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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이 문서에서는 클레도리아 제3제국의 문화를 다룬다.
상세
클레도리아는 대륙 동안에 위치하여 서양 판타지에 나오는 국가와는 상당히 다르다. 그렇다고 한중일, 즉 동양풍이 너무 센 것도 아니다.
클레도리아는, 현실로 따지자면 동서양의 융합체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히말라야 산맥, 쿤룬 산맥, 힌두쿠시, 티베트, 타클라마칸 등등 수많은 지리적 장벽이 적극적인 교역을 가로막은 것과 달리 아르세도스 행성의 "동양"인 아리에티아와 "서양"인 에르멜리시아는 습곡 산맥 하나를 넘거나, 배로 살짝만 이동하면 바로 교역할 수 있었기에 자연스레 영향을 많이 주고받게 되었다.
다만 클레도리아 남부[1]는 일본 열도와 닮았고, 클레도리아 북부[2]는 한반도와 닮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는 지리적인 요인이 큰데, 남클레도리아는 적당한 산지가 많고, 해안이니 따뜻하지만 메르데피르[3]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는다. 또한, 판의 경계 지역으로 섭입대가 존재해 건조한 고원이 형성된 마스카르, 플라다리아와 데셀리트는 지진이 많이 일어나는 지역으로 유명하다. 한편, 북클레도리아는 내륙 지방에 가까우며, 산맥으로 막힌 지역이라 구릉이나 산이 많고, 지반은 안정되어 있어 지진은 많이 나지 않지만[4] 운 나쁘게 북쪽에서 한파가 쏟아지면 영하 10도는 가볍게 찍는 위치다[5]. 그리고 북쪽에서는 기마 민족이 남쪽의 풍부한 곡창지대를 노리며 계속 쳐들어왔고, 그걸 견뎌내는 호쾌한 상부상조, 환난상휼의 기질을 지니게 되었다.
클레도리아 사회 인식 전반은 "클라르킬리아"에서 기원한다. 해당 문서에도 있겠지만, 엄연한 종교였으나 이제는 민족 통합의 상징으로서만 여겨지며, 그냥 옛 관습이라던지, 사고방식이나 철학의 기반으로만 인식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래에 서술할 여러 문화적 특징들이 나타날 것이다.
일단 클레도리아에서는, 그리고 다른 드람리아계 국가들에서도, 강함을 아름다움이라 여기는 문화가 있다.
그래서 전근대에도 남자건, 여자건, 귀족이건, 평민 중 서민층이던 상관없이 어딘가 특출나거나 자신만의 재주, 재능, 특기가 있다면 무언가 존경하고 우러러보는 문화가 존재하였다.
좋게 말하면 평등하게; 신분, 성별, 나이 등의 차별이 없다고 할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지나친 능력주의라고도 평할 수 있겠다. 하지만, 클레도리아 제3제국에서 이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거대한 내수 시장이다. 다시 말해서, 상대적으로 "비주류" 분야라 할지라도 인구가 7억을 상회하고 1인당 GDP도 적당한 선진국 수준이기에, 소비자가 충분하여 돈이 잘 벌리기 때문이다.
결혼을 맹약이라고 보는 문화가 있다.
결혼은 가문 간의 결합이었고, 남녀 간[6]의 가장 긴밀한 관계를 약속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혼인을 깬다는 것은 엄청난 수치로 여겨졌다.
그래도 사실혼 동거였다면 상관없었고, 혼인이라는 행사/의례를 한 "정식 부부관계"[7]가 깨지는 걸 극도로 경계했던 것. 이게 현대 와서도 남아서 이혼에 좀 보수적인 편의 사회가 조성되었다.
사별로 인한 재혼은 그럭저럭 넘어갔지만[8], 이혼과 재혼은 기피했다. 그래서 개인의 자유를 놓고 현대에도 종종 논쟁이 오간다. 대략 5400년경 출생자를 기점으로 점점 이러한 문화에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하여, 점점 이혼율도 올라가고 "캐주얼한 인간관계"로 보기 시작하는 시선이 늘어나고 있다[9].
클레도리아는 성씨 문화가 고대부터 자리잡아, 모든 평민에게는 "집안 이름"이 있었다. 성씨는 자신의 가족, 그리고 조상을 상징하는 가장 강력한 표식으로 여겨졌으므로 바꾸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결혼해도 성씨를 바꾸지 않는다. 따라서 "성씨를 갈아버리는 것"은 조상과의 관계를 아예 단절해버리는 심한 가족 욕으로 치부된다.
클레도리아식 이름은 친명[이름]-(귀족명)-성씨 순이다. 성씨가 이상하게 편중되는 일은 없고, 자신의 출신지명, 지형, 가업, 출신 신분 등등 매우 다양하다. 클레도리아인들은 딱딱한 상황에서는 서로를 성씨로 부르기는 하나, 어느 정도 인간관계를 쌓았는데도 성씨로만 부르는 건 그 사람을 살짝 배척한다는 어감을 풍기기에 학교 내지 직장에서 성씨로만 부르지는 않는다.
이 동네는 친명(=이름)으로만 불려도 딱히 상관하지 않는 분위기이며, 오히려 친근감을 내포하고 있기에 살짝 좋아한다. 그리고 단어를 보면 알겠지만 좀 어절이 많고 긴 편이기에 친해지면 그냥 애칭으로만 줄여부른다. 당연히 연인 사이에서만 부르는 이름이라던지, 절친에게만 알려준 자신의 별명이라던지, 이런 게 많다. 보통은 자기 본명을 슥 줄이며, 간혹 성씨를 줄이는 경우가 있긴 하나 흔하지는 않다.
한편 귀족명은 말 그대로 귀족들이 대외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붙이는 이름이다. 신분제가 사라진 제3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 이전 시대까지는 귀족들이나 황/왕족들이 잘만 사용했다. 지금도 황족은 사용하며, 우리가 황제의 이름이라고 생각했던... 세르네세, 엘리세르, 클로이 등등이 그러한 귀족명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황족이랑 관련이 없는데도 과거 가문을 중시한답시고 미들네임을 붙이는 것은 오지랖과 꼰대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다.
L, TH, SH, DH, T 등으로 끝나는 이름은 보통 어감이 세다고 느껴 "남자 이름"이라는 인식이 있고, A, E, I, O, U, AE 등 모음으로 끝나면 부드럽다거나, 간드러진다고 느껴 "여자 이름"이라는 인식이 있다. N, M, S, R로 끝나는 이름은 남녀 공용으로 쓰인다. 이름의 뜻은 보통 지형지물이나 식물을 가져다 붙일 때가 많다. 아니면 으레 그렇듯 길한 단어로.
클레도리아는, 제2제국 시절 이주해온 고브리아계나 하르나르계 민족을 빼면, 전통적으로 "단일 민족 국가"다[10][11]. 그리고 옛 전통에 대한 향수가 은근 있기 때문에, 이를 보존하고 있는 혈통; 즉, 네이르족, 에세르족, 그레스족 형질이 외모적으로 발현되는 걸 좀 선호하는 문화가 있어왔다. 물론 현재는 평등 의식이 강화되었기에 점점 줄여가는 추세이지만, 여전히 기득권층을 중심으로 암암리에 존재한다.
이는 클레도리아식 외모지상주의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그중 에세르-그레스[12]가 가장 선호되었고, 그 다음이 네이르-그레스와 에세르-네이르[13], 그 다음이 네이르/에세르/그레스 외모[14]였다.
나머지 평범하다고 여겨지는 외모는 "혼합 형질"이다. 이들은 갈색에서 검은색 사이의 눈/머리카락 색을 가졌으며 나머지 요소에서 튀는 부분은 없다. 클레도리아인의 절반이기에 가장 많이 보이는 형태 중 하나다. 한국에서 평범한 검은머리 검은눈을 가진 사람들의 포지션.
그러면 왜 에세르족과 그레스족이 선호되는가. 일단 지혜롭고 재빠르단 이미지가 있다. 하지만 그것에 큰 차이는 없고, 실상은 혈통은 수천 년 걸쳐 다 섞였기 때문에 랜덤하게 튀어나오는 것일 뿐, 구분은 무의미하다. 이것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바로 전통적인 최고 위치인 초공황제를 계승하고 있는 카스비르트 가문의 왕조 종가(宗家)가 이데리아주-카피톨리아 광역권 지역 출신 에세르족[15]과 스트론티아주 출신 그레스족[16]이 만나 탄생하였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고, 그것과 조화롭게 발전해야만 한다. 따라서 인간의 기술 개발은 자연을 이해하여 보듬기 위한 것이다... 라는 인식이 있었다. 이것 역시 클라르킬리아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가치다. 고대 이전부터 내려와 특유의 조신하며 자연친화적인 문화를 가지게 되었으므로, 이 이념은 어떻게 탄생하였는가!를 알아내기는 힘들다.
클레도리아 남부로 갈수록 유난히 집이 안과 밖 구분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클레도리아의 기후는 에레수리아만 이북, 즉 클레도리아 북부 3주는 냉대인데 에르센디아주와 카피톨리아 광역권은 냉대 습윤 기후이고, 스테보니아주와 이데리아주는 냉대 동계 건조 기후이고, 나머지 해안에 맞닿은 주는 온난 습윤 기후이며, 내륙은 오르가르호 덕분에 온대 동계 건조 기후에 속한다. 플라다리아주와 데셀리트주 일부 지방에는 열대가 나타나긴 하지만 사실 없다고 봐도 되는 수준이며, 산맥에는 고산 기후가 나타나지만 사람이 살진 않으니 무시해도 좋다. 즉, 전체적으로 기후는 따뜻에서 선선함을 오가는 정도이기에 풍토병이 없다시피 하단 점이 이 문화에 기여한 것 같기도 하다.
옛부터 에세르족은 하늘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레스족은 풀과 나무에 속삭이는 걸 좋아하고, 네이르족은 물과 돌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한단 낭만적인 전승이 있었다. 이들은 자연을 좋아했으며, 점점 볼수록 자연의 복잡한 측면을 알아가면서, 결국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비록 농사와 금속 도구의 보급으로 식량이 안정화되긴 했어도 자연에 의해 종족의 운명이 결정될 때가 많았기에 이들은 "날씨야 제발 좋아라" 등, 기도와 숭배를 계속하게 되었다. 심지어 드람리아섬 중심에 거대한 성층화산이 있던 건 덤.
이 사상은 환경이 좀 더 척박한 고브리아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때문에 소렌네례크 국가들의 종교사상이 강한 것. 원래 살기가 팍팍하면 극단적인 사상이 꽃핀다. 클레도리아의 전통건축, 의복 등은 자연과 어우러졌을 때 정말 아름답다. 설계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 다만 근대에 들어와서는 에르멜리시아에서 들어온 새로운 가치관과 나라 발전 문제 때문에, 점점 과학과 공학에 밀려 이 원칙을 폐기하는 추세. 때문에 반클레도리아 세력에서는 이걸 보고 교활하다고 깐다.
클레도리아는 대분화의 원인으로 여겨지는 전승, 즉 엣드람리아의 대분화[17]에 대해, "열두 신이 노한 거고, 그 불똥이 단지 튀었을 뿐이다. 옛 땅을 잃어버린 뼈아픈 일이지만 여기 클레도리아에서도 여전히 신들의 힘은 발휘되고 있지 않는가. 새로이 정착한 이 땅에서 그저 살아갈 뿐이로다."와 같은 입장을 펼친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사건 중 하나였을 뿐이며, 신들이 자신들의 본고장에서 자신들을 단지 쫓아낸 섭리라고 생각할 뿐이다.
클레도리아에서는 클라르킬리아를 어떠한 주교를 믿는 종교라기보다는, 사상과 철학으로 뭉친 하나의 개념이라고 의식한다.
클레도리아에는 정령사상이 멀쩡하다. 클라르킬리아에서 그대로 보존되어 현대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래서 이상한 도시전설이나 괴담이 많긴 하지만, 실제로 있는 일은 아니기 때문에 제3제국 들어서는 "그냥 이런 얘기가 전에 나돌았구나" 수준.
모든 것에는 혼이 있으니, 함부러 해쳤다가는 그게 삐져서 미워서 복수하러 올 수도 있기도 하고, 쌓이면 신에게 천벌을 받아 이상한 일에 휘말린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클레도리아의 국조는 오리과에 속하는 헬리나르불사조이다. 불은 "신의 뜨거운 기운이 쌓인" 존재라 믿어졌고, 물은 "신의 형태가 흐르는 것"이라고 믿어졌고, 바람은 "지극히 본질적인 신의 존재를 상징하는 형태"라고 믿어졌다. 따라서 클레도리아에서는 사람의 형태로 신을 묘사하지 않았고, 자연물에 빗대어 그 상징을 신이라고 여겼다.
가끔은 바람이 빠르고 "후우웅" 소리를 내며 잘 통과할 수 있게 관을 만들고 울리게 해놓은 영당도 보인다. 헬리나르불사조는 오리과이기에 물 속도 가서 "흘러가서 묻어진 비밀"도 들출 수 있고, 땅도 걸을 수 있으니 지상의 인간이 사는 세상에 와 소통할 수 있는 데다, 하늘 높이 날기도 하므로 신들의 영역까지 갈 수도 있으며, 심지어 종종 활강도 하므로 "신과 이야기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클레도리아의 고을 입구에는 솟대가 많다. 아니면 옆에 새가 편히 앉을 수 있는 나뭇가지.
클레도리아에서는 혜성과 유성을, '항상 정지한 위대한 우주의 고요를 깨트리는 불경한 존재'가 아니라 "위대한 아이가 태어나겠구나", 내지 "위대한 영혼이 지나가는구나"라고 믿었다. 클라르킬리아 권역에서는 별은 하늘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그윽한 영혼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별은 "순수하게 신들만이 관장하는 영역"에 있는 순수하고 청초하기 그지없는 존재란 인식이 강했다. 그런데 혜성과 유성은 그런 별들이 마치 지구 쪽으로 떨어지는듯이 보이는 현상이다.
따라서 "저기 예쁜 별똥별이 보이네요"라던지, "오늘따라 별이 밝군요"는 예로부터 은근한 고백/청혼 멘트로 통하고, 전래동화에서부터 "그날 밤, 별똥별이 내렸습니다"라는 표현은 아이를 가졌다는 완곡한 표현으로 사용된다. 전승대로 하늘에 있던 영혼이 지상으로 올라온다는 이야기다.
특히나, 클레도리아에서는 강하고 색이 특이한 유성/혜성일수록 더 크게 될 사람이 태어난다고 하였다. 또 그 돌, 즉 운석을 찾는 사람은 반드시 위대한 업적을 이룬다는 전설도 있다. 그 '순수한 영혼'이 '하늘 위'에서 '지상'으로 떨어진 결정체이기 때문. 그래서 위인 설화에는 이상한 돌을 어떤 형태던지 간에 받는다는 구절이 꼭 들어간다. 물론 대개는 전설이지만. 보통 "왜 이런 게 떨어진다고 믿습니까?"라고 물으면, 클레도리아의 전형적인 설화상에서는 "신들의 기교"라고 답한다. 즉, 심심해서 떨구기도 하고, 때로는 인간에게 행운의 순간을 주기 위해 떨군다는 것.
클레도리아에서는 천문이 중요하였다. 신들이 우주에서 일으키는 신비한 의식과 고결한 행위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 그래서 예전부터 영당에 천문대를 같이 설치하여[18] 천문 현상을 자주자주 기록했으며, 그레시아 때부터 이어지던 현상이기 때문에 클레도리아를 상징하는 학문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특히 에세르족이 자주 그랬던 것으로 유명하다.
클레도리아는 하루 중 "따뜻한 시간"을 낮, "추운 시간"을 밤이라고 하였다. 각각은 따스한 노란 빛, 그리고 차디찬 푸른 빛이 비추고 있어 온도를 높였다 내렸다 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또 계절도 둘로 나누어 춘분부터 시작하는 봄과 여름은 따스한 "해의 계절", 추분부터 시작하는 가을과 겨울은 차디찬 "달의 계절"이라 불렀다. 따라서 헬리나르력에 따른 사계절의 분기점과 1년의 시작, 즉 동짓날은 클레도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4대 명절이다. 이것에 대해선 클레도리아 제3제국/공휴일 문서로.
특히 각 계절의 한중간인 사분절은 각각 해의 계절과 달의 계절로 넘어가는 중요한 날이었기 때문에 문의 날이라고 불렀다. 참고로 이 동네에서는 문은 경계를 상징하는 유서 깊은 물건이다.
클레도리아의 신들은 세계를 다스리고 있다고 믿어져 왔다. 이 수많은 신들은 본래 우주에 있으며, 그중 열두 신은 지구를 관장하기 위해 내려와 엣드람리아에 궁전을 짓고 살며, 지금은 인간이 많은 곳에 퍼져있으므로 각지의 산꼭대기를 매개체로 오가며 특정 지역을 맡는다고 하였다.
아리에티아를 관장하는 신을 클레니에스라고 부르고 이들이 다스림을 위해 하는 일은 "성무(聖務)"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클레니에스가 하는 일은 초공황제가 위임받을 수 있으며, 즉위식이란 그 위탁을 받는 과정이라고 믿어져왔다. 그래서 산꼭대기를 성역이라 여긴다. 크고 경치가 좋고 높은, 명산일수록 신기(神氣)가 강하며 상급 정령[19]이 맡는다고 믿는다.
그래서 일식과 월식은 신들이 가끔 인간이 위임받아도 할 수 없는 다스림을 자신들이 행하여 찬 기운과 따뜻한 기운을 균형 맞추어주는 일, 즉 따스한 배려라고 하였다. 신들에게 받은 황송한 도움들을 모조리 기록한 것도 이 이유.
어느 정도 사회의 틀을 지킨다면, 그 안에서라면 "아무렴 뭐 어때"라는 문화가 강하다. 지역이 넓고, 문화도 꽤 많고, 사람들도 다양하며 각종 분쟁으로 인해 전쟁통에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았으며, 예전에는 재수 없이 병에 걸려 죽기도 하였으므로 "뭐든 좋아"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잡았다.
길에서는 각지의 사람들이 모여왔고, 도시에는 가끔은 사투리가 심해 말도 못 알아듣는 수준의 상대들도 많이 모여들었으므로 정말 "아무렴 뭐 어때"라는 의식이 생겨났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의 차이점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 넘겼다는 것. 예전부터 차별이 적었던 원인 중 하나였긴 하지만, 민족적인 사상[20]을 공유하지 않고, 문화가 생판 다른 이국인들에게는 좀 배타적인 경향을 보였다. 혹자는 클레도리아를 전통적으로 닫힌 하나의 작으며 거대한 사회라고 평했다. 물론 제3제국에서는 옛말이다.
고을주의, 지역주의가 있다. 그래서 자신의 묘는 무조건 고향에 놓아야만 한다. 불가피하게 타지에 넣는다 한들, 비석 한 모퉁이에라도 자기 고향에 관한 글귀가 없으면 편히 죽을 수도 없는 게 클레도리아인이다.
하도 나라가 넓으니 여러 지역을 오가는 사람들도 전근대부터 많았건만, 어디서 픽 죽어버리는 일이 현대만큼 희귀한 것도 아니었기에 타지에서 사라지는 경우가 종종 생겨버렸다. 허나, 클레도리아에서 "지역적인 동질감을 느끼는 최소 지역"은 "현"이기에, 이것이 다른 지역에서는 왠지 모를 배타성을 보였다.
또한, 클라르킬리아의 풍습[21]에 큰 영향을 받아 "우리 동네"에 대한 애착과 "우리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잘못하면 이게 으스댐과 선민사상으로 보이긴 하지만. 중세에 여러 소국으로 나눠져 있던 것도 한몫하긴 했으나, 제국이라는 칭호를 달게 된 이래 계속 민족통합정책을 실행하여 또 나라가 갈라지는 걸 필사적으로 막은 중앙정부의 진심어린 노력 덕에 현대에는 나라 단위로 느끼는 동질감이 형식상 더 크다. 허나 고을주의와 지역주의가 강한 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주지의 사실.
여기서 파생된 것이 가업에 대한 다소 강한 집착이다. 집안의 첫째에게 가업을 물려주는 문화가 강하며, 대를 잇는 기나긴 역사를 지닌 사업도 전국을 통틀어 간간히 보인다. 하지만 전후 복구를 일궈낸 5410년대(현 40세) 이후 출생자들은 이러한 고지식한 문화에 반감을 보이고 자신이 하고 싶은 진로를 찾아나가기를 고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악습으로 치부되고, 자중하자는 분위기가 많아지는 편.
건축 양식에서는 기하학적 무늬를 많이 넣었다. 클레도리아 건축은 단순한 도형을 조합해 만든 것이 많다. 대표적으로 영당과 그 입구의 홍예문. 그저 아치 모양이다. 돔도 많았고, 무언가 모이는 장소에는 원 모양을 자세하게 조립하였다.
추격전 관련된 근세 작품이 많으며, 현대에도 며칠 이상 먼 곳에 '임시로' 가게 된다면 반드시 자주 연락을 하고, 전근대 전쟁에서는 민간인을 건드리지 않는 대신 거의 볼모로 삼았다.
뭐가 관련인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클레도리아에서 민중(drothi)은 자신이 정착한 그 땅에 "귀속"되어 있는 존재였다[22]. 즉, 고을주의에 의하여 그 사람의 소속은 곧 그의 고향이자 거주지였으며 그 거주지가 빼앗겨버린다면 이사를 하지 않는 이상[23] 그의 거주지를 원칙적으로 따라야 하는 특이한 문화가 있었다.
이런 문화가 발달했던 건 인구 밀도가 작았던 클레도리아에서 개개인이 아주아주 소중한 노동력이었기 때문. 이는 중세 말기로 갈수록 심해진다. 예를 들어, 중세에 내가 스트론티아 삼림연방에 약초를 사러 갔는데 고향이었던 엣나르헨니아현 맹주가 바뀌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그가 모든 민중을 불러모은다면 그는 그것에 따라야만 했다.
안 그러고 도피했다면 옛날 가장 잔혹했던 문화인 "인간 사냥꾼"이 와서 생포해 잡아갔다. 가끔 기사단이 지역 유력자와 결탁하여 저러기도 했던 모양. 이런 상황이다 보니 사람들 대다수는 자신의 고향 지역과 계속 편지로 소통을 했다. 그 덕분에, 유통업이나 교통 산업이 예전부터 발달해 있었다. 가족 전체가 가끔 유랑하는 경우도 있긴 했는데, 이는 정치적인 마찰 문제도 있고 생활 기반의 모호성 때문에 많지 않았다. 사실, 도피한다고 바로 사냥꾼이 파견되는 것은 아니었고 집에 남아 있던 그의 가족들을 사실상 볼모로 하여 돌아오게끔 했다.
예전에는 이동에는 며칠 넘게 걸렸기 때문에 그냥 시간차 때문인지, 정말 도망간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어느 선까진 가족들을 볼모처럼 잡아놓아 경고했다. 빨리 돌아오라고. 이때 편지로 회신하거나 하면 행복하게 잘 있었다. 아니었다면... 그 가족을 버린 셈이 되는 거다.
이렇게 쓰이기 때문에, 전쟁을 할 때는 땅의 소유권만 두고 기사들끼리만 계속 싸우지 되도록이면 민간인을 건드리지 않았다. 볼모로 사용하기 위해서... 그래서 근대 와서 벌어진 새로운 형태의 전쟁, 총력전이 이들에게 큰 충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주로 가족을 잃은 이가 도피를 자주 했으며 그를 바탕으로 쓰여진 이야기가 인기가 많았다.
클레도리아가 사랑하는 가치에는, 정갈, 정직, 청초, 고요, 침착, 미소와 행복, 재능/재주/능력이 있다. 즉, 특정 분야에 뛰어난데 침착하고 정직하며 품위가 우아하며 정갈한 사람이 이상형으로 여겨졌으며, 이들이 싫어하는 것은 예의 바른 "척", 그리고 겉과 속이 다른 것이었기 때문에 진정으로 즐기고 미소짓고 있는 상황을 매우 좋아했다.
조신한 품행을 보이나 감정 표현 자체는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이 오히려 인기가 많은 이유는 여기에 있다. 허나 싸우는 것은 더더욱 싫어했다. 문제를 피하거나, "그래 좋아 맞붙자"가 아니라, 침착하게 해결해나가자가 미형으로 보였으며 이 가치관은 일상, 의복, 건축물 등 모든 곳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분야 불문 여러 재주가 있는 팔방미인이면 더욱 좋고, 그런데도 겸손하고 늘 정직하게 말하지만 정갈하게 미소를 띈 채 행동하는 사람이 가진 매력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넘치는 것이다. 이 가치를 끝없이 주입받은 인물들이 황족이다. 현대에 들어서는 어느 정도 바뀌었다. 잘 교육받은 현대 클레도리아인은 보통, 밖에 나가서는 민폐를 끼치는 걸 좀 꺼리기에(사실 모든 문화권이 이렇긴 하다!) 정갈하고 보통은 고요하게 지내지만, 대체로 자신에 대해 여는 것을 기피하지는 않으며 정직하게 속마음을 얘기하는 상대와 보통 더욱 깊은 인간관계를 쌓아간다. 특정 분야 하나에는 능력을 갖추려는 (집착적인) 욕구가 있기에 성실하게도 보이긴 하지만, 그들이 결국 타인과 무언가를 할 때 가장 좋아하는 상황은 서로가 진심으로 즐기고 있는 것이다.
클레도리아는 지역감정이 센 편이다. 아니, 애초에 고을주의가 세다. 현대에도 그렇다. 그렇다고 마구 헐뜯는 느낌은 아니고, 시민의식이 개선된 만큼 이제는 그 지역의 특징을 잡고 열심히 서로서로 놀려먹고 드립 치는 정도로 순화되었다.
예를 들면, 에르센디아주 애는 성질머리 더럽고 급하며, 스테보니아주 애는 에드리아에게 맨날 기 눌려 있는 무기력한 애고[24], 이데리아주 애는 맨날 벽 치고 사는[25] 등 굽고[26] 손 까진 돌가루 잔뜩 묻은 더러운 애며, 스트론티아주 애는 폐쇄적인 히키코모리나 인간불신 얼간이고, 오르가이아주 애는 세상 물정 모르고 들판이나 뛰어다니는 순진하고 약해빠진 애며, 오르도리아주 애는 길 하나 못 뚫고 할 거 없이 남 돈만 뜯는 애며, 그레시아주 애는 타 지역 사람들 등골 빨아먹고 하는 거 없는 잉여땅이며, 오르세이아주 애는 듣보잡에 황야만 거니는 외톨이고, 데셀리트주는 연못 때문에 발냄새나 심한 진창 속 더럽기만 한 애 천지고, 마스카르주는 표준말 할 줄도 몰라 소톻이 안 되는 황야를 넘어가야 나오는 사회부적응자 취급, 플라다리아주는 상인 돈놀음으로 돈 벌 줄만 줄 아는 탐욕스런 곳, 에셀리아 광역권는 황태자 산다는 게 자랑거리일 뿐이며 실상은 석탄 때 묻은 거지 노동자 천지이며, 카피톨리아 광역권는 회사의 노예가 된 겉만 찬란한 삭막한 유리숲이라며 깐다.
물론 이런 건 어디까지나 장난이고, 이런 드립을 진심으로 밀어붙였다가는 상대가 어디서 왔든지 간에 대차게 까이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클레도리아식 병맛개그 취급을 받으며, 타지역 출신 친구들끼리 의식의 흐름대로 대화를 할 때 가볍게 던지는 화제일 뿐,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심해진다. 주마다 정서가 굉장히 다른 국가이니까[27].
또한, 원시 헬리나르인들이 하르나르 쪽에서 이주하고 자발적으로 피부색이 옅어지며 어쩌다가 머리색도 붉게 되었는데, 기후가 따뜻해지며 북상해 결과적으로는 초록 눈 속성을 제외한 "진저" 혈통과 거의 비슷해졌다. 어째선가 고대 상륙 직후 기록부터 '북녘에는 머리가 붉고 피부가 흰 자들이 산다'는 구절이 수도 없이 등장하며, 이제는 지브로이아 공화국[28]를 중심으로 동화되었건만, 아직도 "미개한 원주민 족속들"[29]이라는 이상한 스테레오타입이 묻어 있어 살짝 차별을 받는다.[30]
교육
풍습
클레도리아에는 조기독립, 부분귀향이라는 이상한 풍습이 있다. 한줄요약을 하자면 (평균적으로) 만 14세 이상의 미성년자 자식을 자취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귀향은 5450년대 기준으로 흔한 건 아니고, 아직 에레수리아 신개발 확장도시권의 치안이 불안정했던 5400년대를 정점으로 성행했다가 유형이 바뀌어 성행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 이게 무엇이냐 하면, (범죄율 급감 이후에는) 어떠한 급한 사정이 생긴 부모[31]가 그 자녀를 해당 지역에 그대로 두고 자신만 그곳으로 가서[32] 자취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까마득히 예전부터 이런 풍습의 원류는 존재해왔고, 이제는 형태가 많이 바뀌어 99% 고등학생 대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난다.
원래는, 산업혁명 이전부터 있던 것으로 부모는 멀리서 돈만 보내주고 아직 완전히 독립할 만한 처지가 안 된 자녀는 그 지원으로 타지에서 자리를 잡은 후 다시 고향의 가족에게 지원을 해주는 방식이었다. 다만, 근대화 들어 급속한 도시화가 되었고 이때부터 변한 형태가 클레도리아의 학벌주의와 관련지어져 지금과 같이 정착되었다고 본다.
자주 발생하는 계층은 "대도시 이주 1~2세대 시골 출신 저소득층 가족의 고학력 자녀"다. 클레도리아는 꽤나 능력주의 사회이기 때문에[33] 저소득층일수록 많이 배워 '좋은 직업'을 가지겠다는 욕망이 크다[34]. 보통은 오히려 여유 있는 사람들이 마이너 쪽으로 빠질 수 있고, 저소득층은 일용직을 거쳐가든 뭘 하든 간에 최종적으로 고연봉 직업을 통해 수익을 올리겠다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아무튼, 일단 클레도리아인은 시/군 교육청에서 관할하는 초, 중학교에서 다닌다. 클레도리아의 개학날은 3월 30일, 4월 1일, 4월 2일에 걸친 춘분 연휴 때문에 보통 4월 3일이고, 이때 기준 만 6세가 초1, 그리고 6-4-4, 총 14학년 편제로 하여금 고4를 20세 때 진학하고 그 다음부터는 그냥 사회에 나가던, 대학교에 가던, 상관을 하지 않는다.[35] 여름방학은 주마다 기후가 상이하기에 케바케지만 7월 후반에 시작해 8월 중 언젠가까지 방학을 하고, 겨울방학은 1월 말~2월 초에 시작하여 4월 2일까지 한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는데, 비평준화 국가이기에 학생들은 중4 2학기를 진학에 투자한다. 왜 그렇냐, 꼭 기숙사제가 아니더라도 학교 별 특색과 특화 분야가 눈에 띄게 다양하며 이러한 형태의 교육지원이 잘 되어 있다. 학벌주의의 원인으로 꼽히긴 하지만, 어쨌건 이렇게 수험과 입시를 통해 힘겹게 들어간 학교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거기다가 강한 지역주의[36]와 맞물려 웬만해서는 학생 때 이사를 하지 않으려 한다.
대도시일수록 대중교통이 활성화되어있고 등교는 9시까지인데 그렇게까지 학생들이 밤늦게까지 공부공부하지는 않아서, 게다가 예로부터 넓은 나라에서 살아왔으므로 학교가 어딨니, 이동하기 쉽니, 하는 마인드는 꽤나 덜한 편이다.
클레도리아는 대도시 인구밀집지가 아니면 아파트가 별로 없다. 아파트라 하면, 중산층 미만 가구 혹은 1/2인 젊은 층 가구가 사는 원룸/투룸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다. 말 그대로 좁으니까. 물론 이건 범에레수리아 대도시권에서의 이야기.
아무튼, 이 도시권에서 부분귀향이 특히나 흔한데 그 타겟 지역은 인접 주 2개와 오르도리아주 동부 끝자락, 그리고 오르가이아주 정도 된다. 원래 대도시였는데 2차 동서전쟁 때 인구가 갑자기 확! 빠졌다가 동부 재개발 및 서부 신시가지 개발과 함께 일자리가 폭증, 덩달아서 이주해온 덕에 인구가 십수 배 이상 늘어난 케이스다. 그래서 집안은 시골 사는데 제 부모님이 여기로 이사왔어요, 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흔하다.[37]
클레도리아의 문화도 이 풍습에 한몫하는데, 가족과 가문을 중요시하면서도[38] "진정한 어른이라면 너 스스로 자립해야지!" 하는 완전자립 문화가 만연하다. 대신 집안 친척 누군가 큰 곤경에 처했다면 자립한 다른 구성원들이 도와주고 재기하는 걸 도와주는 방식.
이 말을 현대의 스스럼없는 말투로 바꿔주자면, "어차피 다 다른 사람인데 이해할 수가 있겠나? 내 방식은 내 거고 나한테만 맞으니 남이 간섭하면 안 되겠지만, 책임은 스스로 져야 한다. 그치만 아무리 그래도 잘못된 길로 빠지려는 사람은 정신 차리게 해줘라" 정도가 되겠다.
이곳은 한국처럼 입시가 아주 과열되어 있지는 않다. 할 사람만 한다는 분위기다. 따라서 학생들도 스트레스는 별로 없고, 즐기는 편이 대다수다. 학교에 다양한 프로그램이 많은 것도 한몫한다.
우리가 이 풍습에 대해 주의해야 할 점은, 자녀를 소년소녀가장으로 만들고 버리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부분귀향을 한다면 신고서를 작성하고, 지원을 살짝살짝 받으며[40] 부모의 지원을 받으며 사는 것이다. 아주 잠깐만 이러다가 회귀하는 것일 수도 있고, 거리가 가까운 것에서 떨어져 사는 것일 수도 있으며, 어쨌건 형태는 다양하다.
만일 정말로 다른 건 다 멀쩡한데 부모가 경제적 능력이 안 되어 자신이 직접 돈을 버는 상황이 된다면, 각종 시설들에서의 경제적인 지원이 들어오며 원할 경우 시설에 들어가 생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설에선.. 유복하고 온순하며 모범적인 아이는 가뭄에 콩 나듯 하니 그 분위기가 싫어서 자신이 그냥 집에서 아르바이트나 하며 사는 경우가 많다. 금전지원은 일정 상한이 조건에 따라 나오는데, 대개 카피톨리아 물가보다는 낮기 때문에 완전히 그것으로만 안주하고 살 수는 없다.[41] 가끔 좋은 학교에서는 전수조사를 한 다음 이러한 자녀들을 자신들이 추가로 지원하는 경우가 있다.
이 풍습 덕분에, 일단 자녀의 독립이 빨라진다. 이르면 만 15~16세에 독립하는데, 가장 심한 카피톨리아 쪽에서는 권립고 한 반(20~25명)에는 5명 정도 있다. 카피톨리아 6개시에는 이런 아이 비율이 5~8% 정도라고.
그런데, 우리는 "가정부 붙이면 되잖아요!"라는 생각을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스스로 키우도록(=독립) 하면 모를까, 감히 남에게 가족을 맡길 수는 없다!"는 마음가짐을 보유한다. 애초에 주로 이 풍습이 성행하는 것은 중산층 이하 고학력자라고 했다. 그리고, 주거 문화에도 영향을 끼친다.
과거의 부분귀향(~5400년대)에 대해 설명해보자.
일단 그 전에 수도권의 간략한 역사에 대하여 알아보아야 이해를 할 수 있다. 원래는 클레도리아가 제2차 동서대전 때 공권력의 부재를 뼈저리게 맛봤기에[42] 재개발 때 에레수리아 지역 경찰력을 매우 강화했다. 5490년대[43] 초반까지는 그래도 치안이 괜찮았지만[44], 이후 도시 경제력의 급성장과 이로 인한 인구유입, 그리고 일자리를 찾아 떠돌아온 저소득층의 빈민가 창궐[45] 및 부분귀향의 남발로 인해 5400~5410년대에는 조직범죄가 기승을 부렸기 때문에 대대적으로 때려잡는 정책을 하여 5430년대에는 현 한국 수준으로 치안이 매우 안정되었다. 이것에는 황실이 한, 범죄자를 겨냥한 담화와 타박이 크게 작용했고, 입헌 군주제가 뿌리깊이 박혀있는 클레도리아 사회에 제대로 찍혀 힘을 못 추리게 되어 지금은 명맥만 유지한다[46]. 클레도리아 황실은 대의에 맞는 정치/사회/경제 등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편에 속한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꽤나 최근까지 정치권력을 휘두른 바 있고, 지금은 철저히 물러나 있지만 사회문화적 영향력은 막대한 데다 황실의 성립도 생각해보면 자신들이 '제1제국 황실 본가'를 대상으로 일으킨 혁명이다.
위와 동일하지만, 주의할 가장 큰 점은 주 원인이 학력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회가 안정되긴 했으나, 복지망이 아직은 자리잡기 전이었기 때문에 금전 문제로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당시 에레수리아 사람들은 타 지역에 비해 좀 가난한 편이었고, 당시에는 진지하게 천도론을 밀어붙이는[47] 사람들도 있었지만 황실은 극구 거부했다. 이때 날린 말이 "이데르의 강물은 만을 일구는 국민들을 일으켜 세울 것이니, 흙과 재 속에 묻혀버린 광은(光恩)은 반드시 되살아날 것이오.".
아무튼, 이렇게 점점 급속도로 성장해가는 적당히 가난한 지역[48]에 기회를 찾아 온 각지의 빈곤층들이 꽤 있었다. 에셀리아시와 같은 해안가 공장지대에서 살던 서민 저임금 단순노동자 계층이 대다수였다. 즉, 외노자처럼, 국내이지만 고향의 가족들에게 돈을 벌어다 주기 위해 일하러 간 것이다. 보통은 건설업에서 일하거나, 각종 시설들을 쌓고 만들고, 운반하고 하는 일들을 했다. 안 좋게 말해서 막노동이 되겠다.
하지만, 국내의 지역적 격차에 의해 떠밀린 것이라는 특성과 그나마 쉬운 이동 때문에, 중간에 잘못되어[49] 본가로 돌아가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이때, 자식만큼은 그 기회, 새로운 땅, 애초에 "정착해서 쌓아간 것들"을 지킬 수 있게 하고자 했던 부모가 대다수였다. 따라서 핵가족 규모의 집에서 벗어나, 당시 정부가 지방에서 자금을 끌어다 짓고 있던 노른자 땅[50]의 아파트, 군수공장이 폭격으로 해체되고 쾌적한 근교 도시로 자라나고 있던 에르세리아시의 원룸들, 재개발되어 원룸들과 한적한 사무실 지구로 가득차기 시작한 케핀소리아 영역의 폐허, 전통적인 부촌이었던 클레니에스시, 피폐한 노동자들의 도시에서 좋아진 위생과 복지를 바탕으로 성장하는 산업도시 에셀리아시 일대, 그리고 전체적으로 현대 도시로 탈바꿈하여 급성장하고 있던 에레수리아 대도시권. 이들에게는 포기하기 어려운 먹잇감이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독립한 자녀들은 10대 후반으로, 준 성인[51]이었다. 이들은 노동할 수 있었기에[52] 스스로 돈을 벌기 시작했으나, 상대적으로 복지가 부족한 당시 상황과 학업에 열중할 수 없던 현실적인 상황 때문에 점점 비뚤어진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저임금층의 자녀들이었기에 사회에 반항심을 가졌으며, 자신들이 점점 집을 소유해가기 시작했기에 경제력도 슬슬 얻어냈겠다, 복지도 제대로 안 닿는다, 학업을 못 배웠으니 계속 해대던 웨이터[53] 일이나 건설현장 막노동 등등만 전전하는 신세가 되어버렸겠다?
점점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더니, 5398년부터 폭증하여 5404년에 정점을 찍는 조폭 범죄가 여기저기서 일어나버렸다. 치고 빠지고, 서로서로는 신상을 모르지만 만나는 장소나 역할은 잘 정해져 있었기에 검거에 애를 먹었다. 황실까지 타박해대며 열심히 소탕한 결과 5411년쯤 가면 치안이 훨씬 좋아졌고, 이때 도시 경찰력이 많이 확충되어 카피톨리아 쪽에선 5400년대에 준공된 파출소가 어지간히 오래된 중심지가 아니라면 여기저기에 많이 보인다.
이런 잘못된 현상들은 점점 감소하다가, 에레수리아의 가공할 만한 급성장과 부동산 급등 덕에 떼돈을 번 부분독립계층이 많아지며 자연스레 사라졌다. 카피톨리아의 불평등과 사회 문제는 이런 파란만장한 급성장과 그 사이의 우여곡절에서 나가떨어진 사람들과 붙들어매 배를 불려댄 사람들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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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스카르, 데셀리트, 플라다리아...
- ↑ 에르센디아, 스테보니아, 오르도리아 북부
- ↑ 쉽게 말해서 태풍
- ↑ 생긴 지 오래된 산맥이라 별로 지질 활동이 활발하지는 않다.
- ↑ 에르센디아주 연안 지역은 이 문제에선 자유롭다. 카피톨리아 광역권 인구가 왜 그리 많은지 생각해보자.
- ↑ 이런 문화가 생긴 것은, 당연하겠지만 인권이라느니, 평등이라느니 하는 중요한 가치가 제대로 정립되기 전, 즉 전근대다.
- ↑ 예전에는 이 의례를 거쳐야지만 결혼이 인정되었다. 보통 영당에서 한다.
- ↑ 그조차도 좀 보수적인 사람이라면 꼬치꼬치 따지는 사람은 있었다
- ↑ Sithelicros, fild. (시셀리크로스 등) [5447]
- ↑ 혈통 측면에서는 그레스족과 네라크족을 하나로 친다
- ↑ 산맥 때문에 외국과 막힌 점도 크게 작용한다.
- ↑ 인구의 10% 미만
- ↑ 둘이 동급. 합쳐서 인구의 15% 정도
- ↑ 인구의 1/4 정도
- ↑ 시르메닐
- ↑ 엘라네얀
- ↑ 실제로 있었을 것으로 추정.
- ↑ 신에 대해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성역이라나
- ↑ 신의 하수인들
- ↑ 클라르킬리아
- ↑ 고을 안에서 최대한 해결하려고 함
- ↑ 농노는 아니다. 어떠한 조건을 달성하면 자신이 그 지역을 고를 수 있었다.
- ↑ 잠시 상인 활동 때문에 떠나거나, 하는 건 안 됨
- ↑ 한족 보고 몽골과 만주족한테 많이 털렸다고 까는 느낌
- ↑ 광산 일 하느라
- ↑ 대장장이질 하느라
- ↑ 하지만 민족 구성은 거의 단일. 이상할 따름이다
- ↑ 스칸디나비아 + 발트3국 포지션.
- ↑ 오락가락하는 기후 때문에 문명을 제대로 이뤄내진 못했음. 신석기에서 정체되었다가 이주민에게 대차게 밀림..
- ↑ 물론 많이많이 약해지는 추세다. 대놓고 이 논리를 밀어붙이면 한심한 구시대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 ↑ 전직, 친척 부양, 돈 문제
- ↑ 보통은 고향 지역임
- ↑ 이른 산업화가 낳은 산물이다
- ↑ 케바케로, 잃는 거 없는 셈으로 언더그라운드에 뛰어들었다가 발굴되어 대성공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극소수다
- ↑ 덕분에 대학 진학률이 2/3 안팎이다.
- ↑ 자신의 출신, 즉 고향 지역을 굉장히 중요시하며 학업이나 인간관계를 그 토박이 사람들과 끊지 않으려는 특유의 보수적인 문화
- ↑ 카피톨리아 토박이는 의외로 드물다.
- ↑ 가족으로 편 갈라치기 하는 게 아니라 마음의 고향 문제
- ↑ 영혼
- ↑ '사회적배려대상자'가 된다
- ↑ 이는 지원금 편법을 막기 위한 조치이지만 역차별 문제 때문에 말이 많다.
- ↑ 전시, 잡범이 기승을 부렸다.
- ↑ 현실 60년대.
- ↑ 시민의식 문제와 소득, 초기 도시 개발의 고질적인 사회적 혼란 때문에 미국의 대도시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그래도 한국 수준에는 못 미쳤다
- ↑ 일부러 케핀소리아 영역청을 현 그레시움구에 두어서 근처 상권의 발달을 꾀했다.
- ↑ 인구밀도가 매우 낮은 산간벽지 어딘가를 "캠프"로 두고 있다.
- ↑ 보통 오르가르로
- ↑ 당시 동부 해안가 도시는 폭격을 얻어맞고 인구가 극악으로 빠져나갔던 시대였는데, 시골은 적당히 전원적이고 잘 사는 이미지였다! 클레도리아에서 '시골' 하면 떠오르는 오르가이아의 논밭과 오르도리아의 산골은 전쟁의 입김에서 슬쩍 빠져나간 지역이었기 때문.
- ↑ 보통 부동산 불평등에 의한 집세를 이기지 못하고
- ↑ 으로 자라나고 있던 엘리시아 한복판
- ↑ 만 18~19세를 가리킴
- ↑ 우리나라처럼 15세부터다
- ↑ 나중에는... '접대'로도 발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