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서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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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Україна

잿 속에서의 부활
대평원부터 흑해 해안까지 모든 곳에 그림자 드리웠습니다.
동부는 연방에 충성하는 변절자들이 자리 잡았으며 서부는 정치적 폭력과 국제사회로부터의 고립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조국을 위해서는 조국의 일부와 싸워야 합니다.
전쟁은 삶의 일부가 되었고 잿 속에서의 부활을 위한 내전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세력


잔존 영토

우크라이나 공화국
아조우 바탈리온
국가구원군
우크라이나 재통합 운동
우익 전선
 
미수복 지역

노보로시아
하르코프 인민 공화국(노보로시아 연방)
수미 인민 공화국(노보로시아 연방)
오데사 인민 공화국(노보로시아 연방)
헤르손 인민 공화국(노보로시아 연방)


역사


바람 혁명과 태동기

대침체 이후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가 급격히 약화되고, 유럽을 비롯한 서방 세계가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으며 정치·경제적으로 쇠퇴함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친러 성향 정부였던 빅토르 야누코비치 정권은 이전까지 추진하던 친서방 노선을 폐기하고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친러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외교 정책의 급격한 전환은 우크라이나 내부의 정치적 갈등을 자극하는 동시에, 러시아의 전략적 계산 속에서도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014년, 소위 작전복 없는 군인들로 알려진 러시아군 특수부대가 모든 군 식별 표식을 제거한 채 크림 반도로 진입하였으며, 현지의 친러 민병대와 협력하여 크림 자치공화국의 지방 라다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크림 공화국'이라는 명칭으로 독립을 선언하였고, 이 과정은 러시아의 실질적인 병합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사태는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친러파와 반러파 간의 대립을 더욱 심화시켰고, 특히 러시아계 인구가 다수를 차지하는 동부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지역에서 반정부 무장 봉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러시아는 이들 지역의 친러 무장세력을 적극 지원하며, 이들에 의해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자칭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이에 맞서 우크라이나 정부군은 국가의 영토 보전을 명분으로 해당 지역에 병력을 투입하며 본격적인 내전, 일명 돈바스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이 전쟁은 단기간의 충돌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전선이 고착화되며 장기전에 돌입하게 되었고, 수년에 걸쳐 사실상 군사적 교착 상태가 지속되었다.

한편, 이러한 동부 지역의 격동에 반발하여 우크라이나 서부를 중심으로 강력한 반러 시위가 확산되었고, 그 과정에서 급진적인 친서방 세력과 우익 민족주의자들, 일반 시민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전국적인 정치 변혁 운동인 소위 '바람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혁명은 단순한 정권 교체를 넘어서, 우크라이나 국민들 사이에서 민족 정체성과 주권 수호 의식을 강화시키는 전환점이 되었으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종속을 막기 위한 마지막 방어선으로 여겨졌다. 바람 혁명 당시 혁명을 주도했던 급진 민족주의 성향의 정치인이자 정치적 지도자인 안드리 파루비가 국민적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이는 우크라이나의 정치 지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그러나 파루비 정권의 등장은 동시에 러시아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고, 양국은 서로의 존재 자체가 상대방 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강경한 입장을 굳히며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켰다.

국제적인 지원 상황 역시 우크라이나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유럽연합은 미국이 유럽 주둔 미군의 철수를 본격화한 이후 발생한 안보 공백과 지속되는 유로존 재정 위기 속에서 군축을 단행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대외 군사 개입 능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면서도 실질적인 외부 군사 지원이나 경제적 협력을 받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결국 외교적으로도, 안보적으로도 고립된 채 고군분투하게 되었다.




제1차 조국수호전쟁

2019년 1월, 우크라이나 내부의 정국 혼란과 정부 기능의 약화 속에서, 동부의 친러 무장세력인 노보로시아 반군은 그간 축적해온 병력과 자원을 바탕으로 대대적인 군사 공세를 개시하였다. 이에 대해 러시아 정부는 자국민 보호라는 명분을 앞세워, 사실상 처음으로 직접적인 군사 개입에 나서게 되었고, 이로써 러시아-우크라이나 간의 전면전이 공식적으로 발발하게 되었다.

당시 우크라이나군은 여러 해에 걸쳐 누적된 부패와 방산 비리로 인해 전반적인 군 조직과 장비 상태가 심각하게 악화된 상태였다. 군 장비 대부분이 노후했거나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서류상의 장비였으며, 병력 간에도 명확한 지휘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개전 초기부터 연이은 패배로 이어졌고, 러시아군의 기갑 사단과 공중전력이 우크라이나군을 압도하는 결과를 낳았다. 절망적인 전황 속에서, 안드리 파루비 대통령은 수도 키이우 방어전을 앞두고 조국수호전쟁을 공식 선포하였으며,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무장을 들고 모여든 민병대, 우익 의용대, 유랑인 공동체 출신의 전투 인원들이 정부군과 함께 러시아군에 맞서 싸우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우크라이나는 단일한 국가군이 아닌, 다양한 세력과 계층의 결집체로서 항전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전황은 빠르게 러시아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2019년 3월 20일, 전쟁 발발 3개월 만에 러시아군은 하르키우,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오데사 등 전략적으로 중요한 대도시들을 연이어 점령하며 우크라이나의 방어선을 돌파하였고, 마침내 수도 키이우의 외곽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이에 대응해, 안드리 파루비 대통령은 이른바 '조국수호전쟁 연설'을 발표하며, 전 국민에게 끝까지 항전할 것을 호소하였다. 수도 방어를 위해 철수하던 정규군과 지역 민병대가 키이우에 집결하면서 도심 전역에서 치열한 시가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10월 26일, 러시아군의 일부 병력이 키이우 중심부로 진입하였고, 대통령궁을 비롯한 핵심 정부 건물들이 포위되기에 이른다. 이 시점부터 파루비 대통령의 통제력은 급격히 약화되었으며, 우크라이나군 상층부와 일부 정치 지도자들은 러시아 측과 비공식적인 협상을 시작하였다. 결국 파루비는 러시아의 군사적 압박과 자국 군부 및 정치권의 사퇴 압력 속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 직후, 우크라이나 서부의 리비우에서 잔존한 국회의원 113명이 긴급 소집되어 만장일치로 '전시행정 일시 위탁령'을 통과시켰고, 이는 국가비상사태 하에서 헌법에 따라 행정 권한을 군에게 일시적으로 위탁할 수 있도록 한 조치였다. 이로써 우크라이나의 모든 통치 기능은 일시적으로 군사 당국에 이양되었으며, 초기에는 과도 정부의 일환으로 간주되었으나, 이후 전쟁이 격화되면서 실제 행정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이 군대뿐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최고 군사기관으로 우크라이나 최고군사령부(SHCU)가 구성되었고, 초대 최고사령관으로는 발레리 잘루즈니가 임명되어, 사실상의 군정 체제가 수립되었다.

전쟁은 이후 장기전에 접어들었고, 여기에 SPID의 확산이 겹치면서 우크라이나의 경제는 완전히 붕괴 상태로 빠져들게 되었다. 민간 산업 기반이 무력화되었으며, 병원·전력망·식량 공급 체계가 마비되면서 국민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총체적 위기 속에서, 2020년 5월 18일, 양측 모두 극심한 전쟁 피로와 내적 붕괴를 겪고 있던 가운데, 러시아군이 점령한 미르고르드 시청에서 정전 협상이 비공식적으로 개시되었다. 협상에는 우크라이나 대표단, 러시아 연방군, 도네츠크 인민공화국의 대표단이 모두 참석하였고, 격렬한 논의 끝에 미르고르드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에 따라 드니프로 강 동부 지역은 러시아군 및 노보로시아 반군의 통제 하에 남게 되었으며, 우크라이나 정부군은 해당 지역에서 전면 철수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전협정 직후, 헤르손 남부에 배치되어 있던 우크라이나 해군 및 해병대 일부가 협정에 반대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항구시설을 점거하여 러시아군과 교전하였다. 반란은 결국 진압되었으며, 해군은 더 이상의 선박 노획을 막기 위해 보유 중이던 군함들을 전부 자침시키는 결단을 내렸다. 이로써 우크라이나는 해군력을 사실상 상실하였으며, 남부 전선의 저항력 또한 소멸하게 된다.


전후 우크라이나

종전 이후, 발레리 잘루즈니가 이끄는 SHCU는 전면적인 국가 위기 속에서 정권을 유지하고 국가의 존속을 확보하기 위해 일련의 비상 조치를 단행하게 된다. 총력전에 가까웠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우크라이나 영토에 막대한 피해를 남겼고, 특히 수도 키이우는 반복된 포격과 시가전으로 인해 행정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수준까지 파괴되었다. 이에 따라, 군사 전략적 판단과 생존 기반의 행정 효율성 확보를 이유로 최고군사령부는 우크라이나의 수도를 기존의 키이우에서 서부의 주요 도시인 리비우로 이전하는 결정을 내린다. 키이우는 수도의 지위에서 물러나 국경 방어의 전초기지이자 군사화된 완충 도시로 재편되었고, 리비우는 상대적으로 전쟁 피해가 덜하며, 유럽과의 물리적·문화적 접촉이 용이한 지리적 위치를 바탕으로 국가 재건의 중심지로 탈바꿈하게 된다.

새로운 수도 리비우에서의 군사정부는 국가의 존속을 위한 생존 우선 전략, 이른바 월동 국가 정책을 천명하게 된다. 이 정책은 민간의 자유보다는 안보와 생존을 국가 운영의 최우선 가치로 두는 전시체제의 지속화 정책으로서, 정부는 외부와의 무역이나 투자를 기대하지 않는 자립형 국가운영 체제를 지향하였다. 경제 체제는 민간 영역을 철저히 통제하고 자본을 국가가 집중 관리하는 계획경제 형태로 전환되었으며, 각종 자원은 생존과 방어에 필수적인 항목을 중심으로 배분되었다. 전시 배급제도는 단순한 긴급 대응 조치를 넘어, 국민 생활 전반에 깊숙이 뿌리내리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국민들은 배급표 없이 생존을 유지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나아갔다.

국방과 안보 영역에서는, 기존의 우크라이나 정규군 체제 전면 개편이 단행되었다. 전쟁 동안 형성되었던 수많은 민병대, 자경단, 유랑인 출신 부대 등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 무장 세력들을 점진적으로 통합 및 정규군 편입시키는 과정을 통해 대규모의 군대 재구축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은 단순한 통합을 넘어, 서로 다른 정치적 이해관계, 지역적 자치권 주장, 이념적 갈등 등이 얽히면서 최고군사령부의 중앙 통제력에 균열을 가져오기 시작하였다. 특히, 동부와 남부의 광범위한 전쟁 피해 지역에서는 정부의 통치력이 충분히 확장되지 못한 공백 지대가 점점 증가하였고, 그 틈을 타 정부의 지침을 따르지 않는 무장 조직들이 속속 등장하게 된다. 이들은 독자적인 통치를 선포하거나, 외부 무기 밀수 및 잔존 자원을 바탕으로 준정부적 권위체계를 수립하며 정부에 대한 실질적 도전을 개시하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전쟁 시기 정부군과 함께 러시아군에 맞서 싸웠던 극우 민족주의 세력, 특히 네오 나치 성향의 민병대들이 독자적으로 결집하여, 새로운 정치군사 단체인 국가구원전선 을 조직하게 된다. 이들은 최고군사령부가 추진하던 현실적 외교와 국제 사회와의 관계 정상화 노력을 국가적 배신이라 규정하였으며, 과도한 국가 통제 체제 또한 민주주의의 파괴와 군사독재의 정착이라고 비판하였다. NSF는 반정부적 무장 행동을 본격화하며, 중부 전략 요충지인 체르카시를 전격적으로 점령한다. 이들은 도시 점령 직후 우크라이나 임시 민족정부의 수립을 선포하며, 중앙 정부와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또한 전쟁 당시 대거 참전한 유랑인 공동체 민병대들 또한, SHCU의 일방적인 정전 협정에 대해 반발하며 항전과 함께 유랑인에 대한 권리 보장 요구를 천명하였고, 이에 뜻을 함께한 다수의 유랑인 공동체들이 모여 재통합 운동 을 조직한다. 이들은 유랑인 사화주의로 불리는 소규모 공동체를 중심으로한 분배 체제를 앞세워 빠르게 성장하였고 이들의 행동을 바탕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세계 최초의 유랑인 국가 운동이 전개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우크라이나 내부에서 다시금 내전 상태로 진입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한때 단결된 항전의 상징이었던 우크라이나는 종전 이후 다시금 이념과 권력, 생존 전략의 차이로 분열되는 본격적인 내전 국면에 돌입하게 된다.