 활동을 이미 공개적으로 금지령을 선포해 반공정책과 공산주의자 숙청을 수시로 단행중이었으며, 대중들은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에서 공화국 연맹과의 교전을 경험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극도로 혐오했다. 이는 피안토네와 구 게파르토 제국군을 주축으로 한 신 게파르토 공화국 정부의 내부적인 의견과도 같았다.

몰락

정권과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한 공산주의 단체는 단순히 폭도로서 여겨질 뿐이었다. 일반 대중들에게 만연한 반공사상과 거의 기정사실화된 페레차코프에 대한 공화국 연맹의 지원 때문에, 게파르토의 대중들에게 있어 혁명동맹의 활동을 지원함은 곧 지난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에서 게파르토 제국군에게 맞서 전투한 공산주의자들에게 부역하는 것이라 여기기 시작했다.

페레차코프의 주변은 급속도로 와해되기 시작했다. 현 정권의 반응 또한 냉랭했기 때문에, 유력 자본가들과 일반 민중들에 대한 지지도를 획득하지 못한 채, 세를 유지하지 못한 혁명동맹은 차츰차츰 면에서 선으로, 선에서 점으로 쪼개졌다.

건국력 1664년 7월 12일, 모지리 시 외부에서 비밀리에 들어온 십자방패당 소속 선동꾼들이 이들의 몇 남지 않은 본부를 습격했다. 전위대들은 초기에 도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목격자들은 방화와 무차별적인 폭행이 지속되었다 증언했으며, 페레차코프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사망한 사람들과 불에 타죽은 사람 중 몇몇의 목에는 붉은 목도리가 둘러져있어 이들이 범행의 주체로서 추측된다.

이후 시체가 경찰에 인도되었으나, 제대로 된 수사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해당 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이 흘린 피에 빗대어 ‘붉은 혁명 사건’이라 호칭한다.

목격자의 진술 일부에는 사건 당시 군인과 경찰이 목격되었다는 증언 또한 존재하며, 게파르토 공화국군과 게파르토 경찰 측은 이를 공식적으로 부인했으며, 이러한 ‘허위 진술’을 시도한 목격자와 도주한 혁명전위대원들은 각각 ‘허위사실 유포’와 ‘범행 방조’의 명목으로 기소되었다.

기타

* 사건 이후 페레차코프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일반 민중들은 그가 지하로 숨어들어가 마인전쟁(마도절멸전쟁)에서 살아남은 위저드들과 결탁해 다시금 게파르토에서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을 다소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 본부를 습격한 ‘붉은 혁명 사건’ 당시 지방과 수도에 존재하던 몇 남지 않은 혁명 동맹 소속 건물 또한 사보타지와 습격을 당했으며, 철모 부대 또한 개입한 정황이 명확하다.

* 혁명 동맹은 게파르토에 존재하던 공산주의 단체 거의 전부를 아울러 ‘만들어진’ 정당이었다. 혁명 동맹의 몰락과 이어진 게파르토 정부의 반공 정책은 게파르토의 적화 운동에 크나큰 손실을 안겼다.

* 혁명 동맹의 당수인 페레차코프는 혁명 동맹과 공화국 연맹간의 관계를 극도로 부정하였으며, 이들의 당군인 혁명 전위대 또한 공화국 연맹제 소화기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민중의 전위대’인 이들이 소요사태를 일으킨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했다. 대부분의 자료들이 불타 없어졌기에, 진위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