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는 손쓸 수 없는 지경이다!
사흐트라한 제국 총리 테게노프, 자살 직전의 유언
01 개요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이하 사련)의 시작은 동방제국 사흐트라한에서 시작되었다. 그 첫걸음은 바로 피의 화요일(테라스 작전)이다. 이는 오늘날 사련의 명목수도 고베오스카야 스보드니에서 기원한다. 헤스페로스벨트의 역사적인 첫 번째 사회주의 혁명이며 동시에 실패한 혁명이기도 하다. 자신들만의 이념 기조에 따른 국가 전복 시도의 일환이었다. 사흐트라한 내부에서 정치적 혼란을 틈타 젊은 귀족 청년들이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02 주도 세력

대부분은 선진화된 대륙 서부에서의 교육을 접한 귀족 청년들인 붉은 리본이 주도하였다. 혁명의 일파인 케브렌파에서는‘사흐트라한 황제가 왕공령을 병합해 중앙집권 체제를 지향하자, 이에 반발해 일어난 귀족 세력의 이기적인 반발’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으나, 살아남은 붉은 리본 출신들은 그러한 의도가 아니었음을 자주 반발하곤 했다.

그렇다면 피의 화요일 당시 사흐트라한은 어떤 상황이었는가? 사흐트라한은 그 이름만큼이나 동부에서는 융성한 국가였으나, 재정 및 정치적 악재가 많아 시대에 뒤떨어지는 경향이 강하였다. 이런 개황 속에서 황제(가경제)는 전쟁경제의 방식으로 국정 변모를 노렸으나, 당연하게도 내정이 엉켜 행정력이 무너지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게 된다. 이에 저명한 테케노프(인민의 총리라 불린 관료)는 제국이 운명을 다 할 것이라며 한탄하고 자택에서 자살한 사건은 굉장히 유명하다.

붉은 리본은 테케노프의 유언처럼 황제가 국명을 파탄낼 것으로 받아들였다. 제국의 경제학파들은 일시적으로는 제국의 대외정복으로 국가의 경제가 회복세에 들어섰다고 주장했으나 그것은 과도한 국채와 거품 효과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변화가 필요했다. 붉은 리본은 하물며 명문가의 자제들이었으므로 혁명 과정에서 비록 황제 자체를 폐위할 생각따위는 하지 못했고, 어리석은 부폐관료들을 제거하자는 온건적 개혁을 지향하게 된다.[1]

03 준비 과정

가경제는 이런 귀족들의 불만, 재정적 압박, 경제적 문제 등을 서서히 느끼면서, 협조를 강화하는 한편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고자 밀실회의를 준비한다. 대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그렇다보니 혁명 세력 내부에서도 붉은 리본과 같은 귀족 파벌들은 현상 유지 및 개선에 협조하려는 반면, 케브렌과 케브렌파는 더 진취적인 시도를 기대하였다. 결국 조금 엇나간 상황에서 테라스 작전은 계속 준비되었다.

피의 화요일 당일. 돌데베르체 궁전에서 개최된 연회에 혁명세력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예상 외의 일이 벌어진다. 비귀족 인원들의 입장이 거부된 것이다. 근위대장[2]의 판단이었고, 테라스 작전은 예상보다 적은 숫자의 인원이 궁전에 진입했다. 그럼에도 작전은 속행된다.

이때 궁전 내 진입하지 못한 인원은 수도 지역의 시민들을 규합하고, 거리 행진을 주도하는 것으로 작전을 변모했다. 산발적인 시위가 수도에 큰 폭동이 될 것이라 예상했다. 다행히도 대중 역시 자신들의 시위가 황제에게 있어 인민들을 다시금 직시하고 바라봐주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했고, 생각보다 많은 수의 민중이 평화적인 시위에 나서게 된다.

04 피의 화요일

어디까지나 테라스 작전에서의 핵심은 온건적 개혁이다. 붉은 리본은 연회장 내에서 황제와 어느정도 친근한 대화를 나누었다. 전쟁을 끝내고, 새로운 경제 계획을 도모하며, 변화가 필요하다는 화담을 나눈다. 제법 괜찮은 분위기였다. 문제는 이후 전해진 소식이다.

<민중이 폭동을 일으킴>이라는 말을 황제가 듣자, 크게 놀란 황제는 근위대를 동원해 발포를 해서라도 시위를 해산시켜야한다는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 이것을 확인한 연회장 내 온건파는 일촉즉발의 상황 속 더 이상 작금의 방식을 지속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여겼고 현장에서 즉시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것은 우발적이었고, 이미 비귀족 인원들이 진입하지 못한 상황 속 소수에 불과한 그들은 황제의 화만 돋구는 실수에 불과했다.

결국 혁명은 실패하였고, 온건파가 중심을 잃으며 혁명세력은 급진파 중심으로 재건된다. 황제는 새로운 경제계획 수립에 대해 불온세력의 고안이라며 이를 부정하면서 전쟁경제 체제가 반복된다. 결국 이것이 뒤이어 설명할 사흐트라한 내전의 배경이 되며, 사흐트라한 제국 나아가 동방지역 전체를 역변시키는 계기가 된다.

04 사흐트라한 내전
나는 제국의 황제 아이네기오스다. 나의 시체를 받을 자 누구인가!
사흐트라한 제국의 황제, 울라우치 전투 중

앞서 테라스 작전이 실패하고 피의 화요일이 벌어지면서 황제는 다음 전쟁터인 남부 야르크로 향한다. 이 과정에서 사흐트라한 내전(1차 내전)[3]이란 큰 위기가 다가오게 된다. 문제는 불과 몇년 만에 내전에 봉착할 만큼 사흐트라한 내부사정이 엉망진창이었음은 분명하다.

2.2. 초로니코바 회군
사흐트라한 제국은 야르크와의 전쟁을 통해 초로니코바 공성전을 성공하지만, 직후 본국에서 발생한 혁명 소식을 접한다. 마찬가지로 적국인 사흐트라한의 상황을 파악한 야르크와 그 지도자 벨라스타인(남방황제) 역시 탕성, 그로노다르(도시명)를 중심으로 20만의 병력을 활용해 역공세에 나서기로 결정한다. 이후 나발그라차로 전진했다. 그러나 사흐트라한 원정군은 기병대를 활용해 야르크의 공세를 격퇴했고, 많은 보급품을 노획한다. 이것은 훗날 내전에서 충성파의 주요 물자수단으로 활용되었다.

2.3. 1차 당대회
혁명이 일어난 사흐트라한. 농민파의 이반 볼료다노프, 도시파의 세게노프 아이젠토스, 산악파의 폴료나도프 이쇼네츠, 그리고 케브렌은 각자의 정치적 입지를 일시적으로 포기하고 공통된 대의에 집중한다. 그들은 원정을 나간 황제의 군대가 회군하는 것을 파악한 후 얄하르츠크의 국왕 알렉산드로스 프리드니케를 혁명 황제로 옹립한다.(임시역임) 이후 각 세력은 사흐타라한 제국군을 상대하기 위해 전력을 준비한다.

2.4. 서부전선
한편 혁명으로 혼란스러웠던 제국의 서부에는 자잘한 군벌들이 포진해있었다. 초가르드 대공 백치왕 이반, 파트라스 대공 포악한 크라우스, 웅가르 대공 비만왕 보테임이 그것이다. 이들은 혁명 직전에도 어느정도 세력이 있었으나, 혁명 이후 본격적으로 군벌화되면서 서부의 균형을 이루게 된다. 포악한 크라우스는 내전 직후 기반이 완성되지 않은 알렉산드로스 프리드리케와 사흐트라한을 격파하려고 이들에게 협력을 제안하였지만 서로에 대한 경계심으로 성사되지 않았다.

2.5. 내전 격화
혁명으로부터 6개월, 초로니코바 회군 이후 사흐트라한은 혁명세력인 혁명파와 황제를 지지하는 충성파으로 나뉜다. 앞서 언급된 서부전선의 군벌들은 저마다 혁명파와 충성파를 따로 지원하였고, 내전은 지속된다. 그러나 혁명파는 부족한 지지기반 탓에 차츰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하나의 묘수를 세우게 된다.

혁명파는 중심지에서 벗어난 동부의 공업도시들이 충성파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사건을 조작한다. 공업지대는 충성파가 공업지대의 민간인들을 학살했다는 소식이 일파만파 퍼지면서 큰 충격에 빠졌고, 결국 이들이 혁명파에 협력하면서 내전이 기울기 시작한다.

2.6. 울라우치 전투
인구 30만의 농업도시 울라우치는 북부 도르베 역을 통해 외부와 교류하는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충성파와 혁명파가 마지막으로 격돌한다. 남부 트로우동, 남동부 바그동, 남서부 젬갈란동, 중부 베르도동 등 모든 위치에서 포위된 황제와그 군대는 혁명파의 포위전에 완전히 휘말린다. 결국 기병 중심의 기동전술이 패퇴하였고, 이들은 도시에 포위되었다.

2.7. 황제의 최후
충성스러운 황제의 근위대장은 황제에게 탈출을 권유했다고 알려지며, 필사의 각오로 임하였으나 황제는 이를 불허하였다. 결국 울라우치 전투 말미, 결사대는 혁명파와 교전하였으며 마침내 전쟁에서 산화되었다. 황제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2.8. 결과
황제가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막연한 희망 탓에 일부 충성파는 마지막까지 저항하였으나 결국 사흐트라한 제국과 충성파는 대다수 붕괴되었다. 마침내 사흐트라한이란 국호는 사라졌으며 이들은 자신들의 국명을‘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이라고 지칭한다.

04 전간기

3.1. 백군의 대장정
울라우치 전투로 백군은 중심을 잃었다.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고, 충성스러운 근위부대는 저마다의 장소로 흩어졌다. 이제는 살아남기 위해 도망쳐야 할 순간이 된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혁명파의 사령관 콘스탄틴 역시 이를 예측했다. 다만 이미 오랜 전쟁으로 지친 군대를 운용할 만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며, 이에 따라 패잔병들을 추적하지 않게 된다. 덕분에 백군 소수는 체제를 갖춘 채 생존할 수 있었다.

3.2. 주변정리
당연하게도 충성파가 사라진 다음의 표적은 서부지대였다. 세 대공은 곧바로 단합하였으나 머지않아 패배하면서 숙청당한다. 그들은 모두 교수형을 당했으며, 졸속 재판 속에서 하찮게 사형당하였다. 이후 동부지대를 포함해 사흐트라한 전체에 대한 영역 장악을 지속했으며, 마치 모든 것이 혁명이 올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듯 했다.

3.3. 내부정리
그러나 인간은 본디 욕구에 사로잡힌 존재. 4개의 혁명 세력들은 혁명 당시 피의 행진(피의 화요일)로 많은 혁명파 지도층을 잃은 상태였다. 그런데 케브렌파(코룔로프 케브렌)이 집권하자마자 남은 도시파와 온건파를 숙청을 시사하면서 제3차 전국 당대회에선 극도의 비판이 일구어진다. 결국 케브렌파는 내부 의견에 밀려 국가 안정화를 선제 업무로 삼았다.

3.4. 약간의 안정화
큰 피바람이 예상되었던 직전의 분위기와 달리, 케브렌파를 밀어낸 온건파는 특유의 분위기로 사련을 변화시킨다. 그들은 유사 황도파(황제에 대해 중립적이던 귀족 청년들)과 도시파(도시 엘리트 계층)은 뛰어난 관료능력을 보여주며 정권 안정화에 기여하였다. 이후 혁명 세력들은 갈등보다는 협의에 나섰으며, 제국 시절 귀족관료들을 복권시켜 인력으로 활용시키는 대범함까지 보여주었다.

이는 사련의 혁명이 분명하게 뿌리내릴 수 있다는 한줌의 희망이 되기도 했다.


혁명력 제정 원년 6월(건국력 1630년 6월), 테라스 작전으로 붙여진 내전은 종전까지 황제국으로서 동부 대륙의 패권자로서 군림하던 사흐트라한 제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송두리째 변모시켰다.

사흐트라한 공화국의 새로운 정치인들과 혁명가들은 사회주의 국가의 성립에 있어 아직까지 민중들 중에서 황제를 지지하는 자들이 매우 많다는 점을 고깝게 여겼다. 혁명의 여파에서 살아남은 황실 방계 후손들과 종친들과 옛 신하들, 혁명가들 사이에서 비밀스러운 거래가 있었고, 명목상 "대순국"이라는 이름으로 구 사흐트라한 제국의 권위를 대표하는 소조정小朝廷을 구성하게 되었다. 이들은 비교적 소수에 불과하나, 자체적인 사병집단 또한 보유하게 되었다.

한편, 동부의 국가들 중 가장 위세가 강한 국력을 자랑하던 사흐트라한의 적화는 근방에 유지되고 있던 사흐트라한 제국의 영향력 하에 있던 여러 속령들과 왕국들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없었다.

1. 주코르카 제국

사흐트라한 내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혁명력 2년 7월(건국력 1631년 7월), 사흐트라한 근방에 위치한 국가였던 주코르카 제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발생했다. 주코르카 제국은 역사적으로 사흐트라한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아온 바, 혁명 이전부터 사흐트라한 내에 포진해있던 사상가들의 영향을 진하게 이어받았기 때문이었다. 사흐트라한의 혁명에 호응하는 듯한 이 혁명은 훗날 주코르카 제국을 "혁명의 장녀"라는 이름으로 사련 내에서 사흐트라한 바로 다음 가는 정치적 입지를 손에 넣게 해주었다.

건국력 1620년대, 주코르카 제국의 지도자들은 약 1638년까지 이어지는 2차례의 급진적인 3개년 경제개발 계획을 잡고 있었다. 주코르카의 경제학자들이 선대 황제의 선정으로 인해 사회적 간접자본이 유래없이 증가해 공업화를 위한 기틀이 제대로 닦여 있었다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주코르카 제국의 급작스러운 공업화는 규모 면에서 유의미한 성과가 있었으나, 농업 지대에서 도시로 급작스럽게 이주한 노동자의 급속한 수요 관리를 농업당국이 완전히 실패해버렸다. 혁명력 3년 2월(건국력 1632년 2월)에 주코르카 제국은 사흐트라한계 사상가들의 지원을 받아, 제국 시절의 봉건제를 청산한 뒤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한다. 당시 사흐트라한에서 제국군을 몰아내고 있던 "사흐트라한 노농적군"에게 호응하기 위해서였다.

혁명력 3년 7월(1633년 7월), 주코르카 사회주의 공화국은 사흐트라한과 함께 나란히 서서 나아갈 것을 천명하는 동시에 제국주의 국가들의 집단적인 습격에 대비하기 위한 연립정부 구상을 공개적으로 내비쳤다. 지난 5월에 막 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전후복구에 여념이 없던 사흐트라한 당국은 주코르카가 지닌 거대한 공업지대에 아주 큰 관심을 지녔고, 오직 사흐트라한인과 주코르카인만을 위함이 아닌 모든 사회주의자와 나아가 모든 인류를 위한 연립정부라는 명목 하에, 각 공화국들의 독립성을 인정하는 느슨한 연립정부인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체계가 구상되었다.

2. 알하르츠크

양국간을 아우르는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 체계가 구상된 이후, 사련의 행정수도는 사흐트라한의 도시인 "고베오스카야 스보드니"로 결정되었다. 고베어스카야 스보드니는 명목상 독립국가로 독립하여 자체적인 경찰권과 군사권, 행정권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도시 전체가 사련 체제에 소속된 국가들의 회의장으로서 구상되었다. 사흐트라한 규모와 이들에게 저항 없이 합류한 주코르카의 동조로 혁명수도 고베오스카야에는 사흐트라한의 정치적 영향력이 짙게 배게 되었으며, 명목상의 국가로 존속하는 대순국에게도 의석이 할당되었다.

알하르츠크 제국은 사련 체제가 본격적으로 행정적 수속을 밟기 시작한 혁명력 7년 시점에서도 절대왕정 국가들의 선봉장을 자처하며 왕정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본디 대륙 동부에서 가장 혹독한 지역이었던 알하르츠크는 변칙적으로 몰아치는 모래폭풍과 비현실적 기상현상이 발생하는 거대한 사막지대를 지역 북부에 끼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자연환경을 이용해 사흐트라한을 비롯한 각종 외침을 방어해왔던 알하르츠크는 연쇄적으로 발생하던 사회주의 혁명 속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습격을 방어하기 위한 최적의 요충지로 여겨졌다. 혁명력 5년 시점 알하르츠크의 당대 국력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수준이었는데, 이들의 능력을 높이 사는 동시에 자신의 권좌가 위태하다 여긴 여러 왕정 국가들이 알하르츠크를 지원해주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사련 내부에서는 내전의 여파로 인해 붕괴한 경제 복구와 함께, 연합 체계가 기틀을 잡아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는 빠르고 강력한 전후 복구 완수와 제국주의로부터 연합을 방어하기 위해선 급진파들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는 의견이 세를 얻게 되었고(일반 민중들은 사흐트라한 제국 시절 테게노프의 온건적 개혁이 효과가 없다 여겼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화국의 급진주의자 코롤료프 케브렌과 그가 창안한 사회주의의 한 갈래인 '케브렌주의'를 신봉하는 무리들이 당 내에서 강세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케브렌은 본래 사흐트라한 시절 군인 집안에서 자랐던 이였으며, 그 영향을 받아 케브렌주의는 자구적인 경제적 성장과는 거리가 먼, 제국주의 국가에 대한 침략을 통한 연쇄혁명으로서 경제의 규모를 늘리게 되면 자동적으로 경제력 또한 성장할 것이라는 논리를 골자로 하고 있었다.

혁명력 5년 6월(건국력 1635년), 사흐트라한 혁명 5주년을 맞아 진행된 총서기 투표에서 케브렌이 당선되었다. 그는 당초 케브렌주의 노선대로 군대를 재건하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경제력 복구, 연립정부 구상을 위한 행정절차라는 3개의 거대한 과제를 동시에 수행해야 했던 케브렌 내각은 최종 평가 당시 경제력 복구 과제 부문에서 기대치에 한참 못 미치는 성과를 기록한다. 혁명력 9년 1월(건국력 1639년)의 일이었다.

고베오스카야 스보드니의 다른 의원들은 케브렌 집권 이전에 경제재건계획 초안을 제시했던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케브렌의 군사력 증대 정책으로 인해 경제계획이 제대로 된 과실을 맺지 못했다 주장했고, 따라서 대부분의 화살은 케브렌에게 돌아갔다.

따라서 케브렌과 그의 무리들은 경제 개발 이외의 부문에서 "할당량 초과"를 증명해야 했다. 사흐트라한 공화국과 주코르카 공화국을 잇는 연립정부 구성은 매우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케브렌은 새로이 구성된 사련군의 위용을 과시하고자 했다. 과시의 대상은 사흐트라한 공화국 남부에 있던 알하르츠크 제국이었다. 단순히 지도상에서 가까이 있다는 이유였다.

침공 계획이 본격적으로 입안되기 시작한 동년 7월, 사흐트라한 공화국군의 장군진들 중 전향자 출신들은 케브렌의 의견에 극구 반대했다. 이들은 그들의 먼 선조 대로부터 내려온 알하르츠크 자연환경의 혹독함을 원초적으로 학습한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케브렌의 눈에 장군진은 곱게 보이지 않았고, 이들 중 눈에 띄는 자들이 숙청되었다. 남아있는 장군진들은 케브렌의 칼날을 피하고자 알하르츠크 침공 계획을 준비했다. 국가 개편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사흐트라한에게 일정 부문 예속되게 된 주코르카 공화국 또한 지지기반 유지를 위해 사흐트라한의 의견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사흐트라한군은 극단적인 정치적 압력 속에서도 최대한 적은 사상자를 내고 싶어했다. 사흐트라한 제국 시절과는 달라야 했기 때문이다. 일부 전향저 출신 장군진들은 이번 침공을 자신들의 쓸모를 입중할 '기회'로 판단하기도 했다.

침공에 앞서 기상학자, 자연학자, 인문학자들이 초빙되어 알하르츠크 근방 사흐트라한 거주민들이 모래폭풍에 대비하는 방법, 급작스러운 기상현상 발생 직전에 발생하는 전조현상, 해당 지역 동•식물들의 생존술과 역사성 존재했던 국가들의 알하르츠크 침공경로를 몇 달에 걸쳐 조사했다. 최대한 사막을 빠르게 주파하기 위해 기병 위주의 편제가 준비되었다.

  1. 케브렌파는 또한 이런 입장을 부정하였고, 정치적 악수였다고 주장한다.
  2. 李 горький, 황제의 충성스러운 마지막 근위대장. 별칭인 고라키로 알려져 있으며 황제의 측근이지만 동시에 목숨과 부모보다 황제를 먼저해야 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정보는 비밀에 붙여져 있다.
  3. 사흐트라한 내전(1차 내전)은 사회주의 보편주권연합의 서막을 연 내전이다. 사흐트라한 제국은 국가 내부에서 시대의 변화에 따른 봉건주의 붕괴, 사회주의 발흥에 따라 개혁파가 승리하여 거대한 사회주의 정권 및 국가가 수립되었다. 이로 인해 촉발된 혁명의 기세는 인접한 국가들에게 모두 영향을주어 지역 일대는 혁명으로 물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