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1670년 7월 에세르 왕국의 정부가 국민들의 대규모 봉기로 인해 사실상 붕괴되고, 왕정에 의해 해산되었던 인민의회와 인민연맹이 4개월간 정국을 장악하여 공화국 정부를 선포하자 당시 개입한 키르수스 제국이 에세르를 제국판무관부로 합병한 사건.

배경

7월 봉기가 일어나기 전에, 전조 현상은 충분히 나타났다. 1666년부터 1670년 사이에 신생국 에세르는 외국인의 입국을 대규모로 수용하였는데 경제불황은 해가 갈 수록 극심해져, 봉기가 일어난 당년(1670년)에 정점을 찍었다. 빵과 그 원재료인 밀 등의 가격이 폭등하였고 국민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키르수스나 게파르토를 비롯한 주변국에서는 에세르의 외국인 입국이 허용되자 대규모로 들어와 사업장을 차리거나 땅을 사 지주가 되었다. 이들은 자국에 비해 임금이 아주 낮은 에세르 농노들과 노동자들을 극도로 싸게 이용하면서 에세르 내에서 이익을 챙겼다.

1668년 9월 21일에는 이 현상에 반대하던 민족의회가 "정부는 외국인의 입국 허용을 철회하고 외국인의 지주화ㆍ공장 운영을 막아야 한다"며, 정부와 키르수스 제국에 대한 비난 결의를 발표하였다. 1669년 3월에는 노동자들이 이미 한번 소요를 일으켰다. 키르수스인이 운영하던 수도의 한 공장에서 일어난 사고로 노동자 4명이 사망하자 447명의 동료 노동자들이 소요를 일으켰다. 사장은 이들을 모두 해고하는 조치를 취하자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복직과 사장의 에세르인 이임을 요구하였다. 키르수스인 사장은 이 요구를 거부하고 경찰에 진압을 요청하였는데, 447명을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경찰 1명이 달려든 노동자들에게 맞아 죽자 경찰은 이들을 강하게 진압하였다. 결국 447명의 소요자 중 142명이 부상을 입고 20명이 사망하는 대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이후로도 1669년 11월 2일에, 씨앗교의 종교건물에서 죽은 노동자들에 대한 위령 종교 행사가 열렸는데 폭탄테러가 발생하여 80여명이 다치고 40명이 사망하였다. 결국 해당 사건을 모두 겪은 키르수스인 사장은 사업을 철수하고 돌아간 것으로 알려졌다.

1년이 지난 1670년, 민족의회의 원로들과 참여 의원들, 그리고 다수의 국민들은 수백년의 그란치프 지배기 동안 민족과 문화를 보전하고 자유를 위해 목숨바친 "의사"들의 터이자, 대의민주적 공동체 운영의 거름이요, 밭이었던 민족의회를 강제로 정부가 해산시켜버리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에 서술하였듯이 1670년은 국왕의 치세 6년차로, 독립 이전보다도 경제가 악화되어 국민들의 삶은 피폐해졌던 시기였다. 또한, 1664년부터 1670년까지 외국인의 관직 등용이 많아지고 키르수스 제국의 영향력은 더 거세져가던 시기였다. 외국인들의 토지는 점점 늘어만 갔고 국민들 와중에는 이들의 토지에서 일해야 했던 소작농도 늘었다. 7월 8일에, 3천여명의 사람들은 결국 의사당을 침입해 점거하고 주위에서 시위를 일으켰다. 정부는 군 병력과 경찰을 동원해 다수를 해산하고 50여명을 사살ㆍ144명을 체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부군ㆍ경찰 역시 20여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전개

수도의 국민들은 치세 6년차의 국왕에 대한 일말의 충성심이 사라졌다. 7월 12일, 이번에는 7천여명의 사람들이 수도의 거리로 나와 "빵과 자유"라는 구호를 들어 정부에 항의했다. 시위대는 다시 민족의회의 건물을 점거하고 "민족의회의 운영을 방해하지 말고 금지령을 철회하라"고 하였다. 놀란 내각은 이 사실을 국왕에게 전했고, 국왕은 당일 오후 6시 20분에 "민족의회를 유지할 것이니, 시위를 멈추고 해산하라"고 명령하였다. 오후 7시 38분, 시위대가 뒤늦게 소식을 듣고 해산하고자 하였을 때 정부군의 총알이 뒤섞여 날아왔다. 화들짝 놀란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시작했고 총에 맞아 거리에 방치된 사망자와 들것에 실려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이틀이 지난 7월 14일, 왕과 정부에 대한 분노가 수도 마가드 전역에서 극에 달했다. 오후 1시에 3만 4천여명의 사람들이 왕궁 앞 대광장과 민족의회 앞에서 산발적으로 군집하여 무질서하게 봉기하였다. 분위기를 감지한 왕ㆍ왕비ㆍ왕자와 공주를 비롯한 왕족들, 그리고 외국의 대ㆍ공사들은 내각과 군대의 도움을 받아 이미 12시 30분경에 왕궁의 뒷문을 통해 교외로 피신한 상태였다. 군 역시 전부 수도를 철수하여 수도는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왕을 필두로 한 피신 호종대는, 지방으로 거듭 피신하였고 키르수스의 공사는 현지 정부에 긴급 보고하여 도움을 청했다. 왕은 긴급 회의를 소집하고 군대가 이들이 다시는 모이지 못하도록 하기를 원하였다. 왕의 의중을 이해한 방위군 사령부는 오후 2시 경 전국의 병력을 소집한 다음 오후 6시 20분 즈음에 수도로 진입했다. 대규모의 시위대는 혼돈하고 무질서하며 주동자가 그다지 없었으나 군대의 진입에 혼비백산하지 않았다. 이들은 왕궁과 수도의 감옥ㆍ 무기고를 이미 죄다 침입하여 젊은 사람들 중심으로 무장하여 시민군을 구성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7시 30분부터 9시경까지 정부군과 무장한 시민군 간에 크고 작은 교전이 다수 발생하였으나 지휘체계가 부실했던 정부군은 주요 장군들이 다 왕을 호종하러 떠나면서 시가전 도중 시민군에게 항복하고 무장해제하여 시민군에 소속되었다.

에세르 전역이 무정부 사태에 빠지자 인민연맹과 민족의회는 다시 정국을 장악하고 수도로부터 지방까지 차츰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이들은 지난 수백 년의 정치적 전통과 경험을 바탕으로 무정부사태 발생 나흘만인 7월 17일에 신 공화국 정부를 즉시 선포하고 국가 내의 개혁을 지도하며 공화국 연맹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 자세한 것은 인민연맹 후술.

키르수스의 개입, 그리고 허무한 결론

4개월 정도의 기간이 지나면서 키르수스 제국은 마침내 에세르가 반왕당파들의 통치 아래 수습하기 어려운 완전한 혼란에 빠졌으며, 키르수스의 통제 하에 들어갈 것임을 선언하며 대규모의 헌병대 병력과 에세르의 키르수스 교민 민병대를 투입하여 시민군을 사살ㆍ해체시켰다.[1] 왕과 왕비를 비롯한 왕족은 키르수스로 도피하였으며, 최고 법원과 왕국 의회는 키르수스 정부의 통제권 선언에 따라 해산되었다.

2개월 간의 키르수스 통치 기간 중, 기존 왕정의 체계 과반이 복구되는 데 성공했다. 왕과 왕비는 1671년경 수도 마가드로 환도했고 의회 운영도 정상으로 전환되었다.

  1. 키르수스는 에세르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하는 것을 넘어 에세르의 병탄을 염두에 두어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7월 봉기가 일어나자 공련 사상 계열의 인민 연맹 지도자들은 국내 혼란을 수습하고 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여 키르수스와의 정치적 합의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자국내 여러 사건으로 인해 공산주의자들을 혐오했던 키르수스 정부와 인민연맹 간의 합의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했고 키르수스 정부는 에세르를 이윽고 병탄하고자 결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