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아시아 혁명 (민국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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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국 38(民國三十八)은 가장 대표적인 대체역사 소재 중 하나인 중화민국국공내전 승리를 가정한 세계관 입니다.
민국 38년(1949년) 중화민국의 국공내전 승리 이후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변화한 여러 정치, 사회, 문화,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개요

혁명당시 아시아 각국의 모습, 시계방향 순서로 각각 중국, 한국, 버마, 일본, 태국, 베트남이다.

1968년 아시아 혁명은 서구권 68혁명의 영향을 받아 아시아 각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반보수, 반권위주의 운동이다.

언어별 명칭

한국어 1968년 아시아 혁명
중국어 1968年亞細亞革命
베트남어 Cách mạng Châu Á năm 1968
일본어 1968年のアジアの革命
버마어 1968 ၏အာရှတော်လှန်ရေး
태국어 การปฏิวัติเอเชียปี 2511[1]
몽골어 1968 оны Азийн хувьсгал
영어 Asian Revolution of 1968
프랑스어 Révolution asiatique de 1968

배경

대부분의 동북아-동남아 국가들은 일본의 패망 및 식민제국들의 쇠퇴와 함께 1945년 에서 1950년 사이에 독립을 쟁취하고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당시 여러 아시아 국가들은 친소 좌익세력과 친미 우익세력으로 나뉘어 극심한 반목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였고 식민통치자들이 물러나면서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식민통치 시기의 허수아비 왕실이나 우익 민족주의 계열 정치세력들에게 정권을 넘겨주었으나 식민지 민중들은 좌익 정치 세력을 지지하는 경우가 당시 아시아 신생 독립국들의 상황이였다. 정치적인 합의를 통해서 안정적인 연립정권이 출범하는 경우는 한국, 베트남 등 극히 일부에 불과했고 그나마 민주주의가 제대로 돌아가던 베트남은 극우성향의 군부가 연립정권에 불만을 품고 1962년 쿠데타를 일으키고 내전이 일어나 기존체제가 붕괴,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으며 한국또한 좌우 연립정권이 20년간 지속되며 정치적 피곤함을 느끼는 유권자들이 늘어나는 참이였다. 이외의 국가들은 권위주의 우익정권이 집권하며 좌익세력을 무력으로 탄압하고, 남일본의 경우에는 전쟁이후 좌익세력들의 씨가 마른 후였다. 1968년에 68혁명이 서구권에서 일어나고 당시 미국, 서유럽등으로 유학가 있던 유학생들을 각국 정부가 해당 국가의 정치 혼란등의 이유를 대며 귀국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악수 중에서도 최악수 였는데 이미 상당수의 유학색들은 자국의 권위주의적 체제에 반감을 품고 자유주의자들과 어울리며 국내 정치의 변혁을 위해 혁명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중국을 시작으로 혁명의 물결이 아시아를 덥쳐오기 시작하는데...

진행

중국

1968년 중국 사회운동 (1968年中國社會運動)은 1968년 6월경 68혁명의 영향을 받아 해외 유학중이던 중국인 유학생들이 귀국한 뒤 국내 민주화 운동가들과 힘을 합쳐 일으킨 민주화 운동으로 1968년 아시아 혁명의 도화선 역할을 한 사건이다. 결론적으로 중국의 완전한 민주화를 이루어 내지는 못했지만 사회 전반으로 자유화 조치가 실시·확대되었고 야당이 허용되는 등 1975년 중국 민주혁명의 초석을 닦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한국

광주시내의 시위대

1968년 대한민국 자유주의 운동 (1968年 大韓民國 自由主義 運動)은 당시 군사 쿠데타로 집권 중이던 박정희 총리의 독선적인 모습에 반발한 학생들의 주도로 일어난 자유주의 운동이다. 1968년은 박정희 총리가 집권한지 1년이 되가던 해였는데 집권 초반 박정희 총리는 새마을 운동을 추진하고 중공업 활성화 계획을 발표하여 국민들, 특히 중 장년층을 중심으로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는 상황이였다. 그러나 모름지기 무언가 정책을 추진하든 뭘하든 간에 돈이 필요한것은 당연한 일이였고, 특히 새마을 운동과 같은 범국가적인 운동이나 포항재철 (현 포스코) 설립과 같은 커다란 일에는 더 많은 재원이 필요함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박정희 내각은 이를 위해 긴축 조치를 실시, 특히 복지를 축소하면서 서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한국 - 남일본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고 한일간의 무역을 통해 금전적 손실을 매꾸려고 했는데, 당시 한일 국교 정상화는 그동안 양국간의 배상금액 견적에 대한 의견차이가 너무 크고 그 간격이 좁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협상은 20년 넘게 계속해서 질질 끌던 참이였다. 그런데 박정희 내각은 빨리 새로운 무역시장을 만들기 위해 배상금 요구액을 대폭 깎아 버렸고 결국 한일국교가 정상화 되자 일제강점기가 23년 밖에 지나지 않았던 한국인들은 매우 큰 반발을 하게 된다. 또한 박정희 내각이 1967년 평양 테러로 인해 강력한 반공주의와 국방력 증대를 내세워 쿠데타로 집권한 권위주의적 반공주의 정권이였기 때문에[2] 좌익 성향의 사상탄압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많은 국민들의 반발을 일으켰으며 학생들을 중심으로 간헐적인 시위를 이어나가던 와중이였다. 그런데 그 와중에 한국보다 더 억압적인 국가였던 중국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결국 1968년 6월 16일 당시 반 박정희 정서가 강하던 호남 지방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한독당, 사회당 소속 의원들이 시위를 거들기 시작했다. 박정희 내각은 초기에 혼란에 빠졌으나 이내 침착하게 교섭에 나섰다. 박정희 내각 입장에서도 군경을 동원한 강경진압은 실각의 지름길이였기 때문에 시위자 대표 김대중 민의원 의원과 회담을 가졌고 이후 학생대표와도 면담을 가져 내각의 총사퇴와 정치적 탄압의 완전중지, 시위 참여자들의 안전보장과 대일수교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의 실시를 골자로한 7.23 선언을 발표하며 시위는 끝났다. 물론 이후 총선에서 박정희 총리와 민주유신당이 근소한 차이로 재집권하고 대일수교 또한 부정투표 논란이 있으나 통과되어 완전성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수호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베트남

1968년 베트남 반권위주의 운동 (Phong trào chống quyền lực của Việt Nam năm 1968)은 1968년 당시 베트남 총통 쩐반흐엉의 권위주의적 국가 운영에 반발하여 일어난 사회운동이다. 내전이 끝난 후 베트남은 대통령제 개헌을 실시했는데 이 대통령제 베트남의 초대 총통이 바로 쩐반흐엉 이였다. 1차 임기때는 안정적인 국정운영과 경제성장으로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2차 임기때는 경제성장률이 둔화되면서 반정부적 여론이 높아지자 쩐반흐엉 총통은 점차 독선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헌법을 개정하여 편법을 써서 연임을 시도하자 6월 18일 부터 대규모 시위가 사이공을 중심으로 실시되어 결국 쩐반흐엉 총통은 실권을 반쯤 잃은 채 시위대와 협상에 나섰다. 결국 퇴임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권한의 상당수를 토해내 친시위대 성향의 총리에게 넘겨야 했고 사실상 실각하게 된다.

남일본

1968년 남일본 민주화 운동 (1968年南日本民主化運動)은 당시 남일본을 지배하고 있던 군부에 대한 반감으로 젊은층을 중심으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이다. 당시 남일본은 1960년 일본 쿠데타 이후 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상태였는데 군부는 강력한 개발독재 정책을 시행하여 국민들의 불만을 억눌렀으나 모든 국민들을 하나하나 통제 할 수는 없는노릇 이였다. 결국 아시아 혁명의 기류가 남일본에 상륙하여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남일본 전역에서 이루어 졌으나 군부는 7월 7일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 민주화 운동을 좌익 세력의 폭동으로 매도하였다. 결국 민주화 운동은 실패로 끝났으나 이는 이후 일본 민주화에 밑거름이 되었다.

버마

1968년 버마 반정부 운동 (၁၉၆၈ ခုနှစ်မြန်မာပြည်တွင်အစိုးရဆန့်ကျင်ရေးလှုပ်ရှားမှု)은 당시 버마 정부의 좌익세력 탄압에 반발하여 일어난 반정부 운동이다. 1960년대 버마는 반공의 소용돌이 속을 해메고 있었다. 당시 버마는 네 윈의 사회주의 계획당이 1962년에 버마 군사반란 (일명 10.21 사태)을 잃으켜 사회의 반공주의적 분위기가 만연했고 정부와 정당이 이를 거들면서 버마의 좌익 지식인들은 억압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아시아 혁명의 들불이 버마로 옮겨 붙으며 학생들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도시지역에서 반정부 운동이 일어났고 결국 버마정부는 반공법을 폐지했고 좌익에 대한 탄압은 완전히 폐지되게 된다.

태국

1968년 태국 민주화 운동 (พ.ศ. 2511 ขบวนการประชาธิปไตยไทย)은 당시 태국을 장악하고 있던 타놈 끼띠카쫀 군사정부에 반발하여 일어난 반정부 운동이다. 당시 태국은 1948년 부터 이어진 군부독재로 인하여 군부가 모든 권력을 차지하고 민주주의는 질식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런 태국 역시도 1968년 혁명의 기운을 막을수는 없었다. 태국의 젊은이들은 일제히 6월 20일 세벽에 대학가로 쏟아져 나왔다. 타놈 끼띠카쫀 군사정부는 폭압적으로 시위대를 진압하려 했으나 태국을 경제적으로 지원해 주던 미국이 압박을 가했고 결국 타놈 정부는 시위 진압을 포기, 인도네시아로 망명하며 혁명은 끝이 났다.

영향

아시아 혁명은 아시아의 사상적 기반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기존 권위주의, 아시아적 가치, 유교보수주의로 대표되는 수직적, 권위적 사상이 평등적, 자유적인 사상으로 대채되었다.

어록

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고 노란 하늘이 일어나리라[3][4]
― 6월 17일 중산릉 시위에서 난징사범대 학생 장롄쑹의 외침
“박정희는[5] 사퇴하라!, 굴욕외교 철패하라!, 민주정치[6] 복원하라!”
― 7월 12일 광주시위에서 김대중 당시 민의원 의원
“자유는 결코 죽지 않는다![7]
― 버마 반정부 운동 당시 버마 시위대의 구호
“군사독재를 타도하자! 남북통일을 이룩하자![8]
― 일본 민주화 시위 당시 6월 21일 오사카 시청앞 시위대 현수막
“타놈 끼띠카쫀[9]을 죽여라![10]
― 7월 1일 항쟁당시 태국 마하쭐랄롱꼰랏위타얄라이 대학 시위대의 구호
“권위주의를 타파하자!, 민주주의를 수호하자![11]
― 7월 8일 자유 베트남 운동의 라디오 방송中

각주

  1. 태국식 불기로 서기 1968년은 2511년이다
  2. 물론 중국과 미국의 눈치도 있었고 국민들도 좌우합작 정권을 지지했기 때문에 일당우위정당제는 유지하되 한국독립당과 한국 사회당의 선거참여는 허용했고 실제로 사회당이 제1야당이 된적도 2번이나 됐다
  3. 원문 : 蒼天已死 黃天當立
  4. 원래는 황건적의 구호지만 묘하게도 국민당의 상징색인 푸른색과 자유주의의 상징색인 노란색이 맞아떨어져 구호로 쓰였다.
  5. 박정희가 아닌 박총리로 변환하여 쓰이기도 했다.
  6. 민주정치가 이닌 민주주의, 민주국가, 사상자유 등으로 변환하여 쓰이기도 했다.
  7. 원문 : လွတ်လပ်မှုကိုဘယ်တော့မှမသေဘူး။!
  8. 원문 : 軍事独裁を打倒しよう!南北統一を成し遂げよう!
  9. 당시 태국 군사정권의 총리
  10. 원문 : ฆ่าทานถนอม กิตติขจร!
  11. 원문 : Hãy tiêu diệt chủ nghĩa uy quyền!, Hãy bảo vệ nền dân ch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